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9 사랑과 전쟁! =========================================================================
란푸스 3세가 불릿에게 기대를 하고 있었으나 불릿은 그의 유흥에 어울려주고픈 마음이 전혀 없었다.
“놈들의 군세가 일주일거리로 남았다합니다.”
레너드 남작의 보고에 불릿은 한숨을 쉬었다.
“1만이나 되는 병력이니 그 정도 시간은 걸릴 만도하지. 외교대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자신의 방에서 자료를 검토하고 있다 전해달라 하였습니다.”
“말로 구슬릴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은 수겠지.”
“그렇습니다, 각하.”
전쟁이란 잘 싸우거나 대승을 거두는 것보단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전쟁을 통해 이득을 보는 것은 언제나 상위계층뿐이었고, 고통 받는 것은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민들이었으니 말이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불릿은 내전을 통해 심신이 피로한 상태였으므로 더 이상 싸우는 것은 사양하고 팠다.
“삼광은 무얼 하고 있지?”
불릿의 물음에 레너드 남작은 침중하게 가라앉은 얼굴이 되어 느릿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는 지금 구속된 상태로 병영에 감금되어 있습니다.”
“으으음….”
삼광(三光) 셰실리코프, 그는 불릿이 성을 점령하자마자 바로 다음날 모습을 드러냈다.
셰실리코프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보따리를 불릿의 앞에 내려놓았는데, 그 안에는 원통스러운 표정의 게슐린 그랩 자작과 그의 아내, 그리고 후계자의 목까지 들어있었다.
그는 귀족의 예를 불릿에게 올리며 항복하겠다고 전해왔는데, 아직 처분을 결정하지 못한 관계로 그의 무력을 경계하기 위해 구속하여 병사들이 머물고 있는 병영에 넣어놓은 것이다.
“레너드 남작, 군인으로서가 아닌 자네 개인적인 사견을 들어보고 싶네만.”
“셰실리코프에 대해서 말씀이십니까?”
“그가 왜 이러한 행동을 했는지 그에 대해서 조언을 해보도록. 검사들끼리는 통하는 게 있을 거 아닌가?”
불릿을 제외하면 바포 변경백엔 정령사가 없다. 그런고로 외로울 수밖에 없는 자리가 불릿의 위치였는데, 그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죄다 검사만 우글거렸으니 그들만의 커뮤니티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의 말에 레너드 남작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답변을 내놓았다.
“검사로서 라기보다는, 한 지역의 영주로서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주로서라…, 자신의 군대를 출정시키지 않은 것과 관련된 것인가?”
“말씀드릴 내용에 포함된 부분입니다.”
영주는 책임이 막중하다. 한 지역의 경제는 물론이거니와 평화, 법률, 거주문제, 몬스터로부터 주민을 보호하고 중앙영지로의 세금납부와 주변의 파벌들로부터 영토를 지켜내기 위한 노력까지. 그 외에도 세세한 부분이 매우 많았으나 단순히 탱자탱자 놀 수 있는, 그런 자리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이전에 보고 드렸던 대로 그는 군을 출정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행동은 그랩 자작에게 붙었었는데, 이러한 과정엔 각하께서 자리를 비우셨던 기간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말인즉슨, 장기간 영주들을 묶어주는 중심측이 없었기에 혼란이 생길 것을 예상, 셰실리코프는 살아남기 위한 수단으로 2인자였던 그랩 자작에게 힘을 실어주었던 것이다.
다만, 너무 그에게만 의지하면 여차할 때 몸을 빼기 어려우므로 영지는 내버려두고 자기만 살짝 빠져나와 본인의 무력만을 빌려주었다.
“살아남기 위한 처사임은 알겠으나 현명하다곤 하지 못하겠군.”
“그때는 중앙영지군을 움직일 만한 지도자가 없었기에 사실상 2인자였던 그랩 자작이 최고군수였습니다. 게다가 개인소지인 붉은 장미 기사단이 있기에 무력을 휘두르는데 거침이 없었지요.”
비록 중앙영지를 제멋대로 다루진 못했으나 여차할 때엔 바포 변경백을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최고군수가 될 수 있었기에 8명의 영주들 중에서 가장 작위가 낮은 준남작인 셰실리코프로선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아래지방에 바스톤의 영주, 브룩 남작이 있었으나 그 또한 셰실리코프와 마찬가지로 마수의 숲을 지켜야했기에 병력을 움직이기에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결국 고립된 상태였던 셰실리코프는 박쥐가 될 수밖에 없었는데, 불릿의 입장에서 보자면 좋게 볼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삼광 셰실리코프는 조금의 노력이 더해지면 최상급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붉은 장미 기사단의 부단장이었던 레베다 아인그루츠를 능가할 수 있을 테지요.”
마나를 다룸에 있어 부족함이 있으나 그의 검술실력은 가히 일절이라 부를 만했다.
레너드 남작이 하고자하는 말은 셰실리코프를 살려주자는 쪽에 무게추를 기울이고 있단 뜻이리라.
조언과 부탁이 섞인 그의 발언에 불릿도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반란에 가담했으며 그랩 자작에게 힘을 실어주었기에 영토가 한층 혼란스러웠던 점이 있다. 그러나 그의 입장상 어쩔 수 없었던 면도 있었고, 무엇보다 그랩 자작의 목을 들고 왔으니….’
그리고 가장 크게 부각된 점은 셰실리코프가 무력을 빌려준다는 명목으로 그랩 자작에게 붙었었지만, 하나하나 꼬집어보면 심부름꾼과 비슷했다는 것을 보아야했다.
아마 셰실리코프가 입만을 놀린 게 아닌, 백성에게 칼을 들이댔다면 불릿은 가차 없이 그를 처형시켰을 것이다.
방향이 정해지자 불릿은 고개를 끄덕이며 레너드 남작에게 명령을 내렸다.
“삼광처럼 유능한 검사이자 영주를 찾기도 힘든 일이지. 셰실리코프마저 축출한다면 영토내의 무력이 낮아지는 바, 공이 있으나 죄 또한 있기에 둘을 상쇄해 없던 일로 하겠다.”
공죄상보(功罪相補). 쉽게 설명하자면 플러스마이너스 제로였다.
“…헤아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각하.”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은 불릿의 말에 뎁슨 레너드 남작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군단의 최고권력자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불릿이 내려준 직위, 연이어 축출되는 가신들을 보자면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긴장되기 마련이었다.
그의 모습을 쳐다보던 불릿은 깍지를 낀 손으로 턱을 괴며 낮게 읊조린다.
“반역에 연루된 만큼, 그의 세대에선 아무리 공을 쌓더라도 작위의 상승은 이룰 수 없을 것이며, 또 다시 이러한 사건이 발생했을 시 삼족을 멸하겠다.”
삼족을 멸한다, 이것은 매우 잔인한 처사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까지 죽일 수 있다는 소리였다.
물론 불릿이라면 어느 정도 참작하여 아이나 부녀자는 살려주기야 할 것이다.
거의 무보수로 부려먹기는 하겠지만.
“그가 최상급, 또는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더라고 말씀이십니까?”
라체나가 사실상 와해되고 붉은 장미 기사단의 중심인물들이 전멸한 이상, 바포 변경백에서 가장 재능 있는 인물은 삼광 셰실리코프였다.
벤젼스와 레너드 남작도 소드익스퍼트 상급이었으나 이 두 명은 마나에 비해 검술실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졌다.
익스퍼트는 깨달음의 영역, 단순히 마나만 많다고 하여 벽을 깨부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레너드 남작의 말에 불릿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다른 것도 아니고 반역이니까. 선례를 남기면 또 다시 박쥐처럼 행동할지 누가 아는가?”
결국 셰실리코프는 자신의 영지는 평화를 지킬 수 있었으나 입신출세의 길은 막혀버렸다.
“…그렇군요.”
“이러한 처벌을 받았다하여 본인에게 맡겨진 임무를 게을리 했다간 크게 치도곤을 당할 것이라는 점도 명심하라 일러두게.”
“그리 전하겠습니다.”
“병사와 주민들을 잘 다독이도록. 내전을 겪었기에 더욱 힘들 것이야.”
“그 또한 주의하겠습니다.”
전달하고자하는 사항을 모두 전한 불릿은 의자에 기대며 그에게 손짓을 했다.
“나가보도록, 군단장.”
군대용어가 나오자 레너드 남작은 허리를 곧추세우며 ‘탁’ 소리가 나게 주먹을 심장에 가져다댔다.
“충성!”
* * *
란푸스의 군세가 오기까지 1주일, 그 전까지는 영지를 정리하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게슐린 그랩 자작이 죽음으로써 그랩 자작령의 병력들은 자연스럽게 불릿의 휘하로 흡수되었는데, 중앙영지군, 그러니까 지금의 군단과는 앙금이 남은 상태이기에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놓았다.
군단이 중앙영지로 복귀하지 못한 이유는 역시나 란푸스를 대비함인데, 외교를 시도할 셈이었으나 어찌될지 결과를 장담할 순 없었기에 일이 끝날 때까지는 주둔하고 있어야 했다.
그 외에는 일부 일자리를 상실한 주민들을 위해 성벽보수와 전후복구 등에 관한 일감을 주었으며, 대부분의 행정처리는 남부지방의 영지에서 인재를 차출하여 지원받았다.
지시를 끝마치고 나니 불릿은 그저 결제만 해주면 되는 상황, 그는 올리비아와 모처럼 만의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역시 라벤더가 향이 좋아.”
“…맛도 없는 걸 잘도 마시는군.”
올리비아가 차의 향을 느끼며 코를 벌름거리자 불릿은 인상을 쓰며 하녀에게 말을 걸었다.
“본인은 홍차로 주도록.”
“예, 대영주님.”
“꿀 말고 설탕으로 세 스푼, 우유도 넣어서.”
“그리하겠나이다.”
그랩 자작의 손에서 벗어난 하녀들은 잘생기고 젊은, 그러면서도 얌전한 불릿의 요구에 언제나 열성적으로 행동했다.
왕실에서 일하는 하녀들의 경우 귀족가의 자제들이 품위를 쌓기 위해 향하는 곳이었으나 일반적인 귀족가의 경우는 평민들이 대부분이었는데, 평민이라 하여 함부로 대하지 않는 불릿은 어딜 가나 인기만점이었던 것이다.
“아가씨, 한잔 더 드릴까요?”
불릿의 곁에 서있는 하녀와는 달리, 올리비아는 언제나 전속하녀인 루나만을 대동했다.
루나가 편한 이유도 있었고, 올리비아는 불릿을 지키는 비밀호위대인 루나가 있는 것이 한결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루나가 말하는 아가씨란 올리비아가 아닌 다른 이를 의미하였으니…
- 나도 불릿이 먹는 걸로 줘.
수첩에 긁적긁적 적어낸 문장을 읽어낸 루나가 미소지를 지으며 불릿의 곁에 있는 하녀에게로 향했다.
“저희 아가씨께서 대영주님의 것을 원하시는데, 어떻게 된 배합인지 알려주심이….”
“대영주님께서 주문하신 것은 홍차이오인데, 배합은….”
갑자기 하녀들만의 대화가 시작되며 약간 알기 어려워지자 올리비아는 거기서 신경을 끄고 불릿에게 말을 걸었다.
“영지는 잘 돌아가?”
“그냥 그렇소. 좋지도, 나쁘지도. 그래도 이런 속도라면 10년 내로 복구할 수 있을 것 같소.”
일반적인 피해라면 돈으로 해결할 수 있겠지만 기사단을 비롯한 핵심인물들의 사망은 뼈아픈 손실이었다.
체계적인 군사교육과 예절교육을 받은 기사를 배양하긴 위해선 돈도 돈이지만 재능 있는 자를 찾아야 했는데, 대부분이 귀족가에서 선별하는지라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평민들 중에서도 선별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다간 기존 귀족들이 크게 반발할 것이다.
개혁이라는 것은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조금씩 바꾸는 것이지 한 번에 짜잔! 하면서 이루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뭐가 그리 오래 걸려?”
올리비아가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대자 불릿은 완성된 홍차를 홀짝이며 대답해주었다.
“행정관의 경우 7급까지는 평민들을 등용할 수 있으나 고위급 장관과 차관의 경우 역사 깊은 가문에서 배출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후루룩- 마시는 홍차에서 달콤한 향이 올라오자 라벤더의 머리 아픈 냄새에 구겨졌던 불릿의 얼굴도 원상태로 돌아왔다.
“근데 말투는 또 왜 그래? 예전 생각나게.”
불릿의 말투가 하오체를 사용했다, 반말을 했다 왔다갔다하니 올리비아가 중얼거렸다.
“뭐, 편한 말투는 둘만 있을 때면 족하지 않겠소? 후룩-.”
“그, 그야 뭐어…, 히힛.”
살짝 입을 가리며 웃는 올리비아의 미소가 눈부셨는지 루나가 그러한 제스쳐를 취하며 상황극을 연출했다.
“아악! 올리비아 아가씨가 너무 눈부셔요! 이건 대영주님이라고 반할 수밖에 없는 미소!”
그녀의 행동에 부끄러워하는 것은 당사자가 아닌 바로 올리비아였다.
발갛게 달아오른 올리비아는 높은 고음을 내며 소리쳤다.
“하지 마! 하지 말라고! 민망하게, 진짜!”
찰싹, 찰싹!
“악! 아가씨! 작은아씨에게 드릴 홍차가 쏟아져욧!”
“애초에 흙덩이에겐 차를 왜 주는 거야! 먹지도 못하는 애한테!”
불릿에게 배정된 하녀에게서 알아낸 조합법으로 홍차를 만들어낸 루나가 올리비아에게 등짝을 맞으면서도 흙덩이의 조그마한 손에 찻잔을 쥐어주었다.
- 후루룩…
그러나 올리비아의 말과는 다르게 흙덩이는 잘도 음미하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악, 악! 아, 아가씨! 잘만 드시는데 왜 그러세요?! 보세요!”
“이익….”
루나의 말에 올리비아가 그녀의 허리를 잡고서 바싹 잡아당겼다.
‘너어, 도대체 누구 편이야?’
올리비아의 속삭임에 루나는 허리가 아픈지 그곳을 매만지면서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그거야 재밌는 편이죠.’
비밀호위대원이자 하녀인 루나, 그녀는 불릿을 둘러싼 상황이 너무도 재밌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