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정령사-73화 (73/241)

00073  마(魔)의 꽃방울  =========================================================================

그러나 집사의 말은 끝나지 않았으니, 그는 불릿을 보며 말을 이었다.

“대영주님. 올리비아님을 믿으십니까? 전에는 자세히 알 수 없었으나 지금까지 상황을 지켜본 제 식견에 의하면 정말 중대한 사항이기에 거듭 묻는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사항이길래 집사가 이리 말하는 것일까?

그래도 불릿은 집사의 말이 들을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처음 자작령에 도착했을 당시의 십부장을 제외하면 남은 기사들은 모두가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으며 집사 또한 직스 자작의 행동을 탐탁지 않아 햇었다.

이젠 이들이 전부인 직스 자작령, 일으켜 세우려면 집사의 조언을 필수였다.

“그녀는 나의 신체라 여겨도 좋네. 자, 말해보시게. 무엇 때문에 그리도 신중을 기하는가?”

“그건….”

잠시 심호흡을 하던 집사는 이내 눈을 빛내며 또박또박 음성을 내뱉었다.

“마의 꽃방울의 출처가 게슐린 그랩 자작이기 때문입니다.”

“뭣이? 그랩 자작이?”

“…지금 뭐라고 했는가, 집사. 그분께서 마의 꽃방울을 소지했었다는 건가?”

불릿 다음으로 놀란 이는 늙은 가신 크레파토스였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고,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겁게 대꾸하였다.

“대영주님, 그동안 직스 자작령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던 것도 게슐린 그랩 자작이었으며 섭정을 통해 자신의 영지로 물자와 인적자원도 모조리 빼돌렸습니다.”

“…계속 해보시게.”

불릿은 자리에 앉으며 손짓을 했는데, 그는 의외로 화가 난 표정이 아닌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는데, 매우 분노한 듯 핏줄이 돋아난 상태였다.

집사도 이를 확인했으나 굳이 그의 화를 돋굴 필요는 없었으므로 자신이 아는 사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제가 직스 자작…을 예전부터 보필하진 않았으나 그래도 10년이란 세월을 함께 해왔습니다. 그런데 섭정기간이 끝났음에도 게슐린 그랩 자작은 끊임없이 이곳을 방문하며 친분을 돈독히 하더군요.”

“거기까진 나도 아네. 직스 자작의 부족함을 알기에 그의 간섭을 어느 정도 허락했던 면도 없잖아 있었지.”

직스 자작은 선대의 반의반도 따라가지 못했다. 능력도 없이 그저 작위와 영지만 물려받은 상태였기에 누군가 도와줘야 했던 상황, 그것을 섭정을 맡았던 그랩 자작에게 맡겼던 것이다.

조금씩 이익을 취했다지만 그랩 자작이 굳이 이곳까지 올 필요는 없었는데, 그는 꽤나 자주 직스 자작령을 방문했었다.

불릿은 매우 바빴던 관계로 문서로만 확인했었고, 별다른 징후가 없자 그냥 넘겼던 부분이다.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으니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 불릿의 손짓에 집사는 계속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 영지는 잘 돌아가는 듯했으나, 실은 속에서부터 곪아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리분별을 하시던 직스 자작이 어느 순간부터 살이 붙고 향락을 추구하더니 근래에 들어선 파멸에 들어서는 것을 알면서도 영지민을 쥐어짰습니다.”

“…….”

“그리고 그분이 그렇게 된 것이 그랩 자작께 물건을 받았을 때부터인데, 당시에는 몰랐으나 나중에 직스 자작의 부름을 받고 방으로 찾아가니 몰래 그것을 껴안고 애지중지하다가 제가 들어서자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게 마의 꽃방울이었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초기엔 조심하는 모습을 보이시더니 나중엔 대놓고 쓰다듬고 매만졌으며 키스까지 하시더군요. 저도 단순히 보석에 환장한 귀족인 줄 알았지만 상황이 이렇게까지 변하니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집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불릿은 고민하다가 퍼뜩 마의 꽃방울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떠올렸다.

“……마기에 노출되었군.”

그러자 집사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에 맞장구를 쳤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마의 꽃방울은 최상급 마정석을 쓴 것으로 유명하니 충분한 가능성이 있는 셈이지요.”

“송구하오나 각하, 단순히 마정석을 소지하고 있다하여 마기에 노출될 수가 있단 말씀입니까?”

오랜 연륜을 지닌 크레파토스의 질문에 불릿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그러한 현상을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군. 중급 마정석만 하더라도 값비싼 나머지 사용하지 않고 오랜 기간 방치하면 마기가 빠져나간 모습을 볼  수 있지. 하지만 중급에서 빠져나오는 마기는 긴 세월동안 소량씩 흘러나오기에 인체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네.”

그러면서 올리비아와 시선을 마주치는 불릿. 올리비아도 자신들이 소지한 마정석을 떠올렸는지 고개를 떠올리며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상급 마정석, 본인도 구경만 해본 물건이지만 존재만으로도 마물이 꼬일 정도로 눈에 띄는 마기가 흘러나왔다네.”

불릿이 구경했던 마정석은 흑마법사를 통해서였는데, 그게 바로 마지막 결전인 마족소환의식에서 이용된 물건이었다.

아무리 흑마법사들이라 하더라도 맨몸으로 소환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마물이 한계였던 것이다.

마정석의 근본은 마기, 그것이야말로 이 대륙에서 마족을 소환하기 가장 알맞은 물건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 그들도 최상급 마정석을 구하지 못했었는데, 이런 무능의 정석인 직스 자작에게서 발견되고, 거기다 그 배후로 여겨지는 게슐린 그랩 자작이 있다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있을까?

“가공하는 과정에서 마기의 노출을 막기야 하겠지만, 웬만하면 가까이하지 마시게. 중급 마정석부터는 마기를 차단하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는 한 거기서 새어나오는 마기에 타락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네.”

그래서 파르탄의 영주, 콜드 파르탄이 상자에 넣어서 마정석을 주었던 것이다.

괜히 여행하는 자에게 불편하라고 주머니나 가방이 아닌 상자에 넣어서 준 것이 아니란 소리다.

“집사의 말을 들으면 직스 자작은 마기에 노출되어 타락했던 모양이군.”

푸우욱…

침대에 드러눕듯 푹신한 의자 깊숙이 몸을 누이는 불릿. 그는 피곤한 기색을 드러내며 가신들에게 말했다.

“회의가 끝나면 집사는 본인을 그곳으로 안내하고, 어차피 마의 꽃방울을 판매할 순 없으니 그건 제외하도록 하지. 그 외의 귀중품은?”

“없습니다. 그것을 구매하기 위해 모든 금력을 동원하였기에 영지가 이렇게 된 것입니다.”

“빚이 있었나?”

불릿이 결사대에 있던 시기에도 영지에 대한 정보는 꾸준히 전달받았으니 이렇게 됐었다면 진즉에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단시간에 이런 지경에 도달했다는 뜻, 집사의 말도 그러하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예, 대영주님. 이자를 꾸준히 갚느라 발전을 할 수가 없었는데, 대영주님의 실종, 그러니까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떠돌면서 게슐린 그랩 자작이 빚을 독촉하기 시작했습니다.”

상황이 그렇게 변하자 급해진 직스 자작은 영지의 모든 돈을 끌어 모았고, 병력까지 최소한도로 줄인 결과가 이 모양이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자 불릿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다시 시작하는 게 더 쉬울 수도 있겠군.”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이제 곧 수확제가 다가올 것이고, 그때 중앙영지의 축제에 참가하여 세금과 함께 일 년 동안의 보고를 해야 했던 것이다.

이는 각 지역의 영주들이 배신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역할과 함께 충성을 맹세하도록 세력을 과시하는 불릿의 의도도 있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배신하는 자가 나오는 것이고, 불릿의 영토는 엉망이 되었다.

직스 자작의 죽음을 알리지 않은 이유도 그가 자작으로 위장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서 불릿의 본거지인 중앙영지에 진입하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직스 자작령도 불릿의 영토 중 하나였으니 나중을 위해서라도 수습은 해놓고 가야할 것이 아니겠는가?

잠시 고민하던 불릿은 한숨을 내쉬며 파묻었던 몸을 앞으로 세웠다.

덜컥.

“크레파토스, 집사, 나머지 기사들도 잘 듣게. 수확제의 축제가 완료될 때까지 세금은 걷지 않는 것으로 하게. 그리고 남은 병력으로는 오직 치안에 힘쓰고, 외부의 적에 대해서는 그저 경계만 하게. 본인이 중앙영지에 도착하고서 병력과 물자를 파견해 자작령을 흡수할 터이니.”

계속해서 이어지는 말.

“크레파토스는 병력운용과 축제비용에 필요한 자금으로 아까 말했던 490골드를 이용하고, 집사는 저택에 존재하는 모든 예술품을 팔아버리게. 헐값이라도 상관없으니 당장.”

“예, 각하.”

“알겠습니다, 대영주님.”

크레파토스와 집사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자 불릿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재차 명령을 내렸다.

“집사, 아까 말했던 것들을 그대로 실행할 것이며 이에 필요한 무력은 크레파토스를 통해서 해결한다. 기사들도 힘들겠지만 몸을 사리지 말아주시게. 내 꼭 보답하도록 하지.”

“염려마십시오, 각하!”

“영지를, 우리의 영지를 지키겠습니다!!”

그동안 직스 자작에게 눌려 아무것도 못했던 기사들이 우렁차게 대답하며 불릿을 흡족하게 하였고, 크레파토스의 눈에도 한결 힘이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방치된 농경지는 본인의 새로운 정령, 흙덩이와 함께 축복을 내릴 것이니 올해 농사는 열심히만 하면 수확제 때까지는 먹을 만큼의 식량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땅의 정령의 축복을 통해 피폐해진 대지의 지력을 한껏 끌어올리며 동시에 성장을 촉진해 식량을 확보한다.

물론, 급성장한 만큼 맛은 보장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맛이 중요한 건 아니지 않겠는가?

불릿도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정령사로서의 기본교양과 더불어 보아온 것이 있었기에 길은 잡을 수 있었다.

“외부로는 소식을 뿌리지 말도록. 행여 상인들을 통해 게슐린 그랩 자작에게 정보가 들어갔다간 반란이라 짐작되는 그에게서 어떤 해코지를 당할지 알 수 없으니 말일세.”

“으음….”

“알겠습니다, 각하.”

“예, 각하.”

모두가 침음성을 흘리며 대답했는데, 게슐린 그랩 자작이라는 2인자가 배반, 즉 반란이라 여겨지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실질적으로 현 바포 변경백에서 제일의 세력을 자랑하는 이는 불릿이 아니라 그랩 자작이었던 것이다.

그런 강대한 적을 상대로 싸워야한다는 점에 모두가 불안해하는 사이, 불릿이 피식 웃으며 그들의 불안을 잠재워주었다.

“자네들은 걱정도 많군. 어차피 바닥까지 온 마당에 무엇이 그리도 무서운 것인가?”

“하지만 각하, 게슐린 그랩 자작의 성세가 무섭도록 성장하고 있다 들었습니다.”

크레파토스만큼 바포 변경백의 역사에 대해 자세히 아는 이도 드물었다.

그런 만큼 예전의 그랩 자작령이 어땠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자작을 두려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크레파토스, 본인이 누구인가?”

“……저희의 주군, 진정한 주인이시며 바포 변경백의 대영주, 불릿 폰 바포 백작 진(眞)이십니다!”

“그렇다, 바로 본인이 바로 바포 변경백의 진정한 주인이자….”

주변을 둘러보던 불릿이 눈을 번뜩이며 말을 잇는다.

“명분을 가진 결사대의 일원, 정령사 불릿 폰 바포인 것이지.”

시리도록 차가운 눈빛을 빛내는 그의 눈동자는 자비롭고 위대한 군주가 아닌, 피가 난무하고 죽음으로 가득한 전장에서 돌아온 전사의 그것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을 본 가신들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섬뜩함을 느끼며 소름이 돋는 자신의 피부를 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영지를 망가뜨린 무능하며 간악한 영주, 직스 자작을 죽임으로써 직스 자작가의 대를 끊어버리는 단호함을 떠올렸다.

명분은 그들에게 있던 것이지 게슐린 그랩 자작에게 있단 것이 아니란 것을 상기하자 비로소 굳었던 얼굴이 약간이나마 풀리며 충성을 다짐하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올리비아는 난감한 상황 속에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할지를 몰라 탁상 아래에서 손가락을 놀리며 안절부절 못했다.

‘…어쩌면 좋지?’

그녀는 선택을 해야 했다. 이대로 떠나서 위험을 벗어날지, 불릿과 함께하여 영광된 과업을 이루어낼지.

‘볼레트…….’

이제는 용병 볼레트가 아닌, 대영주 불릿과 함께할지를 말이다.

============================ 작품 후기 ============================

밤 12시 10분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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