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2 시상식 =========================================================================
“자, 농은 그만하도록 하지. 뎁슨 레너드 남작, 본 바포 변경백의 주인인 나의 검을 받으라.”
불릿이 웃음을 멈추고 검을 드리우자 레너드 남작도 웃음기를 지우고선 진중한 태도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대 나의 검이여, 수호의 임무를 훌륭히 완수한 나의 검에 기쁨을 감출 수가 없구나. 이에 뎁슨 레너드 남작을 남작의 위에서 자작의 위로 승작하는 바이다.”
불릿의 검이 레너드 남작의 왼쪽, 오른쪽, 그 다음에 머리까지 두드리자 레너드 남작, 이제는 뎁슨 레너드 자작이 된 그가 우렁차게 외쳤다.
“황공하나이다, 각하!”
“뎁슨 레너드 자작, 천세! 천세!”
“뎁슨 레너드 자작님, 천세!”
모두가 자작이 된 레너드 자작을 축하해주자 불릿도 흐뭇하게 그를 바라본 후 천천히 일어서는 그의 손을 맞잡아주었다.
여기서 말하는 천세란, 천살까지 살라는 의미였는데 불릿의 만세와는 차이가 있는 이유는 격에 차이를 두기 위함이었다.
“충성을 다하겠나이다, 각하!”
“흠, 열심히 해주면 본인이야 좋지. 그렇다고 너무 힘쓰진 마시게. 우리 나이에 삐끗하면 평생을 가니 말이야.”
“…각하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가?”
짧은 담소가 이어진 후 물러나는 뎁슨 레너드 자작. 그리고 물러나는 레너드 자작에게 불릿의 뒤에 서있던 올리비아와 흙덩이가 각기 기념트로피와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고맙소이다, 부인. 그리고…, 흠.”
‘어머, 어머!’라면서 부끄러워하는 올리비아를 제쳐두고 흙덩이에게도 말을 올리려다 덜컥 멈춘 레너드 자작.
흙덩이에게 무어라 하면 좋을까 생각하다 이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작은아씨.”
- ……
흙덩이는 아직 부인과 작은아씨의 차이를 잘 몰랐으나 판단력은 좋았기에 불만스러워했다.
그러나 이 좋은 날에 인상을 찌푸릴 순 없기에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만 까닥였다.
레너드 자작이 물러나자 불릿이 이어서 발표했다.
“다음으론 바포가를 2대째 모시고 있는 집사 밴!”
웅성웅성.
“밴? 누구지, 밴이?”
“글쎄, 나야 모르지.”
일반인이 집사인 밴을 알 리가 없었다. 대외적으로 밴의 역할은 집사의 역할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므로 그를 아는 이는 바포가의 가신들을 제외하면 소수일 것이다.
이윽고 밴이 노구를 이끌고 조용히 등장했는데, 역시나 그의 얼굴을 보아도 아는 이가 없어 환호성 없이 적막했다.
“이 노인네를 어쩐 일로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밴의 말은 ‘나 말고도 치하 받을 이가 많다’라는 뜻으로, 질책의 의미가 담겨있었다.
이에 불릿은 그의 말을 능숙하게 받아주었다.
“할아범에게 자격이 없다면 그 누구에게 자격이 있단 것이지?”
“도련님…….”
관중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게 속삭이는 그들. 둘에게 있어 이 자리는 조금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자, 총집사 밴이여! 본인의 검을 받으라!”
“…그리하겠나이다!”
척.
무릎이 시릴 나이가 된 밴이었으나 61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정정한 자세로 다리를 굽혔다.
밴이 한쪽 무릎을 꿇자 불릿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예식용 검을 휘둘렀다.
“반역자 게슐린 그랩 자작의 입성을 막아낸 공로를 치하하며 바포 변경백의 총집사인 밴에게 준남작의 작위를 내린다!”
“……감사…하나이다….”
말을 잇기 버거워하는 밴. 언제나 그는 뒤에서 불릿을 받쳐주었고, 어둠속에서 그림자가 되어 그를 보호해주었다.
그러면서도 마땅한 보상도 바라지 않았는데, 그가 귀족가의 자제출신임을 상기하면 이상할 정도로 명예욕이 없었다.
불릿은 그가 비밀호위대를 꾸리고 있단 것을 모르고 있었으나, 그것을 제하더라도 충분히 보상받을 만하다는 생각에 작위를 내렸던 것이다.
“이제 자네도 어엿한 승계귀족이로군.”
“…다 늙어서 주책인지 모르겠군요.”
“손자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이니 늦장가들 생각일랑 말게나.”
불릿에게 깊게 감읍한 밴은 트로피와 꽃다발을 건네주는 올리비아, 그리고 흙덩이를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본 후 등장할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퇴장하였다.
관중들은 밴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으나 귀족들은 그가 이제야 작위를 받게 되자 조금 늦은 감이 있다는 생각도 드러내고 있었다.
그만큼 밴이 은연중 바포 변경백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리라.
“다음으로는….”
* * *
시상식을 통해 많은 이들이 변화를 겪었다. 자작으로 승작된 레너드 자작을 비롯, 준남작이 된 밴.
무역로를 개통한 비 아이언 외교대사는 영지를 팔아먹었단 이유로 처형된 태티스 남작의 자리를 대신해 그 자리를 꿰찼다.
다만, 그는 어디까지나 외교대사였으므로 영토와 관련해선 아이언 남작이 스스로 거부하였다.
삼광(三光) 셰실리코프 준남작은 상벌상쇄를 통해 그의 대에 한해선 승작을 할 수 없게 되었는데, 그래서 셰실리코프 대신에 군단의 천인장이자 대영주 직속 기사단의 마지막 수석기사인 벤젼스가 남작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그 역시도 영토의 관리에 관해선 아는 바가 없었기에 영주가 될 수는 없었다.
구 직스 자작령의 임시대리자인 벙스 카텐의 경우 정식으로 영주가 되었으나, 아직 그의 능력을 제대로 볼 수 없었기에 셰실리코프와 마찬가지로 준남작이란 최소한의 기준치만 주어 영주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었다.
동쪽의 영주인 카질런 남작은 뚜렷한 활약상이 없어 간단한 치하만을 내리는 데에서 그쳤고, 베니스 남작은 비 아이언 외교대사, 이제는 남작이 된 그로인해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게 되어 논공행상에서 제외되었다.
그가 불릿의 명에 따라 시작한 특산물계획의 향신료로 벌어들이는 금액만으로도 다른 이들과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남서에 위치한 바스톤의 영주, 브룩 남작은 마정석으로 벌어들이는 금액에서 매겨지는 세금을 낮춰주는 것으로 혜택을 주었다.
사실상 바스톤의 주 수입원이 마수의 숲에서 나오는 마정석이었으니 브룩 남작은 만족하는 눈치를 보였다.
결사대의 일원이자 지금은 사망한 마법사 제노스의 아들 제노시스는 마정석을 지원해주기로 결정되었다.
지금 제노시스에게 필요한 것은 성장을 위한 발판이었으므로 꾸준히 지급되는 마정석을 통해 마나를 쌓아 벽을 깨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제노시스는 감사한 마음에 어쩔 줄을 몰라 했는데, 역시 외견상으로는 제노시스와 별로 차이가 안 나는 불릿이 등을 두드리며 대견해하니 영 그림이 나오진 않고 있었다.
처형당한 태티스 남작의 영토는 아직 주인이 결정되지 않았는데, 위치상으로도 약간 어정쩡하다는 의견이 있어 북쪽의 영토에 집어넣어서 이후 파견될 영주에게 그랩 자작의 역할을 맡기는 것이 어떻겠냐는 소리도 나왔었다.
다만 막강한 힘이 주어지면 그랩 자작과 같은 인물이 나올 수도 있었기에 영토 2개를 합치기는 하되, 영주를 보필하는 행정관에 관해서는 중앙영지에서 직접 파견해 감시와 임무를 동시에 수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또 다른 자작임명에 관해선 민감한 사항이었기에 불릿은 고민하던 찰나, 곁에서 그를 보필하던 이우우스 2급 행정관이 눈에 띄어 그를 1급 행정관으로 임명하여 북쪽의 영토로 파견시켰다.
이우우스는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지만 잘만 하면 작위를 받을 수도 있는, 가문의 영광이었기에 힘을 내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대대적인 인사이동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행정관들에 대해서도 공로가 있는 이들을 1계급 특진을 시키는 등, 불릿의 바포 변경백은 점차 안정을 되찾아가는 듯했다.
“으흥, 흥흥흥-♪”
톡톡톡.
올리비아는 콧노래를 부르며 신이 난 모습을 보였는데, 화장을 하는 것을 도와주는 루나도 덩달아 신난 모습을 보였다.
“좋으시겠어요, 마님.”
“얘도 참, 마님이라니? 호호호-.”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던 시간이 지나 개인적인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자 불릿은 이전에 못다한 여행을 하고자 올리비아에게 말을 전하였다.
당연히 올리비아는 이를 승낙했고, 예전에 불릿이 고백했던 마차에서의 한때를 떠올리며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던지라 중앙영지로 돌아오면 거사(?)를 치르겠다던 당초의 얘기와는 다르게 얼굴을 보는 것조차 힘들었었는데, 이렇게 여행을 떠나게 되니 신이 났던 것이다.
“그런데 흙덩이는?”
“또 대영주님한테 안겨계시겠죠, 뭘.”
“아휴, 앙큼한 계집애 같으니라고.”
좋던 것도 잠시, 흙덩이를 떠올리자 올리비아의 고운 미간이 순간 팍! 하고 찡그려졌다.
“마님, 얼굴을 찡그리시면 화장이 먹질 않아요.”
“앗, 맞다. 우리 자기에게 잘 보여야하지?”
“…마님이 자기라고 하시니까 뭔가 좀 어색하네요, 히히.”
“이게…왁!”
“아아- 응큼한 여우가 루나를 잡아먹어요-.”
둘이 시답잖은 장난을 벌이며 꽃단장을 벌이고 있을 때, 불릿은 불릿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으음, 이게 어울리는 것인가?”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아닌, 그냥 불릿의 영토를 한 바퀴 순회하는 것이었는데 이 짧은 여행만으로도 불릿은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할지 몰랐다.
- 아무거나 입어. 불릿은 뭘 입어도 잘 어울리니까.
불릿이 여행용품을 점검하며 고민하고 있을 때, 그의 침상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던 흙덩이의 고운 미성이 흘러나왔다.
“…흠, 그럼 그럴까?”
- 응. 그렇게 해.
“후우, 귀찮군.”
불릿은 대충 한쪽에 짐을 정리한 후 침상에 몸을 눕혔는데, 흙덩이가 자신의 팔에 눕고 있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신청한 여행이었지만 귀찮음은 어쩔 수 없었는지 필요한 물품만을 챙긴 후 하녀와 하인들을 통해 마차에 짐을 싣게 했다.
- 귀찮으면, 흙덩이랑 같이 놀래?
빙글, 돌아누운 흙덩이가 긴 속눈썹을 반짝이며 누워있는 불릿을 올려보자 불릿은 말없이 흙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
‘정신을 차릴 때마다 자라나있군.’
흙덩이는 성장기의 아이처럼 하루가 다르게 모습이 변하고 있었다.
이걸 각성하는 과정이라고 해야 할지, 성장과정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분명 봄까지만 하더라도 열넷 정도로 보이던 모습이 지금은 한 살은 족히 먹은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가슴의 경우 올리비아보단 못했으나 많이 커진 것이 마치 작은 멜론…
“크흠! 크흐흠!”
불릿이 뜬금없이 헛기침을 내뱉자 흙덩이가 배시시 웃으며 속닥였다.
- 이상한 상상했구나?
불릿이 헛기침을 뱉을 때면 민망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 흙덩이도 이쯤 되면 알 수 있었다.
‘상상이 아니라 본 것이지만.’
그의 시선이 침대에 눌리고 있는 그곳에 향했다는 사실은 모르는 흙덩이가 그저 좋다고 웃고 있는 사이,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똑똑똑!
예의라곤 없는, 매우 빠른 두드림에 침상에 누워있던 불릿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품에 안겨있던 흙덩이의 인상도 살며시 찌푸려졌다.
- 어떤 바보가 우릴 방해하는 거야?
‘…딱히 무언가를 하고 있던 건 아니네만.’
입 밖으로 말을 내뱉지는 않고 속으로만 되내이던 불릿은 말려 올라간 흙덩이의 원피스를 아래로 내려주고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 많은 움직임을 보인 것도 아닌데 이처럼 침상에 누울 때면 흙덩이는 속옷을 보이는 것도 모르는지 원피스가 자꾸 위로 말려 올라갔다.
‘……일부러 보여주는 것은 아니겠지.’
이 정신 나간 육체가 또 다시 반응하려고하자 고개를 세차게 흔든 불릿이 문가로 향하며 외쳤다.
“입실을 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