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2 사랑과 전쟁! =========================================================================
와장창!
“씨익, 씨익!”
성난 숨결에 주변의 모두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상태였다.
찻잔이고 보고서고 가리지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지던 게슐린 그랩 자작. 그는 숨을 가라앉히며 의자에 주저앉더니 태티스 남작을 불렀다.
털썩!
“네놈이 주관한 일일 텐데, 결과가 형편없군.”
“죄, 죄송합니다, 각하! 부디 자비를!”
원인분석보다도 용서를 먼저 비는 태티스 남작에게 그랩 자작이 물음을 던졌다.
“용서? 용서라, 내게 자비를 바란단 말이지.”
“그, 그래봤자 용병 하나가 당했을 뿐입니다. 으으….”
자신이 그랩 자작의 밑에서 가장 높은 작위인 남작이거늘, 그의 대우는 그리 좋지 못했다.
태티스 남작은 영지를 가졌던 영주였으나 불릿이 결사대의 일로 자리를 비운 사이, 그랩 자작에게 의탁할 생각으로 영지를 통째로 넘겨버렸다.
이 어리석은 선택엔 그가 많은 수의 사람을 관리해야하는 영지를 감당하기 버거워함과 동시에 성격 자체가 찌질했기 때문이다.
그저 배부르고 등따시면 만족하는, 전형적인 노예근성이 바로 태티스 남작의 실체였다.
그런 그에게 그랩 자작이 찻접시를 던졌다.
퍽!
“끄으윽….”
주륵.
찻접시가 깨지질 않자 그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져 이마가 찢어졌고, 찻접시는 바닥에 떨어져서야 깨질 수 있었다.
쩡!
“살려는 주지. 그러나 앞으로 내게서 무언가를 바란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각하! 만세, 만세, 만만세!”
“닥치고 내 눈앞에서 꺼져.”
“예, 옙!”
굽실거리던 태티스 남작이 후다닥 회의실에서 사라졌다.
비로소 자리에 앉으며 한숨을 쉬자 다른 수하들도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이걸로 저 멍청한 얼간이는 자격도, 발언권도 박탈당했다.”
“…….”
“…….”
싸늘한 그랩 자작의 말에 모두가 다시 침을 삼키며 긴장하는 가운데, 그는 한줄기 미소를 띠며 팔에 고개를 괴었다.
“자, 그렇다면 그 자리는 누가 차지할 것인가?”
그의 말에 고개를 숙이거나 시선을 회피하던 수하들 모두가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였으나 명목상으로는 그랩 자작의 오른팔이었던 태티스 남작이 실각되었다.
이 말인즉슨, 또 다른 인물이 그 자리에 올라설 수 있으며 잘만 하면 남작위를 획득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본인이 생각하기론 그간의 공로를 생각해 붉은 장미 기사단에 먼저 기회를 주는 것이 옳다고 여겨지는 바이다.”
잔뜩 기대하고 있던 수하들은 그의 말에 실망감을 드러냈으나, 곧바로 얼굴을 수습하며 실망한 티를 지웠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붉은 장미 기사단은 그랩 자작의 최대 강점인 무력을 대표하는 집단, 그동안 게슐린 그랩 자작의 요구에 따라 움직이느라 개고생을 했으니 이제 보상을 받을 때도 되었다.
“흠, 그렇다고 모두에게 기회를 줄 순 없으니 공로가 가장 큰 세 명을 호명하겠다.”
태티스 남작이 사라지고 나니까 오히려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그러한 상태에서 그랩 자작이 목을 가다듬은 다음 근엄하게 외쳤다.
“자랑스러운 붉은 장미 기사단의 부단장, 그 이름도 영광스런 레베다 아인그루츠.”
이에 호명을 받은 기사단의 부단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 각하.”
그는 깔끔한 정복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시종일간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어 심리상태를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호명되었다는 점에서 그랩 자작에게 보여주기 위해 기뻐해야함이 마땅하나, 그는 굳이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점에서 그랩 자작은 듬직함을 느꼈으니, 과연 그렇다는 것인지 절로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워 했다.
“다음으로 우리 붉은 장미 기사단에서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든든한 수석기사, 보루너.”
“부르셨습니까, 각하아!”
드르륵!
이번에는 부단장과는 반대로 무척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며 자리에서 씩씩하게 일어서는 거한의 장한.
마치 ‘힘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표현하는 듯한 몸을 가지고 있었는데, 근육으로 똘똘 뭉친 것이 금방이라도 옷이 터질 듯했다.
“…킁.”
어쩐지 조금 못마땅한 기색이 얼핏 드러났으나 순식간에 근엄한 표정으로 돌아오며 다음 지명자를 호명했다.
“그리고 차석기사, 빌 해그먼.”
이번에 호명당한 이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도 모르게 아주 조용히, 그림자처럼 은밀하게 스르르 일어섰다.
“…친애하는 나의 로드시여.”
“그래, 잘 왔도다.”
빌 해그먼은 몸이 호리호리한 인물이었는데, 생긴 것처럼 말수도 적고 행동까지 얌전해서 수석기사인 보루너에 비해 빈약해 보였다.
그러나 차석인 데에는 이유가 있을지니, 게슐린 그랩 자작은 그를 흡족하게 본 후 말을 이어갔다.
“이처럼 보기만 해도 든든한 인물들이 바로 본인의 앞길을 막아서는 적을 쳐부수는 붉은 장미 기사단 최고의 인물들이지.”
짝짝짝짝짝-
마치 자랑을 하듯 발언하는 그랩 자작의 말에 호명된 자들을 제외한 모든 수하들이 일제박수를 시작했다.
자랑을 하는 것 같은 게 아니라 자랑을 하는 거였기에 그렇다.
그는 무력을 사랑하고, 수틀리면 폭력을 가하는 장미 기사단의 단장 게슐린 그랩 자작이었으니 말이다.
“후후후, 멍청한 애송이놈은 우리가 궁지에 몰렸다고 판단할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각하의 혜안에 이 슈르츠바르겐, 감탄하였나이다!”
“허허허, 그만들 하시게.”
무언가 숨겨진 음모가 있는 듯, 그들의 대화는 그다지 어두운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회의시작 때를 제외하면 화난 기색도 없었는데, 화를 낸 대상이 축출하려고 마음먹었던 인물이라서 그런지 오히려 ‘노렸다’는 느낌마저 주고 있었다.
모두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려는 이때, 곰곰이 생각에 빠졌던 아인그루츠가 굳게 닫혔던 입을 떼었다.
“각하, 아무래도 그 용병놈이 수상합니다.”
“어떤 점이 말인가?”
둘의 대화가 시작되자 아부를 하던 이들은 순식간에 가라앉았고, 호명된 나머지 두 명도 조용히 경청을 했다.
“분명 A급 용병 중에 귀신이란 별칭의 아부토라는 용병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아부토는 전쟁용병 중에서도 대인전문, 잔혹함으로 유명한 것이지 저희가 보았던 그러한 폭발을 일으킬 정도의 실력자는 아닙니다.”
아인그루츠의 말에 삼광(三光) 셰실리코프가 조용히 일어섰다.
“맞습니다, 각하. 마법이나 정령술이 아닌, 검술로 그러한 폭발을 만들어내려면 소드 붐을 시전해야 하는데, 그것만큼 비효율 적이고 느린 기술은 없지 않습니까?”
셰실리코프가 아인그루츠의 발언에 힘을 보태자 아인그루츠는 살짝 그에게 고개를 숙여보였고, 셰실리코프도 이를 받아주었다.
그들의 말에 그랩 자작의 수하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속닥이기 시작했는데, 일기토에서 소드 붐을 시전할 수 있으려면 상대가 멍청하게 가만히 있거나, 아니면 실력 차이가 그만큼 많이 나야했다.
하지만 어제 그들이 성에서 지켜보았던 전투는 그렇게 느리지도, 하품이 나올 정도로 가벼운 대결이 아니었다.
“덧붙여 말하자면 검은 기본적으로 베고 찌르기에 특화된 무기라서 그 정도 폭발을 일으키려면 적어도 최상급의 끝자락, 또는 마스터의 단계에서 가능합니다.”
“이 점에 대해선 제가 보증할 수 있습니다, 각하.”
“으음….”
이번엔 아인그루츠가 셰실리코프의 말을 받아주자 게슐린 그랩 자작은 신음성을 터트렸다.
‘가만히 넘어갈 수는 없겠군.’
그들에게 통할만큼의 적당한 미끼를 던져줘야겠다 생각한 그랩 자작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더니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태티스 남작이 헛된 마음을 품은 모양이군.”
뜬금없이 회의실에서 쫓겨난 태티스 남작이 튀어나오자 그들은 의아해 했으나, 그랩 자작의 말이 이어졌기에 경청할 수밖에 없었다.
“다들 알다시피 용병나부랭이는 태티스 남작이 고용했다. 이에 대해선 거짓하나 없는 사실이지.”
“…그렇습니다.”
“그렇지요.”
그 누구보다 삼광 셰실리코프가 잘 아는 사실이었기에 굳이 강조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이런 발언을 통해 대화의 주제는 다른 쪽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용병은 죽었다, 그렇다면 수상한 용병을 고용한 당사자에게 책임을 물어야겠지.”
용병길드에서도 모르면 고용한 사람이 책임자이지 않겠는가?
그렇게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하는 그랩 자작을 둘은 그저 바라만 보았다.
“계집이야 뭐, 좋은 장비로 도배를 했겠지. 애송이놈의 정력을 빼먹듯이 마정석도 말이야.”
이미 불릿에 의해 새로이 무장한 사실은 그랩 자작에게도 전해진 바이다.
마정석을 흡수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가문의 비술이 적용된 것만 빼면 돈이 있는 기사들은 누구나 한번쯤은 해본 것이니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이 모르는 것은 딱 하나, 마의 꽃방울을 올리비아가 소지하고 있단 사실이었다.
‘팔아먹어야 하는데, 아깝게 되었군.’
이미 본전을 뽑을 대로 써먹은 마의 꽃방울이었으나 그랩 자작은 불릿이 소유하게 된 것마저도 아깝게 여기고 있었다.
그것의 진정한 능력은 알지도 못한 채.
“어차피 우리의 목적은 일기토 따위가 아니었으니 이 얘기는 그만하도록 하지.”
“…….”
“알겠습니다, 각하.”
셰실리코프는 말이 없었고, 아인그루츠는 말을 끝마치고 곧바로 자리에 착석했다.
아인그루츠가 착석하자 셰실리코프도 자신의 자리에 앉았는데, 그 이후로 그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랩 자작도 별달리 그를 신경 쓰지 않았는데, 셰실리코프가 아무리 유능한 인물이라 하더라도 별다른 활약상이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멀어진 것이다.
그저 셰실리코프를 태티스 남작의 대용품정도로 생각하는 그랩 자작이었기에 그랬을 수도 있지만.
‘쯧, 융통성 없기는. 저러니 남작으로 올라설 수가 없는 것이지.’
번번이 태클을 거는 셰실리코프와 아인그루츠. 그나마 아인그루츠는 자신이 아끼는 붉은 장미 기사단의 부단장이기라도 하지, 셰실리코프는 자신의 성에서 먼 곳에 위치한 마수의 숲 인근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직도 그가 왜 자신에게 붙은 것인지 미지수였다.
‘배신할 것 같지도 않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않는 것이 영 못미더웠다. 지금만 해도 병력은 별별 변명을 대면서 영지에 놔두고 오지 않았는가?
마수의 숲에서 대기하며 측면을 대비해야 한다, 바스톤을 경계해야한다는 둥, 맞는 말이긴 해서 내버려뒀지만 마음에 들진 않았다.
“그쪽에선 준비가 됐다는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정확하지 않았으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자리를 박차며 일어서는 이가 있었다.
“옛, ‘백작’각하. 그들은 연락만 받으면 곧바로 실행할 수 있다 전해달라 하였습니다.”
“드디어 준비됐단 말이지….”
“언제든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각하.”
“수고했어, 외교부.”
“감사합니다, 각하!”
불릿의 바포 변경백은 지리적 특성상 외교관이 곳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국경지대를 책임지고 있어서도 그렇지만, 국내가 춘추전국시대로 돌입한 가운데 사방이 적이었기에 불릿의 통치아래 그 수를 늘린 것도 있었다.
그런데 이들이 말하는 ‘그들’과 ‘준비’란 무엇일까?
이에 대해선 더 이상의 언급이 없었고, 회의는 이것으로 종료하게 되었다.
“모두들 ‘연기’하느라 수고들 했네. 이제 미끼가 걸려들길 차분히 기다려야겠지.”
그러면서 의자에 몸을 묻어가던 게슐린 그랩 자작은 뭔가 떠올랐는지 마저 입을 떼었다.
“아, 외교부는 그들에게 신속하게 연락할 수 있도록 해놓아야 할 것이야.”
“물론입니다, 각하!”
“그래야지, 그래.”
푸우욱…
그는 자신의 왕좌에 몸을 묻으며 같은 말을 되뇌었다.
“그래야 할 것이야…….”
몸을 푹 파묻으며 그랩 자작이 눈을 감자 수하들은 신속히 회의실을 빠져나갔고, 그들과는 반대로 연이어 들어오는 여인들이 회의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끼이익…
쿠웅-.
============================ 작품 후기 ============================
토요일은 점심 낮 12시와 저녁 6시, 밤 12시 10분 총 3번의 연재가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추천과 선작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