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4 사랑과 전쟁! =========================================================================
다음날이 되자 흙덩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불릿의 소환에 응하였다.
스르륵…
“잘 계셨는가, 흙덩이여?”
- ……
소환된 흙덩이는 별다른 말이 없었는데, 얼굴도 무표정인 것이 처음 불릿에 의해 세상으로 나왔을 때를 연상시켰다.
불릿은 시간이 흐르면 흙덩이도 차차 이해를 해줄 것이라 믿으며 흙덩이의 손을 맞잡았는데, 흙덩이는 예의 애달픈 눈빛도 아닌, 그저 흐리멍덩한 시선으로 그의 정령력을 소모할 뿐이었다.
웅웅웅-
* * *
“애송이놈이 뭘 하는 것일까? 짐작이 되나?”
게슐린 그랩 자작은 이전에 보상 운운하던 붉은 장미 기사단의 세 명과 성곽에 같이 있었는데, 저 멀리서부터 전해져오는 마나의 유동이 못내 신경 쓰여 아침부터 이렇게 중앙영지의 군단이 놓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송구하오나, 놈들의 경계가 튼튼해 접근할 수 없었나이다. …마이 로드.”
“그러한가, 빌.”
“…….”
이에 빌 해그먼은 대답대신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는 제스쳐를 물씬 풍겨주었다.
“빌이 잠입할 수 없다니, 어지간히도 단단해졌나보군.”
빌 해그먼은 음침하고 조용한 사람이다. 붉은 장미 기사단의 차석을 맡고 있지만 너무도 조용한 탓에 활기마저 띠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곁에 다가오더라도 모르는 경우가 많아 사람들은 종종 화들짝 놀라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특징 때문인지 그랩 자작은 그에게 은밀한 부탁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았다.
적어도 대외로 알려지기론 그렇다.
“각하, 이렇게 체외로, 그러면서 대량의 마나를 풍길 수 있는 것은 한명 밖에 없지 않사옵니까?”
“…그렇지. 애송이놈은 정령사였었지.”
“아마 그들이 행하고 있는 것도 이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조심히 추측해 봅니다.”
붉은 장미 기사단의 부단장인 레베다 아인그루츠의 발언에 자작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확실히 마법사가 없는 바포 변경백의 특징을 생각하면 전쟁이 발발한 성의 바로 인근에서 대규모의 마나유동이 감지됐다면, 그것은 중급 정령사로 알려진 불릿 폰 바포 백작밖에는 없는 것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마탑은 어디까지나 중립적인 인물들이기에 지부가 있어도 전쟁에 동원할 수는 없다.
함부로 지부를 핍박했다간 대륙 모든 마법사들에게 보복을 당할 테니 말이다.
그래서 마법사가 없다는 말은 마탑출신이 아닌 마법사를 뜻했다.
“허나 놈들에게서 움직임이 관측되지 않는데, 그럼 이것은 어찌 설명할 텐가?”
확실히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의 마나가 감지되었으나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가 중요했다.
이에 대한 답으로는 아인그루츠도 내놓을 수 없는지 고개를 살짝 저은 후 사과의 말을 건넸다.
“그것에 대해선 저희가 알아낼 방법이 없으나, 적어도 이 상황을 방치할 수는 아니 된 줄로 아뢰옵니다.”
적이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을 방해하거나 와해시켜야함이 정석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현재 수성을 하고 있는 입장. 접근을 불허하는 군단을 상대로 대체 무얼 해야 한단 말인가?
“이래저래 우린 기다릴 수밖에 없겠군.”
자신이 선호하는 방법인 호쾌한 무력을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불쾌했는지 ‘크흠’거리며 헛기침을 뱉는 그랩 자작에게 그의 곁을 지키는 삼인방도 저 멀리, 불릿이 위치한 진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다.”
그랩 자작의 독백이 무얼 의미하는 것인지 삼인방도 아는 듯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에 동조했다.
그들이 기다리는 것이 무엇이건 간에 자신들에게도 출혈이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 * *
회장 대용으로 사용하는 거대한 막사, 그곳에 모인 간부들은 하나같이 열성적으로 토론하고 있었다.
“글쎄 몇 번을 말해야 안단 말인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다, 용기!”
“이 사람이 말하는 것하고는, 그럼 우리가 겁쟁이란 뜻인가?”
“그 소리가 아니고….”
“놈들에게 시간을 줘선 아니 되네!”
“하지만 각하께오서….”
웅성웅성-
시끌벅적한 막사 안의 풍경에서 불릿은 가만히 그들을 지켜만 보고 있었는데, 그가 이들을 말리지 않는 것에는 자신에게도 이유가 있었다.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 성격들도 급하군.’
그러나 자신이 무얼 하는지는 흙덩이를 제외하면 아무도 몰랐기에 적을 눈앞에 둔 수뇌부에게 있어 답답한 마음이 안 생길 수가 없던 노릇이다.
“자, 자기야, 너무 시끄러운 것 같은데….”
불릿의 옆에는 언제 생긴 것인지 좌석이 하나 더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곳엔 올리비아가 다소곳하게 앉은 상태로 그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이에 불릿이 응답하지도 않았거늘, 순식간에 조용해지는 회장.
“…….”
“…….”
“어, 어라? 어라라?”
자신이 말하자마자 소란스러움이 종식되자 올리비아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간부들은 토론을 하던 것도 멈추고서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는데, 가뜩이나 커다란 눈이 놀란 마음에 더욱 커져있자 눈에다 은하수를 박은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간부들의 얼굴엔 아까의 찌푸림 대신에 설핏, 미소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흠흠, 너무 올리비아만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그러다 닳겠군.”
“커허험!”
“으흠, 으흠.”
“아름다우시니 볼 수도 있지요, 안 그렇습니까?”
다들 헛기침을 뱉으며 시선을 돌리는 가운데 늙은 노장, 그의 곁에서 수행원역을 맡고 있던 크레파토스가 입을 열었다.
허리를 숙이며 말하면서도 척추가 아픈 기색이 없는 것이 그가 평소에도 얼마나 단련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숨길 생각은 없네만, 이렇게 시선이 쏠리면 그녀가 본인에게 말을 걸지 못하잖은가. 겨우 ‘자기’라는 말에 반응하다니, 자네들도 익숙해지려면 멀었군.”
간부들의 시선이 올리비아에게로 일제히 향한 이유, 그것은 이제 안주인 역할을 하기 시작한 올리비아의 호칭 때문이었다.
처가 아닌 첩이라면 불릿의 위치상 결코 내뱉을 수 없는 단어인 ‘자기’라는 말 때문에 그들 모두가 인식한 것이리라.
“우으으….”
“뭘 그리 부끄러워하는 것인지, 험.”
스윽-.
“어맛.”
그러면서 살며시 손을 잡아주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고 있던 올리비아가 화들짝 놀란다.
여장부라곤 해도 연애는 처음인 올리비아였기에 이런 사소한 접촉에도 하나하나 반응하곤 했다.
이런 반응을 불릿은 살짝 즐기는 상태였으니, 자신도 처음인 만큼 때때로 보는 이가 민망한 광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전형적인 연애초짜의 실수.
어쩐지 모두가 흐뭇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흙덩이는 말없이, 묵묵하게 한걸음 떨어져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본인의 애정사에 대한 관심은 이쯤에서 접어두고, 자네들의 걱정은 잘 알고 있네.”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의도도 있었기에 농을 건넸던 불릿이었는데, 그게 효과가 있던 것인지 과열되었던 회장은 한층 식어져 있었다.
“본인도 모두와 공유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전략이란 아는 자가 적을수록 효과적임을 자네들도 아리라 생각한다.”
불릿의 말에 간부들이 살짝 고개를 까닥였다. 모두에게 비밀로 하는 것은 지나친 면이 있었으나, 확실히 이렇게 숨기고 있다면 작전을 실행할 때 적의 방해나 개인적 사견이 들어가지 않아 효과적인 전술을 실행할 수 있었다.
어느 작전이나 마찬가지로 적에게 알려진 것만큼 쓸모없는 것도 없었으니 말이다.
- ……
스윽.
“흠, 말해보도록.”
“감사합니다, 대영주님. 그럼….”
불릿의 지목에 비 아이언 외교대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어떤 소식을 듣고서 중앙영지에서 이곳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는데, 모두가 궁금해 하던 와중에 발언권을 획득했으니 그 기대가 남달랐다.
“제가 판단하기에 대영주님께서 진격을 서두르는 것이 좋다고 여겨집니다.”
“이유는 무엇인가?”
외교대사가 전투를 코앞에 둔 전선까지 달려와서 알리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밝혀지려는 순간이었기에 간부들은 숨을 죽이고서 얘기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최근 란푸스 왕국의 국경지대에서 대대적인 군사적 움직임이 포착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받았습니다.”
“…흠, 본인은 밴으로부터 그런 정보를 듣지 못했네만, 자네는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것이지?”
“그것은….”
자칫 잘못하면 자신이 간자로 몰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나 비 아이언 외교대사는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베니스 남작의 데 리치 상단을 통해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상인들은 적대국이라 할지라도 인맥을 갖추고 있으니 말입니다.”
베니스 남작은 바포 변경백의 재정대신임과 동시에 한 지역의 영주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자체적인 상단을 갖추고 있어 그의 재능이 뛰어남을 알려주고 있었는데, 그런 베니스 남작에게서 이번에도 도움을 받자 불릿도 이해가 갔다.
“그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거늘, 부족한 것이 없다보니 본인이 해줄 수 있는 게 없구나.”
“베니스 남작도 대영주님의 말에 기뻐할 것이옵니다.”
자작의 작위를 내릴 수도 있었으나 그것은 언제나 신중하게 선택해야하는 부분이었다.
작위를 내리는 것은 세력구도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으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그를 보증한다는 뜻이었기에 결코 쉬이 판단할 만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만 해도 대대로 이어져오던 관계가 한순간에 무너지지 않았느냐 이거다.
물론 모든 귀족이 대대로 바포가에 충성을 바친 것은 아니었고, 대부분의 귀족은 역사가 100년도 채 되지 않았다.
게슐린 그랩 자작만 하더라도 외부에서 들어온 인물이었으니 한번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었다.
“자네의 말대로라면 본인의 생각으론 란푸스 왕국과 그랩 자작이 결탁한 것으로 보이는데, 맞는가?”
“허어…. 대영주님의 지혜엔 따라가기가 버겁군요. 정보부의 지원에 따라 분석한 결과, 그렇다고 추측됩니다.”
웅성웅성.
“아무리 그랩 자작이라고 하나 외세와 결탁하다니, 진정 나라를 팔아먹는구나, 허허.”
어이가 없다는 불릿의 웃음소리에 비 아이언 외교대사를 비롯한 간부들이 고개를 숙였다.
최전방에 위치한 그랩 자작이 란푸스 왕국의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었고, 베니스 남작을 통해 알아낸 사실을 그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게슐린 그랩 자작은 불릿에 의해 루드밀라의 내부로 들어가는 길이 막힌 상태였기에 필요한 물자를 란푸스로부터 수입해야했다.
그런 상황에서 군사적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했다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 밖에 되지 않았다.
“정황을 보면 란푸스 왕국에서 개입할 것은 명명백백하다. 그곳과 이곳의 거리를 생각하면 아무리 길어도 1주일 안에는 본인의 영토에 발을 들이밀 것 같군.”
“그렇습니다, 각하! 이제 나설 때가 된 것이옵니다!”
“몸을 웅크릴 때는 지났다고 여겨지는 바입니다!”
“각하!”
“각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간부들은 서로 불안했는지 앞 다투어 불릿에게 말을 하였는데, 그만큼 지금의 시국이 촉박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쿡쿡.
옆에서 찌르는 감촉이 느껴지자 고개를 돌리니 그곳엔 흙덩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어제 이후로 줄곧 말이 없던 흙덩이가 먼저 다가왔다는 사실에 기쁘면서도 그는 미안한 감정이 들었으나, 지금은 그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무슨 일이신가, 흙덩이여?”
불릿의 물음에 흙덩이는 무표정을 고수하면서도 약간 주저하는 기색을 보였는데, 그러다 천천히 입을 떼며 말을 시작했다.
- …불릿이 부탁한 일, 내일이면 끝낼 수 있을 거야. 불릿이 힘들 수도 있겠지만, 나도 힘내볼게. 그러니까….
마지막 말은 잊기가 힘들었는지 애써 감정을 드러내려하지 않았던 흙덩이가 결국 자신이 쌓아올린 감정의 벽을 허물어뜨리며 내뱉고야 말았다.
- ……사랑하지 말라는 말은, 하지 말아줘.
기어코 터져 나온 소녀의 말에 불릿은 가슴에 대못이 꽂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