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5 그 정령사의 사정 =========================================================================
우우웅-
끊임없이 흡수되는 마정석, 그것은 주변에 널린 빛을 잃은 마정석의 개수만큼 불릿이 얼마큼 수련하고 있었는지를 알려주었다.
불릿은 주변 영지를 순회하기 전에 벤젼스가 보내온 마정석을 통해 정령력을 쌓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무력시위를 하려면 자기 자신도 단련을 게을리 할 수가 없었던 노릇이다.
명색이 정령으로 일어선 가문인데 가주의 힘이 미약해서야 말이나 되는가?
그래서 자신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다 명확히 알려주려면 정령의 힘을 보여줘야겠다 생각해 이처럼 수련을 거듭하고 있던 것이다.
- ……
그리고 수련하는 불릿의 곁을 지키고 있던 흙덩이는 예의 어느 때처럼, 하나의 마정석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찌나 뚫어져라 쳐다보는지 갖고 싶다는 티를 마구 내고 있었기에 불릿은 슬며시 눈을 떠 그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눈을 감고 있는 편이 집중이 잘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잠든 것도 아닌데 눈을 떠선 안 될 이유도 없엇다.
불릿이라고 이러한 수련이 재밌는 것은 아니었기에 간간히 눈을 떠서 잠을 물리치고 있었는데, 그러한 와중에 흙덩이가 눈에 띈 것이다.
흙덩이의 모습에 예전의 광경이 떠오른 불릿은 잠시 수련을 중단하고 흙덩이에게로 다가갔다.
스윽…
“그것이 갖고 싶은가, 흙덩이여?”
불릿의 물음에 흙덩이는 대답도 않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정석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상점가에서 장난감을 갖고 싶어 하는 아이가 떠올랐지만 고개를 살짝 흔드는 것으로 상상을 지우는 불릿.
그는 뚫어져라 쳐다보아지던 마정석을 집어다가 흙덩이에게 건네주었다.
“자, 받으시게. 이곳에서는 마정석의 수급이 원활한 편이니 자네도 간간히 받을 수 있겠군.”
- ……
그토록 원하던 마정석이었음에도 받지 않는 흙덩이. 이를 이상히 여긴 불릿이 입을 열려하자 흙덩이가 먼저 선수를 쳤다.
- 먹여줘.
“…방금 뭐라고 했는가?”
불릿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물었고, 흙덩이는 볼을 살짝 부풀리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 부끄럽게…, 먹여줘. 아아-.
인간과 똑같은 치아와 혀를 내보이며 입을 벌린 흙덩이에게 불릿은 어찌하면 좋을지 몰랐다.
‘입안의 구조까지 인간과 흡사, 아니 똑같군. 역시 기억력이 비상해서 그런지 신체를 구성하는 것도 완벽에 가까운….’
- 아아--.
그가 잡생각을 하는 중에도 흙덩이는 계속해서 앙증맞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애써 외면하려고 했으나 이토록 바라니 안 해줄 수도 없는 모양.
결국 불릿은 해본 적도 없는 먹여주기를 시도하게 되었다.
“으음, 여, 여기 있네. 자….”
- 아아-, 앙.
덥석.
오물오물.
단단한 광석인 마정석을 먹는 것치곤 오물오물, 귀엽게도 먹었으나 불릿의 심정은 갈수록 복잡해졌다.
‘이게 뭐하는 짓인지…….’
생전 해본 적 없는 먹여주기를 정령에게 해주니 싱숭생숭한 불릿.
옛날에도 여자와는 연이 없었기에, 아니. 없었다기보다는 자신이 멀리했기에 이러한 애정행각 같은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흙덩이에게 한 것은 뭔가 미묘한 것이라 예외라고 넘길 수 있지만, 그래도 복잡한 기분이었다.
‘…올리비아?’
문득 올리비아가 떠올랐으나 자신이 왜 올리비아를 떠올렸는지 모르는 상태였다.
그는 이런 면에선 뭘 해도 초심자였기에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관측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왜, 체스도 옆에서 3년을 지켜보면 상대의 수를 예측할 수 있으나, 막상 해보라고 하면 지켜만 봤었기에 훈수만 둘 줄 알지 정작 본인은 가장 말단인 폰(pawn)조차도 움직이기 버거운 법이다.
꿀꺽.
목넘김이 들림과 동시에 흙덩이를 바라보니 잘 먹었다는 듯 배를 두들기고 있었다.
‘…? 방금 침 넘기는 소리가….’
목넘김, 그것은 동물이 침이나 음식물 등을 넘기며 생기는 식도의 움직임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겉모습만 따라하는 정령인 흙덩이가 낼 수 있을 만한 소리가 아니라는 뜻.
그런데 그러한 소리가 들리자 이상했던 것이다.
- 불릿이 먹여주니까 더 맛있다. 헤헤.
“……그러한가?”
- 응. 이제 쓰담쓰담해줘.
불릿은 쓰담쓰담이라는 단어를 말한 적이 없었으나 성의 내부엔 많은 사람이 있었기에 그들 중 누군가에게 배웠을 것이다.
이젠 언어를 배우는 것에 더 이상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었기에 그 점에 대해선 가벼이 넘기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스윽, 스윽.
‘가만, 이게 머리를 쓰다듬어줄만한 상황인가?’
별로 한 것도 없고, 흙덩이가 삐진 것도 아닌데 어째서?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손은 지 알아서 움직였다.
* * *
빰빠빠빰 빰빠밤-
“불릿 폰 백작각하 납시오!”
요란한 악기소리와 함께 불릿이 마차에 탑승한 채로 창문만 연 채로 손을 흔들어주었다.
“여러분, 다녀올게요!”
어쩐지 같이 탑승한 올리비아가 아름답게 치장한 상태로 고개를 내밀고서 팔을 흔들어주자 주변의 영지민들이 우레와 같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
“백작각하, 만세!”
“바포 변경백, 만세!”
수많은 호위에 둘러싸인 불릿이 대로를 통해 중앙영지를 벗어나자 영지민들은 기쁜 기색을 감추지 않고 그를 배웅해주었다.
그동안 바포 변경백은 불릿의 부재로 인해 연례행사인 영지순회를 못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영지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침체되어 있었고, 점점 질이 나쁜 인물들이 수면위로 솟아오르는 모습이 보였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귀환한 불릿이 화려하게 자신의 등장을 내비치고, 반역자들에 대한 철퇴를 선보이며 기대감이 한껏 상승한 상태였다.
그러니 모처럼만에 다시 진행되는 영지순회가 반갑기 그지없던 것이다.
그렇게 영지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마중 받은 불릿은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열어놨던 창문을 닫았다.
탁.
“후아, 죽는 줄 알았네!”
정작 이 행사의 주인공인 불릿은 점잖게 손을 흔들어주었는데, 올리비아는 불편한 차림인 드레스를 입고서도 창문에 고개까지 내밀며 신나게 팔을 흔들어주었다.
“아가씨, 바깥공기가 차갑습니다. 다음부턴 그러지 말아주세요.”
이전처럼 혼자서 이동할 수 있는, 섹시함을 강조한 드레스가 아닌 전통복장의 드레스인지라 그녀를 곁에서 도와줄 하녀가 같이 동행한 상태였다.
그런 하녀의 핀잔과 조언 섞인 말에 올리비아가 복장을 가다듬으며 구시렁거렸다.
“뭐야, 너까지 그러기야? 안나 아줌마는 평소엔 활발하면서 예의에 대해선 되게 깐깐히 굴더라.”
“모두 다 아가씨를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공손히 대꾸하면서도 조곤조곤, 자신이 할 말을 다 하는 하녀에게 결국 올리비아는 입술을 비죽이며 고개를 돌렸다.
“흥, 불릿, 저것 좀 봐. 나한테 막 뭐라고 한다니까?”
그녀는 맞은편에 위치한 불릿에게 일러바쳤으나 그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본인이 보기에도 맞는 말인 것 같소. 모름지기 올리비아 나이대의 처녀라 함은, 조신함과 더불어 귀족으로서의 예의범절을 지켜야….”
“처녀는 무슨, 자기가 가져가놓고는.”
우당탕탕-!
“나, 나는 그러지 않았어!”
히히힝!
마차가 흔들리자 바깥에선 말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곧바로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각하, 무슨 일이옵니까?! 설마 자객이!”
“아니다, 아니야! 그냥 잠시 넘어졌을 뿐이네!”
마차 안에 앉아있는 이가 넘어질 수도 있단 말인가? 불릿이 타고 있는 마차는 누워서 수면도 취할 수 있도록 제작된 특제품이었으나 넘어질 만큼 넓진 않았다.
그러나 크레파토스는 불릿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기에 의심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네. 그러니 자네는 본래 임무를 수행하도록.”
“…알겠사옵니다, 각하.”
다그닥, 다그닥…
말이 멀어지는 소리와 함께 불릿은 한숨을 쉬며 올리비아에게 말을 건넸다.
“무슨 농을 그리 심하게 하시오?”
“농담이라니? 너야말로 너무한 거 아니야? 내 입술을 훔쳐놓고선….”
그러면서 살짝 눈을 내리깐 상태로 자신의 입술을 매만지는 올리비아.
이에 하녀가 흥미진진하다는 듯 초롱초롱 눈빛을 빛내자 불릿이 기침했다.
“크흠! ……그것에 대해선 내…내가 오, 올리비아를 책….”
“책? 책 뭐? 뭔데?”
“으음, 책임을….”
그때, 불쑥 흙덩이가 난입했다.
- 짜잔, 흙덩이 등장.
대사만 보면 상큼발랄 했으나 얼굴은 무표정, 어투는 무미건조.
전혀 생동감이 없는 모습으로 흙덩이가 둘의 사이를 막아섰다.
백작이라는 작위를 가진 대영주가 타는 마차이기에 흔들림이 적긴 했으나, 그렇다고 서있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아무렇지 않게 둘의 사이를 가로막은 흙덩이가 신기해보였다.
그러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으니….
- 그리고 불릿의 품은 내꺼.
포옥.
말과 동시에 불릿을 껴안으며 품에 안기는 흙덩이. 이에 올리비아와 하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올리비아는 눈을 ‘치켜’떴다.
“꼬맹아? 어린애는 절로 좀 가지? 잠이나 자시던가.”
부글부글 끓는 것인지 말에서 이를 악문 것이 느껴졌으나 흙덩이는 천하태평이었다.
“후우….”
불릿이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는 사이, 흙덩이는 불릿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고개를 돌려 올리비아에게 혀를 내밀었다.
“이게 정말!”
벌떡! 일어서려던 올리비아는 강제적으로 다시 자리에 앉고 말았다.
쿵!
“아악!”
천장에 머리를 찧은 올리비아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수그리자 곁에 있던 하녀가 안절부절 못하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어머, 어쩌면 좋아! 괜찮으세요, 아가씨?”
“으으, 너무 아파….”
세게 찧은 것인지 옥구슬 같은 눈물을 또옥 떨구자 불릿도 그것을 보고선 자신에게 안긴 흙덩이에게 부탁했다.
“흙덩이여, 올리비아를 치료해주시게나.”
- …꼭 그래야해?
어쩐지 하기 싫은 모양이었으나 이번만큼은 불릿도 단호했다.
단호할 땐 단호한 남자! 단호박(?) 불릿!
“지금 해주시게. 내 부탁하지.”
- 어쩔 수 없네.
뭉기적 거리며 불릿의 곁에서 벗어난 흙덩이가 올리비아에게로 다가가더니 고개를 숙인 채 글썽이던 그녀의 머리를 양손으로 붙잡고 속삭였다.
- 바보 올리비아, 아프지 마, 아프지 마…, 조금 아파도 될지도…
마지막 말이 신경 쓰였으나 은은한 빛과 함께 정령력이 빠져나가자 올리비아도 고통스러움을 멈추고서 고개를 들었다.
“훌쩍, 고, 고마워, 예쁜아.”
얼마나 아팠었는지 코까지 훌쩍이며 고마워하자 흙덩이는 불릿을 쳐다보더니 어깨를 늘어뜨리며 불릿의 품안 대신, 그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토옥.
- 역시 인간은 치사해. 그렇게 말하면 어떡하라고…
뭐라 구시렁거렸으나 그런 말까지 들을 수 있을 만큼 마차 안이 고요한 것은 아니었다.
달리는 마차 안은 생각보다 시끄러웠기에, 가까이 맞붙은 상태가 아니라면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혼자서 노는 흙덩이를 제외한 채 불릿이 올리비아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제 좀 진정되었소, 올리비아?”
“으응…. 미안, 너무 들떴었나봐.”
지금은 겨울이었기에 올리비아도 딱히 거리로 나선 적이 없었기에 심심하던 차였다.
그래서 이렇게 타 지역으로의 외출은 신경 쓰이면서도 기분이 들뜨던 것이다.
“괜찮소. 내 올리비아를 데려가는 것은 호위의 목적이 아니었으니 말이오.”
올리비아는 크레파토스보다 뛰어난 여검사다. 지금도 마차의 한켠에 그녀의 검이 실려 있었는데, 그렇다곤 해도 하녀까지 대동해야할 드레스차림의 그녀에게 칼질을 시킬 생각은 불릿에겐 없었다.
“그럼 왜 같이 가는 거야?”
“영지를 순회하며 본인이 젊어진 것을 주요가신들을 제외하고도 백성들에게 알려야하기 때문이오.”
가신들만 불릿을 알아선 안 되었다. 영지의 근간은 다수를 차지하는 백성들, 그렇기에 불릿은 자신의 바뀐 모습을 대중에 알려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올리비아는 여전히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그러니까 왜 같이 가냐구. 나야 신나지만, 딱히 이번 여정이랑은 관계없잖아?”
“…….”
잠시 침묵하던 불릿이 입을 떼면서 하는 말.
“아직 본인의 마, 후우. 편히 말하겠소. 올리비아, 아직 내 마음을 잘 모르겠다. 너에 대한 이 감정, 이것을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 너와 함께한 것이지. 이번 영지순회가 끝나고, 만약 너와 나의 마음이 맞다면, 그땐 새로운 가계가 생겨날 것이다.”
편히 말한다면서도 여전히 무뚝뚝했으나 올리비아의 얼굴은 시뻘겋게 변했고, 하녀는 ‘어머, 어머.’만 반복해서 속닥이고 있었다.
이 중에서 가장 불만을 가진 것은 다름 아닌 한 소녀(?)였다.
- 바보, 멍청이, 바보, 흥.
덜커덩, 덜컹!
달리는 마차는 시끄러운 법이고, 작게 속삭이는 소리는 잘 안 들리는 법이었다.
============================ 작품 후기 ============================
오늘 밤 12시 10분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