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0 사랑과 전쟁! =========================================================================
불릿과의 거사(?)를 치루지 못한 올리비아는 시무룩한 모습을 보였으나, 반대로 흙덩이는 점점 활기찬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에게서 상처 입을 만한 말을 들었으나 좀체 진도를 못 빼는 올리비아에게 고소함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이전처럼 찰싹 달라붙는 것이다.
그리고 유실리아는 더 이상 호위라는 명목하에 불릿을 쫓아다닐 수 없어 한숨을 쉬며 아일렌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있었다.
이러저러한 일들을 겪으며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 일주일이라는 예정된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두두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발자국소리, 저 멀리서부터 파랗게 돋아나는 새싹을 짓밟으며 진군하는 란푸스의 국기를 보며 성곽에 오른 불릿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정확히 도착하는군.”
예정된 시일, 일정한 진군속도, 규칙적인 진열.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막강한 군세에 불릿을 비롯한 모든 이들은 긴장했다.
“각하.”
“…삼광(三光).”
“충.”
삼광 셰실리코프는 그의 앞에 부복하며 고개를 조아렸는데, 이제야 새로운 군율이 몸에 익는 것인지 귀족의 예와 군인의 예를 뒤섞어서 사용하고 있었다.
적이 눈앞까지 다가온 마당에 사소한 걸로 타박할 생각은 없었기에 불릿은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란푸스의 군대가 다가오고 있네. 자네라면 어떻게 대응을 할 것인가?”
불릿이 검사인 셰실리코프에게 이러한 질문을 한 데에는 셰실리코프의 지난 행동에서 이유를 찾아볼 수 있었다.
그는 검사이기도 했으나 한 지역의 영주이기도 했다. 그가 검사로서가 아닌,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의 주민들을 안전을 위해 머리를 써가며 명예를 저버리면서도 원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니 단순무력이 아닌, 다른 방법을 내놓을 수 있으리라 여겨서이다.
“비 아이언 외교대사를 전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송구하오나 그게 끝입니다.”
“…이유를 알 수 있겠나?”
외무대신은 왕실소속이기에 불릿의 영토엔 직접 발로 뛰어다니는 외교대사가 존재했다.
그리고 불릿의 외교대사인 비 아이언 외교대사는 꽤나 유능한 인물로, 무능한 루드밀라 왕국의 외무대신보다 그 수준이 몇 단계는 더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곤 하더라도 남에게 책임을 넘겨버리는 셰실리코프의 태도엔 문제가 있었다.
“그는 이런 방면의 전문가입니다. 그리고 소신은 그를 믿습니다.”
“그가 결과를 내지 못해 전쟁이 발발한다면, 자네는 목을 내놓을 수 있겠는가?”
매우 민감한 문제였기에 친한 사이라 할지라도 답하기 꺼려지는 말이었으나 셰실리코프는 냉큼 대꾸하였다.
“물론입니다.”
“…그것은 검사의 용기인 것인가, 기사의 명예인 것인가?”
불릿의 물음에 셰실리코프는 따스한 봄바람을 맞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각하.”
복권한 이래 처음으로 보는 셰실리코프의 미소에 불릿은 다시 고개를 돌려 군세를 바라보았다.
“본인도 그를 믿네.”
비 아이언 외교대사, 그에게 모든 것이 달려있었다.
* * *
“아아, 아아-.”
목청을 가다듬으며 자신의 음성을 확인하는 장년의 남성.
그는 거울로 정복에 구김이 없는지 연신 눈으로 살피면서도 소리를 확인함에 여념이 없었다.
쿵-, 쿵-.
“비 아이언 외교대사님! 놈들이 오고 있다 합니다!”
문밖에서부터 들려오는 소식에 장년의 남성, 비 아이언 외교대사는 얼굴의 표정을 여러 차례 바꾸다 하나의 표정에서 멈추었다.
“곧 나가겠네.”
문밖으로 나서기 직전 뒤를 돌아보는 외교대사. 그의 얼굴은 사납게 으르렁대는 늑대의 그것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두두두두두-
말발굽과 함께 지축을 울리는 군대의 진격소리 이것에 긴장하지 않는 이는 없을 법도 하건만, 홀로 전투복이 아닌 정복을 입은 이 사내는 겁도 없는지 그저 고요하게 그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이윽고 성벽으로부터 200미터쯤을 남겨뒀을 때, 놈들은 군대를 멈추고선 전령을 하나 보내었다.
“란푸스 3세로부터의 전령이오! 승자 불릿 폰 바포 백작은 본 란푸스 왕국과의 약속을 이행할 것인지 가부를 결정하시오!”
다가닥다가닥!
전령은 그 말만을 남겨놓고 쏜살같이 사라졌는데, 마치 불릿의 진영이 ‘거절’할 것이라는 사실에 비중을 둔 듯한 모습이었다.
전령이 다녀간 지 십여 분, 거대한 성문이 천천히 내려서며 도개교의 형태를 띤 다리가 완성되었다.
쿠웅!
자칫 적이 들어설 수도 있었지만 곧이어 그곳을 통해 하나의 군마가 밖을 향해 달려나갔다.
다각, 다각.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일정한 템포. 승마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 수는 없으나 멀리서 이를 지켜보는 자들에게 저자만큼 대담한 이는 없을 거라는 인상을 새겨주고 있었다.
저 멀리서 험악한 기세로 성을 노려보는 군대가 있는 곳에 홀로 뛰어들고 있는 자가 용기 있지 않으면 당최 누가 용기 있는 자일지 모르겠다.
그렇게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인물은 군대의 코앞까지 이동을 마쳤다.
그는 말의 갈기를 쓰다듬어주며 대지에 발을 디뎠는데, 그가 바로 불릿을 대표할 비 아이언 외교대사였다.
“당신이 뜻을 전할 전령인가?”
불릿의 군단보다 족히 2배는 많은 군을 이끄는 수령으로 보이는 화려한 견갑과 망토를 통해 그가 지휘관임을 알 수 있었는데, 비 아이언 외교대사는 주눅 들지 않고 천천히 인사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가 이번 란푸스 왕국과의 외교를 맡게 된 비 아이언 외교대사라 합니다.”
“알고 있다. 내용은 무엇이지?”
금방이라도 검이 짓쳐들 것 같은 기세에 무술을 익히지 않은 외교대사는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찌릿, 찌릿!
‘크윽, 기선을 제압할 생각이구나!’
그러나 비 아이언 외교대사는 이런 일을 자주 겪어봤다. 지금 시대는 무력이 옳고 그름을 나눠주는 세상, 기사나 용병을 비롯한 무인들은 때때로 이렇게 그를 압박하며 자신에게 유리한 거래를 가져가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지 않는다.’
얼굴이 금세 붉어졌으나 비 아이언 대사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는 상태로 또박또박 말을 이어나갔다.
“재미없는 장난은 그만두고 본론으로 넘어가지요.”
“호오?”
자신의 살기를 견뎌내며 장난이라 언급하는 외교대사에게 지휘관, 베스테포는 살짝 놀랐다.
그러나 이내 그 놀라움은 사그라들었는데, 외교대사가 살기를 견뎌내긴 했으나 식은땀을 줄줄 흐르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유리한 것은 나, 그것에 변함이 없었기에.
“장난이라, 당신은 이게 장난으로 보이는가?”
베스테포의 말에 외교대사는 힘겨워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왕의 부름을 받고 군대를 출정시킨 인물이 말 하나하나가 중요한 설전(舌戰)에서 애들도 안 할 장난을 하다니, 당신은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자각은 하고 있는 것입니까?”
쿵!
외교대사의 말에 이번엔 베스테포의 미간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 있나? 본인은 그저, 전하에 대한 충성심에서 발로된 행동이었을 뿐이지 별다른 마음을 먹지 않았네.”
순식간에 사라지는 살기에 비 아이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왕을 무서워하는군.’
란푸스 왕국의 왕 란푸스 3세의 철혈통치는 생각보다 밖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본인들의 치부라 할 수 있는 문제를 남들에게 알릴 정도로 귀족들의 코가 낮지 않은 것과 더불어 외부적으로는 딱히 큰 변화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비 아이언 외교대사가 이 사실을 아는 이유는 베니스 남작의 상단을 통해 은밀하게 전해 받은 정보를 통해서였다.
‘할 수 있다면 해봐라. 다만, 대가는 죽음이 될 것이니…였던가.’
이 말만 듣고 평소처럼 백성들을 쥐어짜며 호위호식 하던 귀족들의 태반이 숙청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대규모 숙청이 이뤄진 후 란푸스 3세가 내뱉은 말.
“짐이 뭐랬는가? 할 수 있으면 하라고 말이야. 감히 짐의 것을 건드리고도 살아남을 줄 알았나?”
더욱 무서운 것은, 이러한 연설을 하면서도 란푸스 3세의 음성엔 고조가 없다는 점이었다.
데 리치 상단은 이 연설만을 들었으나 이것만으로도 외교대사는 란푸스 왕국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도된 도박이었으나 결과는 생각보다 좋았다. 당장 살기에서 벗어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흠흠, 내 비 아이언 외교대사를 핍박할 생각은 없었네. 그저 당신이 진짜 그 인물이 맞는지 확인해보고 싶었을 뿐이야.”
‘거짓이 서툴군.’
그러나 그것이 거짓이라 할지라도 자신은 감정을 억눌러야 했다.
그것이 외교대사로서의 마음가짐.
“성함을 알 수 있겠습니까?”
아직 기본적인 통성명도 오고가지 않은 상황, 이미 사전에 자신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던 란푸스에 비해 불릿의 진영은 당장 군의 지휘관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본 지휘관으로 할 것 같으면 영광스런 란푸스의 검, 베스테포라 한다.”
“베스테포 백작님이셨군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란푸스의 여덟 번째 검이시여.”
“크흠, 큼!”
란푸스 왕국은 국왕의 철혈통치로 인해 능력이 없다면 귀족이라 할지라도 도태되는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가장 뛰어난 10명의 기사를 선출했으니, 그 중에서 여덟 번째에 속한 이가 바로 베스테포 백작이었다.
“검술명가로 유명한 베스테포의 가주님을 직접 뵙게 되어 기쁜 마음을 감출 수가 없군요.”
“…그렇게 아부해도 나오는 것은 없네.”
“아닙니다. 진심에서 우러나는 말입니다. 부디 본 외교대사의 무례를 용서해주시길.”
오른다리를 뒤로 빼며 왼팔도 자동적으로 따라간다. 그러면서 상체를 숙이고, 오른팔은 배를 감싸듯 하지만 손바닥만큼은 왼쪽 바깥으로 빠지며 펼쳐진 상태.
귀족의 예를 보이며 사과하는 정중한 태도에 베스테포 백작은 헛기침을 뱉었다.
“크흠, 자네가 그리 생각한다면야 내 용서하지.”
“감사합니다, 가주님.”
이로써 무게추는 베스테포에게 기울어져 있던 것이 수평을 이루게 되었다.
베스테포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겠으나 자신이 누구의 명에 따르는지를, 그리고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자각한 이상 함부로 말을 내뱉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로선 더욱 조심해야할 일이지.’
상대를 흥분에 빠트려 쉽게 갈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코앞에 폭력이 짓쳐든 상태, 어떻게든 이들을 물려야하는 상황에서 그들의 수장을 흥분케 해선 절대 안 되었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도 되겠습니까?”
“으음…, 좋네. 한번 말해보도록.”
조금 전의 조심스런 태도와는 다르게 약간의 거만함이 튀어나왔으나, 이것은 본래 몸에 배였던 것이지 그를 핍박하고자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기로 몸을 얽어맺느냐, 아니냐로 쉬이 알 수 있었다.
“아실 것도 같지만 크레센트 폴 푸바 란푸스 폐하와 약속을 나눴던 게슐린 그랩 자작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저기 성곽에 매달린 머리가 보이십니까?”
거의 300미터가 넘는 거리였기에 흡사 점처럼 보이는 게슐린 그랩 자작과 그의 가족들의 머리.
세 명의 머리는 성곽의 깃대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바람에 머리칼을 흩날리고 있었는데, 어쩐지 그 모습이 기괴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것이 보이지 않았겠으나 베스테포는 란푸스의 십검(十劍) 중 일인,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였다.
“용모파기가 일치하는군. 그렇다곤 하나 우리가 그대들의 사정까지 이해할 필요가 있는가? 우리는 약속을 지켰고, 이렇게 군대를 이끌고 당도했다. 이에 대한 비용만 하더라도 상당히 나갈 것이다.”
1만이나 되는 군대를 출정시키는 데엔 시간도 시간이지만 이와 관련된 물자도 어마어마하게 소모된다.
식량을 제하더라도 무기를 비롯한 장비일체, 막사나 공성전을 대비한 공성추나 조립식, 또는 이동식 투석기, 그리고 전략탑 등의 특수병기 등.
이것들은 이동시키는 것만으로도 일반적인 영지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비용이 소모되는 것이다.
이렇게 단단히 마음을 먹고 온 이들에게 그냥 물러나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상황, 이것을 해결하는 것이 바로 비 아이언 외교대사의 일이자 능력이었다.
“저희도 그냥 물러나라는 얄팍한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평화적이면서도 서로에게 해가 되지 않는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그게 어떤 것인가?”
베스테포 백작은 비 아이언 외교대사에게 물음을 건넸고, 외교대사에게선 방안에서 연습했던 표정 중 하나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란푸스 왕국과 루드밀라, 정확히는 저희 바포 변경백의 교역이 트였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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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추천이 1300이 되어서 추가분이 올라옵니다.
그래서 오늘은 총 6편을 연재!...
힘들어요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