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정령사-83화 (83/241)

00083  충성, 중립, 반역  =========================================================================

똑, 똑, 똑.

3번의 두드림이 각기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졌는데, 특이하다고 볼 수 있는 느릿한 두드림에 불릿의 입이 벌어졌다.

“본인이 맞으니 들어오도록.”

그 후에도 몇 분간 들어옴이 없으니, 재차 말할 법도 하건만 불릿은 의자에 파고든 몸을 일으킬 생각도 하질 않고 있었다.

불릿이 허락을 내렸음에도 열리지 않던 문은 다시 몇 분이 지나서야 조용히 열리고 있었다.

그렇게 소리도 없이 들어온 사람은 의자에 몸을 누이고 있는 불릿의 앞에 도달해서야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주인님.”

방문자의 말에 불릿도 마주 인사를 건네주었다.

“신중한 건 여전해, 할아범.”

방문자, 노인은 깊숙이 숙였던 허리를 꼿꼿이 펴며 직립자세를 취했는데, 어찌나 바른 자세를 유지하는지 군인도 저 정도는 아니리라 생각될 정도였다.

“저를 할아범이라 불러주는 것은 손자들뿐이라 생각했습니다만, 아직도 저를 그렇게 불러주시는군요.”

“내게 할아범은 할아범뿐이니까.”

“…감사합니다.”

“뭘, 할아범이 있어서 나도 한숨 돌릴 수 있는 것이지.”

한결 풀어진 대화. 불릿의 말투도 평소의 근엄한 어조가 아닌 약간 가벼운, 귀족청년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젊을 적부터 이러한 태도를 고수하던 그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었다니 새삼 놀라울 따름이었지만 생각해보면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단단하기만 하면 부러진다고, 누구나 긴장을 풀 수 있는 휴식장소가 필요하기 마련이었다.

불릿에게 있어 그것은 눈앞의 밴이라 불리는 노인이었을 뿐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당장 영지를 안정시키는 것이 급선무일 텐데도 자신의 안부를 먼저 생각하는 밴의 발언에 불릿도 미소가 아닌 웃음을 지어보였다.

“훗, 역시 날 생각해주는 건 할아범밖에 없어.”

“그리 칭찬해주셔도 나오는 건 없습니다만.”

“그래, 그랬지. 옛날부터 할아범의 전매특허인 ‘칭찬해주셔도 나오는 건 없습니다만’…, 쿡쿡.”

“제가 그랬습니까?”

원래 자신의 버릇은 자각하기 힘든 법이었다. 이제 나이가 지긋한 노신사인 밴으로서도 자신의 버릇을 온전히 파악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을 콕 집어내니 신중한 태도 속에서도 의아함을 자아내는 게, 이 상황을 약간이나마 즐기는 듯했다.

그러나 웃는 것도 잠시, 그들은 웃음기를 싹 지워버리며 군신의 관계로 돌아갔다.

“밴, 군사적인 요소는 크레파토스가 처리할 것이니 그와 관련된 얘기는 제하도록. 그보다는 반역자들을 처리함으로써 발생되는 공백에 대해서 토의해 보도록 하지.”

집사란 존재는 본디 귀족가의 자제가 되는 것이기에 그 지식이 매우 뛰어났다.

집안의 주인을 보필하기 위해선 다방면에서 활약해야 했는데, 그러려면 모르는 것이 없어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밴은 백작가의 집사로서, 대영주의 측근으로서 보필함에 모자람이 없었다.

“반역자들은 각기 세금과 관련된 행정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유는 주인님께서도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밴은 후계수업을 미처 마치지 못한 불릿을 위해 이렇듯 보고를 하면서도 스스로 생각해보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했는데, 그동안의 배움을 착실히 적용하기만 한다면 대답할 수 있는 선에서 문제를 제시했다.

이제 나이 40이 되어버린 불릿에게 아직도 그런 질문을 던지는 밴이었으나 불릿은 결코 기분나빠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알려주었다.

“그랩 자작에게 자금을 전달하기 위해서겠군.”

정답이었는지 입가가 가늘게 길어지며 음성이 튀어나왔다.

“게슐린 그랩 자작은 주인님의 가신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군벌을 일으켜 스스로를 ‘군주’라 칭하기 시작했습니다.”

“군벌이라…, 그렇다면 대상은 역시 본인이겠군.”

“달리 누가 있겠습니까?”

바포 변경백은 지리적으로 란푸스 왕국과 불모의 황무지, 그리고 마수의 숲과 맞닿아 있다.

무력으로만 따지면 루드밀라 왕국 제일이라 할 수는 없었으나 지리적인 특성에 따라 다른 지역의 패자(霸者)들이 일부러 내버려두는 모양새를 띠고 있었다.

점령하는 수고에 비해 별달리 이득을 취하지 못하는 지역, 그곳이 바로 바포 변경백의 현 위치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별다른 분란 없이 지내왔던 것인데….

“놈이 언제부터 일을 계획한 것 같나?”

본래 게슐린 그랩 자작은 영지를 먹을 생각은 없던 걸로 보였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긴 했으나 언제나 선을 지켰고, 그래서 불릿도 젊은 시절 그에게 섭정이라는 역할을 맡겼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그랩 자작의 이러한 행보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그동안 자기대신 영지를 살펴왔던 밴에게 물어본 것이다.

밴도 그동안 생각해온 것이 있는지 물음이 오자마자 곧바로 답변을 보내주었다.

“10년 전이라 생각됩니다.”

“10년 전이라….”

불릿은 10년이라는 단어에서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예전부터 보필하진 않았으나 그래도 10년이란 세월을 함께 해왔습니다’

문득 그가 떠오르자 불릿은 밴에게 그에 대해서 물어보기로 생각했다.

“밴. 직스 자작령의 상태를 아나?”

“크레파토스를 통해 대략적이나마 들었습니다. 제가 알던 상황보다 약간 나아졌으며, 주인님께서 직스 자작을 처형하셨단 것도 말입니다.”

그 정도면 다 알고 있다 보아도 무방한 정도였다. 하긴, 이제 막 영지에 도착한 불릿보다는 이곳을 관리하던 밴이 더욱 자세히 알리라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생략해도 되겠군. 그곳의 집사에게서 10년 전부터 보필하기 시작했다는 소릴 들었는데, 이에 관련해서 들려줄 말이 있는가?”

“이름 베리츠. 당시 나이 26살. 왕실아카데미에서 행정학을 공부하며 집사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았으며, 졸업 후 1년여 동안 방황하던 것을 직스 자작의 눈에 띄어 일하기 시작.”

“생각보다 자세히 아는군.”

불릿의 말에 밴은 고개를 숙이며 대꾸하였다.

“주의가 필요한 곳이었으니 말입니다. 해서 알아보았지요.”

밴이 생각하기에도 직스 자작령의 몰락은 이상했나보다. 총집사라지만 이렇듯 자세한 신상정보까지 파악하고 있을 정도니 말이다.

“당시 직스 자작의 저택에서 일하던 집사는 돌연히 사라졌습니다.”

“돌연히? 무슨 의미인가?”

보통 집사라는 역할을 맡으면 웬만해선 그 자리에서 내려오기 쉽지 않았다.

모든 업무를 파악하는 것도 집사였고, 담당 귀족의 치부나 비밀을 많이 아는 것도 집사였다.

게다가 후계를 구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몇 년은 훌쩍 넘어간다.

그러니 웬만해선 새로 구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사항.

그런데 홀연히라는 뜻은 예고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니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이상합니다. 분명 베리츠라는 자가 우연히 직스 자작령에서 일하기 시작한 것은 맞으나, 이전 집사가 왜 사라졌는지에 대해선 남아있는 기록이 없습니다.”

이어지는 말에 따르면 주변의 인물들에게 물어보아도 통 알 수 없었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불릿은 짐작가는 바가 하나 있었다.

“크레파토스가 마의 꽃방울에 대해서 말했는가?”

“처음 듣습니다. 알려주시겠습니까?”

역시 짧은 시간 내에 모든 것을 알려주기란 힘들었나보다.

크레파토스도 정말 중요하다 생각되는 것만 일러준 것을 보니 바삐도 다니는 모양이었다.

“직스 자작이 이상해진 시기가 마의 꽃방울을 소유하고부터이네.”

“…!”

놀라는 밴에게 불릿은 더욱 놀랄만한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리고 마의 꽃방울을 구입한 시기가 10년 전, 집사가 교체되던 시기와 맞물리더군. 직스 자작이 변화되던 모습을 베리츠라는 자가 목격했다고 했으니 맞을 것이네.”

“믿을 수 없군요. 그가 그런 귀물을 보유하고 있었다니.”

마의 꽃방울이야 워낙 유명하니 밴에겐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보석에 관해선 밴이 불릿보다 더 자세히 알았으니 설명은 불릿이 들어야 할 판이었다.

“참고로 그것을 게슐린 그랩 자작이 팔아넘겼다고 하는데, 가격은 2만 5천 골드에 구입했다고 들었다.”

“으음, 제 정보력이 부족했나보군요.”

어디서 정보를 얻는진 모르겠으나 자신의 정보력이 부족했다는 것에 밴은 침음성을 흘렸다.

그러나 불릿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밴, 직스 자작은 그때만 하더라도 사리분별을 할 수 있었네. 마의 꽃방울을 구입한 것은 그 이후에 벌어진 사건, 그렇다면 그는 왜 마의 꽃방울을 구입했을까?”

“……!”

밴은 진정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직스 자작이 마의 꽃방울에 노출돼 최상급 마정석의 마기에 타락한 것은 진실.

그렇다면 그것을 구입하게 된 경위는? 2만 5천 골드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빚을 내면서까지 지불한 까닭은 무엇에 있을까?

다들 마기에 오염되어 타락했다는 점에만 주목했지, 그가 제정신인 상태에서 그것을 왜 구입했는지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불릿 또한 거기까진 생각이 미치지 못했으니까.

“놀라지 말게. 본인도 밴과 대화를 나누며 떠올린 생각이니. 자,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일세.”

“……어렵군요.”

“그래, 어렵지. 그렇다면 묻겠네. 본인이 왜 지금 이러한 주제로 대화를 했을까?”

지금 당장 급한 것은 반역자들을 처리함에 따라 공백이 발생한 행정부문에 관해서이다.

그런데도 불릿이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묻자 밴은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아마, 일을 진행함에 따라 그랩 자작뿐만이 아닌 직스 자작과 관련된 인물에 관해서도 알아보라는 뜻이라 생각합니다.”

“크레파토스에게도 말했지만 자네에게도 일러주도록 하지. 그가 반역자들을 ‘심문’해서 가져온 정보를 토대로 루드밀라 왕국 출신이 아닌, 외부에서 온 자들이 많다면 이에 대해서 조사를 해보게.”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크레파토스에게는 시키기 위해 일러주었지만 밴에게는 지혜를 빌리기 위함도 있어서 불릿은 조금 더 정보를 풀기로 결심했다.

“만약이긴 하지만, 흑마법사가 개입됐다 여겨져서 그렇네.”

“헉, 흑마법사 말입니까?!”

처음으로 경악에 찬 소리를 내는 밴에게 불릿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법사는 분명 전쟁에서 패배해 대륙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들었습니다만…, 그 때문에 연합체의 영향도 한풀 꺾였고 말입니다.”

애초에 연합체가 결성된 이유도 흑마법사를 몰아내기 위해서였으니, 그들과의 전쟁이 승리로 끝난 시점에서 더 이상 유지될 이유가 없었다.

전쟁도 끝났으니 이제 각 국가는 내정을 통한 안정을 꾀해야 했기에 그들에게 무언가를 내줄 상황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불릿은 부정적인 답변을 던져주었다.

“본인이 대륙을 가로지으며 보아온 것은 이상할 정도로 많은 몬스터의 출현과 마물의 존재였네.”

“하급 마물이라면 자연적으로 출몰할 수도….”

“아니네. 그곳은 왕국의 안쪽에 놓였던 곳, 결코 바깥쪽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일세.”

마물은 몬스터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군세를 이룬 놈들이 아무런 기미도 없이 나라 안쪽에서 나타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본인이 말을 꺼낸 것이네. 이번에는 귀족이 아닌 자들로 구성하여 행정관을 임명하도록.”

“으음, 알겠습니다. 분부대로.”

고개를 숙이며 불릿의 명을 받드는 밴. 불릿이 이러한 이유를 내린 것엔 이유가 있었다.

외부에서 침입한 자들이 자신을 숨기기 가장 좋은 것은?

대부분 용병이라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실제론 귀족이 가장 많았다.

물론, 고위귀족의 흉내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으나 그 외의, 작위가 없는 귀족이라면 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었으니 이를 통해 잠입하기란 손쉬웠을지 모른다.

“출신지로 사람을 가르는 짓은 안 될 일이지만, 이번에 한해서는 반드시 국내인으로 한정하게. 귀족들도 다시금 고삐를 틀어쥘 때가 되었어.”

작위를 물려받지 못한 귀족의 자제들은 기사나 행정관으로 자신이 살길을 열었다.

평민들도 될 수는 있지만 시작지점부터가 다르기에 대부분 귀족들이 그 위치를 차지했던 것.

게다가 그러한 것들도 인맥이란 것이 형성되어 있었으니, 아무리 불릿이 막으려한들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불순한 의도를 가진 귀족들을 대거 제거한 탓에 자리에 공백이 생겼고, 이를 통해 불릿이 귀족들을 못 믿겠다고 하면 그들로서도 별달리 불만을 토로할 수가 없는 것이다.

============================ 작품 후기 ============================

이따가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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