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1 인장의 주인 =========================================================================
불릿의 말에 크레파토스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각하. 이것보다 더 좋은 계획은 없을 듯합니다.”
“자네의 생각도 듣고 싶군.”
크레파토스는 직스 자작의 곁에서 오랜 시간을 보필해왔다.
그만큼 아는 것도 많을 것이고, 이번 작전에서 크레파토스 또한 핵심인물 중 하나였기에 그의 생각을 듣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과연 생각하던 것이 있던 듯, 크레파토스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각하, 직스 자작은 쉬이 당할 인물이 아니옵니다. 당장 영지의 모든 병력이 그곳을 수호하고 있으니, 자작령이 쇄했다 하더라도 쉽게 볼 일이 아닙니다.”
“병력의 구성과 수는 얼마나 되는가?”
“병사 200과 기사 다섯이 있사옵니다.”
“…….”
“…….”
“…? 그게 끝인가?”
말이 더 이어질 줄 알았던 불릿은 크레파토스가 입을 다물고 있자 다시 되물었고, 그제야 크레파토스도 아차 싶었는지 재빨리 말을 이어갔다.
“송구하오나 각하, 그간 직스 자작령은 쇠락의 길을 걸어왔사온지라 200명 병사와 다섯의 기사를 유지하는 것도 버겁습니다.”
“……그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명색이 자작령인데 아무리 세가 쇄하더라도 이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 넓은 땅을 겨우 200명으로 뭘 한단 말인가? 게다가 아직 얘기는 끝나지 않았다.
“기사는, 기사는 어찌됐는가?”
“유지할 여력이 되지 않아 모두 뿔뿔이 흩어졌사온데, 투툰 후작령으로 향한 기사도 있지만 대부분의 인원이 게슐린 그랩 자작에게로 흘러들어갔사옵니다.”
으드득.
“내 이 잡것들을 그냥….”
“각하, 중앙영지에 도착하시는 것이 시급한 걸로 압니다.”
현재 바포 변경백은 무주공산의 상태, 그래서 직스 자작이나 게슐린 그랩 자작처럼 반기를 드는 이들이 나타난 것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직스 자작은 무능함 그 자체였고 게슐린 그랩 자작은 불릿을 위협할 적으로 성장했단 점이 다를 것이다.
대부분의 기사를 흡수하고서도 그것을 감당할 수 있다면 그랩 자작의 권력과 자금력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계획은 그렇게 할 것이니 본인의 동료에게도 일러둘 것이네.”
“…각하, 그 여인과 저기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소녀는 대체 무엇이온지요?”
크레파토스의 물음에 불릿은 슬쩍 몸을 돌려 뒤에서 멀뚱멀뚱 서 있다가 자신에게 미소 짓는 흙덩이가 있었다.
다시 몸을 돌린 불릿이 크레파토스에게 말하기를,
“뒤에 있는 미소…미소녀는 흙덩이라는 땅의 하급 정령이고, 올리비아는 론 타로 왕국에서부터 나와 함께한 동료지.”
“땅의 정령과… 동료말씀입니까?”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크레파토스. 세간에 알려지기론 불릿은 물의 중급 정령사였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서는 뜬금없이 땅의 하급 정령을 다루는 모습을 보이니 이상하게 여길 법도 하다.
게다가 저 땅의 하급 정령은 이상하리만치 인간과 흡사해 보였는데, 누런 피부만 제외한다면 인간이라고 봐도 무방할 행동을 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올리비아라는 여자, 그녀를 보는 순간 크레파토스는 어렴풋이 그녀의 신분을 알 것 같았다.
“바포 백작각하, 올리비아라는 여성분은 용병의 차림이었으나 분명히….”
“본인도 안다네. 그녀는 아마도 귀족이거나 몰락한 가문의 신분이겠지.”
“예…, 이미 아셨군요.”
“당분간 비밀로 해주게. 그녀가 스스로 말할 때까지는 기다릴 셈이니.”
“알겠습니다, 각하!”
“그리고 사정이 있어 흙의 정령을 다루게 됐으나 크게 문제는 없을 것이야.”
고개를 꾸벅 숙이며 약속을 다짐하는 크레파토스를 보며 불릿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슬쩍 뒤를 바라보았는데, 흙덩이에게도 말을 건넸다.
“흙덩이여, 지금의 대화는 잘 들으셨는가?”
불릿의 물음에 흙덩이는 살며시 다가오더니 무표정하면서도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불릿의 손을 잡았다.
덥썩.
그러더니 자신의 머리위에 올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 알았으니까 머리 쓰다듬어줘.
“…크흠!”
- 빨리, 응?
흙덩이가 애교까지 부리며 부탁하자 불릿은 난감해하면서도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스윽, 스윽.
“……각하?”
언제나 위엄과 기품이 좔좔 흐르던 불릿이 정령을 상대로 보이는 이상행동에 크레바토스가 머리위에 물음표를 가득 띄우고서 묻자 불릿이 헛기침을 뱉으며 변명을 했다.
“커험, 커허험! 크흠. 크레바토스여, 정령은 우리 인간처럼 개개마다 특징이 다르기에 이러한 경우도 있는 것이네.”
“아무리 그렇다한들 그건 아무리 봐도 그저 귀여워하는 걸로밖에….”
“커허허험!! 어허,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지 말게! 이건 어디까지나 정령과의 친밀을 위한 의식이지 본인의 뜻이 아닐세!”
- 불릿, 나 싫어? 안 귀여워?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 그럼 무슨 뜻인데? 응?
“……크흠, 나중에 얘기하지.”
‘나중에, 나중에, 나중에.’
스윽스윽스윽.
크레파토스도 있는 이상 입으로 내뱉는 말로는 대화를 하는 것에 한계가 있기에 불릿은 텔레파시를 강력하게 보내어 강제로 말을 끝냈다.
- 흐응…, 역시 불릿은 이상하네에?
흙덩이는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불릿의 손길을 느꼈는데, 이들의 행동에 크레파토스는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각하의 취향이 바뀌셨나…?’
크레파토스는 무표정한 와중에도 어쩐지 흐뭇해 보이는 흙덩이와 식은땀을 흘리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불릿을 보며 깊은 고민에 빠지고 있었다.
* * *
“하아, 언제까지 이짓을 해야 하는지….”
저택의 대문을 지키던 병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거의 폐허가 된 영지에서 뭣하러 저택의 입구나 지키고 있는지 병사는 통 이해를 못했다.
“사람도 없는데.”
슬쩍 주변을 둘러보아도 지나가는 사람은커녕 자신의 옆에 동료도 없었다.
병사의 수가 워낙 급감을 하다 보니 원래 2인 1조로 하루 3번 번갈아가며 서던 보초도 1인 1조, 하루 2번으로 변하여 거의 12시간씩을 서야했다.
엄청난 중노동으로 변한 보초였으나 그나마 이런 거지같은 영지에서 밥이라도 주는 곳은 병직 밖에 없었으니 별 수 있겠는가?
“떠나던가 해야지 원, 돈도 안 주는데….”
굶지만 않을 뿐이지 임금은 이미 오래 전부터 체불된 지 오래였다.
그렇게 혼자서 궁상을 떨며 외로이 대문을 지키던 병사는 저 멀리서 사람이 보이자 흐트러졌던 창을 바짝 곧추세웠다.
인영은 총 셋, 아니. 넷이었는데, 이제 갓 성인이 되어 보이는 남녀 한 쌍과 약간 누런 피부의 미소녀 하나, 그리고 포박된 채로 그들에게 끌려오는, 흰색으로 뒤덮인 머리칼의 노인 하나가 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대문에 도달했는데, 병사는 이내 심드렁한 표정이 되어 긴장을 풀었다.
“뭐야, 당신들이었소?”
얼마 전 영주의 의뢰를 위해 방문했던 용병무리. 어째서 소녀가 끼어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만사가 귀찮던 병사는 그러려니 했다.
이제 와서 직스 자작에게 충성심을 가진 병사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병사의 물음에 불릿이 앞으로 다가와 말을 건넸다.
“크레파토스를 잡아왔노라고 안에다 기별을 넣어주시오.”
“…크레파토스님을? 당신들이?”
“그렇소.”
직스 자작은 크레파토스를 죽이려 했는데 병사는 그에게 존대를 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직스 자작만 없앤다면 자작령은 원상태로 복구될 수 있음을 의미했다.
크레파토스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었는데, 양쪽에서 그의 팔을 붙들고 있는 불릿과 올리비아에 의해 간신히 서있는 걸로 보였다.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병사는 견디기 힘들었는지 고개를 돌리며 외면했다.
“이런 젠장맞을…, 기다리시오.”
병사는 뭐가 그리도 마음에 안 드는지 손님을 면전에 두고서 욕설을 내뱉더니 저택 안쪽으로 사라졌다.
문지기가 문을 지켜야지, 외부인만 남겨두고 사라지는 것이 직스 자작령이 얼마나 막장인 상태인지를 알 수 있었다.
“아저씨, 기분 좋겠어?”
올리비아가 병사 몰래 크레파토스의 귓가에 속삭이자 그는 낮게 읊조렸다.
“…저항하지 않는 자는 살려주시길 바랍니다.”
그의 간절한 부탁에 불릿도 작게 속삭여주었다.
“걱정 마시오. 그대의 충정에 보답해주리다.”
잠시 후 병사가 돌아오자 그들은 원래 계획대로 돌아가서 병사를 맞이했다.
“안으로 들어가시오. 자작이 나오고 있는 중이라니 알아서 조심하고.”
자신이 섬기는 주군에게 말을 함부로 하는 것 같았지만 불릿은 이를 탓하지 않았다.
직스 자작은 존경받을 가치는커녕 인간이라고 부르기도 부끄러운 작자였으니 말이다.
병사가 옆으로 비켜서주자 불릿 일행은 그를 지나 안으로 들어섰고, 문을 두드리니 저번에도 보았던 집사가 그들을 맞이했다.
“……결국 잡아오셨군요.”
집사는 훌륭히 의뢰를 수행한 불릿 일행에게 칭찬도 하지 않고선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다.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 집사는 불릿 일행을 내버려둔 채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 동작이 가관이었다.
어찌나 굼벵이처럼 움직이는지 가기 싫은 티를 팍팍 내는 게, 직스 자작의 신용이 얼마나 하락했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어디선가 건물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급했던지 쿵쿵 울리는 소리와 함께 직스 자작이 나타났는데, 그동안 얼마나 살이 쪘는지 얼굴살이 축 늘어져서는 턱이 3겹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그의 뒤에서 집사가 쫓아오는데, 역시나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직스 자작은 크레파토스를 죽이는 장면을 모두에게 보여줄 요량인지 병사들을 잔뜩 몰고 왔는데, 거의 모든 병력을 집결시킨 것 같았다.
그래봤자 200명 남짓했지만 말이다.
“지금일세!”
불릿의 신호에 올리비아가 손을 놓자 크레파토스는 구속된 척 하던 연기를 버리고 달려나가 집사를 제압했는데, 그래도 집사라고, 자작을 보호하려고 몸으로 막아서는 모습을 보였다.
“이게 무슨 짓이야!”
이 장면을 목격한 직스 자작은 소리를 빽 지르며 주변의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뭣하는 것이냐! 당장 이놈들을 잡아라!”
자작의 명령에 기사들이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달려들려는 찰나, 불릿도 흙덩이에게 명령을 내렸다.
“흙덩이여, 저들의 진로를 돌벽으로 막아버리게.”
- 꽉꽉 막아줄게.
콰드드드드득-
“으악! 이게 뭐야!”
“멈춰, 멈추라고!”
“으아악!”
퍽, 퍼버벅!
땅에서 돌벽이 솟아나자 둔탁한 소리가 난무했는데, 아무래도 달려들던 병사들이 달리던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고 벽에 박아버린 모양이다.
“이런 멍청한 것들! 얼른 넘어오지 못해!”
병사들과는 달리 외톨이가 된 채로 벽 너머에 존재하게 된 뚱보, 직스 자작은 붙잡혀 있는 집사를 보며 더욱 열성적으로 외쳤다.
“넘어오라고, 이 무능한 것들아!”
“자작님! 도저히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사방이 돌벽으로 막혔어요!”
“으아, 벽이 자꾸 꾸물거려서 올라갈 수가 없어!”
자작의 말에 반응하는 병사들의 반응, 그리고 기사들이 조용히 읊조리는 소리를 듣는 흙덩이.
“좀 더 소릴 질러라. 그래야 크레파토스님께서 살아나실 수 있으니.”
“거기 너, 일부러 미끄러지란 말이다.”
사전에 수습기사들에게 몰래 소식을 전해들은 기사들은 자기들끼리만 알고 있다가 때마침 돌벽에 둘러싸여 갇히자 속닥이며 제스쳐를 취하면서 병사들을 움직였다.
영주에 대한 충성도가 낮아진 상태인 병사들은 이러나저러나 별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영지는 망해가는 상태였기에 은근히 영주가 죽었으면 싶은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연기를 할 수도 없는 노릇, 시간이 지나면 그들도 벽을 넘거나 부순 후 이곳으로 올 것이다.
기사란 익스퍼트의 경지가 최소조건이었고, 익스퍼트는 모든 것을 가르는 마나소드를 발현할 수 있었으니까.
“직스 자작! 자네는 대영주 불릿 폰 바포 백작 진(眞)의 영토를 대리로 관리할 의무를 가졌으면서도 그의 영토를 어지럽혔으며 백성과 수하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었고, 임무를 망각한 채 향락에 빠져 귀족으로서의 체면과 명예도 저버렸다!”
“그, 그게 무슨 소리냐!”
“직스 자작,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불릿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말을 걸자 이에 반응하는 직스 자작.
그러나 직스 자작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는데, 덩달아 크레파토스에게 제압당해 있던 집사도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그것은! 서, 설마아!!”
“흙덩이여, 저기 소리 지르는 놈의 다리에 쌍주먹 쾅.”
- 그럴게.
흙덩이는 불릿의 말에 따라 자신의 양손을 발사했는데, 이 파괴력을 한낱 인간의 피륙이 견딜 리 없었다.
퍼퍽!
“끄아악!”
다리를 연결시켜주는 무릎이 사라져버리자 그대로 허물어지는 직스 자작.
불릿은 그에게 다가가더니 자신의 이름이 쓰여진 단검을 든 채로 그의 머리끄덩이를 잡았다.
덥썩.
“으으으….”
신음하는 직스 자작, 불릿은 고통으로 얼룩진 그의 얼굴을 잠시 마주보더니 작게 속삭였다.
“…죽어서는 아비와 만나길 바라네.”
“끄으으, 너, 너는….”
뎅겅!
============================ 작품 후기 ============================
토요일과 일요일도 점심을 기준으로 낮 12시, 저녁 6시, 밤 12시 10분에 연재가 예정되어 있사오니 그 날도 잘 부탁드리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