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정령사-97화 (97/241)

00097  영지순회  =========================================================================

불릿이 휴식을 취하면서도 초췌해지는(?) 이때, 직스 자작령을 방문한 불릿으로 인해 누군가는 다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애송이가 움직였다고?”

세월이 느껴지는 외모의 장년인이 왕좌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화려한 의자에 몸을 묻고서 말을 뱉는다.

“예, 각하!”

장년인의 물음에 아래에 부복한 이도 열성적으로 대답했다.

“곱게 죽을 것이지, 괜히 돌아와서 치욕을 당하려 하는군.”

장년인은 홀로 독백을 주고받으며 고민하는 듯하다 부복하고 있는 이에게 말을 던졌다.

“애송이가 움직인 이유는?”

“네! 예전부터 시행해오던 영지순회로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아마 무력시위지 않을까 추측됩니다!”

수하의 말에 장년인은 팔걸이에 놓인 손가락을 톡톡 치며 고민했다.

“후, 겨울이라서 가만히 내버려두려 했거늘, 기어코 움직이는군.”

“어찌할까요, 자작각하!”

“어허, 내 백작이라 부르라고 하지 않았더냐?”

“송구합니다, 게슐린 그랩 백작각하!”

수하와 대화를 주고받은 장년인의 정체, 그는 바로 반역자라 일컬어지는 게슐린 그랩 자작이었던 것이다!

그는 불릿이 복권한 이후로 주욱 그를 주시했는데, 최근 들어서 그 행보가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지더니 이제는 자신의 영토나 마찬가지인 직스 자작령에까지 영지순회를 시도했다.

비록 직스 자작령은 버린 곳이나 다름없었지만, 자신이 바포 변경백을 차지하고 나면 나중에 수복할 곳이었기에 감히 그곳에 발을 디딘 불릿을 괘씸하게 여기고 있었다.

“괘씸한 놈이로군. 여태껏 이 땅을 지켜온 것이 누군데 이제 와서.”

그동안 불릿은 결사대에 불려가 자신의 영토에 소홀했었다.

그렇다곤 해도 틈나는 대로 업무를 처리하는 등, 결코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간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었는데 그랩 자작은 그런 것은 염두에도 두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부터 본인이 하는 말을 잘 듣거라.”

“예, 각하!”

잠시 목을 가다듬은 게슐린 그랩 자작은 마치 왕이라도 되는 듯, 웅장한 어조로 수하에게 명을 내리기 시작한다.

“최근 바스톤 영지에서 알려지지 않은 상인과 용병들이 등장했다지? 그들에게 방해공작을 펼치도록 하라.”

“수위는 어느 정도로 하면 좋겠습니까?”

이에 그랩 자작은 50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악동처럼 장난스런 표정을 지으며 가볍게 말했다.

“죽일 수 있는 대로.”

* * *

한쪽에서 은밀하고 위험한 일이 진행되는 사이, 불릿은 아침식사를 하며 크레파토스에게 물었다.

“자네가 추천해준 대로 벙스 카텐은 믿을 만한 인물이더군. 좋은 인재를 발굴했네.”

“감사합니다, 각하!”

“감읍하나이다, 대영주님!”

불릿의 말에 크레파토스와 벙스 카텐은 나란히 감사인사를 올렸고, 한쪽 편에는 올리비아와 흙덩이가 조용한 식사를(…?) 나누고 있었다.

달각, 덜그럭.

달가닥-

아침메뉴는 의외로 조촐했는데, 이는 직스 자작령의 상황이 개선됐다곤 하더라도 물자를 낭비할 여유는 없었기에 그렇다.

“움움. 역시 아침은 빵에 달걀이지. 그치, 예쁜아?”

- …? 뭐래.

냠냠.

흙덩이는 올리비아를 힐끗 쳐다보더니 신경도 쓰지 않고선 자신의 것만 먹고 있었다.

흙덩이에게 식사가 제공된 연유는 이젠 피부색까지 완벽히 사람과 동일해진 까닭에 주변 모두가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굳이 착각이 아니더라도 ‘먹을 수 있겠지?’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런 흙덩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올리비아는 이상함을 느꼈다.

‘정령도 밥을 먹네?’

정령은 대개 ‘소환’된다. 그 말인즉, 실체가 없다는 것인데, 이 실체가 없는 존재들을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정령력이다.

한마디로 정령력으로 똘똘 뭉친 존재가 정령들인데, 어찌 사람의 음식을 먹을 수 있는지 올리비아는 궁금했다.

“얘, 얘. 넌 그렇게 먹고선 다 어디로 사라지는 거야?”

모름지기 먹은 만큼 나온다고(?)하지 않던가? 흙덩이가 여태까지 먹은 것도 꽤나 되건만, 한 번도 내보낸 것을 본 사람이 없었다.

그런 올리비아의 질문에 흙덩이가 마지막 남은 베이컨을 오물거리며 그녀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글을 썼다.

“ㅂ…ㅏ…ㅂ…ㅗ? 바보? 이게 진짜!”

꿀꺽.

올리비아가 화를 내건 말건, 흙덩이는 식사를 끝마쳤는데, 올리비아가 흙덩이의 머리에 꿀밤을 먹이기 직전에 불릿의 말이 울려 퍼졌다.

“지금 그 말은 특산물을 만들자는 겐가?”

놀라움이 묻어나는 불릿의 말에 올리비아는 내려가던 주먹을 멈췄고, 흙덩이는 그런 그녀의 손을 잡으려고 했으나 역시 마찬가지로 멈춘 상태였다.

불릿의 말에 대답하는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직스 자작령의 임시 대리자 벙스 카텐이었다.

“예, 대영주님. 현 바포 변경백의 재정상태는 날로 악화되어 주변영지들의 경우 백성들의 민심이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으음, 계속해보시게.”

자신에게 민감할 수도 있는 사항을 얘기하는데도 불릿이 발언을 허락하자 벙스 커텐은 고개를 숙인 후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대영주님께서 알려주신 것처럼 마수의 숲을 통해 어느 정도 상황을 개선할 수는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대영주님께서도 아시고 계실 겁니다.”

“그렇지. 그래서 외교적으로 거래를 성사시키거나 황무지를 개간시키는 등을 계획하고 있던 중이지.”

총집사인 밴이 언급했던 것을 포함, 3가지의 자금마련방안들은 게슐린 그랩 자작에게 알려져선 안 되는 사항이었지만 가신들에게까지 비밀로 하고 처리하기엔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위치가 있고, 또 믿을 수 있다 여겨지는 가신들에겐 회장이 아닌, 불릿이 사전에 일러둔 상태였다.

“소신이 생각한 바, 외교 건에 대해선 손을 대지 않는 것이 몸에 이롭사, 하고 여쭈는 바입니다.”

“흠, 그것과 특산물에 연관이 있는가?”

“대영주님, 루드밀라 왕국은 사실상 와해된 상태입니다. 이는 굳이 권력층만이 아닌 백성들조차도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지요.”

왕이 공식석상에 나오지 않은지도 오래 되었다. 워낙 힘이 없기도 하고, 지들끼리 알아서 영지를 꾸리는 탓에 왕이 뭔가를 할 수가 없던 것이다.

춘추전국시대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듯, 지금도 루드밀라 왕국의 남부지역은 ‘피의 강’이라는 말이 괜히 떠도는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왕실은 곧 사라질 것입니다. 다른 곳에 흡수되거나, 아니면 새로운 힘에 의해서든 말이지요.”

흡수, 그것은 왕족의 피를 자기들에게 섞어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것이고, 그도 아니면 아예 몰살시켜 새로운 왕족을 탄생시키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무엇이 되었든 피가 흐르고, 시체가 산처럼 쌓이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니 알 라스 폰 구울 백작과 왕실에 대한 중재 건에 대해선 이득을 취하실 수 없다 여겨지는 바입니다.”

“구울 백작이 본 바포 변경백을 노리는 것은 알고 있는 사항이니 상관없지 않겠나?”

크레파토스의 물음에 벙스 카텐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아닙니다. 지금은 구울 백작의 시선을 돌려야 할 때, 비정하다고 볼 수 있지만 지금의 저희는 약간의 이득보다는 시간을 벌어야 할 것입니다.”

비정하다고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비정한 것이 맞다. 유명무실해진 왕국이라 하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루드밀라 왕국의 일원, 자신의 안위를 위해 왕실을 외면하는 것을 뭐라 말하면 좋을까?

“그렇군. 그러면 그에 대한 대안방법인 특산물에 대해서 얘기해보도록.”

그러나 불릿은 비정한 방법을 선택했다. 그는 대영주, 한 지역의 패자이며 군주로서 백성들의 안위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온화한 편인 불릿이 이정도인데, 다른 지역의 군주들은 안 봐도 눈에 선했다.

“먼저 가난한 지방은 아니 됩니다.”

“어째서 그런가?”

이번엔 불릿 대신 크레파토스가 벙스 카텐에게 말을 걸었다.

대영주인 불릿이 작위도 없는 몰락귀족인 벙스 카텐과 자주 대화하는 것은 격이 안 맞아서 그렇다.

이에 벙스 카텐이 하는 말.

“현 직스 자작령을 예로 들자면, 이곳을 방문하는 상인들은 하나같이 물품을 판매하려하지 구매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게다가 이제 막 재건을 시작한 마당에 특산품을 생산할 정도의 여유도 없지요.”

가난한 곳이 가난한 이유, 그것은 다른 것을 할 만한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발전을 하려면 먹고사는 문제에서 벗어나 잉여자원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했다.

그것을 그 지역만의 특색을 지닌 특산물로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나가 문제인 것이지 죽기 직전의 거지들이 부자가 되려고 일획천금을 노리는 행동이 아니란 것이다.

“분쟁이 심한 곳도 안 됩니다. 그런 곳들은 상인들도 방문하기 꺼려하는 곳으로, 활발한 상거래가 이루어지기 힘듭니다.”

“그럼 대체 어쩌자는 겐가?”

바포 변경백의 상황에서 모조리 비켜나가는 조건들이기에 답답해진 크레파토스가 묻자 벙스 카텐은 한 명의 인물을 지목했다.

“베니스 남작이 이번 특산물계획의 핵심인물입니다.”

“…호오, 과연, 그러한가.”

단번에 파악했는지 불릿이 조그마한 감탄사를 터트리자 크레파토스가 자신의 주군, 불릿에게 물었다.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각하?”

“크레파토스여, 베니스 남작이 본 바포 변경백의 재무대신임과 동시에 상단을 갖춘 인물임은 알고 있겠지?”

“그야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재무대신인 베니스 남작은 간첩도 알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자체적으로 상단을 갖추고 있어 상인들에게도 유명한 이였고, 바포 변경백은 루드밀라 왕국의 얼굴이라 할 수 있었기에 그곳의 자금흐름을 담당하는 베니스 남작을 모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불릿도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재무대신은 본인에게 충성을 맹세하긴 했으나 자리가 자리인지라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칠 수 없는 인물이지.”

“예, 그래서 여지껏 논공행상에서 한발 비켜난 적이 많은 인물이기도 했지요. 허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더 이상 그에게 중립을 표방하라 할 수 없겠군요.”

“그래그래, 맞는 말일세. 그래도 베니스 남작이 본인에게 우호를 보이지 않았다면 중앙영지도 여기처럼 됐었겠지.”

중앙영지는 불릿만의 영토, 그렇기에 쉬이 손을 대기가 어려웠다.

베니스 남작이 그랩 자작의 마수에서 지켜낸 것만으로도 그는 할 일을 다 했다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제가 생각한 것은, 대영주님의 정령술을 토대로 농작물을 지어 베니스 남작을 통해 판매를 하는 것이 어떨까 싶사옵니다.”

불릿의 속성력이 물에서 땅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대부분의 가신들이 알고 있었다.

흙덩이가 성을 쏘다니는데 모를 수가 없던 것.

처음엔 흙덩이가 대체 누구의 아이냐고 묻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것은 불릿이 나서서 잠식시켰다.

“세상을 처음 구경하는 정령이니 소중히 다뤄주시오.”

…말만 들으면 무슨 자기 아이를 맡기는 듯했지만, 중앙영지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질이 나쁜 토지에 대지의 축복을 내리는 등, 꽤 많은 일들을 해왔다.

물론 그것은 불릿으로선 모르는 일들이다. 그냥 흙덩이의 취미라고 할 수 있겠다.

“향신료가 옛날보단 많은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다지만, 아직도 많은 평민들이 혜택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산물로 향신료를 하자는 얘기군.”

“예, 그 중에서도 후추를 비롯한 허브 종류의 질 좋은 향신료를 판매하면 좋은 수익을 거둘 것으로 예상됩니다.”

향신료는 여러모로 돈이 된다. 귀족들의 음식엔 꼭 들어가지만, 전에 불릿이 용병행세를 하며 다녔던 때엔 밍숭맹숭한 스프나 빵을 먹었던 기억을 볼 때 평민들이 자주 먹기엔 조금 부담스럽지 않나 싶었다.

“굳이 제가 있는 직스 자작령이 아닌, 베니스 남작령에 향신료 밭을 만들고자 하는 이유엔 대영주님의 정령술로 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어 많은 토지가 필요 없고, 질도 높이며 동시에 저희 바포 변경백의 물류산지라 할 수 있는 베니스 남작령이기에 운송비용도 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운송비용만 줄이더라도 남들보다 더 싼 값에 향신료를 판매할 수 있으니 상대에게도 좋고, 본인들도 손해 보지 않는 좋은 일이라 할 수 있었다.

- ……

그런데 벙스 카텐의 말이 이어질수록 어쩐지 흙덩이의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그렇게 얘기를 나누는 사이, 아침식사는 금세 끝나버렸고 불릿은 검토를 해봐야겠다며 흙덩이를 데리고 호위병력과 함께 직스 자작령의 밭을 둘러보려 나섰다.

============================ 작품 후기 ============================

추천이 700이 되어 한편 더 이어서 올립니다.

사실 저는 작가가 된지 얼마 안 된, 작가라도 해도 되겠지요?

초보작가인지라 연재란에 제 글이 보여야 그나마 클릭을 해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12시가 거의 다 되어서 추천수를 달성했기 때문에 잠시 고민한 결과 그냥 2개를 이어서 올리기로 했습니다.

내일은 저녁 6시와 밤 12시 10분에 올라올 예정이며, 만약 오늘처럼 추천이나 선작이 100단위를 달성한다면 또 다시 한편이 추가로 올라올 것입니다.

비축분이 줄어들 때마다 뿌듯함과 그걸 채워넣어야 하는 불안감이 공존하고 있네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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