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7 귀환, 정령사! =========================================================================
그들이 중앙영지령에 접근하자 성문을 지키는 기사와 병사들이 눈에 보였다.
‘라체나의 기사로군.’
수확제는 매우 크고 중요한 축제라서 그런지 직속 기사단까지 동원된 상태였다.
아니, 남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직스 자작님의 마차 되시는군요. 죄송하지만 인장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여기 있소.”
“…크레파토스님이시군요.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통과!”
인장을 건네주기도 전에 크레파토스의 얼굴을 본 기사는 곧바로 통과를 외치며 마차를 보내주었다.
크레파토스는 바포 변경백의 역사와 함께한 충신이기 때문에 직스 자작령에 있으면서도 그를 모르는 기사가 없었다.
그리고 직스 자작은 무언가를 하는 것을 매우 귀찮아하는 인물이었기에 이렇듯 대부분의 행사에 관한 것은 자신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집사나 기사들에게 떠맡겼었다.
- 아저씨가 쓸모도 있네?
‘쉿, 그런 말을 하면 못써.’
- 하지만 사실인 걸?
올리비아에게도 질 만큼 노쇠한 인물이었으나 크레파토스는 누군가에게 무시당할 위인은 아니었다.
올리비아의 검술이 쾌검에 중심을 둬서 그렇지, 여느 기사였으면 그의 노련미에 검을 놓쳤을지 몰랐다.
그렇다곤 해도 올리비아 또한 뛰어난 검사라는 점에선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드디어 돌아왔도다….’
가신들에게 배분해준 영토가 아닌 자신의 진정한 보금자리, 바포 변경백의 핵심이랄 수 있는 중앙영지로 들어서자 불릿은 아련한 추억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 * *
그날은 루드밀라 왕국 역사상 최대의 폭우가 내렸던 날이다.
어찌나 많이도 쏟아지던지, 마치 하늘의 신이 노해 세상을 멸망시켜버릴 기세로 장대비가 내리던 그런 날.
인간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자연의 분노는 바포 변경백 또한 피해갈 수 없는 숙명이었다.
콰아아아--!
미칠 듯이 불어난 강물은 어느새 바다처럼 형성되어 주민들이 머물고 있는 주택가까지 휩쓸고 있었다.
바포 일가는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이를 막으려 했는데, 이때만 해도 불릿은 정령에 대한 친화력만 확인된 입문 정령사였다.
즉, 자신의 속성이 무엇인지도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부모들에게서 물려받은 친화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불릿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기 바람과 불의 정령사였는데, 이렇게 폭우가 내리는 상황에선 그들의 힘은 반감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어머니이!!”
물에 흠뻑 젖은 불릿이 기사들을 대동하며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들은 바닷가가 되어버린 영주민의 주거지에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모든 백성들이 피신한 마당에 마법사가 없는 영지의 정령사라는 이유로 손을 걷어붙인 부모들.
불릿은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들에게 주입식으로 교육받은 귀족의 책무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기에 외면할 수가 없었다.
“도련님! 수색은 저희가 하겠으니 이곳에서 벗어나십시오!”
중앙영지 직속 기사단 라체나의 조장의 말에도 불릿은 되려 성을 내었다.
“소자의 부모께서 이런 사지를 헤매고 다니시는데 그 무슨 말인가!”
“도련님! 그분들은 병사들과 함께 출정하셨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불릿의 부친인 바포 백작은 폭우에서 영지를 구해내기 위해 바람의 정령을 이용해 수로를 파내고 있었다.
기존의 수로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폭우였기에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가 없었기에 마법사가 없는 영지의 특성상 정령사인 영주가 나선 것이다.
“어머니는! 어머니는 대체 왜 같이 동행하신 것이냐!”
이런 폭우 속에서는 우비도 소용이 없었기에 이미 흠뻑 젖어 덜덜 떠는 불릿이었으나, 그는 부모에 대한 걱정 때문인지 물이 찰방이는 주거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폭우로 인해 기온이 떨어져 정령의 힘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불릿의 어머니는 불의 정령사였다. 정령이 일으키는 불은 쉽게 꺼지지 않았기에 이런 폭우 속에서도 불길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필 수확제가 막 지난 시점이라서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드는지라 빗물에 젖은 사람들이 동사할 가능성이 매우 컸다.
구조활동도 겸하고 있던 군사들이었기에 그녀의 존재는 필수였었다.
“나도 알아! 그렇다고 해도 대체 왜! 왜 그분들이 나섰냔 말이다!”
불릿은 입문이긴 하지만 정령에 대해선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폭우가 내리는 와중에도 정령을 불러내려고 안간힘을 쓸 정도였으니 그가 얼마나 애타게 계약을 맺고 싶었는지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분들은 솔선수범하여…!”
“개소리하지 말라! 그놈의 귀족의 책무! 지긋지긋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왜 본인들의 목숨까지 걸면서 이행해야 하는 것인데!!”
“도련님!! 백작각하의 숭고한 이념을 욕되게 하시면 아니 됩니다!!”
“시끄럽다! 만약 부모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라체나고 뭐고 모조리 치도곤을 당할 줄 알아라!”
“…도련님…….”
“이놈들이 진짜! 알겠나, 모르겠나!”
“예! 알겠습니다!!”
평소 불릿은 언제나 나이에 걸맞지 않게 의젓하고 부드러운 인물이었는데, 이토록 광분하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도 애가 탔나보다.
이에 그를 경호하던 라체나의 기사들도 폭우가 물러갈 정도로 크게 외치며 대답했다.
“충!”
“충! 바포 변경백에 영광을!”
“영광을!!”
“닥치고 찾아아아아-!!”
그러거나 말거나 불릿의 관심사는 부모의 생사였으니, 폭우로 인해 시야가 매우 좁아져 10미터 앞도 구분하기 힘들었다.
철벅철벅-
철벅철벅!
“어머니이!!”
“아버지이이!!”
“어디계세요오오!!”
어찌나 우렁찬 외침이었는지 주변의 라체나의 기사들이 마나를 실은 목소리보다 더 클 지경이었다.
목에는 두터운 핏줄이, 이마에는 얇은 실핏줄이 투두둑 불거져 있었다.
귀족의 체면을 모조리 집어던진 모습이었기에 불릿이 얼마나 간절히 그들을 찾고 있었는지 잘 알 수 있는 장면.
“으아아, 대체 어디 계십니까아아!!”
“도련님!! 폭우가 너무 심해졌습니다! 이만하면 충분히 하셨으니 나머지는 저희가 하겠습니다!”
충정 가득한 조장의 말이었으나 불릿은 빗물에 젖어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눈을 번득이며 그를 노려보았다.
“불안해! 불안해 미칠 것 같단 말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각하의 곁엔 수백의 군사가…!”
“예감이 좋지 않단 말이다아!!”
기사조장이 불릿을 진정시키려했으나 불릿은 지랄발광을 떨며 날뛰었다.
그가 이런 행동을 보이는 이유는 정령력과도 관련이 있었는데, 그의 정령력은 부모에게서 일부 유전된 것인지라 미약하나마 어떤 끈과도 같은 연결고리가 있었다.
흔히 피는 물보다 진하다 했는데, 재능의 일부인 정령력도 그중 하나였다.
그래서 불릿의 예감이란 것이 아주 어이없는 소리가 아니었고, 라체나는 대대로 정령사를 배출하는 바포가를 수호하는 자들이었기에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조장! 온다리스 대교에서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라체나의 단원 중 하나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엔 미약한 불빛이 보였는데, 이런 폭우 속에서 불빛을 낼 수 있는 자는 바포 변경백에서는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어머니! 뭣들하고 있나! 어서 가지 않고서는!”
“옛! 도련님을 호위하며 주변의 장애물을 치워라!”
“충!”
“충!”
주변엔 갖가지 오물과 함께 생활용품은 물론이거니와 물에 뜰 수 있는 것들은 오만가지가 떠다니고 있었는데, 자칫 잘못하면 물이 아니더라도 물건에 부닥쳐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수색을 하더라도 불릿의 곁에서 멀리 떨어지지 못했던 것인데, 불릿은 자신의 주위에서만 얼쩡거리는 라체나 기사단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젠 부모의 행방도 찾았으니 서둘러 그들을 데리고 저택으로 복귀하면 되는 것이었다.
“빨리, 빨리빨리!”
목이 쉬었음에도 이곳의 그 누구보다 앞서나가며 부모를 향해 달려가는 불릿.
그의 부모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간절한지 절로 애틋함이 묻어났다.
기사들도 힘들어하는 이런 폭우 속에서 물을 헤치며 나아가길 30여분, 불빛의 행방을 쫓아온 이들이 발견한 것은 거의 해일처럼 덮쳐오고 있는 강물이었다.
모두가 입을 떡 벌리고 그것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해일은 꿈틀대면서도 제자리에서 나아가질 않고 있었다.
그제야 시선을 돌린 사람들은 그 아래에서 거친 숨을 토해내며 정령에게 힘을 불어넣고 있는 바포 백작과 그의 아내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이제는 어디가 바닥이고 어디가 지상인지 알 수 없는 온다리스 대교에서 유일하게 이곳이 다리임을 알 수 있는 대교의 정중앙에 위치한 바포 백작.
그는 고개도 못 돌리고 안간힘을 쓰며 이에 대답했다.
“라체나는 무엇하는가! 불릿을 데려가란 말이다!!”
“얘야, 더 이상 버티지 못한다! 어서 저들을 데리고 이곳을 피하거라!”
아버지와 어머니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자 불릿도 덩달아 목소리가 커져갔다.
“부모니임!!”
“도련님! 저기에 쓰러져 있는 자들은 영지의 중축인 인물들입니다! 저들을 구하지 않으면 영지는 무너져내릴 것입니다!”
기사의 말에 불릿이 시선을 돌리자 곳곳엔 이미 숨이 끊어진 병사들이 물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고, 몇몇 인물만이 부서진 나무상자나 가지에 의지한 채로 간신히 부유하고 있었다.
“도련님! 이미 허리까지 물이 차올랐습니다! 빨리 피하셔야 합니다!”
“아버지가 수로를 파고계셨다 들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더냐!”
그들이 급박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 불릿의 어머니, 스틱스가 꺼질 듯 말듯한 불길을 유지하며 소리쳤다.
“아가! 어서 피하려무나! 이것은 우리가 막을 수 있는 재해가 아니었어!!”
“어머니! 아버지! 빨리 이쪽으로 오세요!!”
바포 백작과 스틱스는 마치 흐르는 강물 한가운데에 놓인 돌덩이와도 비슷했는데, 그들의 좌우로 갈라지며 쏟아지는 홍수는 먼 옛날 세계를 물에 잠기게 만들었다는 전설과도 같았다.
“어서 가란 말이다! 우린 틀렸어!! 힘을 놓는 순간 해일이 덮칠 것이다!!”
그러면서 바포 백작이 소리치는 말.
“라체나!! 명령이다! 불릿과 가신들을 데리고 안가로 피신하라! 저택도 안전하지 못해!!”
콰콰콰콰-
우우우우우우웅…
그와 동시에 물길은 더욱 거세지기 시작했고, 이제는 범람하기 시작한 홍수가 불릿과 가신들을 쓸어담기 직전이었던 것이다.
“각하아!!”
“어서 가래도! 뭣들 하고 있느냐아! 어서어어!!”
“얘야, 어서 가렴!!”
이를 으드득 가는 라체나의 조장. 그는 주변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단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2조의 조원들은 들어라! 현 시간부로 퇴각령을 내리겠다! 가신분들이 동사하지 않도록 마나를 활성화시켜 체온을 높여주며 안가로 이동한다!”
“옙!”
“알겠습니다! 서둘러, 이것들아!”
그러나 백작의 말을 듣지 않는 이가 있었으니, 불릿은 바포 백작에게로 뛰어가며 소리쳤다.
“아버지! 어머니!”
첨벙, 첨벙!
그가 사지를 향해 나아가자 조장이 그를 붙들고 막아섰다.
“이거 놔, 개새끼야!”
“안 됩니다, 도련님! 피하셔야 합니다!”
“씨바알! 내 엄마아빠가 저기 있다고! 놓으란 말이다아!!”
“숀! 불릿을 데려가!”
때마침 바포 백작의 목소리에 2조장, 숀은 불릿에게 사죄의 말을 올렸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놔! 놓으라, 컥!”
퍽!
뱃가죽을 가격한 숀의 주먹에 불릿은 휘청이다 그의 팔에 안기며 쓰러졌다.
철퍽.
가장 시끄럽게 굴던 불릿이 정신을 잃자 주위는 오직 폭우로 인한 물소리로 가득했고, 숀을 비롯한 라체나의 인원은 백작 부부에게 정중한 인사를 한 후에 서둘러 자리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점점 멀어져가자 바포 백작은 한숨을 내쉬었고, 그의 아내 스틱스는 흐느꼈다.
“후우, 드디어 갔구려.”
“흐, 흐흑….”
이제는 피할 수도 없는 위치, 사방이 물로 둘러싸인 채 바람의 정령이 모든 힘을 쏟아내 이를 밀어내고 있었으나 너무도 엄청난 물의 압력에 점점 밀려나고 있었다.
불의 정령은 이미 사그라진지 오래인지라 그들은 추위에 덜덜 떨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미안하오.”
“으흐흑, 우리 아가, 불쌍해서 어떡해요….”
죽음이 임박해오자 스틱스는 세상에 홀로 남겨질 불릿 생각에 울음을 그치질 못했는데, 정령에게 힘을 불어넣어주던 바포 백작은 거기서 손을 떼어버리며 스틱스를 안아주었다.
“여보, 미안하오. 지켜주지 못한 못난 나를 용서치 마시오.”
“아니에요. 우리 둘이서 같이 선택한 일이잖아요…흑.”
토닥토닥.
그들이 마지막 대화를 나누는 사이, 바람의 정령이 힘을 쥐어짜내 바포 백작에게 말을 걸었다.
- 왜 그런 선택을 한 것이지?
분명 살 수도 있었는데 부부는 죽음을 택했다. 정령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이에 바포 백작은 자신의 체온을 아내에게 나눠주면서도 희미한 웃음을 지어주었다.
“아들에게 미래를 선물하고 싶은 것은 부모라면 응당 모두가 그러하지 않을까?”
“흐흑, 바람의 중급 정령, 실라이온이여. 우리의 어리석은 선택 때문에 미안해요.”
정령과 정령사의 계약은 평등한 관계, 그들의 선택은 일종의 계약위반이었다.
그러나 실라이온은 평온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의 어조는 그저 덤덤할 뿐이었다.
- 나야 즐거울 따름이었지. 그동안 재밌었다고 생각되는군.
콰과과과-
이제는 빛마저 가릴 정도로 해일에 둘러싸이자 활로 자체가 사라진 바포 부부.
실라이온은 바포 백작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였다.
- 그동안 즐거웠네, 애로우 폰 바포여.
“본인 또한, 마찬가지일세.”
이에 대답하며 동시에 바포 백작은 스틱스에게 마지막 키스를 나누며 속삭였다.
“다음 생에서도 함께하고 싶소.”
“저도요, 내 사랑….”
그들은 물에 잠기는 순간에도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였는데, 그들이 마지막으로 떠올린 공통사항은 그들의 소중한 결실인 불릿이었다.
‘잘 있으렴, 우리아들.’
콰콰콰콰콰--!!!
이윽고, 어둠이 그들의 삶을 가려버렸다.
============================ 작품 후기 ============================
내일은 평일이므로 저녁 6시와 밤 12시 10분에 연재가 이루어집니다.
3일간 하루 3연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