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3 그 정령사의 사정 =========================================================================
불릿은 따로 해야 할 일이 많았고, 위험한 마물사냥에 동참하는 것을 가신들이 두고만 보지 않았기에 원래 계획대로 군대의 일부만을 추려내 원정을 가기로 했다.
돈을 번다는 이유만으로 원정을 가는 것이 좋은 원동력은 될 수 없겠지만, 그게 다 자신들의 고향을 위해서라는 점에서 출발하는 것이니 이 점을 선보여 병사들을 다독여야 할 것이다.
“벤젼스 천인장, 몸성히 다녀오도록.”
“충성, 맡겨만 주십시오!”
불릿에게 예를 선보인 후 영지를 떠나가는 벤젼스와 1개 중대들.
100명이 넘는 인원이 은밀하게 영지를 떠나감에도 사열식이나 주민들의 환호는 보여줄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적의 눈을 속이며 출정해야 했기에 그러했던 것.
“중대, 지금부터 우린 바포 변경백을 순회하는 상인과 용병들이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지금은 군인신분이 아니므로 발각되지 않도록 편하게 말하도록. 알겠냐?”
벤젼스의 말에 백인장을 비롯한 병사들이 머뭇거림을 보이자 한숨을 쉬며 그가 솔선수범을 보였다.
“알겠냐고, 자식들아. 최고사령관께서 지시하셨으니 불편해하지 말고, 놈들의 시선에 발각되는 게 더 큰일이니 까라면 까. 알겠냐?”
“예에….”
“이게 뭐야, 방금 전만 해도 군기를 바싹 잡더니…….”
병사들의 불만어린 말들이 튀어나왔으나 벤젼스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떠나가는 그들의 뒤에서 괜찮다는 불릿의 제스쳐를 그가 발견했기에 이토록 편하게 대할 수 있는 것이리라.
“자자, 출발!”
* * *
덜그럭, 덜그럭-
중앙영지에서 멀어져가는 중대, 아니 상인들의 행렬. 겉모습만 본다면 영락없는 거친 사내들이었으나 내면을 들여다보면 조금 달랐다.
“저, 벤젼스님.”
마차라곤 하지만 지붕은 없는, 그저 많은 짐을 실을 수 있는 형태의 수레에 누워있던 벤젼스.
그는 다리를 교차시킨 상태로 한쪽 다리를 까닥이며 여유로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주변을 알 듯 모를 듯 경계하며 나아가는 용병들과는 천양차이.
그런 그에게 백인장, 지금은 상인들의 우두머리가 된 상단장이 말을 걸어왔다.
“정말 이래도 괜찮겠습니까?”
“뭐가 불만인데 그러오, 세스터스?”
세스터스는 자신도 편한 자세를 취한 채 마차를 타고 있으면서도 불안한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저희는 상인과 용병이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교육을 받았다곤 하나 이런 일일수록 조그마한 곳에서 일이 커지는 법이지 않습니까?”
세스터스는 이제는 이름만 존재하는 대영주 직속 기사단 ‘라체나’의 일원으로, 비록 대외적으로는 마땅한 직위가 없었으나 선임기사로서 나름 열심히 활동하던 이였다.
라체나에서는 딱히 활약성이 없더라도 일단 대영주 직속의 기사단이기에 허들이 높았고, 귀족출신이기에 벤젼스와 같은 천인장으로 추천받았다.
불릿의 말대로라면 군대에선 같은 직급일 경우 상하가 없기에 존대를 하면 안 되었지만, 아무래도 사회생활이란 게 민감한 부분이다 보니 이에 대해선 조율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 더 이상 라체나는 입단할 수 없는 곳이기에 라체나 출신의 기사는 그곳에서의 직위에 따라 점수를 더 쳐주고, 같은 계급이더라도 좀 더 높은 우대를 받도록 불릿이 배려를 해주었다.
이마저도 안 해주었다면 라체나의 기사들은 자존심이 바닥까지 떨어져 의욕이 사라졌을 것이다.
“걱정도 팔자요, 설마 각하께서 그런 것도 생각하지 않으셨겠소?”
약간 한심하다는 듯 말하는 어투에 세스터스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으나 이내 진정하고서 그의 말을 경청하였다.
“마수의 숲과 맞닿은 서쪽의 영지는 브룩 남작님의 영토요. 마수의 숲에서 간악한 반역자 놈들과 마주칠 수도 있지만, 뭐. 그럴 리가 있겠소?”
“흠, 확실히 그렇다면 우린 ‘상인’과 ‘용병’인 척만 하면 되겠군요. 마정석과 몬스터의 사체는 그분이 알아서 처리해주실 테니까요.”
“내 말이 그 말이요. 우리가 이러한 변장을 한 것은 진짜로 그 역할을 수행하고자하는 것이 아니니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소.”
괜한 걱정을 했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는 세스터스에게 대꾸를 해주는 벤젼스.
사실 불릿은 이들이 상인과 용병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줬으면 더 효율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중앙영지에서 별로 벗어나본 적이 없는 이들이 그러한 것들을 마음에 들 정도로 해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안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타협한 것이 남서의 영지를 다스리는 브룩 남작에게 역할을 맡겼다.
“그래도 만남에 있어선 주의를 기하는 게 좋을 것이오. 변장은 변장이다 보니 서로를 알아보더라도 어디까지나 상인과 거래상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 말이오.”
“알겠습니다. 그래서 병사들에겐 사전에 일러주지 않았던 것이로군요.”
아직도 병사들은 브룩 남작을 만나더라도 아는 체를 해선 안 되는 줄 알았다.
한낱 용병과 상인들이 대표자도 아니면서 영주에게 다가간다는 것은 얼핏 무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스파이가 있다는 가정 하에 짜올린 계획이라 어느 정도 비밀을 엄수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으면 상단주께서도 편히 쉬시오. 체력을 비축해둬야 도착해서도 일을 시작할 것이 아니오?”
벤젼스가 호칭을 바꿔서 불렀지만 아직 세스터스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저도 사냥에 참가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세스터스는 자신과 맞지 않는 상인이라는 역할에 불만이 있었는데, 기사가 되어서 돈놀음이나 하게 생겼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에 이번엔 세스터스가 아닌 벤젼스가 한숨을 쉬며 구박을 주었다.
“이 사람아, 아까도 말했지만 이게 다 각하께서 지시하신 명령일세. 최고사령관의 이름으로 내려온 명령인데 임무지역을 이탈할 생각인가?”
“아닙니다. 저는 그저 병사들이 걱정되어….”
세스터스가 병사들의 목숨줄을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또한 귀족출신, 눈앞에서 죽어나가면 구해줄 의양은 있어도 발품을 팔아 쫓아가서까지 그러고 싶진 않았다.
이것은 세스터스가 귀족이기도 했지만 기사의 시점에서 보자면 병사는 소모물자랑 비슷했으니 말이다.
벤젼스라고 딱히 다른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한순간에 몰살당한 라체나의 선배들을 보며 깨달은 것이 있기에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자네까지 자리를 비우면 대체 누가 나머지 병사들을 돌본단 말인가? 게다가, 사냥만이 성과를 내는 것은 아니잖소?”
“…죄송합니다. 마음이 좀 급했나봅니다.”
“나도 이해하는 바이니 조급해하지 마시오. 각하께서 돌아오셨으니 다 잘될 거요.”
그들은 한나절을 달려서야 마수의 숲과 인접한 브룩 남작령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루 종일 걷기만 했기에 지칠 대로 지친 병사들을 여관에 던져놓은 벤젼스는 상단장 역할인 세스터스와 함께 브룩남작과 대면했다.
“왔는가, 아오니아 용병단장, 페퍼 상단장?”
“…브룩 남작님, 조금 어색한 것 같습니다.”
“흠, 어차피 우리 셋만 있으니 말을 좀 편하게 하지.”
식사를 하고 있던 브룩 남작은 벤젼스와 세스터스를 데려다놓고 시중을 들던 하녀들을 물리고 난 후에야 말을 놓기 시작했다.
“그래, 내 듣기는 했으나 자네들에게서도 자세히 말을 들어봐야겠지. 어디 한번 얘기해보시게.”
평범한 체구에 외모를 지닌 브룩 남작이었으나 그의 몸은 곳곳에 흉터가 보였고, 얼핏 드러난 목에는 긴 자상이 보이는 것이 그가 어떤 성격의 인물인지를 조금 짐작하게 해주었다.
“브룩 남작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최고사령관께서 마수의 숲을 토벌함과 동시에 거기서 떨어져 나오는 부산물을 처리하여 자금을 조달하란 명을 내리셨습니다.”
“거 최고사령관이라는 호칭은 아직도 어색하군. 벤젼스 자네는 천인장…이라고 했던가? 아쉽겠어, 군단장이라는 것을 할 수도 있다 들었는데.”
“하하…, 제 주제에 무슨 군단장이겠습니까. 그래도 뎁슨 레너드 남작님 정도 되시니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식사에 초대받은 벤젼스와 세스터스는 식사를 하면서도 예의에 어긋남 없이 브룩 남작과 대화를 주고받았다.
일단 그들도 출신은 귀족이기 때문에 기본은 충실히 지키고 있었다.
“그래, 천인장이라는 것이 결코 낮은 직위는 아니지. 영토를 부여받은 나만 하더라도 쉽사리 군사를 늘릴 수 없으니 말이야.”
군인의 비율은 적은 것이 좋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인구를 백분율로 했을 때 1에서 2% 내외일 때가 가장 이상적이라는 소리다.
인구수가 어마어마하게 많다면 1% 미만이어도 상관없겠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으니 100명이 있다면 한두 명만 차출하여 병사로 만드는 것이 좋았다.
이 정도 비율이 아니고서야 그들이 먹고, 마시며 훈련하고 장착하는 장비값을 마련하기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일단 병사들에게도 월급이란 것을 줘야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한 지역에 군대만 존재하는 곳은 없었고, 각 지역에 조금씩, 뿔뿔이 흩어져 있다가 국가의 부름에 따라 이동하며 나라를 수호했던 것이다.
“이곳의 병사가 약 천 명가량이라 알고 있습니다. 유지가 가능하십니까?”
마수의 숲과 인접한 이곳은 사람이 살기 알맞은 곳은 아니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은 그렇다 치더라도 마을은 아니었기에 그렇다.
마을의 방비도 다른 곳에 비해선 우수한 편에 속했지만 그곳을 둘러싼 장벽의 높이가 그리 높은 것은 아니었기에 일부 몬스터가 종종 난입하는 경우가 있었다.
게다가 마수의 숲 특성상 같은 몬스터라도 더 강한 편이었고, 아주 간혹, 마물도 출현했기에 겁을 먹은 주민들이 더 안전한 곳을 선호했던 것이다.
“우리 영지가 다른 곳에 비해 규모가 작다고 하나 너무 무시하는 것 같군, 후후후.”
“죄송합니다,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네, 알아. 인구 3만에 병사가 1000명이나 되면 버겁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
비율로 따지면 3%를 넘는 상태. 상당히 높다 말할 수 있었기에 이 점이 염려되었던 벤젼스가 물어왔던 것이다.
현재 바포 변경백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중앙영지도 자금부족에 허덕이는 상황이니 브룩 남작이 다스리는 바스톤 또한 안 좋을 거라 예상한 모양.
“별 걱정도 다 하는군. 그래, 자네 말대로 비율이 조금 높긴 하지만, 이 정도도 유지하지 않으면 영지민을 지킬 수가 없다네. 그리고 말이지….”
브룩 남작은 신속하게 식사를 끝마친 세스터스를 한번 훑어본 후에 다시금 말을 이어나갔다.
“이곳이 어디인가? 마수의 숲과 인접한 또 다른 의미의 최전선이란 말이지! 그만큼 풍부한 마정석과 몬스터의 부산물이 돌고 있어 용병과 상인들이 끊이질 않는다, 이 말이로세.”
“아, 그렇군요.”
“아…….”
브룩 남작의 말에 비로소 깨달았는지 벤젼스와 세스터스는 동시에 감탄사를 터뜨렸다.
용병과 상인. 그들이 이곳을 방문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바로 몬스터를 사냥하고, 그것에 따른 부산물을 취득하려는 이유에서였다.
조심만 한다면 이곳만큼 사냥감의 수급이 원활한 곳도 없었고, 여러 편의시설도 마련되어 있었으니 론 타로 왕국의 라 쓰랑 보다도 좋았던 것이다.
요새도시 라 쓰랑의 용병우대정책은 좋기야 했으나 지리적 위치가 썩 좋지 않았다.
제값을 받으려면 요새도시 라 쓰랑까지 이동해야 하는데, 몬스터를 제대로 잡으려면 외곽의 소규모 마을로 이동해야 했으니 시간의 소모 등, 여러모로 손해였다.
알려지진 않았으나 일단 한번 맛을 보면 벗어날 수 없는 꿀사냥터가 바로 마수의 숲이었던 것이다.
“자네들이 왜 용병과 상인으로 변장을 했겠는가? 이곳이라면 의심받지 않으리란 생각에 백작각하께서 그리 명하신 것이 아닌가?”
말을 하면서도 야금야금 먹어서인지 브룩 남작 또한 식사가 끝나갔고, 그들의 대화는 점점 끝을 달려갔다.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다시 만나서 얘기를 나눠봄세.”
“예?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이곳에서 사냥을 한다. 부산물을 브룩남작에게 넘긴다.
그 후 한 달 단위로 지휘관과 병력을 교체하는 방식으로 주요병사들의 훈련을 겸한 사냥을 하려했던 것이다.
세세하게 보자면 좀 더 복잡해질 것이지만, 여기서 브룩 남작이 해줄 것은 부산물처리만 남아있을 터인데 무언가 더 언질 할 것이 있는지 의문이 들 법도 했다.
둘의 의아한 반응에 브룩 남작은 깊은 미소를 지으며 의기양양해 했다.
“적어도 자네들보단 이곳에서만큼은 본 남작이 더 자세히 알지. 마수의 숲에 대한 정보도 없이 돌입했다간 백작각하께 호된 꾸중을 듣지 않겠나?”
이에 벤젼스와 세스터스가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숙이자 의기양양해진 브룩 남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뭐, 너무 겁먹진 말게. 그리 무서운 곳은 아니니 말일세. 후후후.”
어쩐지 비열한 악당이 연상되는 웃음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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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도 3연재가 이어집니다.
추천과 선작,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