00135 사랑에 빠진 흙덩이 =========================================================================
똑똑.
“들어오게.”
불릿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밖에서 허락을 기다리던 자가 문을 열고 집무실로 발을 디뎠다.
달칵.
“오늘도 평안하십니까, 대영주님.”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이우우스 행정관의 말에 불릿도 마주 답해주었다.
“이렇게 좋은 날씨에 틀어박혀서 업무만 보아야 한다는 사실이 아까울 정도지.”
“그 누가 대영주님의 행보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불릿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도 있었다. 대영주라는 자리가, 백작이라는 작위가 그것을 가능케 해주었는데, 그저 불릿 스스로가 부모가 물려준 유산인 바포 변경백을 더욱더 부강하게 만들고 싶었기에 열심히 일했던 것이다.
이우우스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불릿은 수염이 있지도 않은 턱을 습관처럼 매만지며 동의하는 의사를 내비쳤다.
“이번 일만 끝내면 소풍이라도 가야겠어. 흙덩이와 나들이를 한 것이 언제인지 까마득하군.”
흙덩이는 땅의 정령, 자연에 있을 때 가장 활발하며 기운이 강성한 존재‘였었’다.
‘지금은 내 곁에 있는 것을 가장 좋아하지만.’
제대로 된 육체를 갖게 된 이후로 흙덩이는 사냥을 가자던가 인간의 시선을 꺼리는 등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대신 불릿에 대한 애정이 한층 격해졌는데, 단순히 올리비아를 따라하던 것에서 자신만의 감정을 개척하고 있었다.
아직은 미숙하고 어색하지만, 흙덩이는 한발한발 인간의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보고서를 작성해 왔습니다, 대영주님.”
불릿이 딴 생각을 하는 동안 이우우스는 눈을 살짝 까내리며 얇은 서류를 건네주었는데, 꽤나 긴 시간동안 토론을 진행했던 것에 비해선 간략하게 추려져 있었다.
“흐음.”
펄럭, 펄럭.
펄럭-.
탁.
순식간에 보고서를 읽어내린 불릿은 책상에 상체를 기대며 이우우스에게 대화를 걸었다.
“본인의 의견은 좋다, 그러나 불확실성이 남아있기에 결과를 예상할 만한 실험작이 필요하다, 뭐 이런 뜻인가?”
“작은아씨의 능력에 의심을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불모의 황무지는 다른 토지와는 격을 달리할 정도로 질이 나쁘기에 그와 비슷한 결과물이 필요합니다.”
흙덩이에 대한 비밀, 아직까지 인간이 됐다는 사실은 일부 인원을 제하고선 대부분 알려지지 않았으나 최근의 행실까지 더해져 불릿의 여자로 알려진지 오래였다.
올리비아처럼 물고 빨고(?) 하는 경지까지는 아니었지만, 육감적인 몸매를 지녔으면서 오히려 수줍어하거나 귀여운 모습을 보였기에 성 내부의 인사들에게 지지를 받는 면도 있었다.
“모의실험인 것인가?”
“말하자면 그렇습니다만, 그렇다고 일부러 악화시키는 등의 행동은 저어됩니다.”
“흐음…, 그럼 주변의 영토로부터 자료를 수집하도록 할까? 그동안은 대지의 축복만 내렸지 정확히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본인도 자세히 모르니 말이야.”
정령사라고 해서 정령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다.
정령은 여전히 미지의 존재였으며, 그 신비로움은 신에 대한 그것과 비슷할 정도였다.
그들이 어디에서 오고, 나이가 어떻게 되며 과연 살아있는 존재일까, 아닐까도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러니 자신이 정령력을 소모해 정령의 능력을 사용하더라도 어떤 작용을 하는지 다 알기란 여러모로 어려웠다.
“송구하오나 바포가의 기록에 남아있지 않겠습니까?”
정령술로 가문을 꾸린 바포가문이었기에 이에 대한 자료도 남아있을 것으로 사료되었으나, 불릿은 고개를 저었다.
“…떠올리긴 싫지만, 20년, 이제는 21년이로군. 그때 겪었던 대홍수로 인해 성 내부까지 들이닥친 물로 도서관이 침수됐기에 어쩔 수 없다.”
불릿이 대영주의 자리에 오른 날이자 그가 사랑하고, 지금도 그리워하는 부모를 앗아간 대홍수는 바포가의 선조들이 남긴 유산도 일부 소실되게 만들었다.
특히 가신들도 읽을 수 있도록 조금 개방적이게 만들어 놓았던 도서관은 무서운 기세로 들이닥치는 홍수를 막을 수 없었다.
그래도 가장 중요하다 여겨지는 가문의 비술에 대한 서적들은 건질 수 있었지만, 어떤 기술이 무슨 효과를 지녔는지 등의 논문이나 고서 등의 책까지 옮길 만한 시간은 당시엔 없었다.
“그렇다면 직스 자작령, 지금은 카텐령으로 변경된 그곳에서 실험하는 것이 가장 좋겠군요. 그곳의 토질도 어지간히 나쁘니 말입니다.”
불모의 황무지와 가장 가깝기에 많은 영향을 받은 카텐령은 토질이 굉장히 나빴다.
지금이야 불릿과 흙덩이의 활약으로 사람이 먹을 수 있을 만큼 상황이 나아졌으나, 예전처럼 풍부한 물이 공급되는 것은 아니기에 개선의 여지는 남아 있었다.
적은 물로도 효율적인 생장을 이루려면 촉촉하면서도 작물이 썩지 않게끔 만들어야 할 것이다.
“대지의 축복을 아무리 내려도 불모의 황무지가 근처에 있는 탓인지 좀체 나아지질 않더군. 그곳의 작물은 도저히 먹을 만한 것이….”
“확실히 맛이 없긴 하더군요.”
“그렇지? 카텐령의 백성들만 불쌍하게 되었어.”
불릿이 물의 정령사였을 시절엔 바포 변경백은 물에 대한 걱정이 없었다.
지금도 예전에 가꿔놓았던 우물이나 분수, 수로에서 꾸준히 물을 얻을 수 있었으나 예전만은 못한 실정.
그렇기에 일부 지역에선 물이 부족해 작물의 상태가 영 좋지 못한 경우도 발생했다.
“땅이 아무리 기름져도 그것을 흡수할 만한 물이 없으니 좀체 자라질 못하더군. 괜히 맛만 이상해졌어.”
“그 진하면서 퍽퍽한 구황작물 말씀이십니까?”
“그래, 바로 그거! 대체 그게 무슨 맛인지….”
땅이 기름졌기에 양분은 풍부하다. 그러나 수분이 부족해 제대로 흡수가 이루어지지 않아 나온 결과물이 바로 맛은 진하면서 수분이 없어 퍽퍽한, 먹기 괴로운 형태의 작물들이었던 것이다.
밀은 생각보다 가뭄에서도 잘 자라는 품종이었지만 맛이 더럽게 없었기에, 그나마 먹을 만했던 구황작물이 현재 카텐령의 작물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고구마나 감자, 옥수수 등을 기르고 있었는데, 그나마 감자는 먹을 만했으나 고구마나 옥수수 등의 단맛이 도는 것들은 사람이 먹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단맛이 아쉬운 자들이 간간히 기르고 있었으니, 그래서 탄생한 괴상한 맛의 구황작물로 인해 미각이 망가지고 있었다.
쓰레기도 맛있게 먹을 정도로 말이다.
“어쩔 수 없지요. 불모의 황무지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과 건조한 기후로 인해 금방 말라버리니까요.”
“또 그곳에 갈 생각을 하니 조금 막막하군. 주변 경관도 그리 좋지 못한데 말이야.”
“카텐령의 백성들도 그리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대영주님.”
“본인도 알고 있네. 서둘러 개선해야할 사항이기도 하지.”
사람이 사는 데엔 단순히 먹고, 자는 문제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의식주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남는 시간은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힘쓰기 시작하는데, 그 중에서도 시각이 차지하는 부분은 굉장히 컸다.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평안을 얻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인데, 카텐령은 지나치게 삭막하고 즐길만한 거리가 없었다.
이전에 건설한 수로로 인해 다른 지역과 비슷한 양의 물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역시나 다른 지역에 비해 땅의 질이 안 좋았고, 불모의 황무지에서 영향을 받기도 했기에 훨씬 더 많은 양의 물이 필요했다.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고, 아. 자료는 다양하게 있는 것이 좋을 테니까 아예 영지를 순회하며 확인하는 게 좋겠군.”
“…대영주님,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복상사의 염려가…….”
“커허험! 어흠!”
불릿은 이번 기회에 올리비아와 흙덩이를 대동하고서 저번에 못다 한 여행을 나가려던 것이었는데, 이우우스의 날카로운 지적에 헛기침만 내뱉게 되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군. 정령력이 마나에 비해선 육체강화에 모자람이 있지만, 이제 중급에 들어선 본인의 경지라면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모르는가?”
불릿이 중년의 나이에도 젊어보였던 이유는 선천적으로 잘생긴 이유도 있었지만, 중급 정령사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었다.
중급의 경지에 올라서면 그때부턴 정령력을 정령이 아닌 자체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는데, 많은 일을 할 순 없어도 기운을 외부로 방출하거나 건강증진 등의 효과는 얻을 수 있던 것이다.
다만, 그 힘을 응응(?)에 사용한다는 것이 조금 그랬지만 말이다.
“그건 조금 부럽다고 생각합니다.”
이우우스는 침착한 면모를 보이던 것과는 달리 아쉽다는 소리를 내었다.
“기사분들이 어째서 그토록 마나연공에 힘쓰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정력문제로 그러는 것은 아니라 생각하네만….”
“하지만, 통계상으로는 기사들의 가정은 유독 자녀가 많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크흠.”
“오히려 명문 정령가인 바포가에 방계가 없는 것이 이상할 정도지요.”
“…크흠, 크흠!”
“이 참에 대영주님께서 후계를 많이 낳아주신다면 단결력이 강해질 것으로 예상….”
“그쯤하지. 올리비아를 죽일 일 있나?”
그 외에도 지나치게 자손이 많아지면 권력다툼이 일어날 수도 있기에 피임을 해온 것도 있지만, 단순히 건강증진의 문제이기에 정력이 증가해봤자 일반인하고 비교해 그리 큰 차이를 보이진 않았다.
이것은 그저 불릿이 건강한(?) 것뿐인지라 바포가가 그동안 손이 귀했던 것과는 연관되지 않는다.
“작은아씨도 계시고, 원하신다면 다른 분들도 있지 않습니까? 레너드 자작님만 하더라도 따님을 대영주님과 엮어드리고 싶어하십니다.”
“……흙덩이는…크흠. 그런데 군단장에게 딸이 있었나?”
처음 듣는 얘기였기에 불릿이 살짝 고개를 기울이자 이우우스 행정관이 이에 답변했다.
“올해로 5살 되는 따님이 계십니다.”
“미친…, 지금 나에게 무슨 짓을 시키려는 것인가?”
“각하, 언행을 조심함이 옳다고 여겨집니다.”
“그런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데 본인의 입에서 고운 소리가 나오길 바라나?”
불릿의 격한 반응에 이우우스 행정관은 그답지 않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제가 아니라 레너드 자작님이 그런 말을 언급하셨을 뿐입니다.”
“…혹시, 그가 권력에 관심을 가지는가?”
이우우스의 답변에 불릿의 얼굴은 살짝 굳었는데, 군단장의 직책을 내린 레너드 자작이 그러한 마음을 먹으면 또 다시 제 2의 반란을 겪을 불릿으로선 자신의 선택에 자괴감을 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우우스는 그의 말을 부정해주었다.
“아닙니다. 각하께선 모르셨겠지만 작은아씨의 옥체를 쓰다듬어주시는 장면을 때마침 방문하신 자작님의 따님께서 목격하셨는데, 그것이 부러웠는지 그런 말을 하셨다고 합니다.”
“웬만하면 머리를 쓰다듬었다고 표현하게. 남들이 들으면 오해하겠군.”
자칫 잘못하면 남들 다 보는 자리에서 대놓고 애무를 하는, 음탕한 군주로 여겨질 수도 있었기에 심기가 조금 불편해진 불릿이었다.
“그런데 레너드 자작의 나이가 올해로 몇이었지?”
“서른다섯 되십니다.”
“자식은 방금 말했던 딸 하나인가?”
불릿이라고 해서 가신들의 모든 신상파악을 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는데, 간혹 나이를 헷갈릴 때도 있었다.
나이도 헷갈릴 정도니 자녀가 몇이고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기도 했는데, 그렇기에 수행원은 항시 이러한 정보들을 외우고 다녀야 했던 것이다.
“본처에게서 둘, 첩에게서 하나를 낳으셨습니다.”
“그가 첩도 있었군.”
의외라는 생각에 불릿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이우우스가 이에 응답했다.
“대영주님도 처첩이 있지 않으십니까?”
“? 무슨 소리지?”
불릿이 머리위에 물음표를 띄우며 묻자 이우우스가 미소를 지었다.
“활발한 마님에게선 아드님을, 귀엽고 사랑스런 흙덩이님에겐 따님을 얻으셨으면 좋겠군요.”
“…흙덩이는 정령이네만?”
그의 말에 이우우스가 건넨 말.
“하녀장이 다 불었습니다.”
“안나아아아!!!”
불릿의 비명 비슷한 고함이 집무실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