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정령사-134화 (134/241)

00134  그곳의 행정관들  =========================================================================

베니스 남작은 한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임과 동시에 바포 변경백의 금전흐름을 관리하는 재무대신이기도 했다.

게다가 자체적으로 상단을 운영함으로써 돈이라는 것이 어떻게 굴러가는지에 대해 파악하는 능력도 뛰어났으니, 지금 이 자리에 모여 있는 행정관들의 상석에 그가 앉아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베니스 남작은 조금 불편한 표정이었는데, 관자놀이에서 슬금슬금 땀방울이 맺히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나보다.

그리고 그의 불편함은 그들과는 별개로, 베니스 남작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는 불릿으로 인해 절정을 맞이하고 있었다.

“외람되오나 대영주님, 어찌하여 제가 이 자리에 위치한 것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보통 회의를 진행할 때는 불릿이 상석에 앉고 나머지 가신들은 어떤 회의를 진행하느냐에 따라 불릿과 가까워지거나 멀어지곤 했다.

그렇다곤 해도 어차피 원탁으로 이루어진 회장인지라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불릿과의 거리는 언제나 두 칸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그것은 불릿을 부각시키는 효과와 불의의 사고를 막을 수 있는 최소한도의 안전장치였던 것이다.

지금도 불릿의 곁에는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언젠가부터 담당기사가 되어버린 유실리아가 불릿을 꿋꿋하게 지키고 있었다.

불릿에게 말을 걸고 있는 베니스 남작이 허튼 수작을 부리는 낌새가 보인다 판단되면 그 즉시 그녀의 검이 번뜩일 것이리라.

이러한 점들 때문에 베니스 남작의 긴장감은 높아진 상태였으나 불릿은 여전히 태연했다.

“그야 이번 회의를 주도할 인물은 자네이니까 본인의 옆에 자리를 마련해두었네.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아무리 베니스 남작이 회의의 중심인물이라 하더라도 굳이 부담스러운 불릿의 옆자리에 위치할 필요는 없다.

상석이 아니라 하더라도 원탁의 특성상 누구나 그를 볼 수 있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도통 불릿의 의도를 알 수가 없던 베니스 남작은 차마 땀도 닦지 못하고선 간절한 목소리를 내었다.

“호위기사가 저리도 눈을 빛내고 있으니 불안해서 말도 못하겠습니다. 제발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시지요.”

“흠, 그러한가? 자네가 그리도 간절히 바란다면야 내 기꺼이 들어주도록 해야지.”

“…감사합니다, 대영주님.”

“아닐세, 아니야. 허허허. 설마 자네가 본인의 몸에 손을 댈 리는 없지 않은가?”

“…….”

불릿의 허락이 떨어지자 베니스 남작은 잽싸게 자신의 원래 자리로 돌아갔는데, 속으로는 살짝 소름이 돋은 상태였다.

‘나를 시험하고 계시는구나!’

그가 생각하기에 불릿이 이러한 행동을 보인 데엔 시험의 이유밖에 없었다.

최근 베니스 남작은 불릿의 명령하에 특산물을 기르고 있었는데, 이제 조금씩 궤도에 오르는 향신료판매가 여간 짭짤한 수준이 아니었다.

거의 돈을 닥닥 긁어모으고 있었는데, 그만큼 많은 세금을 냈으나 어디까지나 불릿의 정령술로 인해 적합하지 않은 기후에서도 여러 향신료를 기를 수 있었던 것이기에 불만은 없었다.

그러나 한곳에 과한 자금이 집중되자 불릿은 그가 게슐린 그랩 자작처럼 헛된 욕망에 빠질 것을 우려해 지금처럼 경고성 섞인 행동을 보인 것이리라.

‘조심해야겠군, 잘못하면 숙청당할 수도 있겠어.’

어디까지나 불릿의 명에 의해서 실행했을 뿐이지만, 이미 한번 크게 데인 상태인 불릿이었기에 가신들이라 하더라도 완전히 믿지 않았다.

어찌됐건 베니스 남작도 자신의 영토만 지켜냈지, 나머지 지역에 대해선 조금 소홀했던 면이 있었기에 불릿의 이러한 행동을 이해했다.

‘군주 된 자로서 믿음을 남발해선 아니 되겠지.’

그래서 군주의 자리가 외롭고 힘든 것이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나 자신은 언제나 상대방의 머릿속을 계산해야 하고, 가신이라 할지라도 조심, 또 조심해야 했으니 말이다.

베니스 남작이 자리에 착석하자 불릿은 목을 가다듬은 후 재차 입을 열었다.

“지난번 하급 마물의 토벌을 통해 본인은 바포 변경백의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현재 각지의 영지를 둘러보면 적이라 판단되는 세력이 등장해도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만큼 군사적인 면이 미흡하다.”

스윽.

불릿이 연설을 하는 가운데 2급 행정관 중 하나가 손을 들자 불릿은 곁에 서있었던 이우우스 1급 행정관에게 말을 속닥였다.

“나머지는 그대가 진행하도록. 조금 피곤하군.”

“…후세도 좋지만 무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대영주님.”

“그런 거 아닐세, 이번에는.”

“자칫 복상사를 하실까 염려됩니다.”

“쓰읍, 아니라니까 그러네.”

젊어진 이래로 불릿은 때때로 이렇게 가신들과 가벼운 농을 주고받을 때도 있었다.

대부분이 올리비아와 흙덩이에 관련된 이야기인지라 조금 난감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불릿이 의자에 몸을 묻으며 잠시 뒤로 물러나자 이제는 1급으로 승진한 이우우스 행정관이 앞으로 나섰다.

“말하시지요, 사무예드.”

“감사합니다.”

불릿이 잘 볼 수 있도록 발언권을 획득한 인물들은 대부분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선 사무예드라 불린 자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먼저 우리는 이번 소집이 어떤 주제로 시작했는지에 대해 알아야할 것입니다. 금일 시작된 회의는 대영주님의 뜻에 따라 진행되고 있사오며, 이 자리에 위치한 행정관들의 대부분이 회계와 관련됐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무예드의 말에 다른 자들도 속속들이 손을 들기 시작했는데, 일일이 지목해서 발언권을 부여하기엔 번거로움이 따랐다.

이에 이우우스 1급 행정관은 기침을 뱉은 후 허리를 꼿꼿이 피며 입을 열었다.

“큼, 여러분의 열성은 잘 알겠으나 이런 식으로 하다간 끝이 없겠군요. 하여 이번 대영주님 주관의 소집회의에선 자유방식의 토론을 진행하겠습니다.”

“푸하!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군!”

“브라투질라 고문관, 대영주님이 보고 계십니다.”

“웁스… 대영주님, 이건 어디까지나 같은 행정관들끼리의 대화에 격식을 차려야 한다는 것이 답답했다는 것일 뿐입니다. 절대, 절대 대영주님에 대한 불만은….”

성격 급한 헤니발 브라투질라 3급 고문관의 발언에 유실리아와 무언가를 속삭이던 불릿은 깜짝 놀라며 대꾸하였다.

“어, 어, 그래?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그대로 진행하도록.”

“무언가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딱히 당황할 만한 일도 아니건만, 별다른 일도 않고 있던 불릿이 허둥대는 모습을 보이자 모든 행정관들이 그를 바라보는 상태였고, 불릿은 어쩐지 얼굴이 붉어져선 딱딱하게 굳어있는 유실리아를 슬쩍 뒤로 밀어놓고는 말을 던졌다.

“험험! 문제없다. 다만 한가지 알려줄 것이 있는데, 본인은 불모의 황무지를 개간할 생각인데 이에 대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도 토의해 보도록.”

부족한 군사적인 면 외에도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불릿은 불모의 황무지를 언급하고 있었는데, 그가 이러한 발언을 한데에는 손익계산이 빠른 행정관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어서였다.

단순히 생각한다면 개간에 성공함으로써 얻는 이익이 막대할 것이나, 그 외의 불안요소가 나올 수 있기에 반드시 거쳐 가야 할 과정이었기에 그렇다.

주어진 명제에 예시까지 더해지자 행정관들의 토론은 한결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오늘도 멋지시다!’

얼굴을 붉힌 유실리아는 불릿의 손길에 따라 그가 위치한 상석의 뒤편으로 이동했다.

그가 자신을 가리려는 의도는 알았으나, 이런 구도에선 불릿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기에 약간의 아쉬움도 남는 구석이 있었다.

‘어쩜 이리도 늠름하실까….’

유실리아는 수십 년 전에 직스 자작령에서 팔려나갔던 처녀들의 자녀다.

그녀들이 불릿의 배려로 중앙영지의 거처에서 하녀로 일하면서 가족도 덩달아 중앙영지로 집을 옮기게 되었고, 이에 따라 파멸할 수도 있었던 인생이 훨씬 개선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입이 닳도록 불릿을 찬양하던 하녀들에게서 태어난 2세대들은 자연스럽게 불릿을 보필하게 되었는데, 유실리아는 기사가 된지 얼마 안 되어서 흑마법사와의 전쟁으로 인해 결사대에 참전했던 불릿을 자세히 본 적이 없었다.

‘나도 각하의 곁에 나란히 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눈에 반하다, 그것은 오직 검만 바라보며 정진했기에 남자를 모르던 유실리아에게도 적용되던 것이었다.

언제나 부모들에게만 듣던 불릿은 나이를 먹어감에도 곱게 늙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인물이었으며 무심한듯하면서도 상냥한, 가슴 따뜻한 사나이였다.

그녀의 부모는 불릿의 부모가 백성들을 위해 희생했다는 얘기를 듣고 눈물을 흘렸었는데, 당시 유실리아는 그러한 감정을 잘 이해하지 못했었다.

‘시어머님(?)을 뵙고 싶었는데….’

성안 곳곳에 걸려 있는 초상화들은 불릿이 얼마나 그들을 애타게 그리워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스틱스 마님과 애로우 폰 바포님 이셨지?’

슬쩍 옆으로 돌아서 불릿의 얼굴을 훔쳐보니 다시금 떠오르는 초상화의 그림.

빼닮으진 않았으나 스틱스와 애로우를 반씩 섞은 듯한 불릿의 외모에 유실리아는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하아….”

그녀가 애틋한 감정을 숨기며 한숨을 쉬자 토론을 지켜보던 불릿이 고개를 돌렸다.

휙.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가?”

회의는 자유토론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었기에 불릿은 상념에 젖어있었는데, 청순미를 뽐내는 유실리아의 가녀린 한숨소리에 절로 고개가 돌아갔던 것이다.

불릿이 자신을 걱정해주자 그녀는 화들짝 놀랐으나 이를 티내지 않고선 살짝 머리를 젓는다.

“아닙니다, 각하.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열심인 것도 좋지만 건강이 우선이다. 그대는 기사이기 이전에 레이디이니까.”

화아악-.

유실리아는 불릿의 걱정 어린 조언에 얼굴에 피가 쏠리는 것을 느끼고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무력에 자신이 있는 기사에게 있어 이러한 말은 자칫 모욕적인 언사가 될 수도 있었지만, 불릿에게 사심 가득한 유실리아에게 있어 이처럼 달콤한 말도 따로 없을 것이다.

‘포기해야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각하….’

불릿의 곁엔 올리비아가 있다. 이미 몸도 섞은, 언제 후계를 잉태할지만이 얘기가 오가는 사이.

그리고 비밀에 치부되고 있지만 흙덩이 또한 첩 또는 제 2 정부로 조심스레 언급되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몰락했으나 근본은 귀족의 피가 흐르고, 흙덩이라 불리는 작은아씨는 불릿이 목숨만큼 중히 여기는 존재였다.

그녀들의 틈에 과연 유실리아는 자신이 끼어도 되는 것일까, 천한 신분의 평민이자 하녀에게서 태어난 자신이 이분에게 어울릴까 하는 생각에 잠 못 이루며 베갯잇을 눈물로 적셨다.

“흠, 그렇지. 자네가 흙덩이에게 교육을 시켜주는 것은 어떤가?”

“헛, 제가 작은아씨의 교육을 담당해도 괜찮은 것입니까, 각하?!”

정부가 될 수 있는, 못해도 최소한 첩은 되리라 여겨지는 흙덩이에게 하녀에게서 태어난 평민출신의 미천한 자가, 그것도 기사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여기사에게 교육을 담당케 하다니, 유실리아는 믿기지가 않았다.

자신이 가르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검술일 테니 여성으로서의 몸가짐이나 예의범절은 아니지 않겠는가?

그런 것은 예절교육을 담당하는 자들이 이미 있었기에 서툰 유실리아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릿은 유실리아의 걱정에도 홀로 고민을 이어가며 중얼거렸다.

“안나에게만 맡겼다간 무슨 짓을 할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 말이지….”

불릿은 하녀장인 안나가 흙덩이에게 이상한 것을  가르칠까봐 불안했다.

그 순진한 아이를 더럽힐까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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