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정령사-121화 (121/241)

00121  사랑과 전쟁!  =========================================================================

“교역이라 했나? 하지만 자네들은 지금도 본 왕국과 이미 거래를 하고 있질 않은가?”

“비밀리에 하는 것이 아닌, 정식으로 교역을 제안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으음….”

비 아이언 외교대사가 하는 말은 그동안 적대국가인지라 몰래몰래, 신분을 숨기며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얼굴 내놓고 편하게 거래를 하자는 뜻이었다.

그동안은 신분을 노출시킬 수 없기에 소량의 물품만이 오고갔으나 만약 교역길이 뚫린다면 각지의 특산물이 오고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왜 그래야 하지? 나로선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군.”

란푸스 왕국은 부족한 것이 없다. 란푸스 3세의 철혈통치가 귀족들에게 있어 비극일지 몰라도, 백성들에게 있어 그만큼 칭송받을 이도 따로 없을 것이다.

부족한 것이 없는데 굳이 무역을 틀 필요가 없다. 갖고 싶은 것이 있다면 강력한 군대를 통해 식민지, 혹은 속국으로 만들면 그만이었기에 그렇다.

“사실 저희 바포 변경백에서 이번에 특산물로 품질이 뛰어난 향신료를 대량으로 생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쫑긋.

“향신료…말인가?”

“네, 향신료 말입니다. 음식에도 해먹고, 약재나 화장품에도 쓰이는 그것 말입니다.”

모든 것이 풍족한 란푸스 왕국에서도 아쉬운 것이 있다면 바로 이 향신료였는데, 향신료의 재배는 까다롭기도 하거니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었기에 백성들에게 있어 선뜻 손을 대기 버거운 작물이었다.

값싸고 재배가 쉬운 것들도 있지만 이미 일손은 기존 작물을 재배하느라 손을 뗄 수가 없는 상태, 향신료가 귀한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기후와 토지, 그리고 일손부족이 손에 꼽히고 있었다.

“혹시 찻잎(Tea)도 있는가?”

“커피, 코코아, 홍차, 바질, 녹차, 무엇을 원하시는지요?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거래하고 싶습니다만.”

“오오오…, 커피가 있다는 말이지….”

아직 커피의 보급은 원활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는 이도 적었고, 마치 걸레를 빤 물과도 같은 맛이라 하여 기피되는 향신료였으나 일부 귀족들은 그 향에 푹 빠져 열렬한 애호가가 된 상태, 베스테포 백작 또한 그중 하나였던 것이다.

“무작정 저희의 영토를 덮친다하여 얻으실 수 있는 물품들이 아닙니다. 이렇게 다양한 향신료의 재배가 가능한 이유는 오직 한 분, 불릿 폰 바포 백작각하께오서 정령사이시기에 그런 것입니다.”

“바포 백작이란 말이지…….”

비 아이언 외교대사의 말에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하는 베스테포. 그는 연신 ‘흐음’, ‘으음’ 등의 신음성을 내뱉으며 짙은 고민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가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자 외교대사는 속으로 외쳤다.

‘됐다! 넘어왔다!’

귀족치고 향신료를 싫어하는 이는 없다. 평민들은 일상처럼 즐기기 어려운 값비싼 향신료를 귀족들이 왜 원하겠는가? 그것은 무료한 일상 속에서 그것들만큼 쉬우면서 간편히 즐길 수 있는 쾌락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바스테포 백작, 그의 입이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 * *

두두두두두…

점점 멀어져가는 군대를 보며 불릿과 레너드 남작은 동시에 한숨을 놓았다.

“후우.”

“흐으음…, 물러갔습니다, 각하.”

“그래, 물러갔지.”

혹시나 해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결국 그들은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고, 란푸스 왕국의 군대가 물러섰다는 것을 알게 되자 불릿은 성을 지키던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전시상황에서 준 전시상황으로 경계도를 낮추고, 다음날 새벽까지 적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면 전시상황을 해제하도록.”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각하.”

“잘했네, 잘했어.”

“모두가 노력한 결과인 것이겠지요.”

“후후후, 역시 비 아이언 외교대사야.”

다과를 차려놓은 채 담화를 나누는 불릿과 비 아이언 외교대사.

그들은 성공적으로 군세를 물리친 성과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불릿은 외교대사의 성과가 만족스러웠는지 연신 그를 칭찬하고 있었다.

거듭된 내전으로 인해 불릿의 심신은 알게 모르게 피폐해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와중에 평화적으로 적을 물리쳤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청년 모습의 불릿이 장년에 접어든 비 아이언 외교대사를 칭찬하니 뭔가 어색해보였으나 외교대사도 기쁜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베니스 남작도 좋아할 것 같군요.”

특산물계획에서 향신료재배는 오로지 베니스 남작의 영토에서만 실행되고 있었다.

상단을 갖춘 것도 그였고, 재정대신도 그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데, 나라를 상대로 한 향신료거래로 막대한 이익을 챙기게 되었으니 좋아할 것이 분명했다.

“지금 마시고 있는 이것도 다 노력의 결과겠지.”

그러면서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는 불릿. 그의 입으로 빨려 들어가는 갈색의 액체에 불릿은 감탄했다.

“후우, 역시 달콤한 것은 코코아를 따라잡을 수 없군.”

코코아는 기본적으로 달지 않다. 그냥 거기에 설탕과 꿀을 한가득 넣은 불릿의 취향일 뿐.

그러나 여기서 그에게 태클을 걸 만한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 후룩, 후루룩…

그리고 저 한편, 마주보고서 담소를 나누는 둘을 제외하고서 왜 이곳에 있는지 알 수 없는 흙덩이와 올리비아가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야, 너는 마실 필요도 없잖아? 근데 왜 자꾸 먹고 난리야.”

- 흥, 흙덩이가 먹던 말던 올리비아가 신경 쓸 일은 아니네요, 베-.

“이게 자꾸 혀를 내미네? 메롱은 누구한테 배워가지고.”

- 올리비아한테 배웠지 누구한테 배워? 베-.

“이씨, 이게 진짜!”

올리비아를 놀리려는지 흙덩이가 불릿과 같은 음료를 마시면서도 분홍빛 혀를 낼름거리자 화가 났는지 올리비아가 흙덩이의 이마에 땅콩을 먹였다.

따콩!

- …….

“맛이 어때? 고소하지!”

“올리비아, 그만하시오. 왜 가만히 있는 흙덩이를 괴롭히고 그러는 것이오?”

흙덩이에게 손찌검(그 정도는 아니지만)을 가하자 흙덩이가 화를 내니 올리비아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하, 하지만 얘가 나한테….”

“흙덩이는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어린아이오. 부드럽게 보살펴주어야지, 그게 다 큰 어른이 할 짓이오?”

정확히 말하자면 흙덩이는 연령측정불가였다. 정령의 나이를 알 수 있는 자가 세상에 존재할지 의심스럽다.

그러나 외견상 흙덩이는 열넷의 미소녀, 지금도 눈이 그렁그렁하며 이마를 양손으로 짚고서 아파하는 모습에 불릿의 인상은 절로 찌푸려졌다.

“뭐야… 얘가 겨우 이런 걸로 아파할 리가 없잖아.”

자신 나름대로의 장난이었던 것인데 불릿이 화를 내자 이해할 수 없는 올리비아.

그런 그녀에게 불릿이 자리에서 일어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뚜벅, 뚜벅.

“흠, 올리비아?”

“응?”

따콩!

“악! 무슨 짓이야!”

불릿은 올리비아가 흙덩이에게 했던 것처럼 검지와 엄지를 튕겨 이마에 땅콩을 먹였는데, 그녀가 이마를 문지르며 노려보자 불릿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하였다.

“흙덩이 괴롭히지 마시오. 올리비아는 올리비아인데 구태여 흙덩이에게 질투심을 내보일 필요가 있겠소?”

“우으으…, 알았다고….”

금세 시무룩해진 올리비아가 손을 축 늘어뜨리자 불릿은 그녀의 이마에 키스를 해주었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화들짝 놀라자 불릿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어른은 어른의 대응이 있지 않겠나?”

그리고 이들의 모습을 지켜본 비 아이언 외교대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춘풍이로구나!”

때는 봄, 불릿의 인생에 봄바람이 불고 있었다.

* * *

비 아이언 외교대사의 활약으로 외세까지 물리치고 나자 바포 변경백엔 평화가 찾아왔다.

비록 예전만 못한 성세였으나 란푸스와의 교역로가 뚫린 이상 이제 바포 변경백엔 날아오를 일만 남은 것이다.

루드밀라의 상황은 춘추전국시대, 영토 하나하나가 외국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무역로를 뚫기엔 적절하지 않은 면이 있었기에 그렇다.

정당하며 강력한 지배자인 불릿이 돌아오자 바포 변경백의 백성들은 불안했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고, 점차 안정되어가는 와중에 그동안의 성과를 나누는 시상식이 거행되었다.

웅성웅성-

많은 인파가 모여 있는 광장, 불릿은 중앙영지에서 벌어지는 시상식에 나타났는데 그의 곁에는 한껏 멋을 낸 올리비아와 흙덩이도 있었다.

몸통을 가로지르는 옥색의 띠와 대조되는 하얀색의 정복, 그리고 곳곳을 장식한 단추는 금으로 만들어졌는지 빛에 번쩍였다.

어깨의 견장은 빨간색 술이 달려 있었는데,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4대원소를 상징하는 바포 변경백의 전통복장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흰색은 물을 뜻하는 것으로, 물은 본래 투명한 것이니 그것을 나타내고자 순결을 뜻하는 백색을 채택한 것이다.

“으으, 역시 사람이 너무 많아….”

머리를 틀어 올려 가녀린 목을 강조하고,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드레스복장으로써 가슴과 허리라인을 강조한 올리비아는 시선을 한 곳에 두질 못하고 있었는데, 도통 적응되지 않는 것인지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 …내 손을 잡아.

꼬옥.

그것이 못마땅했는지 흙덩이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고, 흙덩이의 따뜻하며 작은 손길이 느껴지자 올리비아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내렸다.

불릿과 마찬가지로 하얀색이 바탕인 드레스에 노란색 프릴장식을 달아 청순하면서도 어린 소녀의 미모를 부각시키는 컨셉.

올리비아와 같은 복장을 할 수 없다는 데에 불만을 가진 흙덩이였으나 불릿의 ‘예쁘다’는 말에 그대로 잠잠해졌다.

슬쩍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던 흙덩이는 올리비아의 손을 잡아주면서도 중얼거렸다.

- 더 클 수 있어….

뭐가(?) 더 커진다는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으나, 긴장한 상태인 올리비아는 흙덩이의 손길에 따라 이끌려서 시상식을 위한 장소에 도착했다.

“본인의 연설이 길어질수록 지루해질 테니 이하 생략하겠다.”

와아아아아!!

연설을 생략한다는 말에 관중석에서 떠나갈 듯한 함성이 쏟아져왔는데, 다른 귀족들의 연설을 얼마나 싫어했던 것인지 이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자일수록 연설은 길고 지루했는데, 불릿은 그걸 단칼에 잘라버리니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시상식을 마친 후 3일간 축제를 벌여야하니 이 기쁜 날, 미리 준비한 말이 있더라도 참아주면 좋겠군, 후후.”

“역시 대영주님이 최고다!”

“사랑해요, 바포 백작님-!”

금세 소란스러워지려는 시상식장이었으나 불릿이 손을 들자 귀신같이 조용해졌다.

불릿은 이우우스 2급 행정관이 건네주는 예식용 검을 집어 들고서 입을 열었다.

“먼저 일러둘 것이 있다. 본인이 언급하는 인물들에게 순서는 있을지언정 모두가 노력해서 결과를 냈다는 데에선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니 누가 더 잘했고, 못했느니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생각한다.”

상벌을 주는 것에 등수를 매기는 것만큼 좋은 것도 없다. 받는 자에겐 명예와 보상을, 못 받은 자에겐 받고자하는 열의와 동기부여를 줄 수 있었는데, 현재 바포 변경백은 반란으로 인해 반으로 갈라졌던 상황이었었기에 모두의 마음을 하나로 합치고자 등수를 매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호명을 시작하겠다. 이우우스?”

수행원으로 참석한 이우우스가 불릿의 명에 따라 입을 열어 외치기 시작했다.

“그동안 루드밀라의 혼란스런 정세에서도 각하의 영토까지 그 손길이 닿지 않도록 지켜내 주었고, 이번에 새로 개편된 군단의 단장으로 새로이 취임해 활약한 뎁슨 레너드 남작!”

와아아아아!!

열화와 같은 환호와 함께 붉은 카펫을 밟으며 등장하는 뎁슨 레너드 남작.

그 또한 갑옷이 아닌 정복차림이었는데, 중후한 멋을 살린 복장에 가슴에 주렁주렁 달린 메달들이 그가 어떤 공로를 세웠었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그가 등장하자 불릿은 예식용 검을 수직으로 세웠고, 뎁슨 레너드 남작도 이에 맞춰 불릿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지난번에 얻은 상처는 다 나았는가?”

레너드 남작은 군단장임에도 최전선에서 활약한 바 있다. 그것도 붉은 장미 기사단의 차석기사인 빌 해그먼을 상대했었는데, 그가 알려진 것보다 실력이 높아 낭패를 본 부분도 있었다.

불릿이 그것을 언급하자 레너드 남작은 미미한 미소를 머금고서 답해주었다.

“각하, 저희들에겐 준비한 말도 속으로 삼키라고 하시더니 각하께오서 사담을 하시는군요.”

“무어라? 하하하!”

하하하하하!

평소 근엄함을 보이던 레너드 남작이 농을 보이자 불릿이 웃어보였고, 그러자 관중들도 따라 웃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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