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6 사랑과 전쟁! =========================================================================
드륵.
드르륵- 드륵, 드륵.
우글우글.
드디어 게슐린 그랩 자작의 성에 도착한 불릿의 군단은 평지보다 약간 높은 봉우리에 위치한 성을 앞에 두고서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각종 물자를 끌어와 구석구석에 두고, 일시에 덮치기 좋은 구도로 병력을 배치하니 당장 마음먹으면 성을 점령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해자의 수면이 낮군.”
불릿의 정령술에 의해 언제나 일정한 물을 공급받을 수 있었던 바포 변경백이었으나, 물이 나오도록 수로를 만들었다 하더라도 더 이상 물의 정령의 영향이 미치질 않았기에 수면의 높이가 낮아져 있었다.
날씨가 춥다고는 하지만 얼음이 얼 정도는 아니었고, 물의 높이도 낮았기에 해자의 존재의미가 퇴색된 상태라고 말할 수 있겠다.
“최전방의 성이라고 하지만 자연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는가?”
“그렇습니다, 각하.”
날이 저물고 있는 가운데, 불릿은 한창 진지구축과 저녁준비로 분주한 병사들과는 반대로 여유로움을 선보이고 있었다.
내면은 다를 지도 모르겠으나, 겉모습만 보면 홀로 평화로움을 만끽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의 말을 크레파토스가 받아주었다.
“그렇지. 자연은 무섭고도 위대하지. 그리고 본인은 그런 자연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이, 흙덩이를 데리고 있고 말이야.”
스윽스윽.
불릿의 쓰담쓰담에 흙덩이가 눈을 살짝 감았다 뜨며 차가워진 그의 손을 자신의 품에 안아들었다.
- 손이 차가워졌어. 빨리 들어가서 쉬자.
“……크흠, 알겠네, 흙덩이여.”
호위병대와 합류해 불릿의 곁에 서있던 올리비아가 찌릿, 노려봤으나 흙덩이는 개의치 않아하며 한쪽에 설치된 커다란 막사로 불릿을 끌고 갔다.
“크레파토스여, 저녁을 든 후에 수뇌부회의를 열 것이니 병사들을 다독인 후, 이따 봄세나.”
“편히 쉬십시오, 각하!”
“……오, 올리비아도, 함께 들겠는가?”
불릿이 흙덩이에게 끌려가면서 묻자 올리비아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면서 그의 곁에 따라섰다.
“당연한 걸 묻고 있어? 내가 누구 때문에 따라왔는데.”
“각하를 잘 보필해주십시오, 아가씨.”
“…아가씨 말고 경이라고 붙여주지.”
크레파토스까지 올리비아를 안주인 취급하자 작은 불만이 일었으나 반대로 인정받았다는 뜻이기에 올리비아는 적을 눈앞에 둔 진지에 있으면서도 가벼운 발걸음을 보였다.
불릿이 막사로 들어서려하자 언제 다가온 것인지 막사 입구엔 두 명의 여기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실력만으로 보자면 병사들과는 비교할 수 없었고, 여성인 올리비아도 있었기에 기왕이면 아름다운 인물로 배치한 것이 호위병대를 책임지는 크레파토스의 생각이었다.
그들이 들어서려하자 왼편에 서있던 유실리아가 입구를 걷어주며 불릿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도 멋지십니다, 각하!”
“……? 그래, 수고하는군.”
이상한 인사말에 불릿이 의아해하면서도 어깨를 두드려주며 입실하자 유실리아가 므흐흣 웃었고, 오른편에 있던 아일렌이 고개를 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올리비아 경, 조심하세요. 아무래도 유실리아가 단단히 마음먹었나 봅니다.”
“불릿은 내꺼라고….”
아일렌의 말에 올리비아가 뒤따라 들어가며 중얼거리자 유실리아도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그거야 두고 봐야 알지 않을까요…….”
그러거나 말거나 흙덩이에게 이끌려 입실한 불릿은 답답한 갑옷을 루나의 도움아래 자연스럽게 벗었다.
철컥, 찰카닥-.
“음, 고맙군.”
“당연한 일인걸요, 대영주님.”
“이런 절차까지 외우고 있었나?”
보통 하녀가 기사시종들이나 배우는 갑옷의 착용법까지 알고 있진 않았다.
다만, 루나는 보통 하녀가 아니라 불릿도 그 존재를 모르는 비밀호위대의 일원이었기에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루나는 살포시 눈웃음을 지으며 뒤로 물러섰고, 이번엔 올리비아의 갑옷을 벗겨주었다.
철커덕, 투둑.
올리비아도 자연스럽게 시중을 받은 후 자신의 갑옷을 불릿의 갑옷과 나란히 쌓아두었다.
그 모습에 불릿이 고개를 갸웃했다.
“올리비아는 따로 막사가 있을 터인데?”
- 맞아. 밥 먹고 나가야지, 바보 올리비아는.
불릿의 물음을 받아낸 것은 올리비아가 아닌 루나였다.
“아가씨랑 같이 지내셔야지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대영주님.”
“으음?”
“설마 전통을 잊진 않으셨겠죠?”
루나의 물음에 불릿이 얕은 신음을 흘렸다.
“음, 그런 낡아빠지고 천박한 전통은 이제 없어질 때도 됐다 여긴다.”
“천박하다뇨? 아가씨랑 뜨거운 밤을 보내는 게 어찌하여 천박한가요? 이 매끈하고 긴 다리, 그러면서 통통한 허벅지와 개미처럼 얇은 허리, 이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가슴….”
“루나! 그만해!”
지켜보던 올리비아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지 허겁지겁 막아서자 루나가 입맛을 다시며 물러섰다.
“그럼 저는 세 분(?)이 식사하실 음식을 가져오겠사오니, 편히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뒷걸음질을 치며 막사를 나서던 루나는 고개만 빼꼼 내민 후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파이팅?”
“어, 어? 어…파이팅?”
어쩐지 예전에도 이런 광경이 있었던 듯하지만 올리비아는 분위기에 잘 휩쓸리는 모양이다.
루나를 따라한 올리비아를 끝으로 불릿도 침대에 앉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지치는군…, 이쯤 되면 이것도 입버릇인 것인가.”
- 흙덩이가 힘써줄까?
미묘한 말이었지만 불릿은 어떤 뜻인지 알아듣고서 고개를 저었다.
“힘의 낭비는 좋지 않네. 다음을 위해 비축해두도록 하지.”
“힘? 뭔 힘? 너 설마, 예쁜이랑 뭔갈 하려고….”
“이상한 상상하지 말게. 치유에 관한 이야기였으니.”
“아, 아아…, 그치? 그런 이야기였지? 아하하. 난 또 뭐라고….”
“자넨 대체 본인을 어떻게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군.”
불릿이 고개를 저으며 내뱉는 말에 흙덩이가 침대에 앉아 다리를 흔들며 투덜거렸다.
- 하면 뭐 어때서….
“…크흠. 식사가 늦게 준비되는군. 어허, 뭘 하고 있는 겐지….”
이제 막 준비를 하러 갔는데 느리다고 타박을 하고 있으니 약간 어이가 없었다.
미리 준비라도 해놓은 것인지 불릿의 침상은 넓고 튼튼했는데, 마치 3명이 자도 안락할 것처럼 생겨먹었다.
“침상이 이상하게 크군. 누가 준비한 것이지?”
아무리 백작이라고 하지만 이곳은 야전이었고, 급히 준비해야 했기에 크고 무거운 물품은 저어되는 부분이 있었다.
이렇게 큰 침상이 준비되었다는 것은 출발하기 전부터 이미 사전에 얘기가 오갔다는 뜻인데, 불릿은 이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으니 이상할 만도 했다.
“아, 피곤하다-.”
풀썩-.
올리비아가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 드러눕자 불릿이 그녀에게로 몸을 돌리며 한마디를 하려 했다.
“올리비아, 과년한 처자가 그러…면 안…되….”
“응? 뭐가?”
“……아….”
올리비아의 자세는 한쪽 다리를 불릿이 있는 방향으로 젖히고서 다시 한쪽 팔로 머리를 지탱하고 있는, 말하자면 옆으로 누운 상태였는데 그 모습이 고혹적으로 보였는지라 불릿이 할 말을 잃은 것이다.
불릿의 반응에 어리둥절해하던 올리비아도 그가 무엇을 떠올리는지 짐작되자 순간 얼굴을 붉혔으나 시선을 피하진 않았다.
이상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곧 결과가 나올 것 같은 순간!
흙덩이가 난입하였다.
쪽.
“으헉?!”
“뭐, 뭐얏!”
흙덩이가 갑작스레 불릿의 볼에 뽀뽀를 하자 화들짝 놀란 불릿은 몸을 던지듯 자신에게 다가온 흙덩이를 안아들었고, 올리비아는 흙덩이의 존재를 알아채고서 둘이 아니라는 사실에 더욱더 얼굴을 붉혔다.
불릿에게 안긴 흙덩이는 올리비아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특유의 애달픈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올리비아가 미처 몸을 일으켜 세우지 못한 사이, 루나가 어디서 데려온 것인지 머리에 헝겊을 뒤집어 쓴 병장 하나와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스르륵-.
“아가씨, 식사하세…요.”
“오오…….”
루나가 말을 간신히 이은 후 연이어 터지는 병장의 감탄사.
한데 뒤엉킨 흙덩이와 불릿, 그리고 그 뒤에 요염한 자태를 뽐내는 올리비아가 누워있자 그들이 오해를 한 것 같았다.
“아, 아니야, 이건 말이지! 아앗?!”
올리비아가 다급히 일어서려다 침대보를 밟고 넘어지려하자 불릿이 팔을 뻗어 그녀를 낚아챘다.
풀썩!
“조심하시오, 올리비아.”
“으, 으응….”
한쪽엔 흙덩이를 안고, 또 한쪽엔 넘어지려던 올리비아를 낚아채 그대로 안아버린 상태의 불릿에게 병장이 존경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 …? 뭐야, 저 인간남자는?
그의 시선이 이상했는지 흙덩이가 불릿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묻자 불릿은 미간을 씰룩이며 루나에게 명령했다.
“루나, 이리 와서 좀 도와라.”
“네에-♪,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대영주님-.”
어쩐지 신나 보이는 루나가 쟁반을 한쪽에 내려놓고서 흙덩이를 받아서 제자리에 세웠고, 한쪽 팔이 자유로워지자 불릿이 올리비아의 하체를 쓸어 넘기며 마찬가지로 일으켜 세웠다.
“……닿았….”
신체접촉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올리비아의 얼굴은 벌겋게, 아니 그보다 더욱 더, 마치 화산의 용암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마지막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불릿은 제대로 듣지 못했으나 루나와 병장은 시시덕거리며 탁자를 이어붙여 식탁을 만들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혼돈의 카오스냐, 루나?”
“그렇다니까요? 히히!”
“반역자 놈들은 이런 사실도 모르고서 후계자가 없다고 난리를 친 거야? 어이가 없네.”
“빨리 나가요, 곧 하시겠어요.(?)”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다고.”
병장과 루나는 둘이서 속닥이며 재빠르게 식사준비를 마치더니 막사 밖으로 쌩하니 나가버렸다.
“1시간 후에 치우러 올 테니 오.붓.하.게.즐.기.세.요?”
“루나!”
올리비아가 소리치자 눈웃음을 흘리며 퇴장하는 그녀의 모습에 흙덩이가 식탁에 앉았다.
폭.
- 나도 빨리 클 거야.
그러면서 말도 없이 자신의 몫인 음식을 먹기 시작하는 흙덩이였다.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하자 불릿도 정신을 차리고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음식을 보며 올리비아에게 말을 건넸다.
“……식사를, 하는 것이 어떻겠소?”
그 사이에 조금은 진정됐는지 올리비아도 자리에 착석했는데, 치마를 입은 것도 아니거늘, 다리를 한데 오므려 앉아 매우 조신하게 행동했다.
불릿까지 자리에 앉자, 그의 입이 열렸다.
“그럼, 먹도록 하지.”
“응…….”
덜그럭.
달각, 달그락-.
- 합, 냠냠냠.
그 이후 막사 안은 식사하는 소리만 가득했다.
* * *
“다들 식사는 하였는가?”
주변의 그 어느 막사보다도 거대한 막사에서 회의를 시작하자 불릿이 나란히 앉아있는 간부들에게 안부를 물었다.
이에 간부들의 대표자인 군단장 뎁슨 레너드 남작이 입을 떼었다.
“다들 든든하게 식사한 것으로 아옵니다, 최고사령관각하.”
“…그냥 최고사령관은 빼주시게. 각하를 붙이는 시점에서 의미가 없군.”
“그럼 그리하겠습니다, 각하.”
호칭이 너무 길어지자 자신이 만들었던 최고사령관이라는 직위의 호칭을 빼버리는 불릿.
그렇다고 그의 마음가짐이 군인의 자세가 아니었던 것은 아니다.
“이곳까진 별다른 공작 없이 수월하게 접근했으나 내일부터는 다를 것이다.”
꿀꺽.
누가 침을 삼킨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막사에 울리는 침 삼키는 소리가 현재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우리의 목적이 반역자를 처단하는 것에 있으나, 그렇다고 지금 이 상태에서 돌격하는 것은 무모한 일, 방패병을 앞세운다 하더라도 본디 그랩 자작의 성은 국가를 상대로 수비하던 곳이기에 물자가 풍부하다. 크레파토스?”
불릿이 대략적인 설명을 가하자 그의 옆에서 대기하던 크레파토스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백작각하께서 말씀하셨듯이 일반적인 공성전을 생각해선 안 된다. 특히 주의할 것은, 적군이라고 해서 그들이 바포 변경백의 백성이라는 점을 망각해선 아니 된다는 것과, 무고한 주민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크레파토스가 말하는 것은 최대한 살상을 적게 하면서도 인질이 된 영지민들에게 피해를 입혀선 안 된다는 뜻이엇다.
“그래서 각하께서 생각하신 바, 시간의 여유를 두고 공략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당분간 군단의 병력은 이곳에서 상주하며 적들의 상황을 파악할 것이다.”
“호위병대장이여, 그렇다면 그동안 우린 무얼 한단 말이오?”
군단의 대장인 뎁슨 레너드 남작이 물음을 건네자 이에 대한 해답은 불릿이 주었다.
“군단이 주둔하는 것만으로도 놈들에겐 심리적 압박이 될 것이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나중에 알려주겠으나, 차분히 기다리면 절로 기회가 생길 것이니 기다려보도록. 크레파토스?”
“전체, 차렷!”
본래 이우우스 2급 행정관이 하던 수행원의 역할을 크레파토스가 역임하며 따라하자 이미 지난 몇 달간 회장의 회의에 익숙해진 간부들이 허리를 곧추세우며 정면을 주시했다.
“최고사령관께 대하여, 충.성!”
============================ 작품 후기 ============================
약속 드렸던 추천수 일천 기념화입니다.
일이 있어 예정되었던 12시보다 약간 일찍 올립니다.
그럼 저녁 6시와 밤 12시 10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