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4 그 정령사의 사정 =========================================================================
“으음…….”
사락-.
사라락, 팔락-.
연신 문서를 넘기며 업무에 열중하는 불릿. 찡그려진 그의 얼굴은 좀체 펴지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진행하는 일이 생각만큼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 힘들어? 좀 쉬는 게 어때?
그리고 불릿이 업무를 보는 동안 흙덩이는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는데, 아니.
지키고 있다기보다는 바싹 달라붙은 게 애정을 갈구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도저히 정령이라 생각되지 않는 행동은 언제나 불릿을 난감케 만드는 요소 중 하나였다.
“…크흠. 흙덩이여, 아직 처리해야 할 내용이 남았으니 조금만 기다려주시게.”
부탁도 아닌 통보에 팔을 붙들고 안겨오던 흙덩이가 볼을 부풀리며 살짝 떨어졌다.
- 치사해. 올리비아하고는 뽀뽀도 했으면서.
“푸웁!”
뜬금없었지만 강력한 공격(?)에 불릿은 문서가 뚫릴 기세로 헛숨을 뱉어버렸다.
누가 보기라도 했으면 불릿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당황하는 모습이었으니, 그의 감정이 얼마나 흔들렸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 그 얘기는 나중에 하지.”
처음 듣는 말도 아니었으나 좀체 정신을 가누지 못하는 불릿의 모습이 재밌었던 것일까?
흙덩이는 살짝 요염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몸을 바싹 밀착시켰다.
부빗부빗-.
- 왜에? 흙덩이도 나중에 해주려고?
이전처럼 속이 비치는 형태의 속옷은 아니었지만, 새하얀 프릴 드레스는 열넷쯤으로 보이는 흙덩이의 나이대에 어울리면서도 기묘한 분위기를 흘려냈다.
‘…정령 맞지? 맞는 거지?’
체면상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어투의 말. 신체의 영향을 받은 말투였으나 그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할 만큼 당황하고 있었다.
누렇다고 여겨졌던 흙덩이의 피부는 ‘앗’하는 순간 인간의 그것과 다를 바 없어졌고, 최근 조금씩 커지는 것도 같았고, 무엇보다 부풀어 오르는 괘씸한 가슴은….
“크흠! 큼! 크.흠!”
- 우후훗, 불릿, 불릿.
뭐가 그리도 좋은지 모르겠으나, 팔에다 몸을 비비던 흙덩이는 불릿의 무릎으로 목표를 변경하여 볼을 비벼댔고, 그로인해 업무가 잠시 중단된 불릿은 하는 수 없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보고서의 내용을 머릿속에서 떠올려야했다.
‘사냥은 순조로움, 경상을 제외하면 크게 다친 이도 없고….’
그가 최근 가장 신경 쓰는 곳은 다름 아닌 바스톤에 주둔한 벤젼스들이었다.
몬스터의 가죽과 피, 뼈 등의 부산물은 여러 상인들을 통해 나눠 판매하여 신경을 분산시키고, 마정석은 따로 모아 마탑에 넘길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과연 한 지역의 영주답다고 할까, 불릿이 미처 신경 쓰지 못한 부분에서도 꼼꼼함을 보여주어 그에게 믿음을 주었다.
‘브룩 남작이 잘해주고는 있으나…, 마정석에 대해선 고민 좀 해봐야겠군.’
마정석은 현재 답보상태에 빠진 불릿의 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 예로, 흙덩이의 성장(?)도 멈춘 상태이고, 여기서 한 단계 앞으로 더 나아가려면 실전보다도 정령력이 필요한 상태였다.
실전경험이야 젊어지면서 속성력이 바뀜과 동시에 바포 변경백까지 오며 겪을 만큼 겪었다.
중급의 경지에 올라서면 모를까, 하급의 수준에서는 더 이상 경험을 쌓을 필요가 없다는 소리였다.
“1할은 따로 추리라는 말을 해야겠군.”
원정을 간 중앙영지군, 지금은 개편된 군단의 중대가 모으는 마정석에서 1할이면 무시 못 할 양일 것이다.
그들은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바포 변경백의 정예중의 정예였으며, 지휘관으로는 가장 낮은 십인장부터 시작하여 군단장까지, 모두가 기사의 칭호를 획득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마수의 숲의 생태계와 영역을 조절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자제하겠으나 그 양이 어디로 가겠는가?
한 명의 정령사가 그만한 양을 소모한다니 지금 상황에서는 아까운 것이 마정석이었다.
- 헤헤, 불릿이 좋아.
얼굴을 부비는 것에서 만족하지 못했는지 흙덩이가 무릎으로 기어 올라와 그의 품안을 차지했으나, 이미 깊은 고민에 빠진 불릿은 무의식중에 머리가 아닌 흙덩이의 다른 신체를 쓰다듬고 있음에도 이를 깨닫지 못하였다.
“으음, 대체 얼마나 소모해야 가능할는지….”
재능이 있다 여겨지는 정령사들이 평생을 노력해야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중급의 경지였다.
결사대의 일원들이 하나같이 천재와 수재여서 그렇지, 불릿도 그에 못지않은 수준급의 물의 중급 정령사였었다.
이번에는 속성에 대한 친화력도 높았고, 정령과의 사이도 매우 좋은 상태였으니 시간만 지나면 자연히 해결될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조급함을 드러내는 데엔 아무래도 게슐린 그랩 자작이라는 반역자의 존재가 크게 작용할 것이다.
“흐으음….”
- 불릿은 여기가 좋아?
스윽스윽.
고민을 하던 와중에도 불릿이 흙덩이를 쓰다듬고 있었는데, 흙덩이가 고개를 올려다보며 묻자 흙덩이의 부드러운 머리칼이 그의 턱을 간지럽혔다.
이에 정신을 차린 불릿이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자 절로 기겁했다.
“으헉! 고, 고의가 아니었네!”
냉큼 손을 치웠으나 그가 손을 뗀 부위는 이제 막 부풀기 시작한 흙덩이의 가슴, 평소 흙덩이는 자신의 그곳을 신경 쓰고 있었기에 불릿이 만져주자(?) 어디서 배웠는지 허리에 손을 얹고서 기분좋아했다.
- 나도 이제 좀 있는 것 같아?
“그것은, 음.”
- 좋아?
“…으어…?”
- 좀만 기다려주면 올리비아랑 비슷해질 거야.
“…….”
침묵. 이 상황에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란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는 불릿이었다.
가만히 내버려두니 갈수록 흙덩이의 접촉이 심해지자 불릿이 가까스로 입을 떼었다.
“흙, 흐그더. 으음. 흙덩이여, 친밀을 위한 의식에 이러한 접촉은 필요가 없으이.”
- 응. 그래서, 불릿도 나 좋아하지?
“…그렇긴 하네만.”
- 헤헤.
흔들흔들.
한층 기분이 더 좋아졌는지 다리를 까닥이며 자신의 상태를 나타내는 흙덩이.
이러한 점들을 보면 흙덩이가 하급의 틀을 벗어나 중급에 들어서기 직전이란 것을 알 수 있었으나 어쩐지 그것도 애매해 보였다.
‘중급에 들어서기도 전에 변화를 보일 수도 있는 것인가?’
정령의 모습은 소환되는 순간 그것으로 구체화된다. 한번 정해진 모습은 변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정설인데, 흙덩이는 초기의 모습과 비교하면 많은 변화가 이루어졌다.
일단 인간처럼 성장한 모습을 보였는데, 언어의 발달이라던가 키도 컸고, 판판했던 가슴도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피부, 누렇던 피부는 어디간지 온대간대 없었고, 지금은 불릿을 제외한 외부인과 음성대화를 못할 뿐이지 수화라던가 글로 적어내는 것이라면 상호간에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아무리 특별하다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특별함에도 정도가 있지, 흙덩이의 경우는 정령이 맞는지도 의심될 정도였기에 정령학에 박식한 불릿으로서도 처음 보는 케이스였다.
지금만 봐도, 그 어떤 정령이 애교를 부린단 말인가?
아니, 보일 수는 있다. 근데 이건 단순히 그런 문제가 아니라 마치…….
- 좋아, 불릿이 제일 좋아. 헤헷…
‘본인이 잠시 미쳤군. 그딴 생각을 하다니.’
이 순진한 정령에게 이상한 감정을 품으려던 자신에게 자체적으로 혼을 내며 마음을 다잡는 불릿.
그는 정신을 돌리기 위해 다음 보고서로 눈길을 돌렸다.
팔락.
거친 동작으로 집었기에 바람소리를 내며 움켜쥔 문서. 그곳엔 잠시 제쳐두었던 화두가 떠올라 있었다.
‘…세금이 제때 올라오지 않는군.’
중앙영지는 자체적으로 벌어들이는 세금 외에도 주변의 지방영지에서 거두는 세금으로 바포 변경백을 꾸려갔다.
지방영지보다 중앙영지가 강력해야 통솔함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반대로 지방영지에 문제가 생겨도 중앙영지에서 자금을 보내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에 자금이 중앙영지로 모이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지방의 영주들은 불릿과는 군신의 관계였기에 땅을 하사받음에 따라 세금을 내는 것은 기본중의 기본이었다.
‘카질런 남작이야 본인과 접점이 적다곤 하나, 브룩 남작은 어찌하여 안 내는 것인지….’
동쪽에 위치한 카질런 남작은 상대적으로 불릿과의 접점이 적었다.
그들의 관계는 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왔기에 이렇듯 별다른 친분이 오고가지 않는 군신관계가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이럴 때마다 대영주인 불릿이 해주어야 하는 행동이 있었다.
‘순회를 해줘야 하는 것인가.’
현재 바포 변경백은 게슐린 그랩 자작의 반역파와 멸망 직전까지 갔던 직스 자작령을 제외하면 총 4곳에서 세금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부유한 편인 베니스 남작을 제외하면 다들 은근히 세금을 납부하길 꺼려하고 있었으니, 슬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려주어야 할 때가 다가왔음을 깨닫게 되었다.
“또 다시 자리를 비워야겠군.”
불릿이 하려는 행위는 일종의 무력시위, 즉 군사를 이끌며 대대적인 행차를 통해 위기감을 조성하는 것이다.
이렇듯 한번씩 행보를 보여주지 않으면 충성스런 신하라 하더라도 나쁜 마음이 은근하게 생겨나는 법이었다.
- 우리 놀러가?
한창 엉겨 붙던 흙덩이가 불릿의 말에 반응하자 그는 이번엔 제대로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을 이어나갔다.
쓰담쓰담…
“놀러가는 것은 아니지만, 바람을 쐰다는 면에선 괜찮을지도 모르겠네만.”
불릿의 말에 흙덩이는 그의 무릎에 앉은 채로 다리를 파닥파닥이며 좋아하는 기색을 띠었다.
- 난 좋아! 불릿이랑 둘이! 단 둘이!
“…본인과 자네, 단 둘이서만 가는 것은 불가능하네.”
둘이서만 가는 것이 아니다. 이것에 불만을 가진 것일까, 흙덩이가 잔뜩 볼을 부풀린 상태로 불평을 토해냈다.
- 인간은 불편해. 이상한 짓도 많이 하고.
흙덩이는 불릿을 좋아하고, 또 세상에 호기심도 많았기에 곧장 인간의 문화도 습득해나가고 있었다.
그렇다곤 해도 간혹, 이들의 문화 중에서 정령의 입장에선 이해하지 못할 일이 많았다.
수하로 부리는 자들을 조였다가 풀어주는, 강약조절행위를 감정이 풍부한 흙덩이라 하더라도 이해할 순 없었나보다.
“미안하군, 이상한 인간이라서.”
딱히 할 말이 없었기에 장난 섞인 말을 건넸으나 이번엔 흙덩이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 미안해. 상처 입힐 생각은 없었어.
자신의 장난에 시무룩해하는 흙덩이의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불릿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흙덩이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서 옆으로 돌렸다.
휙.
- ……?
돌림과 동시에 예의 그, 아기를 안는 것인지 공주님 안기를 한 것인지 모를 자세로 흙덩이를 품에 안은 불릿이 나긋한 어조로 흙덩이에게 속삭였다.
“본인은 자네에게 유감이 없으이. 언제나 고맙고, 또 즐거움을 주어서 삶에 활력이 넘치네.”
그 말 그대로, 불릿은 언제나 흙덩이에게 고마운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세상에 처음 나와서 궁금한 것도 많고, 보고 싶은 것도 많을 텐데 언제나 흙덩이의 최우선은 불릿이었다.
그가 기쁠 때는 함께 기뻐하고, 힘들어 할 때는 자신의 일처럼 슬퍼했다.
게다가 정령사가 보내주는 정령력이 아닌, 자체적으로 쌓는 정령력까지 소모하면서까지 불릿을 치료해주던 헌신적인 모습은 그의 인생을 통틀어도 받아본 적이 없던 것이었다.
가신은 어디까지나 가신, 동료도, 친우도, 가족도 될 수 없었으니까.
“흙덩이가 슬퍼하면, 본인도 슬프이. 자네가 기쁘면, 본인도 기쁘게 되겠지. 자네는 언제나 밝고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구려.”
석양이 지는 창가를 통해 붉게 물든 햇살이 비추며 매우 애틋하고, 따스한 광경을 연출했으나 그것은 연인의 모습이라기보단 어미가 아이를 달래주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럼에도 핑크빛 분위기를 풍겼으니, 이에 흙덩이는 활기차게 대답하기보단 어쩐지 부끄러워하며 불릿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 응…, 너를 위해서.
붉게 물든 석양 탓일까, 흙덩이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오른 것처럼 보였으나 집무실 자체가 그러한 상태였기에 별다른 티를 내진 못하였다.
이때,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올리비아가 들어섰다.
벌컥!
“불릿, 밥 먹어!”
흙덩이 대신 활기차게 내뱉는 올리비아의 말에 불릿이 자애로운 표정을 지우며 고개를 저었다.
“후우, 올리비아. 전에도 말했지만 과년한 처자가 그러한 행동을 보이면 아니 되오. 좀 더 몸가짐에 신경을 써야….”
“야, 너 거기서 뭐하는 거야!”
쿵-쾅-쿵-쾅!
고릴라도 아닐진데, 올리비아는 성난 기색을 내비추며 불릿에게 다가오더니 흙덩이를 덥썩 안고선 바닥에 내려놓았다.
탁!
“꼬맹이, 너어! 이러려고 나한테서 떨어지려 했던 거야?!”
흙덩이가 올리비아에게서 떨어지려던 것은 단순히 귀찮게 굴어서지만, 그것을 모르는 올리비아는 흙덩이에게 삿대질을 하며 화를 내었다.
이에 흙덩이는 올리비아가 싫어하게 된 알 듯 모를 듯 미묘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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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6시, 밤 12시 10분에 이어서 올라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