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8 사랑과 전쟁! =========================================================================
펄럭!
“크, 큰일났습니다!”
갑자기 막사를 방문한 불청객으로 인해 불릿은 기운이 없는 와중에도 이불로 흙덩이를 덮어버렸다.
하지만 이미 두툼하게 부푼 이불로 인해 불청객은 그가 어떤 거사(?)를 치르고 있었다 착각하여 황급히 밖으로 나서려했다.
“헉, 실례했습니다!”
“아니, 오해 말도록.”
자신의 행동이 오해를 불러왔다는 생각에 그 생각을 불식시키려고 이불을 걷어버렸다.
스륵-
그 안에는 불릿의 몸을 꼭 껴안고 있는 흙덩이가 나타났는데, 누운 상태에서 움직여서인지 흙덩이가 입고 있던 원피스가 말려 올라가 속옷이 드러난 것도 말이다.
“…이, 일단 즐기신 후에(??) 찾아오겠습니다!”
더욱더 커진 오해를 가진 채 불청객이 밖으로 빠져나가자 불릿이 한숨을 내쉬었다.
“미친….”
- ??? 불릿이 욕했다??
상스러운 말을 내뱉더라도 상욕은 거의 안 하던 불릿이 욕설을 내뱉자 흙덩이가 그를 올려다보았으나 이미 불릿의 정신은 이로 인해 파생될 온갖 문제로 골치가 아파오고 있었다.
“…….”
“……….”
“………….”
짙은 침묵이 내려앉은 회의실. 이 커다란 막사 안에서 단 한명도 말을 꺼내지 않고 있는 것은, 아마도 불릿의 양쪽 팔을 하나씩 점령한 존재들로 인해서일 것이다.
- ……
“……흥.”
흙덩이, 그리고 올리바아는 남자들로 득실대는 회의실 내부에서 빛을 내고 있었는데, 미모는 둘째 치고 숨이 막힐 듯한 적막이었기에 그들 모두가 불편해 보였다.
이 와중에 안팎으로 지켜지고 있는 입구사이로 몰래 고개를 내밀어 훔쳐보고 있는 유실리아와 루나, 그리고 둘의 뒷목을 잡아끄는 아일렌은 논외로 치자.
“크흠.”
이때 한 인물의 기침소리가 울리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움찔.
자신에게 시선이 쏠리자 절로 몸이 굳는 인물이었으나, 이내 몸을 풀며 자신의 말을 시작하고 있었다.
“흠흠, 현재 게슐린 그랩 자작 측에서 보내온 사자에 의하면, 명일(明日:내일) 오후 3시경에 일기토를 하자는 제안을 보내왔습니다.”
상당히 중요한 소식이었으나 워낙 강렬한 충격이 회의실을 휩쓸고 있었기에 다들 별다른 의견을 제시하지 않고 있었다.
- 저리 가.
“쉭쉭, 꼬맹이는 엄마 젖이나 더 먹으렴.”
- …? 불릿, 젖이 뭐야? 엄마라는 인간이 만드는 음식이야?
“………….”
매우 깊은 침묵. 그렇다고 침묵만 고수할 수 없는 자리가 이곳, 회의실로 사용하는 막사였으니 천천히 입을 여는 불릿.
“올리비아, 대체 왜 그러는….”
“안 져, 못 져, 안 돼!”
“…….”
“처음은 나야! 나라고! 알았어…요?”
“어, 응…, 알았으니 일단 이 팔 좀 풀어.”
당황한 나머지 뜻도 모르고 엉겁결에 반말을 했으나 그것도 모르고 당사자도 모르는 허락을 받아낸 올리비아는 한손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리며 막사 밖으로 뛰쳐나갔다.
펄럭-!
그녀가 나가자마자 몰래 지켜보던 여기사와 하녀들의 높은 고음이 들렸으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간부들로 인해 그 소리는 곧 묻혔다.
“후우우.”
“올리비아 경은 왜 저러는 거지?”
“난들 아는가…, 보나마나 치정싸움이지 않을까 싶소.”
“…각하의 옆에 있는 소녀는 정령이 맞긴 하나?”
“맞을 거요…아마도.”
“식사도 하던데?”
“요즘 정령은 식사도 하나보지.”
간부라고 하나 애당초 이들은 대부분이 귀족출신이다.
바포 변경백의 귀족들은 정령학의 기초를 필수적으로 배우기에 정령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데, 그들이 보기에도 흙덩이는 평범함을 벗어난 존재였다.
여기서 말하는 평범함이란, 하급이나 중급 같은 경지가 아닌, 객체로서의 특별함을 지녔다는 뜻이다.
간부들의 잡담이 이어지자 불릿도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그래, 일기토! 놈들이 일기토를 제안했다고 했지?!”
불릿의 우렁찬 말에 아까 발표를 이어가던 이가 마저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각하. 다만, 놈들이 내세운 인물은 용병이라고 합니다.”
“자네는 이름이 무엇인가? 케이프를 보니 천인장인 것 같긴 한데….”
불릿의 군단은 새로이 정비를 마치며 몇 가지 바뀐 것이 있다.
그것은 간부계급의 차별성인데, 보다 원활한 계급구분을 위해 진홍색 케이프를 착용했다.
십인장은 흰색 줄이 1개, 백인장은 2줄, 천인장은 3줄로 말이다.
군단장의 경우는 무릎까지 닿는 기다란 망토를 둘렀다.
고위간부 중 불릿이 처음 보는 자가 존재할 리가 없었기에 의문을 품고 묻자 그가 주먹을 심장에 갖다 대며 군례를 올렸다.
“충! 본 천인장은 이번에 새로이 입대한 제노시스라 하옵니다, 각하!”
“제노시스? …군단장이 아무나 천인장에 올렸을 리는 없고, 일반 기사들 중에서 두각을 드러낸 이인가?”
불릿이 일일이 신경을 쓸 수는 없기에 군단장인 뎁슨 레너드 남작에게 간부의 임명권한을 주었었다.
그렇다곤 해도 천인장급이면 불릿에게까지 보고가 올라왔을 텐데 몰랐다는 것도 이상한 노릇이다.
불릿이 궁금해 할 것을 예상했는지 이때까지 조용히 있던 레너드 남작이 입을 열었다.
“각하, 제노시스는 과거 각하를 보필하던 마법사 제노스의 핏줄입니다.”
“오오, 제노스의 아들이었단 말인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불릿이 눈썹을 치떴으나 다시 의문을 보였다.
“그렇다면 어린 것은 이해를 하는데, 마법사의 아들이 기사가 될 수도 있는 것인가?”
재능은 일부 핏줄을 통해 계승된다. 그래서 핏줄을 이어받은 자손은 부모가 그러했듯, 그 길을 따라가는 성향이 있었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제노시스라는 자가 마법사로 보이진 않았던 것이다.
체격도 건장하고, 근육도 발달한 것이 영락없는 기사였다.
그러한 의문을 레너드 남작이 해소시켜 주었다.
“마나에 대한 재능이 남달라 각하껜 미처 허락을 받지 못하였사오나, 제가 중앙영지에서 빼내어 양자로 입양하였습니다.”
“…그렇군, 그렇게 된 거였어.”
재능이 있는 자라면 부모가 있더라도 다른 자의 양자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시대엔 그게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기에 제노시스가 어떻게 양자가 되었고, 왜 기사가 되었는지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제노스의 일은…, 안타깝게 되었다.”
“……괜찮습니다, 각하.”
얼핏 보아도 스물도 안 된 청년이었으나 울음을 참아내는 것이 여간 기특해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결사대에까지 자신을 따라왔던 제노스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불릿은 그에게 큰 점수를 쳐주고 있엇다.
“그래, 마나에 재능이 있다고? 그렇다면 현재 경지가 어떻게 되나?”
불릿의 물음에 제노시스가 우렁차게 외쳤다.
“부끄럽사오나 소드유저상급의 경지에 올랐습니다.”
“…? 그러한가?”
생각보다 낮은 경지에 아쉬워하던 찰나, 레너드 남작이 부가설명을 이어줬다.
“각하, 제노시스는 검과 마법을 동시에 다루는 마검사이옵니다. 원소는 바람, 여러 보조마법에 능통하며 경량화 등의 마법으로 재빠른 몸놀림이 특징이고, 무엇보다 헤이스트 마법을 시전 할 줄 아옵니다.”
그러면서 제노시스에게 핀잔을 주는 레너드 남작.
“이 녀석아, 보고를 하려면 모든 것을 밝혀야 하지 않겠느냐? 어딜 감히 각하 앞에서 숨기려고 하느냐!”
“죄송합니다, 각하! 용서해주십시요!”
“괜찮다, 괜찮아. 허허허….”
젊은 놈이 늙은이의 흉내를 내며 젊은 놈의 사과를 받는 모습이 괴상해 보였으나, 실제 나이가 41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해가 지났기에 40에서 1살 더 먹은 불릿이었다.
“그렇다면 제노시스를 선봉으로 내세우면 괜찮을 것 같군.”
비록 검술의 경지가 낮았으나 마법이라는 변수를 통해 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제노시스는 이름이 알려진 자가 아니었기에 상대 측에서도 당할 가능성이 높았기에 나온 제안.
그러나 이를 레너드 남작이 부정했다.
“죄송하오나 각하, 제노시스는 일기토에 부적합한 인재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마검사는 굉장히 드문 직업군으로, 검술을 연마한 이가 보조마법 1개만 익혀도 마검사라고 우대받는 세상이었다.
그렇다곤 하나 검술과 마법, 두 개의 길을 걷는 이치고 제대로 된 경지를 밟은 이가 없어 쉽게 떠오르며 쉽게 가라앉는, 냄비와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소드유저 상급에 헤이스트까지 가능한 제노시스라면 라체나의 수석기사인 벤젼스도 고전할 만한 전력인데, 어째서 이를 막는 것인지 영문을 몰랐다.
“제노시스가 마검사라는 점을 알려드렸으나, 약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아직 마법과 검술, 둘 중 하나도 벽을 깨지 못하였기에 마나가 부족하고, 시전이 느린 현상이 벌어져 시간이 촉박한 일기토의 경우, 마법을 시전하지도 못하고 당해버릴 것입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1:1인 일기토에서 상대방이 마법을 시전할 시간을 주지 않을 것이고, 캐스팅에 걸리는 시간을 단축할 만큼 제노시스가 능숙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게다가 두 가지를 동시에 연마하려니 검술실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법이 뛰어난 것도 아닌지라 마나홀과 마나서클에 충분한 마나를 축적하지 못한 것도 이유 중 하나다.
기사들은 마나 홀이라 불리는 배꼽부분의 단전에 마나를 쌓고, 마법사들은 심장에 서클이라 부르는 링을 둘러 고도의 집중을 할 수 있도록 마나를 중첩시킨다.
서로 목적이 다르기에 마나라고 정의하지만, 같은 용도로는 사용할 수가 없기에 마나가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럼 벤젼스가 나서겠는가? 그야말로 현 영지군 최고의 검사일 테니 말일세.”
레너드 남작은 군단의 사령탑이기에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더라도 전선에 나설 수 없었다.
게다가 나이도 있기에 같은 소드익스퍼트 상급이라 하더라도 육체의 노화 때문에 접전이 벌어지면 손해를 본다.
자신의 얘기가 나오자 반대편에서 입을 열었다.
“각하, 저는 삼광(三光) 셰실리코프를 상대해야 합니다.”
삼광은 세 번의 칼질을 빛살처럼 뿌린다하여 붙은 셰실리코프의 별명이다.
그를 상대할 인물은 벤젼스를 제외하면 불릿과 레너드 남작밖에 없는데, 물량으로 커버하기엔 피해가 막대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대체 삼광은 그런 반역자의 편에 서서 본인을 이토록 곤란하게 만든단 말인가.”
불릿의 한탄에 간부들 모두가 고개를 숙여보였다.
마땅한 인물이 없자 답답함이 이는 불릿, 그는 누가 적당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게슐린 그랩 자작은 멍청하지 않다. 오히려 교활하게 똑똑한 인물이 바로 그였다.
바포 변경백의 귀족들이 바보멍청이라서 그랩 자작에게 휘둘린다는 말이 아니었단 소리다.
이때, 한 인물이 막사로 난입했다.
펄럭!
“내가 나갈게!”
“…올리비아? 또 무슨 일이 있소?”
한창 회의가 진행되던 중이기에 불릿이 근엄한 자세로 말을 건네자 올리비아가 척척척, 그의 앞으로 와서 소리쳤다.
“일기토, 내가 나갈게! 나 잘할 수 있어!”
“올리비아! 이건 애들 장난이 아니오!”
불릿까지 벌떡 일어서서 소리치자 그의 팔을 붙들고 있던 흙덩이가 자연스레 떨어져나갔다.
불릿의 감정이 격해지자 그것이 전해졌는지 흙덩이가 그의 손을 살며시 양손으로 감쌌다.
“후우, 장난하지 마시오. 이럴 때까지 장난치는 것은 용서치 않을 것이니.”
흙덩이의 손길에 진정이 된 것일까, 한결 누그러진 불릿의 말투였으나 이번엔 올리비아의 차례였다.
“누가 장난이라고 했어? 장난이라고 했냐고! 나 진심이야, 응? 널 위해서 돕고 싶다고!”
“올리비아, 당신은 살인을 감당할 수 있소? 지금까지처럼 위협만 가하는 것이 아닌, 칼로 사람의 살덩어리를 찌를 수 있냔 말이오.”
그들의 대화를 숨죽이며 지켜보는 간부들의 시선엔 ‘상황이 재밌게 돌아가네?’라는 흥미도 담겨 있었다.
일단은 올리비아가 유력한 정실후보임은 확실했으니 말이다.
불릿의 말에 올리비아도 버럭 소리만 치는 것이 아닌, 진심을 담은 진중한 어조가 나오고 있었다.
“할 수 있어. 나도 이제는 달라질 거라고. 더 이상 도망치거나, 물러서지 않아!”
과거에 올리비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불릿은 모른다.
그녀가 밝히지 않았지만, 가끔가다 나오는 대화를 통해 가문이 몰락했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숨기고 또 숨기던 그녀가 스스로 일어서려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여기서 불릿이 해야 할 선택은 과연 무엇일까?
“그렇다면 한번 해보시오, 올리비아. 당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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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도 저녁 6시와 밤 12시 10분에 연재가 이루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