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0 귀환, 정령사! =========================================================================
‘더러운 쥐새끼의 기운이 느껴진다.’
불릿이 마의 꽃방울에 대한 출처를 부탁한 것은 그가 싫어하는 쥐새끼, 흑마법사들의 그림자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만 보면 그들과의 연관성을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불릿이 대륙을 횡단하며 겪었던 일들을 보면 아직도 쥐새끼들이 만연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간악한 놈들. 대체 언제까지 암약하는 것이지?’
죽여도, 죽여도 끝없이 나오는 쥐와 같은 존재들. 하는 짓도 그렇고, 음지에서만 활동하는 자들인지라 좋아할 만한 구석이 조금도 없었다.
“본인의 얘기는 여기까지네. 자네도 할 말이 있으면 해보시게.”
“……정말 잘 돌아오셨습니다, 각하.”
“고맙네.”
“진심으로 올리는 말이옵니다. 각하가 계시지 않는 바포 변경백은 루드밀라 왕국의 각 지역처럼 변해가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으음….”
루드밀라 왕국의 사람들은 천성이 착하고 선하다. 그와는 반대로, 현재 루드밀라 왕국의 권력을 쥐고 있는 이들의 대부분은 외부에서 유입된 인물들인데, 루드밀라 사람들의 성향과는 반대되는지라 그 악독함이 말로 이를 수 없었다.
아니, 그저 루드밀라의 사람들이 너무 착한 것뿐일지도 몰랐다.
대륙 각지에서 보아온 사람들의 대부분이 외부에서 들어온 이들과 비슷했으니 말이다.
바포 변경백에도 그런 인물들이 몇 있었고, 대표적으로는 게슐린 그랩 자작이 있었다.
“과인의 잘못은 차차 고쳐나갈 것이네. 그러기 위해선 반역을 일으킨 그랩 자작을 없애야겠지.”
“…각하, 오해 말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말해보시게.”
“게슐린 그랩 자작과 손을 잡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의 세력은 너무도 강세해져 지금의 각하에겐 무리가 아닐는지 심히 걱정스럽습니다.”
게슐린 그랩 자작은 바포 변경백의 2인자다. 게다가 최근엔 더욱 기승을 부려 바포가문을 밀어내고 1인자가 되는 게 아니냐는 말도 나오고 있었다.
많은 귀족들이 그에게 연을 이으려고 했으니, 이제 막 돌아온 불릿에게 불리한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베니스, 그가 직스 자작령에 섭정을 했었단 것은 알고 있는가?”
“예, 각하. 각하의 명령에 의해 그리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나이다.”
“그런데도 그런 말이 나오는가?”
그랩 자작이 섭정을 한 결과, 그것은 직스 자작을 폐인으로 만드는 결과를 낳았고 영지는 폐기직전의 쓰레기마냥 사람이 살 곳이 못된 상태였다.
다행히 불릿이 그 전에 구해놓긴 했으나 아직도 어렵긴 마찬가지인 상황.
아직 마의 꽃방울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는 상태인 베니스 남작은 의문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조아려 용서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각하!”
“조금 더 말해주자면, 본인의 부탁은 그랩 자작의 섭정과 연결되네.”
여기서 눈을 번뜩 빛내는 베니스 남작. 상단은 결코 멍청해서는 운영할 수 없기에 이 정도 말만으로도 베니스는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다.
다시 고개를 든 베니스는 눈에 어렸던 의문이 사라져 있었고, 대신 미미한 분노가 어려있었다.
“철저히 조사하겠습니다.”
“그래, 고맙네. 오래 머물러도 의심받을 터이니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군.”
표면상 베니스 남작이 직스 자작을 방문한 이유는 귀중품 거래였다. 베니스가 소유한 상단은 원체 유명하니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베니스는 떠나기 전, 불릿에게 한가지 귀금속을 건네주었는데, 그의 속삭임에 불릿은 애매한 표정이 되었다.
“요즘 레이디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프로포즈용 반지입니다. 마정석을 이용한 인첸트된 제품이 실용적이긴 하지만, 역시 보석의 아름다움을 따라올 수는 없지요.”
그 말을 끝으로 베니스가 떠나자 불릿은 알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반지를 매만졌다.
“다이아몬드 반지라…, 으음.”
처치 곤란한 선물을 받은 불릿이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갸웃하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크레파토스는 내심 흐뭇하게 웃었다.
‘베니스가 내 부탁을 잘 들어주었군. 암, 역시 결혼반지는 다이아몬드지.’
크레파토스는 의외로 유행에 민감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크레파토스의 주도하에 여러 명의 충성파가 불릿이 머물고 있는 저택에 오고갔는데, 하나같이 놀라면서도 반기는 모습을 보였다.
간혹, 불릿이 대영주 본인임을 믿지 않는 이도 있었는데, 겉으로는 믿는 척하면서도 불릿의 모습이 청년이다 보니 몰래 숨겨둔 자식정도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하긴, 당사자인 본인이 보아도 믿기 어려운 현상이지.’
불릿은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지금도 미심쩍은 표정을 짓는 충성파의 일원을 보고 있었다.
실종됐던 대영주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영지에 숨어들어선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비밀스런 만남을 추구한다.
그러면서 자신을 믿어달라 하고 반역자들을 숙청하겠단다.
불릿은 원래 이토록 과격한 자가 아니었기에 더욱 의심을 받는 것이리라.
그래도 불릿의 아들이라면 현재 상황보다는 나아지리란 생각에 밀어주려는 것이리라.
‘영지를 복구하면서 본인임을 확실히 각인시켜야겠군.’
중심이 잡히지 않는 나라는 흔들리기 마련이다. 당장 루드밀라 왕국만 하더라도 왕이 유명무실해지니 나라가 있으나마나, 각지에서 들고 일어나 자신의 영토를 넓히려고 하지 않는가?
당장 이들의 도움을 받더라도 휘둘리지 않으려면 마땅히 그래야할 것이다.
‘일단 지금이 중요하지.’
입으로는 충성파에게 설명을 하면서도 머릿속은 자신만의 지도를 그려나가는 불릿이었다.
“생각보다 아직도 본인을 따르는 가신이 많군.”
2층의 복도에서 창밖을 내다보던 불릿의 말에 크레파토스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였다.
“게슐린 그랩 자작은 지나치게 무력주의의 인물이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랩 자작은 붉은 장미 기사단이라고 다른 영주들과는 달리 자기만의 기사단을 갖추고 있었다.
다른 영주들도 기사단이 있기야 하지만, 붉은 장미 기사단만큼 이름이 알려진 곳은 없었다.
게슐린 그랩 자작은 나이가 49, 곧 50이 되는 인물답지 않게 매우 정정했으며 본인 스스로가 붉은 장미 기사단의 단장을 역임할 정도로 막강한 자였다.
게다가 아인그루츠라는 인물이 부단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 또한 강한 인물이라 그의 폭정을 알면서도 다들 쉬쉬하는 입장이었다.
“익스퍼트 최상급이라고 했던가.”
“맞습니다, 각하. 높은 경지에 올라섰기에 육체의 노화가 느려져 30대의 혈기왕성함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이 노인네는 검을 부딪치자마자 죽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웬일로 자신을 비하하는 크레파토스의 말이었으나 불릿도 부정하진 않았다.
비록 검술 스타일의 차이라곤 하지만 B급 용병인 올리비아에게 제압당한 전적이 있질 않은가?
“붉은 장미 기사단의 부단장이 상급이었지?”
“아닙니다, 곧 최상급에 오를 거란 소문이 파다합니다.”
“으음…, 우리에겐 불행한 소식이로군.”
그들은 그랩 자작령의 주요 핵심인물이기 때문에 영지에서 잘 나오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충성파로부터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불릿이 결사대에 참전한 이후부터 반역파들은 영주가 입성하지 않고 수하들만 보냈다고 한다.
그렇기에 이번 작전도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지만 그 이후를 생각하면 입안이 절로 씁쓸해졌다.
“각하, 일단 마지막 날의 파티에 집중하시지요.”
비록 끄나풀이라곤 하지만 그 전력이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다.
구색은 맞춰서 오는 자들이니 만반의 준비를 끝마친 후에 없애야할 것이다.
“크레파토스, 슬슬 쥐새끼가 꼬이기 시작하는군.”
슬쩍 커텐 너머로 바라본 창밖엔 지나가는 척하며 몰래 크레파토스의 별장을 훔쳐보는 자들이 몇몇 눈에 띄고 있었다.
한두 번이면 모르겠으나 이번이 처음도 아닌지라 불릿 일행은 알아차린지 오래였다.
“괜찮습니다, 각하. 저들은 조무래기들만 보내왔기에 스스로 행동할 이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 말인즉, 자신의 영지에 틀어박혀 주판알만 튕기고 있다는 말이었으니 불릿을 얼마나 무시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 * *
- 불릿, 일어나.
흙덩이의 속삭임에 잠들어 있던 불릿은 살며시 눈을 반개해 옆을 바라봤다.
그의 옆에는 흙덩이가 누워있었는데, 이불속에 몸을 가리고 있어 언뜻 봐서는 일을 치른 뒤 두 남녀가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
아직 잠이 덜 깬 불릿은 상황파악을 하려 눈을 깜빡이고 있었는데, 무의식중에 흙덩이를 쓰다듬으려하자 흙덩이가 이를 막았다.
덥썩.
- 누가 들어왔어, 어서 일어나.
그 말에 불릿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번쩍!
‘…누구인지 알 수 있는가?’
불안정한 텔레파시보단 차라리 음성으로 말하는 게 나았기에 몸을 수그리고 흙덩이를 껴안듯 귓가에 입을 가져갔다.
- 낮에 지나가는 척하며 이쪽을 보던 사람이야.
그러면서 이불속에서 고양이처럼 웅크린 채 대답하기를,
- 손에 칼을 들고 있어.
‘좋은 의도는 아닌 모양이군.’
불릿의 속삭임에 흙덩이도 따라서 속삭였다. 흙덩이는 정령이라 굳이 속삭이지 않더라도 저들에게 들리지 않겠지만 말이다.
- 어떡할 거야? 죽여?
귀여운 외모와는 달리 흙덩이는 섬뜩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애초에 정령이기 때문에 선악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할지도 몰랐다.
인간의 기준에서 선이 다른 종족에겐 악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아니, 사로잡아서 정보를 획득한다.’
구심점도 없는 이들이 무슨 연유로 자신을 습격한 것인지를 알아야 했다.
이에 흙덩이도 알았다는 듯 불릿의 볼을 쓰다듬어주었다.
- 걱정 마, 흙덩이가 지켜줄게.
‘……부탁하네.’
- 후훗.
웃음소리를 끝으로 흙덩이는 바닥에 스며들 듯 사라지더니 침입자의 바로 앞에 나타났다.
스르륵…
- 안녕?
“헉!”
갑자기 나타난 흙덩이에게 복면인은 칼을 휘둘렀으나 정령인 흙덩이에게 단순한 물리력은 통하지 않았다.
콱.
그렇다곤 해도 맞으면 기분이 나쁘기에 땅의 정령 특유의 괴력으로 검을 잡아버린 흙덩이.
복면인이 검을 빼내려 안간힘을 쓰자 흙덩이가 놈의 사타구니를 가격했다.
퍼억!
그리 강하게 친 것 같지도 않았는데,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복면의 틈으로 거품이 흘러나오더니 바닥에 쓰러졌다.
툭.
쓰러지던 복면인을 받아낸 흙덩이는 놈을 바닥에 눕히고선 불릿을 바라보았다.
- 됐지?
“……죽지 않았길 바라야겠군.”
파이어에그가 터진, 아니 어쩌면 통째로 으깨졌을지 모를 고통에 쇼크사하질 않았길 바라며 불릿은 자리에서 일어나 복면인에게 다가갔다.
저벅, 저벅!
* * *
불릿이 습격을 당하자 크레파토스는 한층 경계를 강화했다. 감히 바포 변경백의 주인인 불릿에게 암살자를 보내다니?
충성파에게서 정보가 새어나갔나 확인하려했으나 불릿은 크레파토스를 만류했다.
“어쩔 수 없군. 크레파토스여, 본인의 인장을 충성파의 인물들에게 보여주도록.”
직접 마주보며 대화를 시도하려 했으나 습격을 받게 되자 더 이상 저택으로 그들을 불러낼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선택한 차선책이 크레파토스에게 불릿 폰 바포임을 알려주는 인장인 펜던트를 건네주어 그들을 모으는 것이었다.
암살자를 보낸 이들도 들어가기만 하고 나오질 않으니 정보를 확인할 방도가 없어 아마 애간장이 탈 것이다.
“알겠습니다, 각하. 파티날까지 최대한으로 모아볼 터이니 부디 옥체를 보전하시옵소서.”
자신이 곁에 있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에 크레파토스는 눈물을 집어삼키고선 밖을 향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제 수확제의 마지막 날, 파티까지 크레파토스를 볼 수 없게 되자 정말로 올리비아와 단 둘이 남게 된 불릿.
그는 소파에 앉아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올리비아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미안하네, 올리비아. 본인 때문에 자네도 위험을 사게 되었군.”
끄나풀들은 크레파토스의 별장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다만, 이곳에 충성파가 자주 들락거리는 것을 목격했기에 그와 관련된 인물이 있으리라 짐작하여 위험인물은 일단 제거하고 보자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어차피 직스 자작이야 폐인이나 마찬가지인 인물이었으니 죽더라도 큰 탈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가 죽음으로 인해 공중에 붕 뜬 영지를 서로 찢어먹으려 달려들지도 몰랐다.
“무슨 말을 그리 섭섭하게 말해? 너와 난 파트너라고. 나는 네 등을 지켜주고, 너는 날 지켜주고. 응?”
용병으로서의 말이었지만 불릿은 고개를 끄덕이며 고마워했다.
“역시 자네를 만난 것은 행운이라 생각되네.”
그들이 담화를 주고받는 사이, 이젠 소파높이 정도라면 다리가 닿는 흙덩이가 다리 대신 몸을 좌우로 까딱이며 중얼거렸다.
- 내가 더 대단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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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 10분에 이어서 올라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