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9 사랑과 전쟁! =========================================================================
게슐린 그랩 자작의 성 앞에 진지를 차린 지 5일째, 아직도 꽃샘추위는 풀리지 않았으나 대낮이라는 시간대라서 그런지 햇살을 받아 따스함이 추위 속에 묻어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따스하다고 할 수 있는 오후 3시를 향하는 시간, 일기토까지 1시간이 남은 상황 속에서 불릿의 입장에서 보자면 반역자들이 내세운 일기토의 상대를 드디어 마주볼 수 있었다.
“저놈이 그놈인가?”
불릿의 물음에 제노스의 아들, 제노시스가 답변을 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각하.”
제노시스도 용병에 대한 정보가 없기에 대략적인 추측만 한 것이었으나, 마법과 더불어 검술도 연마한 기사의 시선이었기에 불릿이 보는 것과는 다른 점도 발견할 수 있었다.
제노시스가 발견한 용병의 특징은 바로….
“놈에게서 쥐새끼의 기운이 흐르는군.”
“…각하?”
“역시 쥐새끼였어, 쥐새끼….”
불릿이 상스러운 말을 계속해서 입에 담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제노시스였으나, 그가 욕을 하고자 그런 말을 입에 담은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간악한지고….’
이제야 자신의 영토가 어떤 이유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지 제대로 사태파악이 되는 불릿이었다.
그동안은 어렴풋한, 안개가 끼인 느낌을 받았던 쥐새끼의 존재.
마의 꽃방울에서 힌트를 받는 기분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정석을 이용한 아티펙트, 확실한 증거로 채택될 수 없던 것이다.
“올리비아가 걱정이로군.”
저런 사이한 기운을 흘리는 놈에게서 쥐새끼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니, 필시 보통 놈은 아닐 것이다.
자연히 대전 상대인 올리비아에게로 걱정이 쏠렸는데, 불릿이 알기론 그녀의 경지는 아직 소드익스퍼트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깨달음이 부족하여 그렇게 측정된 것이지만, 이 마나로 오러를 만들어내 검에 덧씌울 수 있느냐, 없느냐가 크나큰 차이를 만들어냈다.
정도에 차이는 있어도 오러소드는 가르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알려진 검사들의 비기였던 것이다.
“…본 천인장도 우려되옵니다, 각하.”
올리비아의 검술실력이야 크레파토스를 통해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레이디(lady)라는 사실 또한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었다.
레이디는 보호받고 지켜야 되는 존재! 그것이 기사들의 일반적인 관념이었던 것이다.
그런 불릿의 걱정이 전해졌는지 저 멀리서 백색갑옷을 차려입은 채로 대기하던 올리비아가 불릿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그녀의 미모를 갑옷이 가려주진 못한 듯, 그저 얼굴만 드러났을 뿐인데도 시커먼 남정네들 사이에서 빛나고 있었다.
“안 되겠다, 잠시 올리비아를 이리로 불러들이도록.”
“선수를…교체하겠습니까?”
출전 대기상태인 기사를 불러들인다는 것은 교체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기에 제노시스가 묻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녀의 마음을 뭉갤 생각은 없다.”
마음, 불릿은 올리비아의 선택을 마음이라고 발언했다. 그녀가 과거의 상처를 딛고 미래로 나아가려는 것을 그리 부르며 뭉개지 않는다는, 존중하는 모습을 보인 것.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막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올리비아를 본인의 막사로 데려오도록. 할 얘기가 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각하.”
* * *
“……불렀어?”
철그럭, 철그럭-.
올리비아가 금속음을 내며 막사로 들어서자 침대에 앉아있던 불릿이 손짓을 했다.
“이리로 와서 앉아.”
“응….”
웬일로 반말을 하는 게, 무언가 중요하며 개인적은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흙덩이도 없는 게, 둘만을 위한 무언가를 준비한 것 같았기에 올리비아는 내심 기대를 하며 옆구리에 끼고 있던 헬름을 탁자에 내려놓고선 그에게로 다가갔다.
철걱, 철그럭-.
“이건 잠시 벗도록 하지.”
“으, 응?”
“팔을 이리 주도록.”
“어어…….”
철걱, 찰칵-
찰그락, 철커덕-.
이리저리 돌리고 매듭을 풀며 그녀의 갑옷을 분리시킨 그는 올리비아가 방한을 위한 누비옷을 입은 상태가 되자 그것마저 벗겨버렸다.
“어맛! 이 안에는 속옷밖에…!”
“벗어, 명령이야.”
처음 보는 불릿의 강압적인 말에 부끄러워하면서도 옷을 벗기 시작하는 올리비아.
불릿의 막사라고 해서 따듯한 것은 아니었으나,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올리비아에게 있어 이곳만큼 더운 곳은 없었다.
화아악…
“대체 무얼 하려고….”
거의 발가벗겨진 상태가 되자 괜시리 그녀가 가슴과 아래를 가렸는데, 그 모습이 되려 색정적인 느낌을 뽐내고 있었다.
이 모습에 불릿도 흠칫, 했으나 이내 고개를 털고 자신의 침대에 그녀를 앉혔다.
풀썩.
“어머! 앗! 엇!”
놀란 나머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새어나올 듯, 말 듯한 비명을 지르는 올리비아에게 불릿이 무언가를 건네서 그녀의 양 손에 쥐어주었다.
“이것은…?”
“저번에 받았던 하급 마정석 2개다. 떨어지지 않도록 쥐고 있어.”
“뭘 할 생각이야?”
이상야릇한 상상을 이어가던 올리비아는 그게 아닌 듯하자 약간 실망감이 감도는(?) 말투가 되었는데, 이에 불릿은 그녀가 앉혀진 침대의 바닥을 가리켰다.
“급조하긴 했으나 본가의 비술로 전해져오는 마법진이다. 여기서 가부좌를 튼 채 연공을 하면 보다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거다.”
가문의 비전기술. 자신과 가장 오래된 사이인 밴은 물론이고 가신들에게도 알려준 적 없는, 오직 불릿만 아는 비밀이었다.
지금까지 함께해온 올리비아에게도 숨겨왔던 것인데, 여기서 왜 밝히는 것인지 그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어째서 이런 걸…?”
그녀가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손등으로 슥슥 비비며 묻자 불릿이 그녀의 다리를 마저 침상으로 올려주며 말을 이었다.
“네 상대로 나온 놈에게서 포착한 점이 있기에 그래, 그래서 걱정이 돼서 그런 거다.”
“걱정이 돼…? 뭐가? 무엇이?”
“그건….”
때마침 덜컥, 목에 걸리는 말. 그녀가 쥐새끼의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되는 순간, 올리비아 또한 놈들의 표적이 될지도 몰랐다.
이런 더러운 비밀은 아는 자가 적을수록 좋았기에 불릿은 한숨을 쉬었다.
“후우, 나중에, 나중에 얘기해주도록하지. 그것보다 네가 일기토에 나온 놈보다 부족한 점이 보여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했기에 손을 쓰는 거지.”
지금 불릿의 말투는 여느 또래의 청년들과 비슷했다. 이 순간만큼은, 적어도 지금만큼은 불릿은 겉모습에 충실한 20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대결까지는 1시간의 시간이 남았으니 그럭저럭 효과를 볼 수 있을 거다. 온전히 흡수하진 못하더라도 체내에 머물러 있는 것만으로도 괜찮을 거야.”
“이건 네 거잖아…, 나도 마정석이라면!”
“알아, 알지만, 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래.”
그리고 올리비아는 불릿처럼 마정석을 챙겨 다니지 않는다.
불릿이 마정석을 소지한 이유는 정령력을 채울 수 있기에 그랬던 것이다.
보통 마법사나 정령사들은 불릿처럼 가문의 비술이 없기에 포션처럼 들고 다닐 이유가 없었다.
“올리비아.”
“응?”
연신 볼을 문지르던 올리비아가 불릿의 물음에 시선을 마주치자 불릿이 사르르 그녀에게 다가갔다.
스으윽…
“아….”
짧은, 그러면서도 긴 입맞춤. 살짝 스쳐지나가는 혀끝이 소름이 돋을 정도의 황홀감을 선사하고 있었다.
그녀가 비몽사몽하고 있을 때, 불릿이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미루었던 말, 지금 해주마.”
“……어떤…말?”
자신의 속옷이 노출된 상태라는 것도 잊고 축 늘어뜨린 팔엔 여전히 마정석이 들려있었으나, 올리비아의 머릿속은 꿈속을 허우적거리는 듯했다.
불릿은 동공이 잠시 흔들렸으나 마음을 다잡았는지 강렬하게, 그리고 애틋한 마음을 담아 그녀에게 전했다.
“사랑해.”
파아앗!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게 새빨개진 얼굴.
아마 바늘로 찌르면 그곳에서 분수처럼 피가 터져 나올 것 같은 광경이었기에 불릿도 덩달아 얼굴이 피가 쏠렸다.
“어, 어버, 어버버….”
“그렇게 부끄러워하면 나도 감당하기 힘들군. 일단 진정해라, 일기토가 코앞이니까.”
부른 이유가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기에 흥분한 상태의 올리비아부터 진정시키려는 불릿.
당장 본인도 그녀의 매끄러운 육체에 불끈했으나 한낱 욕망에 불릿이 쓰러지진 않을 것이다.
“…나중에 하면 되니까, 그러니까….”
아마도.
그래도 그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도리질을 치던 올리비아가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우, 어…, 비, 비거, 비거거!”
“비겁하다고?”
“으, 응!…왜, 하필이면 지금에서야 말해….”
뚝, 뚜둑.
급기야 눈물까지 흘리는 올리비아. 손에 들고 있던 마정석은 침대에 나뒹굴고 있었는데, 그녀는 불릿의 널따란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선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바보, 바보야…, 그동안 자꾸 말을 피해서 내가 얼마나 불안했던 줄 알아?”
퍽, 퍽.
마나를 싣지 않은 그녀의 육체적인 힘이 강해봤자 얼마나 강하겠는가?
꽃사슴처럼 가늘고 흰 팔에서는 별다른 힘이 가해지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릿의 마음은 시큰거리는 게 그동안 홀로 가슴 졸이던 올리비아의 마음이 전해지는 듯했다.
“…아직 시간이 있군. 일단…, 이리와.”
“흡!”
달콤한 올리비아의 체향과 은은한 땀냄새가 느껴지고, 그 사이에 간간히 퍼지는 침소리가 질척였다.
“츄릅….”
‘퐁’소리를 내며 떨어진 입술, 그리고 이어지는 불릿의 머리쓰다듬기에 올리비아가 그의 품에 안긴 채로 중얼거렸다.
“흙덩이가 왜 자꾸 안기나 했더니, 이런 기분이었구나….”
“그건….”
‘그건 나도 모르겠다. 대체 흙덩이가 왜 그러는지.’
흙덩이는 정령이일 텐데 자꾸만 불릿에게 애정을 갈구했다.
그럴 때마다 불릿은 젊어진 육체의 욕구를 내리누르기 바빴는데, 흙덩이는 올리비아만큼이나 그에게 고민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후우,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다. 3시라곤 했으나 절차를 생각하면 조금의 시간은 더 벌 수 있으니 어서 연공을 시작해.”
“응, 그럴게. 그리고….”
이번엔 불릿이 아닌, 올리비아가 먼저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대었다.
“쪽-.”
단순한 뽀뽀라기엔 빨아 당기는 힘이 강했으나, 여기에 대해선 불릿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왜냐? 그도 남자였으니까.
“속눈썹이 길군.”
그녀의 입술이 떼어지는 순간 튀어나온 불릿의 발언에 다시금 올리비아의 얼굴은 붉어졌다.
이쯤 되면 안면홍조증이 아닐까 걱정되었으나, 평소 생활하는 것을 보면 단순히 부끄러워서일 것이다.
당당한 여장부이기에 불릿에게만 보이는 애정행각은 상당히 기분 좋은 모습이었다.
“그, 그럼 시작할게.”
“난 감상하도록 하지.”
“고맙긴 한데, 너 너무 변태 같아.”
“41년을 참았는데(?), 이 정도야 뭘.”
“…전쟁 끝나면, 그때…….”
“그래, 일단 내전을 끝내야겠지.”
짧은 대화를 주고받은 후 올리비아가 심호흡을 한 후 마정석을 집어 들었다.
“나 할게. 그리고…, 고마워.”
“고마우면 다치지 마라.”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는 것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한 불릿이었다.
불릿은 젊어졌다. 이것이 다시 태어난 것인지, 아니면 육체가 재구성된 결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죽은 줄 알았던 자신에게 또 다시 기회가 찾아와 사랑이라는 감정을 불살라준 올리비아, 또 다른 소중한 존재인 흙덩이, 이 둘을 지켜내는 것도 자신의 의무중 하나일 것이다.
‘흙덩이는… 그래, 가족으로서 사랑하는 거다, 가족으로서.’
가족이라는 단어에 다시금 무거워지는 마음.
대영주라는 무거운 짐을 함께 짊어지고 나아갈 수 있는 사람, 그것이 올리비아라면 불릿은 기꺼이 함께하고 싶었다.
“만약 네가 다친다면….”
불릿은 숨소리를 내며 명상에 빠져든 올리비아의 고운 얼굴을 바라보며 아직까지도 자신을 괴롭히는 사악한 쥐새끼들을 떠올렸다.
‘그땐 내게서 자비를 바라지 말아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