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9 수습하다 =========================================================================
웅성웅성웅성!
“그게 무슨 말이오? 전쟁이라니!”
“지금은 겨울이 아닌가, 전쟁이라니? 허허.”
“자포자기를 하겠다는 것인가….”
아까보다 훨씬 더 소란스러움이 지속되자 이번엔 불릿이 직접 나서기 시작했다.
“모두 그만, 아이언 외교대사, 그들이 본인의 영토를 침범하려는 뜻인가?”
이에 외교대사는 정중히 고개를 숙인 후 말을 이어갔다.
“아닙니다, 각하. 그들은 다른 지역을 점령하려고 준비 중이었습니다.”
비 아이언 외교대사의 말에 불릿이 되물었다.
“다른 지역이라…, 구울 백작의 아래쪽은 혼란스러움이 극에 달해 먹고 먹히는 와중이라 손을 대는 것이 껄끄러울 터인데?”
알 라스 폰 구울 백작령의 아래지역은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루드밀라 왕국의 수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이 군벌들로 인해 하루가 다르게 지도가 바뀌었으니, 그런 피의 바다나 마찬가지인 곳을 구울 백작이 지금 손을 댈 필요는 없던 것이다.
먹더라도 나중에 치고받던 이들이 지쳐 쓰러졌을 때가 기회였다.
그러니 바포 변경백도 아니고, 아래지역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쪽에 위치한 불모의 황무지는 줘도 안 가질 쓰레기였으니 이상할 만도 하였다.
“설마 투툰 후작령을 건드리겠단 것은 아니겠지?”
투툰 후작은 명실공히 루드밀라 제일의 세력이며 가장 강한 인물임과 동시에 바포 변경백이나 구울 백작령을 합친 것보다도 족히 3배 이상은 더 거대한 어마어마한 곳이었다.
불모의 황무지보다도 넓은 그곳은 땅도 기름지고 천연자원이 넘쳐나 굳이 다른 지역을 습격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의 사태를 관망하다 최후에 남는 승자를 먹어치우면 끝인 인물이 바로 투툰 후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도 아니었는지 아이언 외교대사는 고개를 저으며 나직이 대답하였다.
“투툰 후작도 아닙니다. 구울 백작은 동쪽의 왕실영토를 점령한다고 공표하였습니다.”
……….
싸늘한 적막감이 감도는 회장. 그만큼 비 아이언 외교대사의 말은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불릿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은 상황. 그러나 불릿은 한 지역의 군주였기에 남들보다 빠르게 정신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들이 불가침을 깨겠다는 것인가?”
왕실영토는 그 누구도 건드리지 않는 안전한 중립지역이었다.
왕이라는 존재가 유명무실해졌으나 아직까진 모두가 존중하는 티를 내었다.
그렇기에 이런 혼란스런 시국에도 루드밀라 왕국이라는 틀이 유지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중립지대를 구울 백작이 깨겠다? 이것은 다른 지역의 패자(霸者)들은 물론 왕실에 던지는 도전장이었다!
“자세한 것은 모르겠사오나, 그들은 간섭하지 말라고 엄히 말하였습니다.”
“진정 그가 미쳐버렸구나.”
외교대사의 말에 불릿은 벌떡 일어섰던 자세에서 풀썩 주저앉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불릿이 자리에 착석하자 비 아이언 외교대사도 본인의 자리에 앉았고, 그러자 조용했던 회장은 서로가 나누는 대화로 들썩이기 시작했다.
‘미쳤구나, 미쳤어! 알 라스여, 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것인가?’
이렇게 소란스러움이 지속되면 싸움도 벌어지기에 중재를 해야 했으나 수행원도 심각하게 고민하던 터라 이들을 말릴 이가 없었다.
가장 윗사람인 불릿이 인상을 쓰며 홀로 상념에 잠겼는데 그 누가 말린단 말인가?
그러나 이내 불릿은 한가지 다짐을 맺고서 수행원에게 속닥였다.
불릿의 말을 들은 수행원은 정중히 고개를 숙인 후 좌중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집중해주시기 바랍니다! 대영주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고 전하시랍니다!”
순식간에 조용해지는 회장. 불릿의 카리스마가 얼마큼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번엔 자리에 앉은 채로 불릿이 손을 휘저은 후 비 아이언 외교대사에게 말을 걸었다.
“비 아이언 외교대사, 자네는 본인에게 경각심을 일깨우라는 의미에서 그러한 보고를 올린 거겠지?”
“송구스럽사옵니다, 각하.”
“아닐세, 비단 본인만이 아닌 모두가 들으라는 의미에서 그런 거겠지.”
“…….”
외교대사와의 대화를 통해 회장의 인원들은 불릿이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어렴풋이 알아가고 있었다.
“가신들은 들어라. 이렇듯 우리의 영토, 바포 변경백은 위험으로 둘러싸인 상태다. 북쪽에는 가증스런 반역자, 게슐린 그랩 자작과 그의 세력이, 그 위로는 호시탐탐 우리가 속한 루드밀라 왕국을 노리는 란푸스 왕국이, 서쪽으로는 인간의 영역이 아닌 마수의 숲이 있지.”
란푸스 왕국. 몇 백 년째 루드밀라 왕국을 괴롭히는 침략자들. 그리고 바포 변경백의 서쪽엔 마수의 숲이라는 마물출현지가 있었다.
“동쪽으로는 생물이 살 수 없는 불모의 황무지가, 그곳의 아래엔 강대하며 부유한 세력을 자랑하는 투툰 후작령이 있도다.”
“각하.”
“괜찮네, 수행원. 자책하는 것이 아니야.”
수행원이 걱정스런 어조로 그를 부르자 불릿은 수행원을 다독이며 뒤로 물러나게 했다.
잠시 끊겼던 호흡을 고른 후 불릿은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금 나왔던 대로 우리의 아래지역엔 알 라스 폰 구울 백작과 왕실, 그 외의 세력들이 서로 으뜸이 되고자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것은 굳이 본인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모두가 아는 사실일세.”
알 라스 폰 구울 백작은 모두가 건드릴 생각을 않는 바포 변경백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투툰 후작에게도 라이벌이라 생각하는지 적대적인 면모를 보였다.
“본인은 비 아이언 외교대사가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충분히 알아들었다. 그러나 군사적인 부분에서만큼은 결코 물러설 수 없도다.”
“각하, 그것은….”
“그래서 말하는 것일진데, 자네들은 본인이 설계한 ‘군단’이라는 것에 대해서 아직도 잘 이해를 못하는 듯하군. 그러니 다시금 설명을 할 수밖에 없겠군. 벤젼스, 들어오게!”
드드드드득-
다소 육중한 문이 열리며 바깥에서부터 대기하고 있던 라체나의 수석기사, 벤젼스가 들어오고 있었다.
뚜벅, 뚜벅.
탁!
처척.
“최고사령관께 대하여, 충.성!”
벤젼스는 귀족의 예를 하고 있었는데, 동작을 딱딱 끊어주면서 마지막 오른팔로 배를 감싸는 대신 주먹을 심장에 갖다 대며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었다.
처음 보는 동작이었기에 귀족들은 의문을 보였으나 아직 불릿의 설명은 끝나지 않았기에 말은 하지 않았다.
벤젼스의 예가 끝나자 불릿은 자신도 심장을 주먹으로 가리며 인사했고, 그들이 그것을 주고받자 그제야 벤젼스는 자세를 풀며 수행원이 없는 불릿의 반대편에 섰다.
“자, 보았듯이 이게 군단의 새로운 인사법이다. 그동안 상하관계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기에 생길 수 있었던 문제를 이러한 각이 잡힌 인사를 통해 바로 잡을 수 있으며, 또한 상관이 왔음을 인식할 수 있기에 불미스런 상황도 방지할 수 있지.”
“그렇습니다, 최고사령관 각하!”
“……벤젼스, 각하는 빼게. 군인으로 대할 때는 계급만을 부르는 것이야.”
“충, 최고사령관!”
“그래, 그렇게 하시게.”
희한한 모습이었으나 평소 기사들에게서나 볼 수 있었던, 아니. 기사들보다도 더욱 멋들어지는 모습이었기에 귀족들에게서 호감을 샀다.
이에 한 귀족이 손을 들자 불릿은 그를 지목해주었고, 그는 감사를 표하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백작각하, 그것은…, 제 사견으로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과 군단의 권력집중으로 인한 문제에 대해선 아직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걸로 아옵니다.”
“기다리시게, 천천히 설명해줄 터이니.”
불릿은 의자에 걸쳐진 팔에서 손가락만 위아래로 까딱이며 말을 잇기 시작했다.
“이렇듯 기사라 할지라도 군에 들어가면 군율에 따라 엄히 다스릴 것이네. 귀족과 귀족으로 대하면 서로 말싸움을 벌이다 명령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을 수 있으니 말이야. 벤젼스, 나머지는 자네가 설명하게.”
“옛, 최고사령관. 이렇듯 본 천인장 또한 귀족이며 기사이지만 군대에 발을 디딘 순간부턴 계급체계를 따라야한다.”
“…벤젼스 경? 말투가 하대인 것 같소만….”
“군인은 군인과 민간인만을 나누지 민간인 중에서 누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는 따지지 않는다. 이는 민간인에게서 간섭을 받으면 군의 기강이 흔들리기 때문에 최고사령관께서 직접 설계하신 부분이다.”
불릿이 이러한 체계를 만든 것은 마물토벌대가 맥을 못 추는 모습을 봤을 때부터였다.
분명 힘들긴 하더라도 피해를 감수하면 그들만으로도 마물을 잡을 수 있었거늘, 이상하리만치 뒤로 죽죽 밀려났었다.
그것은 기사들이 자기들끼리만 뭉친 채로 명령도, 행동도 하지 않았기에 그랬던 것인데, 론 타로의 병사들은 계급이란 것이 없었기에 서로 앞장서라고 소리만 지르다 몬스터에게 당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 천인장보다 윗 계급인 군단장, 즉 사령관이라 할지라도 보고체계를 무시할 수 없으며 군인은 부당한 명령에 불복할 권한을 지녔다.”
이 말은 한낱 병사가 귀족의 말을 안 들을 수도 있다는 뜻이기에 반향이 따랐다.
스윽.
스윽스윽.
여기저기서 손이 들리자 불릿은 누구를 고르면 좋을까 고민하다 냉큼 제일 멀리 있는 자를 지목했다.
“감사합니다, 각하. 벤젼스, 아니 천인장. 그대의 말에 따르면 오히려 전보다 혼란스러움이 가중될 것 같은데, 이에 대한 해결법이 있소?”
“당연히 있다. 군인은 부당한 명령엔 불복할 수 있으나 그것이 부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라 생각되면 재판에 회부되어 합당한 처벌을 받게 된다. 최고 형벌은 사형이다.”
또 다시 웅성웅성. 이 말은 자칫하다간 마음에 안 드는 자를 재판에 회부하여 죽일 수 있다는 뜻이었기에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말해보시오, 재판관.”
“감사합니다, 대영주님.”
불릿의 말에 중앙영지에서 법에 관해서 최고로 박식하며 백성들에게 판결을 내리는 재판관이 나서기 시작했다.
“천인장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면 마구잡이로 재판이 열릴 수 있는데, 이에 대해 반박하실 사항이 있는가?”
재판관의 근엄한 말에 벤젼스는 살짝 긴장한 상태로 말을 잇기 시작했다.
재판관의 직위는 1급 행정관, 이 중에서 그에게 반항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었다.
“꿀꺽, 무, 물론 있다. 부당한 재판을 막기 위해 시민들로 구성된 판정단과 군율을 담당하는 재판관, 변호사, 검사가 꾸려질 것이다. 그리고 충분한 증거와 상황재현을 통해서 억울한 이가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벤젼스가 얼마나 달달 외웠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기에 재판관은 말을 더듬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불릿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불릿은 싱긋 웃으며 그를 반겨주었고, 재판관은 잠시 불릿을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군율은 귀족출신 지휘관인 군단장 밑 십인장들로부터 부당한 대우와 착취를 당할 병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생겨난 것으로, 실제 병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폐해는 실로 높다.”
실제로 병사들은 귀족들의 사적인 일에 동원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가장 하찮은 일로 짐꾼역할이나 똥푸기, 농사부터 시작하여 자신들의 사병을 대신해 몬스터 퇴치나 분란에 나섰다 사망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그렇게 죽거나 다쳐도 보상을 받지 못했고, 노동을 하더라도 정해진 월급을 제외하면 마땅한 보상조치가 없었다.
이는 불릿이 결사대로서 활동하며, 용병생활을 통해 뼈저리게 느낀 불만사항을 집대성한 결과물인 것이다.
불릿은 충분하다 여겼는지 옆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재판관에게 답해준 벤젼스를 툭툭 치더니 뒤로 물리게 했고, 그는 한숨을 쉬며 뒤로 스윽 물러섰다.
이제는 자신이 나설 때라 생각한 불릿은 자리에서 일어나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본인이 설계하고, 만들어낸 군단이라는 것일세. 그동안 중앙영지군은 비효율적으로 운영되어 소모되는 자금에 비해 그 실적이 좋지 못했다. 게다가 각자의 역할이 제대로 정해져있지 않아 같은 보고가 중첩되거나 했던 짓을 또 하는 경우도 많았지.”
한마디로 ‘뻘짓’을 많이 했던 영지군이었기에 결사대로 활동하며 눈이 높아진 불릿에겐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영지군의 재편은 비단 병사들만이 좋은 것은 아니다. 그동안 비효율적인 보고체계 덕분에 피곤에 찌들었던 기사들을 비롯해 군과 관련된 업무를 가진 자들도 한숨을 돌릴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예를 들자면 더 이상 잠자다가 보고를 받거나 10명에게 같은 보고를 10번 듣는 짓은 안 해도 된다는 것이지.”
“오오오….”
“좋습니다, 매우 좋습니다!”
얼마나 시달렸었는지 불릿의 허락이 없음에도 손뼉을 치면서 좋아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눈 밑이 거뭇한 게 군과 관련된 인물들인 것 같았다.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없자 불릿도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마쳤다.
“본인 또한 군단을 다룰 때엔 군인으로서 행동할 것이니 부당함은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다. 부관?”
부관이라는 말에 수행원은 회의 내내 보이던 유들함이 사라지며 뻣뻣한 자세로 차려를 했다.
“최고사령관께 대하여, 충.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