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7 수습하다 =========================================================================
“그러나 직스 자작령의 방식을 그대로 차용하면 그동안 유지해오던 중앙영지군이 흔들릴 가능성이 있지. 그렇다면 어찌해야할 것 같은가?”
자신의 의견을 말하면서도 상대에게 질문을 통해 보다 폭넓은 사고의식을 하게끔 만든다.
그저 수동적인, 피동적으로만 움직인다면 사실상 기사라는 존재는 필요가 없을지도 몰랐다.
불릿이 원하는 기사란 중간지휘자의 역할도 겸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으음…….”
벤젼스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자 고개를 숙이며 불릿에게 사죄를 고했다.
“죄송합니다, 각하. 부디 답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벤젼스 또한 귀족자제로서 기사단에 입단했던 것이기에 생각이 굳어져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하나보다.
그래도 생각했던 사정범위이기에 불릿은 실망하지 않고 그에게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중앙영지의 특색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직스 자작령의 제도를 도입하려면 라체나의 기사들에게 각기 십인장, 백인장의 권한을 부여하고 병사들과 어울리도록 한다.”
“각하, 기사들에게 원성을 살까 두렵사옵니다.”
불릿이 하고자하는 일은 기사들에게 있어선 품위가 떨어지는 일로, 자칫하다간 기사와 병사 두 사이에서 원성을 살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불릿은 단호할 때는 단호박(?)을 시전하는 인물인지라 물러서지 않았다.
“자네는 본인의 말을 착각하는 것 같군. 본인은 자네들보고 병사들과 함께 병영에서 생활하라는 것이 아닐세.”
벤젼스의 반응에서 불릿은 기사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으로 보이자 부가설명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내 분명 기존의 방식은 그대로 둔다 했거늘, 자네는 그걸 착각한 모양이군. 병사들의 위계인 하위, 중위, 상위병, 그리고 병장에 관해선 건드릴 생각이 없네.”
“…그렇다면 십인장은 어찌하여 도입하시나이까? 백인장은 어찌 이해를 하겠사오나….”
병사들을 다스릴 인물로 병장이 있는데 굳이 십인장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한 벤젼스.
“그래서 십인장이 필요하네. 현재 중앙영지군은 병사들을 다스릴 병장이 존재하나 병력이 세세하게 나누어있지 않아 혼란스런 면이 없잖아 있지.”
쉽게 설명하자면 한곳에 1000명의 사람이 뭉쳐있는데 ‘야, 너 이리와’라고 하면 누굴 부르는지 몰라 우르르 몰려다닌다고 봐야했다.
실제로 그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자기들끼리 역할분담이 확실하게 이루어진 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십인장 아래 병장이 있고, 병장 아래 상위병이, 그 아래에 중위병, 그리고 그 아래에 하위병을 놓는다면 관리하기도 쉽고 역할에 따라 배치하기도 수월하지 않겠는가?”
그러면서 뒷짐을 진 채 손가락을 척하니 드는 불릿.
“그리고 백인장, 백인장은 십인장들에게서 보고를 받아 병력을 편성하는 이로서 상황에 따라 자체적으로 판단한 뒤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경우에 위에다 보고를 하겠지.”
“듣고 보니 매우 좋은 것 같습니다, 각하. 현 중앙영지군의 경우 아랫것들이 곧바로 윗줄에 보고하는 경우가 있어 보고가 겹쳐 들어오는 상황이 여럿 발생합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기사들이 퇴근했을 시엔 병장들이 병영을 지키며 다스리는 것이다. 이것 또한 시행착오가 있겠으나 차차 고쳐나가는 것으로 하지.”
십인장, 백인장이 생길 경우 보고가 겹치는 일도 줄어들고, 보고를 받는 입장에서도 교통정리가 되어 훨씬 편해진다.
이거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경우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것만으론 무언가 부족했는지 불릿은 그 스스로가 그 자리에서 고민을 하더니 천천히 입을 떼기 시작했다.
“백인장만으로는 뭔가 부족하군. 벤젼스, 영지군의 사령관은 누구지?”
“본래는 라체나의 단장이 겸직을 하고 있었으나 그가 사망한 뒤로는 제가 임시로 맡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불릿이 쳐다보니 뭔가 피곤한 기색도 보이고, 눈 밑에 기미도 있는 것이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것 같았다.
“자네 잠은 제대로 자는가?”
불릿의 물음에 벤젼스는 씁쓸하게 웃으며 이에 대꾸하였다.
“사실 요 며칠사이 제대로 자본 적이 없습니다. 낮이고 밤이고 보고가 들어오니 수련을 할 시간도 부족합니다.”
벤젼스의 말에 불릿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본인의 계획은 자네에겐 희소식이겠군. 본인의 생각엔 백인장만으론 부족할 것 같아서 천인장과 그들을 총괄하는 단장, 영지군이니 군단장이라는 직함이 적절하겠군. 군단장이라는 존재를 만들 생각이네.”
그러면서 불릿은 척, 하니 벤젼스의 어깨에 손을 얹고서 말을 이었다.
“자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사람을 배치할 것이니 그리 알도록 하고, 자네는 무엇이 좋은가? 천인장? 군단장?”
불릿의 말에 벤젼스는 기겁하며 소리쳤다.
“아, 아닙니다, 각하!”
“음? 싫은 겐가? 그래도 꽤 명예스런 자리라 생각하는데.”
그러나 요 며칠사이 시달릴 대로 시달린 벤젼스는 거절의사를 분명히 표명했다.
“각하, 기사는 기사다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그 자리에 오르면 저는 병사들을 지휘만 하다가 인생이 끝날지도 모릅니다.”
결국 업무에 치이는 삶은 싫다는 얘긴데….
불릿은 이에 대한 해결방법도 가지고 있었다.
“벤젼스, 자네만한 실력자는 우리 영지에서 더 이상 없네. 올리비아의 실력이 자네와 비등할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여성, 체력이 달릴 수밖에 없지. 게다가 중갑옷은 그녀에겐 무리야.”
“그분은 각하의 안주인이 되실 분이 아니십니까?”
“푸웁! 그 얘길 왜 지금 꺼내는가!”
“에, 예? 그게, 다들 그리 말하는지라….”
뜬금없이 올리비아의 얘기가 나오자 침을 뿜으며 버럭 소리치는 불릿.
그런 그에게 벤젼스는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며 말을 이었다.
“아기씨가 태어나시면 함께 검술수련을 하고 싶은데, 안 되겠습니까?”
결국 벤젼스도 ‘안나파’였던 것이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으나 입을 다물고 있을 수도 없었다.
“끙, 그 문제는 나중으로 하고. 벤젼스여, 자네는 현 영지직속 기사단 라체나가 괜찮다고 생각하는가?”
“문제가 없…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단원과 일반기사들을 다스릴 존재들이 모조리 죽었으니 정상적인 상황은 분명 아니었다.
그렇다고 남아있는 인원에서 무턱대고 단장과 조장을 뽑자니 그건 그것대로 엉망이 될 노릇이었다.
“현 라체나 기사단의 문제는 더 이상 라체나라는 특색이 사라졌다는 것일세.”
“…….”
단장과 조장들이 모두 죽었다. 그것도 후임을 정하기도 전에, 무언가 알려주기도 전에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비록 벤젼스가 수석기사이기는 하나 그가 누구를 가르치기엔 자신의 깨달음을 전해주기가 요원했다.
현 영지 제일이었으나 그렇다고 그가 이전 단장이나 조장들보다 뛰어났다는 것은 아니란 소리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라체나라는 기사단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할까?
“본인도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이대로라면 라체나는 어중이떠중이가 될 뿐이네.”
결국 어중이떠중이가 될 바에야 차라리 하나의 군단을 통해 새로이 거듭나자는 것이 불릿의 의견.
쉽사리 정할 수 없는 문제였기에 벤젼스의 대답은 느리게 흘러나왔다.
“시간을… 주실 수 있나이까….”
막중한 책임감이 그를 짓누르는 듯해 불릿은 벤젼스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게. 다른 기사들과도 충분히 상의하고, 그렇다고 해서 기사라는 호칭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세. 그저 살아남기 위해 약간 길을 변경하는 것뿐일세.”
“오늘 말씀은 감사했습니다, 각하. 빠른 시일 내로 결정사항을 보고하겠사오니 부디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음, 가보도록.”
꾸벅 고개를 숙인 벤젼스는 터덜터덜 힘없는 걸음걸이로 자신의 저택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불릿은 혀를 차더니 자신도 장소를 옮겨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 * *
복도를 거닐던 불릿은 절로 독백이 튀어나왔다.
“장난이 아니로구나.”
자신의 영지가 얼마나 심각한 상황에 처했는지를 깨닫자 좀체 얼굴을 펼 수가 없었다.
차라리 용병으로 활동했을 때가 마음이 편했을지도 몰랐다.
영지의 꼴이 이래서야 용병 ‘볼레트’가 불릿 자신이었음을 공표할 수도 없었고, 데빌로안 영지와 파르탄 영지를 구해낸 일도 밝힐 수가 없다.
‘아니지, 파르탄은 제외시켜야겠군.’
그곳의 어린 영주를 위해서라도 의뢰는 비밀로 해주어야겠다.
그리 생각한 불릿이었으나 늘어나는 것은 한숨이요, 점점 압박감이 조여오자 쉴 곳이 필요했다.
‘올리비아는 왜 자꾸 엮으려는 것이지?’
이제는 불릿도 자신의 마음을 안다. 자신이 올리비아를 좋아한다는 것을.
그렇지 않고서야 통제가 되지 않는 육체라 할지라도 입맞춤을 할 리는 없던 것이다.
그가 아무 여자나 보고 미쳐 날뛰는 짐승도 아니었으니 올리비아를 좋아한다는 점만은 명확한 사실.
‘싫다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아직 어떻게 할지 갈피를 못 잡는 자신이 못나보였으나 그래도 지금은 아니었다.
때가 어느 때인데, 자신의 욕망을 따르겠는가?
부모의 희생을 통해 물려받은 영지를 강탈하려는 도적에게서 지켜내려면 지금 이 순간에도 노력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도….”
“뭐가 그래도야?”
“흡…, 올리비아?”
상념에 빠져있던 불릿은 놀람을 감춘 채 언제부터인지 나란히 걷고 있던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중앙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편한 복장인 바지와 셔츠를 입는 것에 익숙해졌던 불릿은 그녀가 이곳에서 생활하면서는 가슴과 허리라인을 강조하고, 유행에 따라 매끈한 다리도 보이는 드레스를 입으니 눈을 둘 곳이 없었다.
“험험, 여긴 어쩐 일로…?”
“…? 그게 무슨 소리야? 여긴 내방 앞이잖아?”
“으음…?”
불릿은 급히 주변을 둘러보다 이내 탄식을 터뜨렸다.
“허어, 이럴 수가.”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올리비아의 방 앞에서 왔다갔다를 반복하고 있었는데, 그걸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깊은 고민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불릿은 자신도 자기가 왜 그러는지를 이해하지 못해 어이가 없었고, 그래서 탄식을 터뜨린 건데 그런 그를 보면서 올리비아가 흙덩이에게 말을 건다.
“와, 꼬맹아. 아무래도 불릿이 나한테 관심이 많은가봐, 그치?”
- 네가 아니라 날 보러 온 거야, 이 바보야.
그러면서 불릿에게 고개를 돌리는 흙덩이.
- 그치, 불릿?
“어, 음. 그렇다, 흙덩이여.”
불릿과 흙덩이가 대화를 주고받자 올리비아가 볼을 부풀리며 불만을 토해낸다.
“뭐야, 둘이서 나만 쏙 빼놓고. 흙덩이가 뭐라고 했는데?”
뭉클.
저번의 사건 이후로 올리비아는 스킨십을 함에 있어 스스럼이 없어졌다.
아니, 부끄러워하긴 했으나 그 대상이 불릿이라면 그것을 감내하면서도 실행하는 것이다.
자신의 팔을 껴안으면서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올리비아에게 불릿은 난감함을 보이며 헛기침을 뱉었다.
“커험, 그, 과년한 처자가 이러면 못 쓰는 거외다.”
“어째서?”
올리비아의 당돌한 말투에 불릿은 당연하다는 듯 이어받았다.
“그야, 혼인을 위해선 정조를 지켜야….”
“그 정조를 네가 가져갔잖아?”
“그….”
“그, 뭐?”
뭉클-.
주변의 하녀들이 인사를 하며 지나감에도 올리비아는 아랑곳 않고 자신의 품에 불릿의 팔을 껴안고 있었는데, 이것을 지켜보던 흙덩이가 불릿의 다른 손을 붙잡았다.
덥썩.
- 나도 할 수 있어.
올리비아를 따라하는 것일까? 뭔가 불릿의 손을 가지고 자신의 몸에 비비는 것처럼 보였는데, 말 그대로 비비는 것인지라 별다른 감흥은 생기지 않았다.
“꼬맹아, 너는 좀 더 커야하지 않겠어? 후훗.”
어쩐지 올리비아가 이겼다는 듯 웃으며 말하자 흙덩이가 콧등을 찌푸리며 불릿에게 졸랐다.
- 나랑 놀아줘. 쟤는 혼자서 놀라고 해.
둘의 이상한 신경전에 낀 불릿은 한숨을 쉬며 작게 중얼거렸다.
“본인보고 대체 어찌하란 말인가….”
그리고 그것을 들은 올리비아와 흙덩이는 동시에 외쳤다.
“책임을 져야하지 않겠어?”
- 날 소환한 건 불릿이니까 책임져.
한 명의 인간과 한 명의 정령(?)이 서로를 책임지라하자 급속도로 피로해진 불릿은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어쩐지 벤젼스의 고민을 알 듯 하구나!’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불릿이었다.
비비적, 비비적.
뭉클.
그렇다고 해서 이 상황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 작품 후기 ============================
오늘 추천 600을 못 넘을 줄 알았는데 살짝 놀랐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9시에 올리고, 12시 10분에 이어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