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0 그 정령사의 사정 =========================================================================
어둡고 칙칙한 방, 그곳엔 언제나 그가 있었다.
끼이익……
기분 나쁜 소음을 내며 열리는 강철문, 마치 감당할 수 없는 존재를 가둬두기 위해서 제작된 듯한 문이 열리며 어두운 실내로 누군가가 들어섰다.
또각, 또각.
높은 구두굽이 사이한 기운을 흘리며 어둠과 동화되는데, 그것은 섞인다기 보다는 어둠을 홀리는 것처럼 보였다.
또각….
탁.
“아직도 그러고 있어?”
높은 고음, 그러나 매혹적인 목소리는 듣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강한 색기를 드러냈는데, 안타까운 것은 실내의 어둠이 그녀라 생각되는 존재를 품에서 놓아주질 않고 있었다.
“크으으…….”
그녀의 매혹적인 목소리와는 반대로 고통으로 점철된 신음이 울려 퍼졌는데, 어딘가 아픈 것인지 참기 어렵다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크윽! 으으윽!”
고통을 참아내는 신음에 그녀는 흥미롭다는 듯 콧내음을 흘리며 신음의 주인공에게 말을 걸었다.
“어째서 참는 거지? 참으면 몸에 해롭단다?”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어조였으나 달콤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바지춤이 부풀 듯 했다.
그럼에도 목소리의 주인공은 참아내는 기색이 역력했다.
“쿠후, 쿠후! 꺼져라, 음탕한 년!”
“나에게 몸을 맡기면 쾌락과 힘이 함께할 텐데, 너무 오래 참으면 병이 난다고?”
“패배했으면 썩 꺼질 것이지 어디서 감히, 크으윽! 수작인 것이더냐!”
신음의 주인공은 남성인 듯했는데, 고통과 함께 욕망을 참아내는 부분도 은근히 엿보이고 있었다.
남성에게 있어 욕망을 참아내기란 무척 힘든 것이었으므로 그가 얼마큼 초인적인 인내를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흐응, 잘 안 넘어오네.”
아쉽다는 기색이 가득한 음성에 남성은 또 다시 고통과 욕망을 참아내는 신음을 흘렸고, 여성은 구두굽을 또각이며 방을 나섰다.
“언제까지 참을 수 있나 한번 보자구? 잘나신 영웅 오.빠. 호호호!”
츄릅-.
어두운 실내에서도 침으로 입술을 적시는 게 보일 정도로 고혹적인 모습을 보인 뒤 사라지는 그녀.
끼이이…쾅-.
문이 닫힌 후에도 남성은 스스로의 욕망과 싸우는 것인지 거친 호흡을 흘리며 홀로 독백을 중얼거렸다.
“크으으, 더 이상은….”
한계가 찾아오는 듯한 독백이었기에 불길함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 * *
“크으으, 더 이상은….”
짙은 신음성, 이 남성은 고귀한 기품을 지니고 있었으나 그의 인내심은 이미 한계치까지 도달해 있었다.
결국, 그는 욕망에 졌는지 고통에 겨워하며 끝내 굴복하고 말았다.
“항복이네, 항복! 흙덩이여, 제발 부탁이니 그런 것은 따라하지 말아주시게!”
대체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흙덩이는 고혹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었는데, 아직 성장이 덜 된 소녀의 모습이었음에도 남성이라면 흙덩이에게 어떤 끌림을 가질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불릿에게 그런 취미는 없었으므로 난감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 나 예뻐?
흙덩이는 이리저리 요염한 자세를 취하며 불릿을 유혹(?)하고 있었는데, 흙덩이와 놀아주려던 불릿은 덜컥 기겁하며 물러섰다.
“대체 그런 옷은 어디서 난 것인가?”
올리비아가 입었던 것과 흡사한 속이 비치는 네글리제를 입은 흙덩이.
그녀가 입었던 것을 훔치더라도 흙덩이의 체구라면 착용할 수 없었기에 평범한 방법으로는 구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말을 하는 와중에도 불릿은 어떤 인물의 수작임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 안나가 입혀줬어.
흙덩이는 불릿을 제외한 다른 이들과 대화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기억력이 비상한 흙덩이였기에 굳이 음성이 아니더라도 손짓발짓, 또는 간단한 문자를 통해서 서서히 뜻을 주고받을 수 있었으니, 그 결과가 이것인 것 같았다.
“후우우…, 본인을 위해서 입어준 것이오?”
- 응, 좋아?
“좋…, 끄으응!”
- 헤헤.
해맑게 웃는 흙덩이였으나 불릿은 어찌할 줄을 모르며 눈도 돌리지 못했다.
그는 어디까지나 그동안 방치했다시피 놔두었던 흙덩이를 달래주기 위해 같이한 것이었기에 흙덩이가 싫어할 행동을 해서는 안 되었다.
불릿이 바포 변경백의 대영주이긴 했으나 근본은 정령사였다.
정령의 힘으로 일어선 가문이었기에 정령에 대해서 소홀히 한다면 본말전도가 되지 않겠는가?
“흙덩이여, 그게 그토록 입고 싶었소?”
불릿의 물음에 흙덩이는 동작을 관두고선 고개를 저었다.
- 아니? 딱히 입고 싶었던 건 아닌데.
정령에게 인간의 의복이 가지고 싶냐 물으면 백중 구십구는 ‘아니오’라고 답할 것이다.
아주 간혹, 호기심이 왕성하다 못해 지나친 정령들이 의복에도 관심을 가졌으나 역소환 되면 의복은 땅바닥에 떨어지고, 그것을 입을 정도로 구체화될 수 있는 정령은 흔치 않았다.
게다가 속성에 따라 의복이 더러워지거나 아예 파손되는 경우가 허다했으니 정령들에게 있어 인간들의 물품은 그림의 빵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어찌하여 맞춤 제작한 옷을 입고 있는 것이오?”
흙덩이가 입고 있는 네글리제는 어린아이가 입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흙덩이의 체구에 맞게 특수제작한 주문품이란 것인데, 가지고 싶은 게 아니었다면 이런 옷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 그냥 올리비아만 쫓아다니는 건 심심해서 돌아다니다 보니까 안나가 이것저것 입혀주던데.
“……오늘은 어떤 연유로 그런 복장을?”
생각해 보면 흙덩이는 불릿이 갈아입히지 않았음에도 자주 복장이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거기까지 신경 쓰지 못한 불릿은 그러려니 했으나 이제와 생각해보니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설마 그러한 일의 흑막에 안나가 있었을 줄이야! 그렇다곤 해도 불릿은 안나를 탓할 생각이 없었다.
안나는 언제나 이렇듯, 자신의 생각이 미치지 못한 부분을 세심하게 신경 써 주었기에 그녀를 탓할 수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불릿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우러난 결과였으니 말이다.
그렇다곤 해도….
- 이러면 불릿이 좋아할 거라던데? 그래서 나도 입었어. 근데 아기가 뭐야?
“…방금 뭐라고 했나?”
불릿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귀족의 체면도 잊고 귀를 후볐으나 이어지는 말에 귀를 파고들 만큼 심각한 내용이었다.
- 올리비아 다음이 나라고 하더라? 근데 난 싫어. 내가 처음이 될 거야.
“안나에게 설명을 해줬어야 했는가….”
- 응? 뭔데?
“으, 으으음. 정령은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네만.”
그러자 흙덩이가 애달픈 눈으로 불릿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 흙덩이는 안 돼?
“그것은 노력만으…론? 음….”
아무리 애달프게 바라본다 하더라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기에 현실을 알려주려 흙덩이를 내려다보니 뭔가 이상했다.
어쩐지 내려다보는 시선이 조금 더 높아졌고, 빨래판(?) 같던 그곳이 봉긋 솟아난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얼굴만 해도, 이전엔 약간 중성적 매력을 지닌 귀여운 외형의 미소녀였었는데 볼살도 사라진 것이 무언가…
“흙덩이여, 모습이 바뀐 것 같소만?”
- 응?
“키도 큰 것 같고, 거기도….”
자신이 물어놓고는 아니라고 하는 불릿을 흙덩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쳐다보자 불릿은 네글리제 차림의 흙덩이를 바라보기 민망했기에 머리만 쓰다듬을 뿐이었다.
‘……확실히 달라졌다.’
정령의 모습은 첫 소환 때 고정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그것이 정령력의 수준에 따라 얼마나 잘 구체화되느냐의 차이가 존재했지만 기본적인 틀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그동안은 조금씩 변화가 이루어졌기에 알아채지 못했었는데,
스윽.
힐끗 내려다본 흙덩이에게서 불릿은 그 변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앞으로 솟아난 융기가 얼핏 계곡을 형성하는 것이 한층 성숙해진 것을 말이다.
“크흠! 그, 역시 흙덩이는 특별한 것 같으이.”
- 좋아?
“…….”
- 좋아?
“뭐가 좋다는 말이오?”
- ? 그야 흙덩이지. 좋아?
“어, 음. 당연히 좋소.”
- 나도 불릿이 좋아. 좋아해.
이제는 열셋, 아니면 열넷? 그쯤으로 보이는 흙덩이가 저런 말을 꺼내니 싱숭생숭했다.
- 불릿.
“으음, 좋긴 좋은데, 이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 우리 사냥가자.
“흙덩이는 정령이일진데, 본인이 미쳤는가….”
- 불릿? 사냥가자고.
“이 괴상한 육체는 도대체가 말을 듣질 않는군.”
- 불.릿.
스윽-.
자괴감에 빠졌는지 불릿이 이마를 짚고서 중얼거리자 흙덩이가 그의 허리춤을 껴안았다.
다만, 뒤가 아닌 앞에서 껴안았기에 아직 키가 작은 흙덩이의 가슴이 거기에 닿았다는 게 문제였다.
“…….”
민감해진 육체가 반응하려하자 기겁하는 불릿. 그는 뒷걸음질을 치며 헛기침을 뱉었다.
“커험, 크흐흠. 흠…, 으으음.”
- 사냥가기 싫어?
흙덩이가 자꾸 사냥을 가자고 조르는 이유는 그것이야말로 단 둘만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사냥을 나갈 때는 주로 기술을 점검하거나 야외수련을 할 때에만 그러했는데, 다른 이들에게 보여줄 만큼 깔끔한 모습이 아니어서 불릿은 흙덩이만 대동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것이 반복되니 흙덩이는 ‘사냥=단둘’ 이라는 공식을 성립해 외우고 있던 것이다.
흙덩이는 자신에게 세상을 보여준 불릿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지만 자신의 행동이 무얼 의미하는지 모르고 있었기에 그를 난감하게 만들었다.
“아닐세, 그저 지금은 성을 비울 수가 없어서 그렇네.”
불릿이 사냥을 나서려면 영지를 벗어나야 했는데, 지금처럼 중요한 시기에 또 다시 몸을 감추면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기껏 안정화 되가는 영지가 엉망이 된다.
게슐린 그랩 자작이라는 반역을 일으킨 2인자를 처치하려면 힘을 모아야 할 때, 개인수련에 힘쓸 틈이 없었다.
그러나 흙덩이는 정령, 인간세상이 신기하긴 했어도 그러한 사정까지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계속해서 불릿이 자신을 거부하는 태도를 보이자 완전 삐졌는지 팔짱을 끼며 몸을 홱하고 돌렸다.
- 바보, 미워. 나는 불릿이 좋은데 자꾸 밀어내고.
“아니, 그것은 말이지, 흙덩이여….”
어째 영지에 오고 나서부터 더욱 혼란스러워하는 불릿이었기에 그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만으로도 어지러워했다.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올리비아 하나만으로도 정신머리가 없는데 정령인 흙덩이마저 골치 아프게 됐다.
아니, 이젠 정령인지도 의심스러울 지경. 하는 행동하며 모습까지, 게다가 내뱉는 말마다 왜 이리 가슴을 울리게 만든단 말인가?
그리고 성장하는 정령은 듣도보도 못했다.
- 불릿은 흙덩이가 싫어진 거야?
감정의 절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올리비아나 흙덩이에게서 한발자국 떨어져 있었으나 더 이상 흙덩이를 밀어내면 서로 감정이 상할 판국.
결국 불릿은 어쩔 수 없이 흙덩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기 시작했다.
스윽, 스윽.
“그럴 리가 있나? 본인이 가장 아끼는 존재중 하나가 자네인 것을.”
‘이것으로 끝내줬으면 싶군.’
예전에 떠올렸던, 아기오리의 특징과 비교하며 달래보았으나 이번엔 통하지 않았다.
- 안아줘.
“흙덩이여, 이건 친밀을 위한 의식으로, 정령과 인간은….”
- 안아줘. 나 삐진다?
“…후우, 이리 오시게.”
팔을 벌리며 안아달라 하자 하는 수 없이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서 번쩍 들어 올리는 불릿.
그런데 어째 모양새가 아기를 안는 듯 엉덩이를 받친 자세로 팔에 걸터앉아놓았다.
이것은 무의식중에 나타난, 불릿이 흙덩이를 어찌 생각하는지 알려주는 행위였다.
흙덩이도 자신이 바란 건 이런 게 아니었는지 살짝 볼이 부풀어 올랐으나, 딱히 더 이상 투정을 부리진 않았기에 불릿도 한숨을 놓았다.
‘흙덩이가 성장이란 것을 이룬 것 같은데, 그것을 확인하고자 나가고 싶어 하는 것인가?’
한눈에 보아도 2차 성징(….)이 이루어졌기에 이전처럼 애매한 것이 아닌, 확연한 여성미를 뽐내고 있었다.
자신과 계약관계인 정령이 아름다우면 불릿도 좋기야 했지만, 이런 모습으로 민감한 부위에 닿거나 이상한 생각이 들게끔 만들면 난감할 따름.
젊어진 이래로 평생토록 겪어보지 못한 일들이 펑펑 터지니 육체의 활력과는 별개로 급속히 피로해지는 기분이었다.
꼬옥…
바로 지금처럼, 뜬금없이 목을 껴안는 흙덩이의 행동 같은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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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은 3연재가 있겠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