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정령사-76화 (76/241)

00076  수확제  =========================================================================

“‘그동안 불미스러운 일도 많았지만 오늘만큼은 먹고 마시며 즐기도록, 직스 자작이 영지민들에게.’ 이상!”

기사들 중 한 명이 공고를 알린 후 단상에서 내려오자 조금씩 숙덕거리던 주민들은 한숨을 내쉬며 각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휴, 이제야 간신히 먹고 살 만하겠구나.”

“그러게 말이다…, 근데 2달 만에 이렇게 되는 것도 능력이다, 그치?”

“능력은 능력이지. 영지 개판으로 만들어놓고 2달 만에 얼렁뚱땅 급속도로 회복시키는 걸 보면.”

“쉿, 쉿! 죽으려면 너 혼자 죽어! 이게 미쳐가지고….”

그들의 대화를 보면 아직도 불만은 풀어지지 않은 모습이었으나 그래도 한숨 돌릴 상황이 되자 하늘을 찌를 듯했던 것보단 한결 나아졌다.

수확제가 시작되자 불릿과 일행도 떠날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직스 자작님’.”

중앙영지까지 불릿을 보필할 인원으로는 극심한 인력난에 시달리는 직스 자작령을 고려해 크레파토스와 올리비아만이 동행하기로 하였다.

흙덩이야 어차피 불릿과 일심동체(?)이니 제외하고, 그래도 체면이 있기에 마부가 존재하긴 했다.

집사는 불릿이 없는 동안 직스 자작령을 다스려야했기에 동참하지 못했다.

“드디어 때가 됐군.”

일행은 불릿이 가짜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고 출발하기 이전부터 마차에 탑승한 상태였는데, 마차의 문을 닫기 직전 집사가 걱정스런 어투로 그에게 충언을 고했다.

“…‘직스 자작’님, 부디 일을 성공하여 저희를 구해주시옵소서….”

비록 집사는 이미 사망한 직스 자작의 충복으로 활동하며 온갖 더러운 일을 도맡아 했었지만, 그가 영지를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진실하다 말할 수 있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떼어먹을 것도 없는 영지에 죽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네도 몸조심하도록.”

“……감읍하나이다, 대영주님.”

“어허, 현재 본인은 직스 자작일세.”

“…예, 영주님.”

이제 정말 출발하려고 하자 집사가 더 할 말이 있었는지 문을 닫지 않고 있었다.

이에 불릿은 자세를 고치려던 것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는데, 집사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여전히 불릿을 걱정하는 주제였다.

“직스 자작님, 그것을 가지고 가셔도 탈은 없으실 런지요?”

“…그것이라…. 현 상황에선 본인이 소지하고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하지 않겠는가?”

“그렇긴 합니다만…, 사례가 있지 않사옵니까?”

그들이 대화를 주고받으며 얘기하고 있는 그것, 그것은 바로 마(魔)의 꽃방울을 일컫는 것이었다.

사망한 직스 자작만 해도 마의 꽃방울에서 흘러나오는 마기에 취해 어이없는 행동을 늘어놓지 않았는가?

그러나 불릿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답했다.

“그렇기에 더욱 본인이 소지하고 있어야하네. 현 상황에서 이것에 접근할 수 있는 이는 측근들뿐인데, 누구 하나라도 마기에 노출되면 어찌되겠는가?”

어지간히 정신력이 강하지 않거나 경지에 다다른 이가 아니라면 금세 마기의 악영향을 받아 미쳐버릴 것이다.

그렇기에 불릿은 중앙영지에 그것을 가지고가는 것이리라.

“그 외에도, 선물이라는 형식을 띄면 의심도 덜 받겠지.”

“확실히 그렇군요.”

이 상태에서 중앙영지에 가져갈 선물을 마련하려면 영지를 쥐어짜야 하는데, 그렇게 된다면 직스 자작령은 말 그대로 파멸이었다.

그러니 허울이나마 이것만큼 좋은 선물은 없을 것이다.

“각하, 게슐린 그랩 자작의 경계를 곧추세우는 결과를 낳지 않겠습니까?”

이들의 대화를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노기사, 크레파토스가 입을 떼었는데, 그는 최대의 적이라 할 수 있는 그랩 자작을 주제로 삼았다.

“중앙영지에 입성만 한다면 상관없네. 그곳에서는 대놓고 수작을 부릴 수가 없기 때문이지.”

“……각하.”

“그만, 거기까지. 그리고 자네도 도착할 때까지는 각하가 아닌 자작이라 부르도록.”

“알겠습니다, 직스 자작님.”

“언제까지 걱정만 할 거예요? 불릿, 못 믿어요?”

잠자코 있던 올리비아의 한 마디에 집사와 크레파토스는 살짝 멋쩍은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각하!”

“의심했던 것이 아니옵니다, 그저….”

“그만, 그만! 직스 자작이라고 부르라 했거늘, 언제까지 본인을 그리 부를 것인가!”

- 불릿, 이제 가자.

흙덩이까지 합세해서 말하자 불릿은 자리를 마무리하며 진짜로 떠나려 했다.

“다들 그리 알고, 어서 본인의 보금자리로 돌아가세. 정당한 주인은 본인이거늘 무얼 그리 걱정하는 것인가? 크흠.”

“…살펴가십쇼, 영주님.”

불릿을 마중하는 집사의 눈짓에 고개를 끄덕이는 크레파토스.

그렇게 그들은 직스 자작령을 떠나 중앙영지로 향하는 여행길에 올라섰다.

* * *

촤악!

“끼엑!!”

털푸덕-

고블린이 비명횡사를 터뜨리며 바닥에 널브러지자 이젠 익숙해졌는지 알아서 사체를 처리하는 흙덩이, 그리고 한쪽에 서있는 불릿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서 눈을 질끈 감고 있는 노기사가 있었다.

“송구합니다, 주군! 죽여주시옵소서!”

대낮의 대로에 몬스터가 출몰하여 마차를 습격하자 깜짝 놀란 마부가 고삐를 흐트러트렸고, 그로 인해 마차 안에 있던 일행은 한바탕 나뒹구는 신세가 되었었다.

이에 분노한 크레파토스와 흙덩이가 몬스터를 처리했지만, 자신의 진정한 주인에게 해를 끼쳤다는 생각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괜찮네. 상처야 흙덩이가 치료해주었고, 그것이 자네의 과실은 아니질 않은가?”

상처라고 해봤자 피륙의 긁힘 정도, 그보다는 마차 안에서 나뒹구는 도중에 올리비아의 가슴이 쿠션역할을 해주었기에 별달리 상처를 입지 않았다.

‘…크흠, 크흐흠.’

역시 육체가 젊어지니 팔팔해졌다(?).

올리비아는 여전히 마차에서 나오질 않고 있었는데, 평소라면 자신이 몬스터를 쓸어버리겠다고 했었겠지만 저렇게 벌게진 얼굴로 가슴을 팔로 감싸고 있는 상태라면 아무것도 못할 것이다.

불릿도, 크레파토스도 그녀가 왜 그러는지 알고 있었기에 서로 그 부분에 대해서는 대화를 회피하고 있었다.

- …치.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는데.

구덩이를 파서 몬스터의 사체를 정리하던 흙덩이가 어색해 보이는 그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아래로 내렸는데, 그곳엔 약간의 존재감만이 보이고 있었다.

- ……역시 저 여자, 싫단 말이야.

올리비아가 들었으면 가뜩이나 빨간 얼굴이 폭발해버렸을지도 몰랐으나 지금 이 순간은 흙덩이와 대화가 통하는 이가 불릿 하나라서 다행인 것 같기도 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주…, 자작님.”

“흠흠, 뭐. 그것은 나중에 영지가 안정되면 자연히 그리 될 것이고.”

“헌데 자작님, 흙덩이라 불리는 정령의 힘이 보통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유를 물을 수 있겠는가?”

크레파토스는 정령사라고는 불릿 밖에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불릿이 어릴 적부터 보아왔기에 하급과 중급의 힘을 대략적으로 가늠할 수는 있었다.

“분명 하급이라고 하신 것 같은데, 단순한 기술 하나로 몬스터가 일격에 나가떨어진다는 것이라던가, 마법도 아닌데 저런 것도 할 수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강해지신 것 같습니다.”

분명 흙덩이는 다른 정령들과는 달랐다. 하급임에도 하나하나의 위력이 강했고, 할 수 있는 일도 보다 폭이 넓었다.

그뿐이랴? 능동적인 사고로 인해 그 상황에서 자신이 무얼 해야 할지 판단도 할 수 있었으니 명령을 내리는 수고도 덜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만 해도 몬스터의 사체를 처리하라 말도 하지 않았거늘, 알아서 마무리까지 하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원소의 종류만 달라졌을 뿐이지 더 강해지신 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지만 땅의 축복이라던가, 이런 용도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더 좋아지신 것 같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 이 아저씨가 뭘 좀 아네.

토토토-

크레파토스의 말에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흙덩이가 불릿에게 다가와 찰싹 달라붙더니 그의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위에 올려놓았다.

이에 불릿은 한차례 헛기침을 뱉은 후 흙덩이가 바라는 일을 해주었다.

“커흠.”

스윽, 스윽-

이 장면을 목격한 크레파토스의 한마디.

“전에도 궁금했으나, 그 행위에 의미가 있나이까?”

불릿은 언제나 근엄한 군주. 행동거지에 있어 조심할 필요가 있는 위치에 있었다.

불릿을 오랜 세월동안 알아온 그였으니 몇 번을 봐도 익숙하지 않는 것은 이해할 만했다.

- 불릿이 날 좋아한다는 뜻이야.

“…커허험! …이것은 정령과의 친밀을 위한 의식일세. 전에도 말한 것 같은데, 정령은 객체마다 개성이 있으니까 말일세.”

“……취향이 바뀌신 것은 아니시지요?”

“취향??”

“아, 아닙니다. 그럼,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린아이를 좋아하시는 건 아닌가보군.’

이전의 물의 정령들도 불릿의 바람에 따라 형체를 소녀와 성숙한 여인으로 했었기에 떠오른 생각.

하지만 불릿은 평소 여성을 멀리했고, 혼인할 생각도 하지 않았었기에 그저 스쳐지나가는 생각일 뿐이었다.

크레파토스도 그저 불릿이 젊어졌기에 한번 떠본 것이었지만, 불릿의 머리위에 물음표가 백만 개는 떠오르는 듯하자 바로 관두었다.

“마정석은 챙겼는가?”

그러자 크레파토스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먼저 도착하는 것이 유리한 상황이고, 몬스터의 피가 묻을까봐 그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외는 있는 법. 옆에서 꼼지락거리던 흙덩이가 조심스레 두 손을 다소곳이 내밀었다.

스윽.

- 내가 챙겼어. 칭찬해줘.

이제는 알아서도 잘하는 흙덩이었기에 불릿은 약간 풀어진 표정으로 바라는 것을 해주었다.

“잘했네, 흙덩이여. 자네는 언제나 본인을 기쁘게 해주는군.”

이에 크레파토스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송구하다고 거듭 읊조렸다.

크레파토스는 불릿의 체면을 생각해 그런 것이겠지만, 이곳까지 오며 불릿이 겪었던 고생들은 마정석의 가치를 다시금 깨닫게 되었었기에 허투루 버리는 법이 없었다.

게다가 당장 직스 자작령만 하더라도 가난한 상태인데, 어찌 이것을 버리고 갈 수 있겠느냔 말이다.

불릿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는 한발 더 백성에게 다가가는 성군으로 발전하고 있던 것이다.

다각, 다그닥-

다그닥다그닥-

덜컹이는 마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불릿은 점점 안정되는 도로에 만족하고 있었다.

직스 자작령의 경우는 불행했으나 그나마 다행이랄까. 자신이 직접 다스리던 중앙영지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좋아지는 치안상태와 관리가 잘 되고 있는 길을 보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혼란스런 난세에서도 자신의 일에 충실한 자들이 남아있나 보군.’

난세일수록 원래 해오던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되었다. 그렇게 하나둘 흐름이 막힐수록 난세는 더욱 혼란으로 빠져드는 것이며 나중에는 수습자체가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자들이 있다는 점에서 불릿은 그들에게 포상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 저기. 불릿?”

그때, 갑자스런 올리비아의 미성에 창밖을 바라보던 불릿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자신과의 접촉이 신경 쓰였던 것인지 부끄러워하는 부분을 보였으나 그래도 감정을 추스른 듯 말을 더듬이면서도 말을 걸고 있었다.

“…말해보시오.”

그 일에 관해서, 그러니까 가슴….

“흠흠.”

…의, 올리비아의 말이 이어졌다.

“너희 집, 그러니까, 중앙영지…? 거기로 돌아가면 뭐부터 할 거야?”

“아아, 계획을 말하는 것이오?”

올리비아는 자세한 사항은 알지 못했다. 불릿이나 크레파토스야 그곳의 지리나 어디에 뭐가 있고 영지의 상황도 이전과 비교하며 상황판단을 할 수 있었지만, 올리비아는 말 그대로 타지인인지라 정보를 줘도 써먹기 곤란했던 것이다.

어차피 올리비아를 그런 생각으로 데려온 것도 아닌지라 불릿은 선선히 계획에 대해서 설명해주었다.

“일단 그쪽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보아야 알 수 있겠지만, 축제 중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렇듯 초라한 행렬로는 큰 관심을 받지 못할 것이오.”

초라하다는 대목에서 크레파토스가 고개를 숙였으나 불릿은 개의치 않아했다.

지금 당장 조금 초라해보이던 어떠한가? 배신자를 처단할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바닥으로 내려가볼 수도 있는 것이다.

‘심판은 본인이 내릴 것이지만.’

올리비아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흙덩이는 창밖을 보고 있었지만 손은 불릿의 소매를 꼭 움켜쥐고 있었다.

“여기서 흙덩이의 역할비중이 클 것이오.”

턱.

그러면서 흙덩이의 머리에 손을 얹고 쓰다듬자 깜짝 놀랐는지 흙덩이가 애달픈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올리비아나 크레파토스, 불릿을 제외한 모든 이가 그를 쳐다보자 불릿은 얕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그러나 애정이 전해지도록 쓰다듬으며 흙덩이를 바라보았다.

“흙덩이가 있기에 이 작전은 성공할 것이니, 승리는 우리의 손안에 있소이다.”

============================ 작품 후기 ============================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 밤 12시 10분에 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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