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정령사-92화 (92/241)

00092  그 정령사의 사정  =========================================================================

“그런 의미에서, 본인의 의견은 어떠한가?”

실질적인 영지의 주인은 불릿이었지만 그 영지를 꾸려가는 역할은 여러 명이 분담하고 있었으니, 밴 또한 그중 하나였다.

“개간만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잠시 호흡을 고른 뒤 말을 잇는 밴.

“불모의 황무지는 까마득한 시절부터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알려져 있기에 인간도 그렇지만 다른 종족도 일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그래서 그쪽방향으로는 우리도 형식만 갖추었잖은가?”

바포 변경백은 루드밀라 왕국을 란푸스 왕국으로부터 지키는 최전방의 지역이었다.

그러니 당연하다고 해야 할까, 방어선의 구축이 매우 튼튼했기에 란푸스 왕국은 물론 몬스터나 다른 자들의 침입을 불허했다.

그런 바포 변경백이었으나 불모의 황무지와 맞닿은 직스 자작령만큼은 허술한 면이 있었다.

허술한 만큼 많은 예산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어 중앙영지가 아님에도 번성할 수 있던 것인데, 그걸 말아먹었으니 직스 자작의 무능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밴이 무얼 걱정하는지는 잘 아네만, 우리는 앞으로 발을 디뎌야만 하네. 다스리는 자가 앞장을 서야지 뒤따르는 자도 나아갈 수 있지 않은가?”

군주라는 자리가 고독한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언제나 남들보다 한 걸음 더, 보다 빨리 나아가서 이끌어야 했기에 뒤에서 따라오는 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 이렇게 하지, 불모의 황무지에 대한 개간작업은 흙덩이와 본인이 시도해보겠네. 어차피 사람이 많다하여 가능한 일도 아니니 말일세. 당장 이득을 취할 수는 없지만 성공한다면 가장 많은 성과가 나오겠지.”

“괜찮으시겠습니까, 주인님? 호위대를 꾸리시는 게….”

“그랩 자작에게 어디로 이동하는지 알려주고 싶다면 그리하시게.”

“…….”

불릿의 말에 밴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불릿이 소수로 이동하려는 이유, 그것은 그랩 자작에게 위치를 발각시키지 않으려는 의도에서였다.

만약 어중간한 인원으로 출정하여 불모의 황무지로 향했을 때 그곳에서 그랩 자작과 마주친다면 꼼짝없이 당할 판국이었다.

불모의 황무지는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없었으니까.

그러니 그럴 바에야 조용히, 아군에게도 비밀로 한 채 다녀오는 것이 좋았다.

“마수의 숲으로의 원정은, 병사들에게도 훈련은 필요하니 중대단위로 교체시키면 되겠군.”

“중대라 하면, 주인님께서 새로 편성하셨다는 군대의 단위가 아닙니까?”

“그렇지. 백인장이 다스리는 100명을 중대라 일컫고, 다시 그 밑의 십인장이 다스리는 10명을 소대라고 부르지.”

덧붙여 말하자면 천인장 이하 천 명에 대해선 대대라고 칭했다.

단위의 수가 갑자기 불어나는 것 같았지만 아직 군단의 창설이 초창기였기 때문에 세세하게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단 지휘관인 기사들과 병사들이 군단이라는 것에 익숙해지고 나서야 가능할 것이다.

“100명씩 오고가는 것이야 크게 티 나지 않을 것이니 괜찮을 것이네.”

“그 정도 인원이라면 안전도 확보할 수 있으며 제대로 된 훈련도 겸할 수 있으니 원정을 나가서도 원활한 사냥이 이루어지겠군요.”

너무 많은 인원이 움직이면 보급품이 기하급수적으로 많이 필요했으며 이동하는 시간 또한 배로 걸렸다.

그랩 자작에게도 들킬 수 있었으니 100명이라는 인원은 적당하다고 볼 수 있던 것이다.

“그래도 마수의 숲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마수의 숲 또한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위험한 곳이었다. 불모의 황무지와는 다른 의미에서 위험했는데, 몬스터는 물론 마물도 존재하는 곳이었기에 병사들이 죽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것에 대해서도 말하려했네. 우리 영지군, 그러니까 군단의 병과비율은 궁병의 비율이 지나치게 높네.”

현재 활을 다루는 인원만 1000명. 군단의 인원이 오천 명이란 것을 상기하면 지나치게 많았다.

이는 수성을 주로 하는 중앙영지의 지리적 위치에 이유가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만으로는 안 되었기에 차차 개선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궁병의 수를 줄이고 나머지는 근접병기로 무장시키지. 전열에 검보병을 앞세우고 뒤에서 창병이 2열로 대기하며 번갈아 찌른다.”

“전열에 세우려면 방패병이 낫지 않습니까?”

밴의 의문에 불릿이 그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이미 군단장과 조율을 했지만, 자네에게도 알려주겠네. 당연히 방패병을 앞세우는 게 좋지만, 새로 제작하기엔 자금도, 시간도 부족하네. 그렇다면 있는 것을 활용해야하지 않겠는가?”

창은 사정범위가 길다. 그러나 가까이에 있는 물체를 찌르기엔 지나치게 긴 면이 없잖아 있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창대의 중간을 잡고 짧게 찌르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것은 군대의 장점을 상실하는 방법이었기에 적절하진 않았다.

군대는 단체라는 장점을 살려야했기에 여럿이서 공격할 수 있게끔 진열을 구축해야했다.

가장 좋은 것은 아군이 다수이고, 적군이 소수인 상황.

그래서 전장을 보면 항상 병사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이다.

‘기사들도 있고, 괜찮을 것이다.’

창과는 반대로 검은 베는 것에 특화되어 있다. 찌르기도 가능했지만 창에 비해선 손색이 있었고, 베기를 하려면 옆에 무언가가 없어야만 했다.

만약 베기를 시도하다 아군이 베인다면 적군에게 선물을 상납하는 것과 똑같지 않은가?

다만, 수비를 생각한다면 검은 공격도 가능했지만 제한적이나마 막는 것도 가능했으니 부족한 방패를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마수의 숲이라 하더라도 초입에서만 활동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네.”

마물출몰지라 하여 초입부터 나타나진 않는다. 놈들 또한 인간의 영역을 인식하고 있었고, 그 중심부에 나타나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숲의 초입은 중심에서 밀려난 놈들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조심만 한다면 전멸한다거나 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뎁슨 레너드 남작님과 이미 얘기를 나누셨다니 저로선 실행할 뿐이지요.”

전투에 관해서 가장 잘 안다고 여겨지는 군단장이 허락했다는데 높은 위치에 있다지만 집사인 밴이 무어라할까?

그가 고개를 숙이며 대꾸하자 언제 튀어나왔는지 흙덩이가 숙여진 밴의 머리를 톡하니 건드렸다.

톡톡.

“……? 무슨 일이시지요, 흙덩이님?”

갑작스런 상황에 밴은 어리둥절해했고, 기껏 잊히게끔 만들었던 흙덩이가 앞으로 나서자 불릿도 흙덩이가 왜 저러나 싶어 어리둥절해했다.

둘이 갈피를 못 잡아하는 사이에 흙덩이는 살며시 미소를 머금으며 입을 벙긋했다.

- 불릿은 내가 지킬게. 걱정하지 마.

도도도.

덥썩.

그러면서 흙덩이는 불릿에게 다가가 그의 허리춤을 잡고서 고개를 돌렸는데, 그 방향이 밴에게 향해있었다.

순수함이 묻어나는 미소에 밴은 비록 알아듣진 못하였으나 어떤 의미에서 저런 것인지 짐작하고선 본인도 주름살을 만들며 미소를 지었다.

“흙덩이님, 저희 주인님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꾸버억-.

깊게 숙여지는 고개. 이 늙은 집사의 인사에 흙덩이는 그저 기분 좋게 웃어줄 뿐이었고, 이것을 바라보던 불릿은 말도 못하고 그저 가만히 있었다.

‘…나쁘진 않군.’

누군가 자신을 지켜준다는 말, 그것이 이토록 기분 좋을지 상상이나 했을까?

불릿에게 있어 흙덩이는 복덩이였다.

스윽스윽.

그가 지금 흙덩이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불릿 또한 흙덩이를 아낀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뿐이었다.

“아참, 외교 건에 관해선 비 아이언 외교대사와 함께 상의해보게. 불확실하지만 중재가 가능하다면 병사들을 훈련에만 집중시킬 수 있으니 말일세.”

“알겠습니다, 주인님.”

좋은 상황은 아니었으나 바포 변경백은 하나씩 바뀌어가고 있었다.

바로 불릿과 흙덩이, 그리고 올리비아에 의해서.

* * *

흙덩이와 불릿은 기술점검에 들어가 있었다. 황무지에 대한 개간도 있었고, 그동안 소홀했던 수련 때문에 실력이 퇴보한 것은 아닌지 알아야 했던 것이다.

이것은 불릿과 흙덩이, 정령과 정령사라는 둘만의 문제였으나 올리비아는 심심했었는지 소파에 앉아 그들이 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흙덩이여, 들리는가?’

불릿은 텔레파시에 관해서 실험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됐다 안 됐다를 반복하니 제대로 해볼 요량으로 시도한 것이다.

들리면 들리는 데까지를 흙덩이에게 말해보라고 했는데, 어째 반응이 심심찮다.

‘들리면 대답하시게, 흙덩이여.’

- ……

여전히 묵묵부답. 자신의 말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것 같자 불릿은 답답함을 느꼈다.

‘역시 강렬하게 바라는 것이 아니면 지금 단계에선 어려운 것인가?’

고민하는 불릿에게 흙덩이가 묘한 미소를 짓더니 그의 무릎에 폴짝 올라섰다.

포옥.

수련이라고 해서 몸을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정령력을 소모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불릿은 소파에 앉아있던 상태였다.

운동과는 별개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려니 조금씩 지쳐가던 중이라 휴식을 겸하는 수련이었던 것.

그런 와중에 무릎이 묵직해지자 고민하던 불릿은 그 원인을 보며 입을 떼었다.

“흙덩이여, 왜 그러는가?”

불릿의 물음에 흙덩이가 여전히 묘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는데, 말을 않는 것이 이상해보였다.

“야, 너 뭐하는 거야?”

이에 그들을 구경하던 올리비아가 난입했는데, 어쩐지 화가 난 듯한 음성이었다.

그녀의 반응이 이해가 가질 않았기에 불릿이 올리비아에게 물었다.

“왜 그러는가, 올리비아? 문제 있소?”

“문제? 있지! 지금 얘 표정 안 보여?!”

잔뜩 성난 듯한 음성이었는데 당최 이유를 모르던 불릿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흙덩이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길고 얇은 속눈썹, 애달프면서도 평소보다 휘어있는 눈매, 애기살이 사라지며 여성미를 풍기기 시작하는 얼굴까지.

그냥 예쁜 미소녀의 모습이었다.

- 나 예뻐?

올리비아에게는 보이지 않게 입을 우물거리며 속삭이는 흙덩이에게 불릿은 말도 못하고 머리만 쓰다듬어주려 했다.

덥썩.

흙덩이는 그 손을 낚아채 자신의 볼에 갖다 대고선 슬슬 문질렀다.

- 헤헤, 이러니 좋다.

올리비아가 성을 내고 있었으나 흙덩이가 이토록 기뻐하니 정령사의 관점에서 보자면 얌전히 내버려두는 것이 가장 좋았다.

‘이런 장난으로도 정령력이 늘어나니 불만은 없으나….’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방식. 물의 정령들은 까탈스러움을 넘어 혐오감을 드러냈기에 정령력은 불릿 스스로 명상과 가문의 비술을 통해서만 늘려가야 했다.

헌데 흙덩이와 있으면 단순히 피부를 맞대며 생활하는 것만으로도 정령력이 늘어났으니 편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에이 씨! 날 두고서 둘이 뭐 하냐고!”

“올리비아, 과년한 처자가 그런 말투를 보이는 것은….”

“뭐! 왜!”

“……아무것도 아니오.”

이럴 땐 역시 가만히 있는 게 최고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불릿은 입을 다물었고, 올리비아는 씩씩 성을 내다 성큼 다가와 불릿의 옆자리에 앉았다.

풀썩!

소파에서 공기가 빠지는 소리를 낼 정도로 힘차게 앉은 올리비아가 불릿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올리비아? 피곤하오?”

자신에게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는 올리비아에게 불릿이 묻자 올리비아는 여전히 성난 목소리로 대꾸하였다.

“안 졸려! 근데 잘 거야! 움직이지 마!”

안 졸린데 대체 왜 이런단 말인가? 그러면서 잔다고 하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졸리면 자신의 방에 가서 자는 것이 더 편하고 좋지 않은가?

여전히 흙덩이는 불릿의 무릎에 앉아 그의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문지르고 있었고, 이젠 올리비아마저 그의 몸에 기대었으니, 이젠 더 이상 수련이고 뭐고 아무것도 아니었다.

성과도 없이 수련이 끝나버리자 불릿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 헤헤.

“조용히. 나 쉴 거니까.”

“…….”

왜 올리비아가 화가 났는지 모르겠으나 그동안 올리비아가 자신에게 많은 것을 바란 적이 없기에 백작체면에도 꾹 참아주었다.

화난 것치곤 하는 행동은 귀여워보였기에 별달리 참을 것도 없었지만.

다만, 이제 슬슬 다리가 저려오는 것이 흙덩이를 내려놓고 싶었으나 행복해하는 흙덩이를 내치는 것도 마음이 불편했던지라 불릿은 이 또한 지나가리, 하면서 인내를 머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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