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6 영지순회 =========================================================================
덜커덩, 덜컹.
다그닥-, 다그닥-
긴 행렬이 이어지며 영지로 들어서는 가운데, 영지의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몸소 행차한 영주가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오십시오, 대영주님, 올리비아 아가씨. 누추한 곳이지만 잘 오셨습니다.”
영주의 공손한 태도에 마차에서 내린 올리비아와 불릿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해주었다.
“안녕하세요.”
“그래, 잘 지키고 있었는가. 벙스 카텐?”
불릿을 맞이한 이는 벙스 카텐이라고 하는 이였는데, 중앙영지를 8방위로 둘러싼 영주들 중에서 이런 이름을 가진 인물은 없었다.
대체 누군고 하니, 불릿은 그러한 의문을 금방 잠식시켜주었다.
“자네가 이번 일만 잘 마무리하면 본래 작위로 복권시켜줄 수도 있으니 열심히 하게나.”
벙스 카텐, 그는 불의 정령을 다루던, 초창기 바포 가문과 함께 영지의 설립을 함께 한 가신가문의 일인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정령력이 사라져갔고, 쇠퇴를 거듭하더니 결국엔 친화력과 정령력, 둘 모두가 사라져 정령과의 계약이 해지된 불행한 자였다.
딱히 세력도 없으면서 가문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정령력까지 사라졌으니 자연스럽게 작위는 해지되고 말았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으니, 직스 자작이 망쳤던 영지를 불릿의 마음에 들게끔 키워내면 남작의 작위로 올려줌과 동시에 영지 또한 그대로 하사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연히 벙스 카텐은 뛸 듯이 기뻐했고, 열과 성을 다해 직스 자작령을 보살피고 있던 것이다.
“대단히, 정말 감읍합니다, 대영주님! 저에게 이런 기회를 주시고…,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바포 변경백에서 자신이 설 자리를 찾지 못했던 벙스 카텐은 기사로 전업했었는데, 핵심전력이라 할 수 있는 대영주 직속 기사단 ‘라체나’에는 입단하지 못했고, 그저 그런 일반 기사가 되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군기 하나만큼은 빠릿하다고 할 수 있었으니 그만큼 믿을 수 있는 가신도 흔치 않았다.
‘삐뚤어질 만도 하건만, 괜찮게 자랐군.’
불릿은 어릴 적의 벙스 카텐은 모른다. 기사가 되기 전까지는 그라는 사람이 존재하는지도 몰랐으니, 얼마나 가문이 쇠했던 것인지 알만한 대목이었다.
그래도 자포자기하지 않고 뭐라도 하려는 마음은 기특해보였고, 그것이 지금의 기회를 잡게 만든 원동력일 것이다.
이제야 20대 후반인 벙스 카텐에게 이런 기회를 주는 불릿을 올리비아는 하녀와 함께 속닥이며 눈을 빛냈다.
“얘, 얘. 역시 우리 불릿이 최고지?”
“그럼요, 아가씨. 대영주님만큼 다정다감하며 멋지신 분은 또 없지요.”
그러면서 한마디를 덧붙여 말했다.
“원래도 잘생기셨는데, 젊어지시니 정말… 황홀하세요….”
어딘가 풀린 듯한 목소리를 내며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는 것이, 어딘가의 열렬한 신도라도 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올리비아가 떠올리기를, 성 내에서도 불릿의 외모에 대한 하녀들의 극찬은 끊이질 않았었다.
자신의 것(?)인 불릿이 하녀들은 물론, 몇 없는 귀족가의 레이디들이 만났다 하면 꺼내게 되는 화제에 오른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불안하기도 했다.
‘다른 년들이 꼬리치진 않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물끄러미 흙덩이를 쳐다보았다.
‘저 요망한 계집애(?), 대체 왜 저러는지 몰라.’
올리비아도 흙덩이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분명 정령인 것은 맞는데, 하는 행동도 그렇고, 생김새도 영락없는 사랑에 빠진 미소녀 그 자체였던 것이다.
불릿도 흙덩이에게는 언제나 관대함을 보이니 은근한 불안감이 맴돌았던 것.
“에이, 아니겠지. 설마.”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어질 정도로 흙덩이에 대한 불안감이 표출되니 뒤에서 드레스자락을 들어주던 하녀가 속닥였다.
“아가씨, 무언가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응? 아냐아냐. 내가 무슨 고민이 있겠어?”
평소처럼 활발한 모습인 올리비아였으나 하녀는 여자끼리만 아는 무언가가 있는 것인지, 불릿과는 다르게 말을 트여주었다.
“대영주님은 청렴결백한 분이셔서 귀족분들이라면 으레 하나정돈 가지고 계시는 나쁜 소문도 하나 없으세요. 게다가 말이죠….”
정말 중요한 말인 듯, 벙스 카텐과의 대화에 여념 없는 불릿의 눈치를 보며 입을 떼는 하녀.
“대영주님이, 실은 깨끗한 분이시래요.”
발그랗게 달아오른 하녀의 얼굴은 무엇이 깨끗하다는 건지 알려주는 듯했다.
눈치가 빠른 올리비아도 덩달아 얼굴에 열이 오르자 순으로 부채질을 하며 더위를 식히려 했다.
“아아, 더, 덥다, 더워.”
다시 말하지만 지금은 겨울, 삭풍까지는 아니었으나 드레스 때문에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올리비아가 더위를 느낄 수는 없던 것이다.
그녀들의 은밀한 대화가 이어지는 사이, 남자들의 대화는 어느덧 끝나가고 있었다.
“오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제가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흠, 조금 피곤하긴 하군. 그러면 식사나 하면서 영지의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눠보도록 하지.”
“이쪽으로 오시지요.”
아직 직스 자작령은 제대로 수습이 된 상태가 아니었기에 병사의 수는 그리 많아진 것도 아니었다.
그들 대부분이 불릿의 얼굴을 알고 있던 이들이었고, 기사들 또한 당연히 그를 알고 있었다.
그래도 영지가 다시금 부흥의 분위기를 띄고 있어서인지 과중한 업무에도 밝은 얼굴을 보이고 있었다.
불릿이 마차에 오르며 말에 올라탄 벙스 카텐을 뒤따르려하자 조잘거리던 올리비아와 하녀도 마차에 오르기 시작했다.
한쪽에 멀뚱히 서있던 흙덩이를 냉큼 챙긴 것은 올리비아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 * *
풀썩-.
“하아, 피곤해!”
하녀의 도움으로 드레스를 허겁지겁 벗어낸 올리비아는 흉부를 조이는 코르셋에서 해방되자 살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코르셋이란 것이 가슴을 강조하고 허리를 조여 매기 때문에 숨이 막히는 것은 당연했다.
그나마 올리비아의 몸매가 코르셋이랑 흡사했기에 압박을 덜 받아서 피가 안 통하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
과거 어느 귀부인이 코르셋으로 인해 질식사한 예도 있으니, 코르셋의 무서움을 모르는 남자들은 귀족 레이디들의 고통을 모를 것이다.
“피, 그런 말을 하면 내가 어떻게 반응하냐구.”
올리비아는 아직도 마차 안에서의 일을 떠올리면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올리비아, 아직 내 마음을 잘 모르겠다. 너에 대한 이 감정, 너에 대한 이 감정, 이것을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 너와 함께한 것이지. 이번 영지순회가 끝나고, 만약 너와 나의 마음이 맞다면, 그땐 새로운 가계가 생겨날 것이다’
메아리치는 마지막 말.
‘그땐 새로운 가계가 생겨날 것이다.’
‘새로운 가계가 생겨날 것이다.’
‘새로운 가계….’
‘생겨날 것이다….’
‘생겨날….’
‘생겨.’
‘생겨, 생겨, 생겨, 생겨….’
“꺄아아악!”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며 남들은 들을 수 없게 소리를 지르는 올리비아.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귀 끝까지 시뻘게진 상태였다.
그렇게 온몸으로 부끄러움을 나타내며 침상에서 발버둥 치던 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비로소 잠잠해졌다.
“에휴휴…….”
베개를 껴안고선 벌렁, 몸을 뒤집은 올리비아는 천정을 보며 불릿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고맙소이다.’
‘미안하오. 이걸로 좀 닦으시오.’
‘그러는 올리비아야 말로 그 검술은 어떻게 된 것이오?’
‘올리비아, 과년한 처자가 그러면 못쓰오.’
‘올리비아, 힘내시오!’
‘크윽, 올리비아!’
‘루드밀라 왕국은 처음이오?’
‘당신이 있어 내 언제나 든든하오.’
‘올리비아에게 어울리오. 아름답구려.’
그런 말을 듣고 난 직후에 적막감이 감도는 곳에 홀로 있자니 온갖 상념이 떠돌았다.
그리고 마지막을 강타하는 과거의 기억.
‘올리비아!’
그렇게 외치며 테라스에서 슬피 울던 올리비아에게 깊은 입맞춤을 하던 불릿.
그토록 열정적인 키스를 받고서야 여장부인 올리비아라도 그에게 빠지지 않을 수 없던 노릇이다.
“악, 악, 악!”
가빠오는 숨을 견딜 수가 없었는지 베개로 얼굴을 가리며 소리를 지르는 올리비아.
그녀에게 있어 이번 여정은 행복감에 못 이겨 난리를 칠 정도로 아찔한 여행이었다.
“…귀가 가렵군.”
평소 청결함에 신경 쓰던 불릿이기에 갑작스런 귓구멍의 가려움은 조금 불쾌한 일이었다.
그게 신경 쓰여 귓가를 매만지자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던 흙덩이가 벌떡 일어나 의자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는 불릿에게 다가왔다.
도도도-
키가 컸어도 여전히 흙덩이는 어린이처럼 걸어 다녔는데, 그게 귀엽게 어울려서인지 불릿도 딱히 말을 하진 않았다.
흙덩이가 다가오는 소리에도 불릿의 눈은 서류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비록 직스 자작령이 다음해까지는 세금을 내지 않더라도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는 알아야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관련사항이 많았지만, 나열하자면 한도 끝도 없었다.
- 후우-.
오싹.
흙덩이가 귓구멍에 숨을 불어넣자 화들짝 놀란 불릿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쿠당탕!
의자가 뒤로 넘어가며 요란한 소리를 내자 흙덩이도 깜작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그를 쳐다보았다.
“이, 이게 무슨 짓인가, 흙덩이여?”
흙덩이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불릿은 한쪽 손으로 귀를 가리며 물어왔고, 흙덩이는 예상치 못한 그의 반응에 입을 우물거리며 대꾸하였다.
- 나는, 그저, 불릿이 가렵다길래, 시원하게 해주려고…
인간들은 시원하다는 표현을 여러 방면으로 사용한다. 뜨거워도 시원하다던가, 매워도 시원하다 표현하고, 때로는 알싸한 향도 시원하다고 말한다.
지금 불릿이 시원하려면 귓구멍은 귀이개로 파내는 것이 제격이었는데, 거기까지 파악 못한 흙덩이가 실수를 한 것이다.
그렇다고 크게 혼낼 일도 아니었기에 불릿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무릎을 꿇고서 혼난 아이마냥 고개를 푹 숙인 채 손을 뒤로 모은 흙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스윽스윽.
“괜찮네, 괜찮아. 자네가 본인을 생각하는 마음은 충분히 알고 있으이. 인간의 말은 어려운 구석도 있으니 오해할 만도 하지.”
흙덩이는 불릿이 자신을 부드럽게 달래주자 울컥했는지 그를 껴안으며 흐느꼈다.
- 미, 미안해. 장난친 거 아니야. 정말이야.
평소 불릿이 이만큼이나 놀란 것을 본 적이 없었고, 신체의 반응도 예사롭지 않았기에 흙덩이는 불릿이 화가 난 줄 알았다.
불릿이 세상의 전부인 흙덩이에게 있어 그에게 미움 받는 것은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
한동안 흐느끼던 흙덩이를 껴안고서 부드럽게 등을 쓸어내려주던 불릿은 순간 흠칫했다.
‘뭐지, 이 손에 걸리는 감촉은…?’
흙덩이가 불릿의 앞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도 옷을 입고 있긴 했다.
하지만 그때는 하늘하늘한 원피스 차림이었고, 딱히 무언가를 더 껴입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아니, 정령이 그렇게까지 차려입고 나타났다는 점에서 놀라워해야하지 않았을까 싶다.
최근엔 자신과 나이가 같은 40이나 먹은 아줌마인 안나가 엄마마음이라도 발동했는지 흙덩이에게 이것저것을 입혀주었는데, 이에 따라 주변의 하녀들이 흙덩이에게 뭔가를 주섬주섬 챙겨주던 것을 불릿도 목격했었다.
- 우웅, 불리잇…
뭔가 우는 것도 아니고, 흐느낌도 아닌 애매한 어조였지만 아직 껴안아주는 상태였기에 그것을 확인할 순 없었다.
그런 것을 확인하기에 불릿의 머리는 뭔가 복잡한 상태였다.
슬며시 눈알을 아래로 향하니 흙덩이의 등에서 뭔가 얇은 줄 같은 것이 보였다.
이것 때문에 불릿이 흙덩이의 등을 쓸어내려줄 때 걸렸던 것인데, 무언가해서 자세히 확인해보니 또 순간 불릿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 불릿? 왜 그래? 흙덩이가 또 잘못했어?
“아닐세, 아니야. 아니긴 한데….”
급히 대꾸한 불릿이 흙덩이의 등을 쓸어내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더듬는 것도 아닌 괴상한 짓을 하며 껴안고 있자 흙덩이의 음성에서 흐느낌이 사라졌다.
왠지 모르게 엉거주춤, 허리를 뒤로 빼는 것이 자신의 가슴과 맞닿으려고 하지 않는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 ……불릿?
‘안나! 대체 흙덩이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불릿이 흙덩이의 등에서 확인한 그것, 그것은 바로 모양을 잡아주고 교정해주며 또한 보호도 해주는 여성용 속옷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