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4 충성, 중립, 반역 =========================================================================
“영지민들의 충성심도 한층 높아지겠군요.”
불릿의 정책은 의심스런 자를 사전에 차단하는 효과도 있었지만, 평민들에게도 기회를 제공한다는 광고효과도 있었기에 평민들에게서 지지를 받아낼 수 있는 기회였다.
지금 세상은 춘추전국시대, 누구나 자신의 세력을 군벌로 형성하며 폭력을 휘두르려 했으니 그러고 싶지 않아도 거기에 합세해야 했다.
그러려면 소수의 귀족이 아니라 다수의 평민에게서 지리를 얻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지금으로썬 말이다.
“귀족의 의미도 재정립해야겠지. 단순히 잘 먹고, 잘 사는 이들이 아니라 고귀함과 희생에 대해서도 일러줄 필요가 있으니 말이야.”
아무리 폭력, 즉 힘이 우선시되는 시대라 하더라도 무릇 귀족이라면 그래선 아니 되었다.
루드밀라 왕국 최고의 세력인 투툰 후작만 하더라도 자신이 왕이 되고자하는 욕망은 있으나 군주로서의 덕목을 지녔기에 그토록 방대하고 큰 영역을 과시할 수 있던 것이다.
“행정관 임명에 관해선 그리하도록 하고, 또 달리 시키실 것이 있는지요?”
불릿이 돌아와 명분이 생겼기에 영지를 장악하는데 무리는 없었으나 직스 자작령처럼 망가질 대로 망가진 곳은 직접 손을 대야했기에 대영주인 불릿의 허가가 필요했다.
그러니 정비라는 측면에서 허가받아야할 사항을 미리 언질 받아야 나중에라도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인데, 이러한 상황에서도 한 번 더 생각해보라는 의미에서 시험을 내리는 밴을 보니 피식 웃음이 새어나오는 불릿.
“자네에겐 아직도 본인이 어린아이로 보이는가?”
이야기가 끝마쳐갈 때가 다가오자 굳었던 불릿의 얼굴이 풀렸고 이에 따라 집사 밴도 격식을 약간 내려놓고 있었다.
“제가 20살일 때 주인님은 이제야 막 세상에 나오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이 말을 해석하자면 ‘내 눈엔 넌 아기나 마찬가지야’였다.
언제나 자신을 긴장시킴과 동시에 풀어주는 밴을 보자 비로소 자신이 돌아왔다는 것을 실감하는 불릿.
밴이 있기에 바포 변경백이 돌아가는 것이고, 밴이 없다면 그의 영지는 어쩌면 이미 무너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밴, 우리의 구호를 기억하는가?”
구호라는 말에 밴은 비로소 웃음기를 띠며 대답하였다.
“어찌 모를 수 있겠습니까? 저희의 구호는….”
그와 동시에 터져 나오는 말.
“‘바람과 불이 노니니 하늘에선 비가 반갑다고 내려오더라.’”
“‘바람과 불이 노니니 하늘에선 비가 반갑다고 내려오더라.’”
그리고 이어지는 구호.
“‘그리하여 그들은 대지를 딛고 즐거워하네.’”
대대로 정령사를 배출해낸 바포 가문, 나아가 그들이 다스리는 변경백에 널리 퍼진 구호였다.
비록 정령사는 바포 백작가에만 있었으나 그들의 근본이 무엇으로 인해 생겨났는지를 알려주는 구호였던 것이다.
“이 땅은 대대로 선조분들과 본인의 부모께서 가꾸고 일구신 곳이네. 이런 소중한 보물을 불한당들에게 빼앗길 순 없지.”
게슐린 그랩 자작은 어디까지나 바포 백작에게 고용된 입장.
가신이라는 것도 결국엔 고용과 고용주의 관계였던 것이다.
그런 주제에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반란을 일으킨 게슐린 그랩 자작을 불릿이 용서할 리가 없었다.
“실행하게. 일단은 몸을 추스린 후….”
눈을 번뜩이는 불릿.
“감히 누구를 건드렸는지 알려주어야겠지.”
* * *
명령을 내린 불릿은 오침을 하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오침은 이상할 수도 있으나, 지금 그는 밤을 새운 상황. 검술을 단련한 것도 아닌 그가 맑은 정신을 유지하려면 잠은 필수적인 요소였기에 불릿은 오침을 선택한 것이다.
지금 당장 조금의 일을 처리하려고 몸을 축낸다면 저녁 만찬을 진행할 때 지장이 생길 것이다.
그러기 위한 오침이었는데, 뜻밖의 방해자로 인하여 불릿은 잠에서 깨어날 수밖에 없었다.
부스럭.
부스럭, 부스럭.
“으음….”
자꾸만 귓가를 울리는 천이 비벼지는 소리에 잠에 빠져들었던 불릿은 인상을 쓰기 시작했다.
부스럭.
자꾸만 뒤척이던 불릿은 소리가 끊이질 않자 무시하고 잠을 자려다가 자신이 내는 소리가 아님을 깨닫고 눈을 번쩍 떴다.
“흙덩이!”
스으윽…
그의 부름과 함께 흙덩이가 나타나자 불릿은 이불을 젖히며 소리의 근원지를 확인했는데, 이내 벙찐 얼굴이 되고 말았다.
“……지금 뭐하는 짓이오?”
그러면서 젖혔던 이불을 살며시 덮어주며,
“올리비아.”
말을 끝내는 불릿. 그의 침대 속엔 반나체의 올리비아가 숨어들어 있던 것이다.
불릿의 피곤한 음색에 침실에 숨어들었던 올리비아가 이불사이로 빼꼼 고개를 빼들고선 혀를 내밀었다.
“헤헤, 들켰네?”
“…그렇게 부스럭거리면 아무리 깊게 잠들었다한들 깰 수밖에 없잖소?”
- 이 바보 여자가 불릿을 깨운 거야?
올리비아의 말에 불릿의 부름에 따라 소환되었던 흙덩이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소환되면서도 불릿의 급박한 감정을 전달받았기에 공격할 준비를 했었는데 그 실체가 올리비아이니 김이 빠지면서도 화가 나는 상태.
불릿은 정령의 기분을 필요성을 느껴 성을 내고 있는 흙덩이에게 손짓을 했다.
“흙덩이여, 이리 오시게.”
불릿의 부름에 흙덩이는 올리비아를 노려보면서도 순순히 다가왔는데, 불릿은 그런 흙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스윽스윽.
“괜히 부른 것 같군. 미안하게 됐네, 흙덩이여.”
위기상황이라 여겼거늘, 그것이 올리비아의 장난임이 밝혀지자 흙덩이에게 사과하는 불릿.
그러나 흙덩이는 이에 고개를 저었다.
- 바보여자는 신경 쓰지 마. 근데 저기는 내 자리 아냐?
흙덩이는 종종 불릿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변의 보호를 위해서였지 흙덩이가 잠들기 위해서는 아니었던 것이다.
정령은 잠을 자지 않으니 한 이불에 같이 들어갈 이유가 없었던 것.
그렇다고 불릿의 취미가 그런 쪽(?)도 아니었으니 휴식을 위해 소환을 해제해놓았었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지정석을 독차지했으니 화가 난 흙덩이.
“…올리비아, 설마 그 차림으로 오진 않았을 터이고, 어서 옷을 입으시오.”
현재 올리비아는 속이 비치는 네글리제를 입고 있었는데, 보는 불릿이 다 민망할 지경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것인지….’
아니, 은연중에 이미 깨닫고는 있었지만 섣불리 손이 가지는 않았다.
그는 스스로에게 제동을 걸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불릿의 심정도 모르는지 올리비아는 좀체 침대보 안에서 빠져나가질 않고 있었다.
“불릿이 피곤해한다고 알려주길래 내가 왔지!”
“본인은 다치지 않았소만?”
불릿은 밤을 새서 피곤한 것이지 부상을 입거나 병든 상태는 아니었다.
그리고 올리비아에게 그런 쪽의 치료능력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다음으로 이어지는 올리비아의 말에 무너지고 말았다.
“응? 하녀장이라는 아줌마가 이러면 좋아할 거라고 하던데?”
“……안나, 대체 무슨 짓을….”
안나는 불릿의 나이와 똑같은 40살의 여인. 불릿의 젊을 적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가신들 중의 하나였으며 제발 애 좀 낳으라고 닦달하던 단 한 명의 가신이었다.
안나가 불릿에게 행했던 일화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으론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제발 혼인 좀 하세요! 애 안 낳을 거예요?! 사람들이 불안해하잖아요!’
이처럼 여자와의 접점이 없던 불릿에게 안나의 잔소리는 꽤나 고달프면서도 가족애를 느끼게 해주는 부분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 누가 백작에게 이처럼 친근하게 다가오겠느냔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안나, 이건 너무 심하잖소!’
설마 올리비아에게까지 마수를 뻗칠 줄은 몰랐는데, 그걸 그대로 실행하는 올리비아는 대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올리비아의 복장은 얇은 실크로 이루어져 보들보들하면서도 몸의 윤곽이 드러나 전에 파르탄 영지에서 입었던 옷보다 가리는 면적은 넓었으나 야함에 있어선….
“아, 아무튼 간에 옷 좀 입으시오. 옷은 어디 있소?”
불릿은 올리비아가 자신이 잠든 사이 갈아입었을 거라 생각했기에 주변을 둘려봤으나 그 어디에도 그녀의 옷은 보이질 않았다.
불릿이 옷을 찾는 동안 올리비아는 그제야 부끄러운 듯 이불로 몸을 감싸며 침대에 앉더니 나직히 속삭였다.
“이 상태로 온 건데….”
“…….”
“……….”
“안나! 안나 어딨는가! 안나아아!!”
“네, 부르셨어요, 도련님!”
벌컥!
부르자마자 방에 들어서는 안나를 보자 불릿은 할 말을 잃었다.
“어머나, 올리비아님 말고도 귀여운 꼬마아가씨도 계셨네? 우리 도련님, 범위가 무척 넓으셨구나?”
- 누구야, 저 사람은?
침대의 머리맡에 서있는 흙덩이를 보고 안나가 뱉는 말에 반응하는 흙덩이.
그러나 넋만 놓고 있을 순 없었기에 불릿은 올리비아의 몸을 가려주며 안나에게 소리를 쳤다.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인가!”
불릿의 호통에 이제는 40대의 중년여성이 되어버린 안나가 태연스레 대답하였다.
“뭐하는 짓이긴요? 도련님 장가보내려는 짓이지.”
이제는 젊을 적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아줌마가 되어버린 안나의 행태에 불릿은 이마를 짚으며 차근차근 말하기 시작했다.
“안나, 본인은 이제 도련님도 아닌데다 지금 시국이 어떤 때인데 그런 말을 하시오?”
“이런 때이니만큼 더욱더 후사를 낳으셔야죠. 대체 언제까지 영지에 혼란을 초래할 셈이세요?”
“…….”
“게다가 이제는 젊어지셨잖아요? 세상에, 옛날 그때보다 더 피부가 고와진 것 같네요! 어머어머.”
“안나아….”
“네에! 도련니임-?”
“다 좋은데 귀여운 척은 하지 말아주시오. 이제 처녀도 아니잖소?”
상큼발랄하게 대꾸하던 안나는 불릿의 한마디에 비수가 꽂힌 듯 가슴을 움켜잡았다.
“으윽, 도련님이 안나를 괴롭혀요, 도와줘요 스틱스 마님-.”
“……어머님은 이제 이 세상에 안 계시오.”
가라앉은 불릿의 목소리에 난입한 안나로 인해 부끄러워하던 올리비아도, 불릿과 감정을 공유하던 흙덩이도, 발랄하던 안나도 분위기가 낮아졌다.
그러나 이내 안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불릿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니까 더욱더 후계를 생산하셔야죠. 도련님이 일찍 짝을 맺으셨다면 적어도 아기님은 보여드렸지 않았을까요?”
확실히 가문의 장자이며 외손인 자가 결혼을 늦게 한다는 것은 이상했다.
바포 부부가 사고를 당한 그때만 하더라도 불릿은 꽤나 늦은 상태였기에 그런 말이 나온 것.
이에 계속해서 거부감을 보이던 불릿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긴 하나, 이제 그분들은….”
“에에잇, 진짜! 몸도 젊어졌겠다, 색시도 있겠다, 대체 뭐가 문제라고 미루시는 거예요?!”
“앗, 새, 색시요?”
“그래요, 올리비아님! 도련님을 콱 잡으셔서 안주인이 되시는 거예요!”
“안나아….”
자신을 언급하는 말에 화들짝 놀란 올리비아에게 등을 떠미는 안나. 그리고 그런 안나에게 불릿이 그만하라는 제스쳐를 취했으나 안나는 아랑곳 않고 올리비아를 응원했다.
“낮이고 밤이고 신경 쓰지 마시고 생산에 힘내세요! 이제 저희 영지도 걱정 좀 덜자구요!”
“됐으니까 나가보시게.”
불릿의 축객령에 순순히 따르면서도 안나는 침실을 나서기 직전, 고개만 내밀고선 팔을 휘저었다.
“올리비아님, 파이팅?”
“파, 파이팅?”
흘러내리는 이불로 몸을 가린 채 엉겁결에 안나의 행동을 따라하며 파이팅을 외치는 올리비아.
이에 한숨을 쉬며 졸린 기색을 내비치는 불릿이었는데 닫히려던 문이 다시금 활짝 열리더니 안나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아참, 저녁 만찬엔 스태미나음식이 많이 나온답니다? 그러니 마음껏 힘쓰셔도….”
“됐으니 나가보시오!”
“흑, 가련한 안나는 나가봅니다….”
달칵.
겨우 안나를 쫓아낸 불릿은 부족한 수면을 취하기 위해 자리에 누우려다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올리비아와 어느새 침대로 올라선 흙덩이를 발견하고 행동을 멈추었다.
다시 흙덩이를 돌려보내기엔 조금 그래서 소환한 상태에서 올리비아와 함께 내보내려던 불릿은 올리비아에게 말을 하려고 쳐다보다가 흠칫했다.
“핫, 안나아! 옷! 올리비아의 의복을 가져오시오!”
투명한 네글리제를 입고 있는 안나에게 반응(?)하기 전에 빨리 내보내야 하는 급박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 작품 후기 ============================
추천, 선작이 100 넘을 때마다 1개씩 올리려 했더니 힘들군요.
오늘 밤 12시 10분에 이어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