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4 사랑과 전쟁! =========================================================================
바포 변경백 중앙영지군, 일명 군단은 그대로 북상해서 모든 일의 원흉인 게슐린 그랩 자작의 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척-, 척-, 척-.
전이라면 이토록 박자가 맞는 발소리를 내기 힘들었겠지만, 개편된 군단에는 중간간부인 십인장과 백인장이 존재하고 있어 병사들을 통솔하기 한결 수월해졌다.
불릿의 연설에 힘을 받은 대다수의 평민 군단원들은 다소의 잡담을 나누면서도 차분한 분위기를 깨지 않고 있었다.
이것도 다 군사교육과 귀족으로서의 예를 아는 기사들이 중간간부로 들어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예전이라면 그저 상위병과 병장이 윽박지르고 폭력으로 제압했을 일인데, 귀족출신 기사는 아무래도 부담되다 보니 알아서 기는 모습을 보였던 것.
“최고사령관각하, 주변에선 몬스터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뎁슨 레너드 남작의 보고에 말에 탑승한 채로 나란히 걷고 있던 불릿이 한숨을 내뱉었다.
“…결국 각하라는 말은 끝끝내 붙이는군. 됐네, 됐어. 군단장까지 그럴 줄은 몰랐네.”
자신이 직접 손을 댄 군단이기에 명칭 하나하나에도 각별한 신경을 기울이고 있던 불릿이기에 평소라면 그냥 넘어갔을 부분에도 민감하게 반응을 했다.
불릿의 반응에 근엄한 모습을 보이던 레너드 남작이 어색한 웃음을 보였다.
“하하하…, 그래도 분위기는 꽤 좋지 않습니까?”
“흥, 말을 돌리려 하는군……, 하긴, 나쁘진 않네만.”
“그렇습니다, 각하.”
다각다각.
크레파토스까지 다가와서 대화에 참여하자 불릿의 양 옆에는 장군급인 인물 두 명이 달라붙은 형국이 되었다.
“크레파토스, 자네는 호위병대를 책임지지 않는가?”
레너드 남작의 말에 크레파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최고사령관각하의 안전은 우리 호위병대가 책임질 터이니, 군단장께선 적의 섬멸에만 주의를 기울이시면 되겠소.”
노장인 크레파토스가 장시간에 걸쳐 벌어지는 전장에 참여할 순 없다.
노련미라는 것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체력과 떨어진 순발력을 채울 수는 없던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맡겨진 직책이 호위병대의 대장인 것.
전장을 파악하는 눈이라면 그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할 수 있는 크레파토스였으니 일일이 지시가 필요한 일반기사들에게 있어 크레파토스만큼 어울리는 적임자는 없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쌀쌀해지는군.”
휘이이잉-
이중에서 가장 나이를 먹어서일까, 크레파토스가 혼잣말을 중얼거리기가 무섭게 매서운 꽃샘추위가 불어닥쳤다.
그러나 불릿의 군단은 이미 방한용품으로 무장한 상태인지라 행군으로 인해 달구어진 병사들의 몸은 추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중급 마정석을 내놓으시다니, 소인, 감탄했사옵니다, 각하.”
크레파토스가 고개를 숙이며 불릿에게 감사인사를 전하자 그는 손을 들어 보이며 입을 떼었다.
“모두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중인데 귀한 물건이라고 하여 아끼고만 있을 순 없는 법이지. 안 그런가, 뎁슨 레너드 남작?”
“…각하께서도 짓궂으신 면이 있으시군요.”
“하핫! 그러기에 누가 각하라고 부르라던가? 자네들도 참.”
“허허허.”
“하하하.”
남자들이 훈훈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을 때, 여자들은 여자들대로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아가씨, 절대, 절대 앞장서시면 안돼요?”
“맞습니다, 올리비아 경. 루나의 말처럼 올리비아 경은 백작각하의 배필이시니 몸을 아끼셔야 합니다.”
올리비아를 배려한 것인지, 몇 없는 여성기사들과 함께 그녀들은 마차에 탑승한 채로 이동하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멋들어진 갑옷도 입었겠다, 남들처럼 홀로 말을 타며 이동하고 싶어 했지만 불릿이 단호하게 거절한 관계로 어쩔 수 없이 마차에 올라탔다.
“루나는 대체 왜 따라온 거야?”
새로이 개편된 군단은 불릿의 지시에 따라 많은 부분이 변경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곳 중 하나라면 기사들의 시중을 들던 하녀들의 부재일 것이다.
아무래도 귀족들이기 때문에 부유한 이들은 하녀를 대동하기도 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불릿은 평민들의 인권을 상승시키려는 의도가 있었기에 그렇다.
이 또한 결사대와 용병으로 얻은 경험이 바탕으로 깔려있다.
그러니까 하녀인 루나가 위험한 전장에 따라올 필요가 없다는 뜻.
이에 루라는 갑옷을 입은 올리비아가 춥지 않도록 모포를 덮어주며 미소를 지어줬다.
펄럭-.
“아가씨도 참, 이건 전쟁이기도 하지만 대영주님과의 사이를 좁힐 수 있는 기회라구요?”
“…뭔 놈의 기회가 그리도 많아?”
올리비아가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흘겨보자 곁에서 같이 착석한 상태로 있던 2명의 여기사도 각각 말을 꺼냈다.
“이번 전쟁은 백작각하의 정당성이 부여된 내전이기 때문에 시작하기도 전에 승리의 추가 기운 상태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된 전장에서 피를 본 남자들은 여자를 갈구하더군요.”
“……? 그야 뭐……, 그런 것 같기도 한데….”
여기사들의 말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는 올리비아. 그녀는 용병으로 떠돌며 자신을 노리던 짐승들을 많이 보았기에 그런 면에선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과 루나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너희 자꾸 이상하게 말 돌리네? 루나가 왜 여기에 있냐고.”
이에 모범적인 기사의 예를 보여주던 그녀들까지 포함, 루나와 합세한 세 명의 여인이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더러운 상태로 결합하실 순 없으시잖습니까? 그래서 저희 셋이 올리비아 경의 목욕을 도와드리려 합니다.”
“싫어! 싫어! 절대 싫어!”
올리비아가 모포를 감싸 쥐며 빼액! 소리를 질렀으나 주변을 의식해서인지 그 소리는 마차 안을 감돌뿐이었다.
“어휴, 저것 좀 봐, 아일렌, 유실리아. 내 말이 맞지? 아직 손도 제대로 못 잡으신다니까.”
“그날 밤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도 백작각하께서 돌아봐 주셨으면…….”
아일렌과 유실리아라 불린 여기사들은 루나와 매우 친밀한 사이인 듯, 서로 말을 트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세 명 다 어려보이는 것이 갓 성년에 진입한 것처럼 보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유실리아라고 불린, 약간 청순한 느낌을 주는 여기사는 엄청 신경 쓰이는 말을 내뱉었다.
“와, 유실리아 너도 대영주님을 노리는 거야?”
“우리 중에서 백작각하를 사모하지 않는 사람은 없잖아.”
약간 발그레해졌으나 기사답게 부끄러움을 숨기는 기색은 없는 유실리아.
그녀의 말에 올리비아가 앙칼지게 입을 열었다.
“불릿은 내꺼니까 손도 대지마. 알았어?”
고양이의 으르렁거림 같았으나 이에 반응한 것은 유실리아가 아닌 루나였다.
“아가씨, 그러니까 빨리 독차지하시라구요. 기껏 목욕재계도 끝내고 비밀병기도 입혀드렸었는데 밤새도록 시끄러운 소리만 들리고, 대체 무얼 하신 건지….”
‘그거야 꼬맹이랑 싸워서 그렇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 흙덩이와의 애정싸움 때문에 불릿만 피곤해하고 결국 유야무야가 됐었던 그날 밤이었다.
반응을 보자면 곧 넘어올 것도 같았지만, 흙덩이를 어떻게든 떼놓지 않는 이상 그가 거사를 치를 것 같진 않아 보였다.
“에휴휴, 나도 그런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의무적으로라도 여러 명의 여자를 곁에 두는 걸 알아. 그래도….”
힐끗.
그러면서 올리비아는 슬쩍슬쩍 미소를 내비치는 당돌한 여기사 아일렌과 청순미를 뽐내는 유실리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유실리아는 본인이 불릿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을 감히 올리비아에게 밝혔으나 전혀 그것을 감추지 않았다.
“올리비아 경, 혈기왕성해지신 백작각하를 더 이상 방치하는 것은 그분에게도 괴로울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니 제가 나서서 희생하겠습니다.”
유실리아가 희생이란 말을 언급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으나 얼굴은 발그스레한 게, 사심이 한가득 그 자체였다.
참고로 말하자면 중앙영지의 여기사들은 그 수가 매우 적지만 대부분이 아름다웠는데, 그 이유는 거친 전장을 뒹굴지 않아도 됐으며 그저 실력만 검증받으면 됐기에 체력만 좋은 오크녀들이 없던 것이다.
이 말은 유실리아 또한 아름다운 여성이란 뜻이었으니, 그녀가 이런 포부를 내비치면 주춤하던 올리비아도 한발 내딛을 수밖에 없었다.
“알았다고! 하면 되잖아, 하면!”
결국 항복선언을 하고나서야 루나와 아일렌은 웃음을 보이기 시작했다.
유실리아는 아쉬워했지만 말이다.
“정말, 우리 일인데 왜 남들이 껴드는 것인지….”
올리비아의 투덜거림에 루나가 대꾸한다.
“그렇게 주춤거리다가 대영주님께서 덜컥 다른 여성에게서 아이를 배면 어쩌시려구요?”
“불릿은 안 그래. 놈팡이 놈들하곤 다르다고.”
불릿이 자기도 아니거늘, 뭔가 자랑스러워하는 올리비아에게 유실리아가 한마디를 더 건넸다.
“올리비아 경, 젊은 남성의 성욕을 무시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군에 여성이 거의 없는 이유가 비단 체력적인 이유에서만은 아니란 것을 상기해주시길.”
“그게 무슨 말이야?”
일단 도와준다니 내심 든든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올리비아가 의문을 보이자 유실리아의 볼에 홍조가 일었다.
“……그렇다는 겁니다.”
“??”
물음표 백만 개를 머리위에 띄우는 올리비아와 이상한 기색을 보이는 유실리아, 그리고 그 둘을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짓는 루나와 아일렌까지.
몇 없는 여성들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다각다각.
천천히 진군해도 이틀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기에 불릿은 조급함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상대측도 준비를 마친 상황, 괜히 빠르게 진군했다가 병사들이 지치면 전쟁이 더욱 길어질 뿐이었다.
어떤 식으로 전쟁을 수행할지 불릿이 고민하는 사이, 그가 타고 있는 말에 앉혀진 흙덩이가 그의 품안에서 체온을 나눠주고 있었다.
- 따뜻해?
“…중얼중얼…….”
흙덩이의 물음에도 신중한 선택이 군단의 목숨을 좌우하기 때문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불릿.
시선은 정면을 향해있으나 머리는 이미 게슐린 그랩 자작의 성의 구조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불릿이 고민에 빠진 듯하자 흙덩이는 쌀쌀한 날씨에 가만히 승마중인 불릿이 추울까봐 더욱 몸을 밀착해주었다.
포옥, 스윽-.
부비적거리며 자신의 안락함을 어필하는 흙덩이에 의해 흠칫한 불릿은 없는 턱수염을 매만지다가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쪽.
불릿이 고개를 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흙덩이가 입술을 맞대자 일순간 멍해진 불릿.
이에 흙덩이가 웃으며 말한다.
- 내가 있으니까 불릿은 괜찮아. 어려운 일이 있으면 흙덩이를 떠올려줘.
급히 주변을 훍어보던 불릿은 크레파토스를 제외하면 이 장면을 본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크레파토스, 비밀, 알겠나?”
“……주군, 취향이…….”
“제발 좀, 알겠는가?”
다시 이어진 불릿의 말에 억지로 고개를 끄덕인 크레파토스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불릿이 흙덩이에게 속삭였다.
‘자네 이게 무슨 짓인가!’
언뜻 성난 것도 같았지만 그 속에는 당황함이 묻어난 불릿의 음성에 흙덩이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 올리비아랑도 했는데 나는 안 돼?
‘으음…, 그것은….’
차마 대꾸하지 못하는 불릿에게 여전히 고개를 올려다보고 있던 흙덩이가 다시금 기습을 가했다.
츄-
“…….”
이번엔 단순한 뽀뽀가 아닌, 초를 셀 수 있을 정도로 긴 키스를 끝마친 흙덩이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 내 입술 따뜻하지?
“…….”
경을 칠 일이었으나 다행히(?) 이번엔 크레파토스도 다른 곳을 보고 있었기에 이를 목격한 사람은 없었다.
불릿이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흙덩이도 고개를 정면으로 돌리며 불릿의 품안으로 몸을 더욱 파고들었다.
‘…따뜻하긴 하군….’
흙덩이와 닿았던 입술이 후끈 달아오름을 느끼는 불릿이었다.
============================ 작품 후기 ============================
밤 12시 10분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