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7 사랑과 전쟁! =========================================================================
휘이이이잉-
차디찬 꽃샘추위가 몰아닥치는 가운데 불릿의 군단은 게슐린 그랩 자작의 성과 대치하고 있었다.
불릿은 무얼 하는 것인지 흙덩이와 함께 성의 한곳을 바라보며 손을 맞잡고 있었는데, 그 상태로 하루의 대부분을 소모할 정도로 지루한 일과를 보내고 있었다.
군단의 진지에서 마나를 다루는 자라면 불릿과 흙덩이에게서 미세하게,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정령력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뭘 하는지 판단하기란 불가능했다.
우우웅…
“흐음.”
불릿이 찬바람을 맞으며 바깥에 나와 있자 주변을 둘러싼 호위병대가 걱정스러워했다.
“각하, 바람이 찹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경계는 저희가 서겠사오니, 부디 옥체를 보존하심이….”
그리고 호위병대의 일원에는 올리비아를 비롯한 여인4인방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체 뭘 하길래 그러고 있는 거야? 응?”
“…….”
올리비아의 성화에도 불릿은 흙덩이의 손만 잡고서 멀거니 서있었는데, 눈을 뜬 게 아니었더라면 흡사 선잠을 자는 것과도 비슷해 보였다.
- 저리 가, 방해하지 말고.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불릿 대신에 흙덩이가 마치 인간과 같은 귀찮은 표정을 지으며 가라는 손짓을 하자 올리비아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빠직.
“이게 정말….”
“그만, 뭣들 하는 게냐?”
“아, 불릿…, 그게 말이지.”
정령력을 끌어올리던 불릿은 그새 지쳤는지 추운 날씨에도 땀을 비오듯 쏟고 있었다.
그것을 목격한 흙덩이가 소매를 잡아당기자 불릿은 자세를 낮춰주었고, 흐르는 땀을 흙덩이가 닦아주었다.
스윽, 스윽.
“흠, 아무래도 정황을 보니 본인이 하는 일에 궁금증이 일었나보군. 맞는가?”
“어, 어어…, 맞긴 한데 말이지….”
올리비아가 대꾸하며 앞으로 다가오더니 흙덩이와 불릿을 떼어놓으며 루나가 건네준 손수건으로 자신이 땀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톡톡, 톡.
“대체 뭘 하길래 땀까지 나는 거야? 파장이 느껴지긴 하는데, 미약해서 알 수가 없네.”
지금은 사라졌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불릿과 흙덩이에게서 마나의 유동을 느낄 수 있었다.
은밀한 기운이었기에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알 수 없을 정도였는데, 당최 말해주질 않으니 답답한 간부들이었다.
- 불릿과 내 시간을 방해하지 마.
잔뜩 심통이 난 흙덩이가 소리쳤으나 흙덩이의 목소리는 불릿에게만 들렸으므로 오직 그만이 반응했다.
불릿은 흙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입을 열었는데, 지쳐서 그런지 기운이 없어보였다.
“…본인의 예상으로는 적들에게서 곧 반응이 나타날 것이오. 그리고 그 반응이란 일기토일 가능성이 높은데, 우리 측에서도 나갈 인물을 선발해야 하오.”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다른 화제로 전환하는 불릿으로 인해 더욱 궁금증이 증폭했으나 올리비아를 제외하면 다른 인물들은 더 이상 물어볼 엄두를 못 내었다.
애초에 물어보지를 못해 올리비아가 나섰던 것이니 이제는 그저 결과를 기다려야만 할 것이다.
“또, 또. 맨날 자기 혼자서 신비로운 사람이지? 쳇.”
“일단 놈들이 누구를 내보낼 것인지 확인한 다음에 선출할 것이니 기사들은 대비해두라 일러두는 것이 좋겠소.”
“그리하겠습니다, 각하.”
올리비아가 토라진 사이 호위병대장인 크레파토스가 대답하자 불릿도 고개를 끄덕인 후 흙덩이에게 부축 받으며 막사로 걸음을 옮겼다.
흙덩이의 힘이 장사이긴 하나 키가 맞질 않았기에 올리비아의 뒤에 서있던 여기사 중 한 명인 유실리아가 급히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제가 보필하겠습니다, 각하.”
“그래, 고맙군.”
“저도 좋습니다, 각하!”
“……? 그리 생각해준다니 고맙네.”
거의 탈진할 정도로 힘을 소모할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기도 전에 유실리아가 불릿의 팔을 어깨에 걸친 후 껴안듯이 이동하자 흙덩이의 볼이 살짝 부풀었다.
그러나 자신만으로는 불릿의 이동이 불편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잠자코 있었다.
“아가씨, 한발 늦으셨네요?”
“윽.”
유실리아의 부축을 받으며 자신의 막사로 이동하는 불릿을 따라가던 올리비아에게 루나가 던진 말이었다.
그리고 루나에게 말을 들은 올리비아는 가슴을 부여잡는 시늉을 했는데, 장난이 섞이긴 했으나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아가씨. 아가씨가 대영주님의 배필이 되시길 바라지만 저는 친구도 외면하기 어렵네요.”
“…….”
그 말에 올리비아는 할 말을 잃었다. 유실리아는 과거 불릿에게 구원을 받은 처녀들의 핏줄이다.
말하자면 평민출신이라는 소린데, 그럼에도 청순미를 뽐내며 저렇게 헌신적인 모습을 보이니 올리비아는 자신보다도 유실리아가 더 어울리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 유실리아가 나보다 더 나을 수도 있겠네.”
올리비아는 몰락한 귀족의 자식. 중앙영지에서 기반을 다진 후 당당한 기사로 입성한 유실리아와는 다르게 그저 용병생활을 전전하다 불릿에게 눈이 맞아 따라왔을 뿐이다.
지금이야 불릿과 이러저러한 썸을 타고 있지만, 그게 과연 나중까지 이어질지는 두고봐야 할 일이었다.
번번히 불릿과의 그짓(?)에 실패하니,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어깨가 축 늘어진 올리비아의 모습에 주변의 호위병대원도 안쓰러워하는 눈초리를 보냈고, 그런 그녀를 루나가 응원했다.
“힘내세요, 아가씨. 기정사실, 그것만 성공하신다면….”
“루나! 사람도 많은데 여기서 그러면 어떡해…!”
처음 목소리는 컸으나 갈수록 작아지던 올리비아의 음성은 마지막 말에 이르러선 개미만큼 작게 쪼그라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마치 홍당무처럼 변했는데, 부끄러운 줄 모르고 아무데서나 그러한 말을 언급하는 루나가 창피했는지 루나에게 등짝스매시를 날리며 안절부절 못했다.
찰싹, 찰싹!
“아야, 아얏! 아가씨! 진짜 아파요, 아파욧! 아야야!!”
“몰라몰라! 내가 루나 때문에 못살아!”
찰싹!
그러는 사이, 불릿은 유실리아와 흙덩이의 부축을 받으며 자신의 막사로 들어섰다.
펄럭-.
“후욱, 후욱….”
거의 텅 비어진 정령력의 영향 때문인지 조금 전보다 더욱 안색이 나빠진 불릿.
그가 이토록 힘들어하며 강행하는 일이 무엇인진 알 수 없으나, 유실리아가 판단하건대 결코 가벼운 사안은 아닌 것 같았다.
“각하, 어떤 고민을 품고 계신지 미천한 저로선 알 길이 없으나, 부디 그 지혜로운 생각을 조금만 알려주실 순 없겠나이까? 그래주신다면 이 유실리아,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일을 성사시키겠나이다….”
진심 가득한 유실리아의 말을 듣던 불릿은 자신을 침대에 눕히려는 흙덩이의 손길에 따르며 입을 열었다.
“후우…, 그대의 충정은 알겠으나, 이건 그대들이 해줄 수 없는 일이라네. 그래도 자네의 충심은 내 기억할 터이니, 이만 물러가보게.”
“각하….”
유실리아가 안타까운 듯 애절하게 말하자 불릿에게 이불을 씌워준 흙덩이가 그녀를 밀어냈다.
- 불릿은 쉬어야 하니까 나가.
흙덩이에게 조금씩 밀려나던 유실리아는 안타까워하면서도 몇 시간이나 무언가를 열심히 한 불릿의 휴식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기에 순순히 물러났다.
“부디 옥체를 보전하시길….”
유실리아가 막사를 나가자마자 곧바로 올리비아가 들어섰다.
이번엔 루나를 대동하지 않은 그녀만이 홀로 들어왔는데, 자리에 누운 채로 최하급 마정석을 흡수하고 있던 불릿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런 불릿을 보호하기 위해서인지 이번에도 흙덩이가 올리비아를 막아섰다.
“뭐야, 비켜봐. 상태가 어떤지 좀 보게.”
쉬고 있을 줄 알았더니 아예 드러누워 있자 걱정이 심화된 올리비아가 불릿에게 다가서려하자 흙덩이가 고개를 저었다.
- 불릿의 휴식을 방해하지 마. 바보 올리비아.
“뭐라는 거야? 너 글 쓸 줄 알잖아? 글로 써, 글로.”
그러자 흙덩이는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쉬는 제스쳐를 취한 후 최근 들어 소지하고 다니기 시작한 수첩에 글을 사각사각 적어 넣기 시작했다.
글을 다 적어낸 흙덩이가 수첩을 돌려 올리비아에게로 보여주자 그녀가 천천히 읽어냈다.
“알지도 못하면…빠져? 너 정말!”
“으음…, 올리비아. 잠시 나가주시오. 정령력을 회복해야하니.”
“아, 깼어?”
시끄럽게 굴어서 그런지 불릿은 정신이 흐트러져 정령력의 흡수를 중단했는데, 올리비아는 마치 불릿이 잠이라도 들었던 것처럼 반응한다.
여전히 불릿은 누워있는 상태였는데, 이제는 최하급 마정석으로는 쉬이 회복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기에 여전히 지친 모습이었다.
“시끄럽게 굴지만 않으면 이곳에 있어도 상관없으나, 본인은 조용한 환경이 필요하니 불편하다면 잠시 다른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어떻소?”
명백한 축객령이었기에 올리비아는 슬픈 기색을 보였으나, 자신이 시끄럽게 한 것은 사실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무리하면 안 돼, 응? 너만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고….”
“…주의하겠소.”
“그래…, 그럼 나가볼게…. 흙덩이 넌 나중에 두고 보자.”
- 흥, 바보주제에.
올리비아가 째려보았지만 흙덩이는 아랑곳 안 했고, 결국 올리비아는 막사 밖으로 쫓겨나듯 나갈 수밖에 없었다.
펄럭-.
“……끙.”
- 괜찮아?
도도도-
불릿이 힘들어하자 그에게 다가온 흙덩이가 애달픈 눈빛으로 그의 손을 잡고서 치유능력을 발현하려하자 불릿이 이를 말렸다.
“그러지 마시게. 본인은 다친 게 아니라 자네가 능력을 사용해봤자 효과는 미미할 뿐이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차오를 것이네.”
지금 마정석을 사용한 것은 예상외로 많은 힘을 소모했기 때문이지, 이게 효율적이라서 사용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마정석은 마기의 덩어리. 마나나 정령력으로 전환해 흡수할 수 있지만, 무분별한 남용은 몸에 해를 끼친다.
마의 꽃방울이라는 아티펙트에 들어간 최상급 마정석을 예로 들자면, 거기서 흘러나오는 마기만으로도 사람의 정신을 오염시킨다.
안전을 생각한다면 자신의 힘이 온전할 때 사용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었고, 상태가 나쁠 때에도 급히 사용하는 것이라면 한두 개만 사용해야 했다.
- 흙덩이를 사용해. 흙덩이는 언제나 불릿의 것이야.
엄연히 따지자면 동등한 계약관계였지만 흙덩이의 태도는 그 이상의 행동도 보였다.
정령이 애정행각을 한다니 이상해 보였지만, 지금 그러한 모습을 보이는데 어쩌겠는가? 그냥 그렇다고 여겨야지.
흙덩이의 말에 불릿은 손을 꺼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자네의 정령력은 아껴두시게. 지금은 본인의 힘만으로 해볼 터이니.”
‘가문의 비술을 사용하지 못하는 게 아쉽군.’
스윽스윽.
흙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생각하는 불릿. 바포가의 비술이라면 큰 부작용 없이 대량의 마정석을 흡수할 수도 있었지만, 전시상황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자금이 부족해서 중급 마정석을 팔았던 게 아닌가?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기 위해서가 아닌, 일시적으로 소모된 정령력을 회복하려고 마정석을 소모하는 것은 지금의 상황에선 저어되는 행동이었다.
무작정 마정석을 흡수한다고 수준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기에 지나친 남용을 할 필요는 없었다.
- 그럼, 내가 옆에 같이 있어줄게.
부스럭, 부스럭.
그러면서 불릿이 누워있는 침상에 들어가는 흙덩이. 그의 옆에 누운 후 몸통을 껴안으며 차게 식어버린 불릿의 몸을 달구어주었다.
- 따듯하지? 좋지? 흙덩이가 최고지?
땅의 정령은 포근함이 특징 중 하나인지라 따듯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러한 접촉은 정령력을 키우는데 도움이 됐기에 좋다면 좋았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왜 사랑하는 연인처럼 행동하며 하냐는 것이다.
흙덩이에게 이상한 감정을 품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릿에게 있어서 이건 다른 의미에서의 고통이었다.
“으음….”
- 올리비아나 이상한 여자들보다 흙덩이가 더 좋지? 계속 껴안고 싶지?
흙덩이의 몸은 부드럽고, 머릿결은 찰랑여서 만지면 기분이 좋긴 하다.
그렇다고 흙덩이의 말에 동의하자니 뭔가가 목을 턱하니 막는 듯해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 나는 불릿만 있으면 돼. 그러니까 불릿도 나만 바라봐줘…
꼬옥…
그러면서 더욱 밀착하는 흙덩이 덕분에 불릿의 차게 식었던 몸은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제발, 속옷은 어찌해줬으면 좋겠군.’
흙덩이의 가슴이 신경 쓰여서 아예 눈을 감고 잠들려는 불릿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