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1 그 정령사의 사정 =========================================================================
흙덩이와 단 둘만의 시간의 가지는 사이, 그들의 시간을 깨부수는 자가 난입했다.
똑, 똑, 똑.
느릿한 3번의 두드림. 이것은 불릿이 머무는 중앙영지의 성에서만 들을 수 있는 특이한 방식으로, 오직 밴이라 불리는 60살의 노신사만이 사용하는 문두드림이었다.
아까처럼 남들이 보면 오해할 상황도 아니었기에 잠시 정신을 수습한 불릿이 소리를 외쳤다.
“들어오시게.”
달칵-.
“주인님, 잠시 실례하겠습….”
갑자기 말을 하다말고 멈칫하는 총집사 밴. 불릿은 그가 왜 그러나 싶었는데 곧이어 이어지는 그의 말에 원인을 알게 되었다.
“…주인님. 수비범위가 넓으시군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안나에게 들었을 땐 혹시나 했는데, 주인님이 흙덩이님에게 그런 옷을 입힐 줄이야….”
“흙덩이가 어찌했다는…, 헉.”
그제야 비로소 흙덩이가 어떤 차림이었는지 상기한 불릿은 황급히 흙덩이를 내려놓으며 자신의 뒤에 숨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볼 것은 다 본 밴이었기에 불릿의 뒤에서 고개를 살며시 내밀고 있는 흙덩이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정령에게까지 그러지 마시길. 원하신다면 그 나이대의 인간여성도 구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열셋에서 열넷, 결혼을 하기엔 이른 나이였으나 귀족들은 으레 일찍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백작이라는 작위를 지닌 불릿은 어디서나 환영받는 존재였다.
삼처, 사첩까지는 아니더라도 귀족이라면 첩 한둘이나 하룻밤 불장난 상대가 많았기에 그 나이가 되도록 순결(?)을 지킨 불릿이 괴상할 뿐이었다.
한때 불릿이 성불구가 아니냐는 소문도 돌 정도였으니, 그가 얼마큼 여성을 멀리했는지 알 수 있던 것이다.
“뭔가 오해를 하는 모양인데, 흙덩이에게 네글리제를 입힌 것은 본인이 아닌 안나인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군.”
밴의 말에 극구 부인하는 불릿. 그러나 밴의 의심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정말이십니까? 혹시 주인님께서 시키신 것은 아니온지….”
“절대, 아니네, 절대.”
“흐으음….”
그러다 좋은 생각이 들었는지 손가락을 퉁기는 밴.
“주인님께선 정령에게만 반응하시는….”
“제발 할아범까지 안나에게 물들지 말아주오. 본인이 어째서 홀로 있던 것인지는 할아범이 가장 잘 알지 않소?”
“……죄송합니다, 주인님.”
“후우우! 아니오, 이런 모습이라면 오해할 수도 있지. 그러나 다음부턴 그러지 마시오. 매우 피곤해지니까.”
그 말에 고개를 꾸벅 숙이며 알겠다는 표시를 보이는 밴. 불릿의 깊은 한숨이 절절하게 와닿은 모양이었다.
이런 와중에 자신의 뒤에 숨겨뒀던 흙덩이가 슬금슬금 앞으로 나서려하자 손으로 막아내는 불릿.
흙덩이의 괴력이면 불릿의 손쯤이야, 날려버릴 수도 있었지만 얌전히 그의 손길에 따라주었다.
“집사가 이유도 없이 방문했을 리는 없고, 또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지?”
말투가 친근한 사이에서 주신관계의 그것으로 변하자 밴도 그에 따르며 공손히 대답하였다.
“그 말대로입니다, 주인님. 저희가 수확제를 지낸지 얼마 안 지났다는 것은 알고 계실 겁니다.”
“한 달도 안 됐으니 아직도 들뜬 마음을 지닌 자들이 간혹 보이더군.”
축제라는 게 원래 그렇다. 지내고 난 이후에도 다음 축제를 기다리며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것, 그래서 축제라는 것이 즐겁고 행복한 것이리라.
그러나 밴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주인님, 이제 막 추수를 끝낸 직후라 당장 겨울은 지낼 수 있으나 그 이후에 먹을 양식이 부족합니다.”
“그렇다면 예산을 분배해 구입하면 되지 않는가?”
불릿은 영지의 주인이었기에 예산분배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고 있었기에 그런 말을 꺼냈으나 밴은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어갔다.
“곡식의 시세가 폭등하여 그것이 불가능해졌습니다.”
“원인을 알 수 있겠는가?”
짐짓, 없는 수염을 쓰다듬는 불릿. 굳이 말하자면 젊어진 이후엔 수염을 기르지 않았다. 올리비아는 물론 흙덩이도 싫어했기에.
불릿은 한 지역에서 군림하는 군주답게 침착하게 대응하며 집사에게 물었다.
“주인님도 아시다시피 알 라스 폰 구울 백작이 일으킨 전쟁도 있사오나, 그 외에도 흑마법사들에게서도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설명하길, 그동안 누적되었던 식량부족이 구울 백작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빵 터졌다는 것이다.
결국 구울 백작이 불을 지피긴 했으나, 그 이전에 원인을 따지자면 흑마법사들로 인해 황폐해진 대륙의 상황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전쟁에서 패배한 후에도 모든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흑마법사들이었다.
“쥐새끼들은 언제나 사람에게 해를 끼쳤지. 그래, 본인이 어찌해주었으면 하는가?”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으니 불릿을 찾아온 것이다. 그러니 해결방안도 불릿에게서 찾아야했다.
“본 집사가 방법을 찾아본 결과, 크게 3가지로 돈벌이를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밴이 제시한 해결방안은 세 가지.
첫째는 마수의 숲에서의 몬스터 사냥. 이것은 바포 변경백에서 돌아다니다간 자칫 겨울이 가기도 전에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었기에 원정을 나간다는 개념이었다.
몬스터의 사체는 물론이고, 마정석이야말로 가장 쉽게 판매할 수 있으며 급전을 마련하기 알맞은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불모의 황무지의 개간. 이것은 예전부터 생각해왔던 것으로, 밴이 말을 하면서도 조금 민망해한 사항이었다.
불모의 황무지가 그토록 광대한 자리를 차지하면서도 아무도 가지려 노력하지 않은 것이 왜겠는가?
개간이 ‘불가능’하니까 그래서였다. 혹시나 해서 예전에 불릿이 물의 정령을 통해 물을 퍼부었으나 금세 땅으로 스며들기만 하고 좀체 물기를 머금지 못하고 있었다.
불모의 황무지, 그곳은 사막이었으니 말이다.
2개만 제시하기엔 뭔가 심심했기에 버리는 패로 넣은 것뿐이었다. 원래 보고라는 게 상급자에게 발표를 할 때엔 버리는 용도로 몇 개를 집어넣기도 했으니까.
셋째, 외교중재. 이것은 현재 알 라스 폰 구울 백작이 왕실을 상대로 벌인 전쟁을 말하는 것인데, 왕실을 상대로 일정한 대가를 받은 뒤 전쟁이 발생하지 않도록 막아서는 것이다.
위험하기도 했으나 그만큼 과실은 달콤할 것을 예상하는 바였다.
불릿에게도 이익이 됐으나 분쟁을 싫어하는 루드밀라 왕국의 백성들을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반으로 쪼개진 상태인 바포 변경백에게 구울 백작이 말을 들을까 의심스럽긴 했으나, 반역자인 게슐린 그랩 자작은 북쪽의 국경선에 갇힌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이니 이에 대한 정보가 구울 백작에게 전해지진 않았을 것이다.
불릿이 영토를 장악했다거나, 아니면 그랩 자작의 제안이라고 하거나. 둘 중 하나로 중재를 제안하면 될 것이다.
“밴, 란푸스 왕국을 상대로는 뭔가 할 만한 것이 없겠는가?”
비록 게슐린 그랩 자작에 의해 그곳으로 향하는 통로가 봉인된 상태였지만 찾아보고자 한다면 방법은 있을 것이다.
당장 예산이 말라가고 있었으니 현 바포 변경백은 불릿으로 하여금 뭐라도 하게끔 등을 떠미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적대국인지라 상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습니다.”
“역시 그러한가.”
세상을 떠도는 용병이나 상인들이라 할지라도 국경선은 함부로 진입할 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만큼 한 나라에서의 국경선이란 그토록 예민한 것이었으므로, 흑마법사들로 인해 각국이 동맹을 맺었던 상태라곤 하나 란푸스 왕국은 예부터 루드밀라 왕국과는 사이가 극도로 나빴기에 어쩔 수 없던 것이다.
- 불릿, 나 앞으로 나가고 싶은데.
때마침 흙덩이가 비비적거리며 말을 걸자 불릿은 흙덩이에 대해서 생각을 떠올렸다.
‘흙덩이는 땅의 정령. 대지의 축복을 통해 땅의 지력을 끌어올린 경험도 있다.’
당장 황폐화 되었던 직스 자작령만 하더라도 흙덩이 덕분에 식량을 확보할 수 있지 않았는가?
직스 자작령은 남과 북으로 갈린 바포 변경백에서 북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동쪽에 위치한 불모의 황무지와 맞닿아 있었기에 토지의 질이 나빴다.
게다가 장기간 방치된 상태여서 무언가를 기르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았음에도 단순히 대지의 축복을 시전한 것만으로도 풍성한 먹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맛은 없었지만.
“자네가 제시한 방안 중에서 두 번째 사항인 불모의 황무지도 그리 나쁘다고 여겨지진 않네만.”
“예? 하오나 그곳은 개간이 불가능한 곳이라 알려지지 않습니까? 저희가 노력해보았음에도 불가능 했었는데….”
밴의 말대로 불릿은 이미 예전에 그곳을 영토로 삼으려고 시도를 해봤었다.
불릿은 평화를 사랑하는 자였으나 주변이 온통 불한당들로 가득했고, 자신을 따르는 백성이 한두 명이 아니었기에 세력을 넓혀야 했었다.
그러한 와중에 주인 없는 땅인 불모의 황무지가 눈에 띄었으니, 당장 달려가 만능이라 할 수 있는 물의 정령으로 메마른 땅을 적셨으나 그 결과는 실패였다.
물을 아무리 쏟아 부어도 어디로 사라지는 것인지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금세 메말라버리는 모래바닥.
상태가 그래서야 구황작물로 알려진 감자는커녕 풀뿌리 하나라도 자라기 힘들었다.
“흙덩이는 땅의 정령, 이곳까지 지나오는 동안 그 효력은 입증하고도 남네.”
그러나 불릿은 흙덩이를 믿었다. 하급이라지만 정령 중에서도 특별함을 드러내는 자신의 계약자를, 그리고 흙덩이를 부리는 자신을.
이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지 않았느냐, 이 말이다.
- 부울리잇-, 언제까지 세워둘 거야?
비비적, 비비적.
…이렇게 애교를 부리는 것만 제하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니지, 사이가 좋다는 것은 정령력의 효율이 증가한다는 것이니 나쁠 것도 없지.’
왜 정령과 사이가 좋아야 하는가? 그것은 효율의 문제였다. 자신이 성장하고 싶으면 정령과의 교감을 통해 정령력을 끌어올려야 했고, 정령 또한 정령사와 함께하며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러한 애교는 정령이 정령사를 좋아한다는 것이니 남들이 보기엔 부러워할 상황이라는 것이다.
- 헤헤, 라고 하면 좋아하던가?
올리비아가 웃는 것도 따라 해보는 흙덩이.
“크흠, 대지의 축복이라면 그곳이라 할지라도 가능할 것이라 보네만?”
“역대 바포 변경백의 선조들께서도 무던히 노력했으나 성공했던 적이 없습니다.”
바포 가문은 정령사의 가문. 대대로 정령사를 배출했으니 그 중 땅의 정령이 없을 리가 없었다.
당연히 그들 중에서 땅의 정령사가 나올 때마다 불모의 황무지를 개선하려 시도해왔고, 결과는 실패였다.
그러나 불릿 또한 밴의 부정적인 말을 부정했다.
“내 선조분들이 부끄러운 것은 아니나 땅의 정령사가 되셨던 분들은 중급에 올라서지 못했잖은가?”
이상하리만치 바포 가문은 곧잘 물, 불, 바람의 원소에는 중급도 올라서면서 땅의 원소는 거의 되지도 않았고, 되더라도 하급에서 머물다 인생을 마친 경우가 허다했다.
대륙의 정령사들 사이에서도 땅의 정령사는 중급에 올라서더라도 그 위치가 낮은 것을 생각하면 다른 원소에 친화력을 지녔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운 나쁘게 땅의 원소에 선택당한 선조들이 불쌍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주인님께서도 중급의 벽을 깨지는 못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밴은 정령에 대한 친화력은 없었으나 그 눈썰미만큼은 그에 못지않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긴, 60년이란 세월을 헛으로 먹은 게 아니라면 바포 가문을 보필하면서 어느 정도는 구분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었을 것이다.
애초에 백작가를 보필하는 자가 우수하지 않을 리 없었다.
- 나 대단한데, 할 수 있는 거 많은데!
이 대화를 듣고 있던 흙덩이가 불릿의 뒤에서 시위했으나 그 목소리는 불릿에게만 전해질 따름.
그러나 흙덩이가 화났음을 그도 알았기에 밴에게도 알려줄 필요성을 느꼈다.
“밴, 흙덩이도 있는데 그런 말은 삼가는 게 좋겠군.”
“죄송합니다, 주인님. 그리고 흙덩이님.”
꾸벅-.
밴이라는 나이 지긋한 노신사가 정령에게까지 님이라고 부르며 존대하는 것은 흙덩이가 불릿과 계약관계이기도 했지만, 정령의 나이를 인간이 판별하기란 어리석다는 점에서 기인하기도 했다.
대체로 소환에 응하는 정령들은 존재해온 세월이 엄청났으니 말이다.
- 불릿 빼고는 다 바보야. 흥.
흙덩이가 언어습득을 빨리하는 것은 기특하기도 했지만 다른 자들에게서 나쁜 말을 들었을 때 고스란히 알아듣기도 했기에 난감하기도 했다.
차라리 몰랐다면 조용히 넘기기라도 하련만, 이제는 그것도 안 되었으니 중간에 낀 불릿만이 식은땀을 흘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