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0 인장의 주인 =========================================================================
‘역시 크레파토스는 저리 행동하는군.’
그러나 불릿은 미리 대비를 하고 있었는데, 크레파토스의 성정을 잘 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흙덩이여.”
- 알았어, 잡아두면 되지?
그때까지 멀뚱히 상황을 지켜보던 흙덩이는 불릿이 자신을 부르자마자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감을 잡았다.
스스로 생각한 후 움직인 흙덩이는 정령력을 움직여 평소보다 더 큰 힘을 내며 크레파토스를 붙잡았다.
덥썩.
“으윽, 이거 놓아라!”
무언가 이상한 힘을 내포한 것은 알고 있었으나 흙덩이의 모습이 여타 정령들과는 다르게 사람과 흡사했고, 미소녀이기 때문에 방심하던 크레파토스는 차마 베지 못하고 허리를 잡고 있는 흙덩이를 떼어놓으려 안간힘을 썼다.
자신의 스승인 크레파토스가 곤란에 빠지자 수습기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려했으나 그보다 올리비아가 더 빨랐다.
스윽…
“아저씨, 가만히 있지? 죽기 싫으면.”
“크으윽.”
올리비아는 크레파토스 칼집에서 검을 뽑기 전에 칼집 째로 그것을 빼앗아버렸다.
탁.
“이건 압수. 어디서 수작을 부려?”
크레파토스는 불릿이 수작을 부린다 생각하여 인장을 빼앗으려 했거늘, 오히려 올리비아에게 그 소리를 듣자 주름진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허어, 이 영지도 이젠 끝인가….”
그의 독백은 직스 자작령에서 크레파토스만이 마지막으로 남은 충신이란 것을 알려주는 대목이었다.
흙덩이에게 붙잡힌 채 망연자실하게 무릎 꿇린 크레파토스에게 불릿이 한쪽 무릎을 꿇고선 그의 손을 맞잡았다.
스윽.
“크레파토스여, 본인이 전대 직스 자작의 부탁에 따라 그의 아들을 살려주었으나, 이젠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네.”
“어찌 그것을…!”
아주 극소수의 인물만이 아는 이야기, 그러나 그것만으론 눈앞의 이가 불릿이란 것을 믿기 어려웠다.
그의 생각을 눈치 챈 불릿은 크레파토스와 자기 둘만이 아는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그때, 자네는 내게 말했었지. 처녀들의 행방을 알고 있다고.”
그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던 비밀, 크레파토스는 불릿에게 비밀을 알려주며 그를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했었다.
“게슐린 그랩 자작의 영지로 처녀들이 은밀히 보내지고 있다고, 그래서 중간에 낚아채 과인이 지내는 저택에서 일하도록 만들었단 것을.”
“……!!”
이 사실은 당사자인 처녀들도 알지 못했다. 당시 불릿은 백작의 작위를 지닌 대영주였으나 2인자나 다름없던 그랩 자작의 힘을 당해내지 못했었다.
그래서 크레파토스를 시켜 처녀들의 가족과 함께 은밀히 중앙영지로 보내어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처녀들을 백작성에서 일하도록 만들었던 것.
이런 숨겨진 비사는 오직 둘만이 알고 있던 사실이기에 수습기사들은 물론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올리비아도 놀라워했다.
“그분이, 그분이 알려주셨단 말입니까!”
어느새 흙덩이가 크레파토스의 포박을 풀었으나 그는 인지하지 못하고 불릿에게 물었다.
이 정도까지 이야기를 했으나 그는 불릿이 바포 변경백의 주인이라고 연관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떠올린 생각이, 눈앞의 청년이 그의 핏줄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러나 이런 오해도 이제는 잠식시켜야했기에 불릿은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서 또박또박 말했다.
“크레파토스여, 피치 못할 사정으로 본인이 젊어졌으나 혼인도 하지 않은 사람을 방정맞지 못하게 부르는 것은 듣는 당사자로서 기분이 좋지 않구려.”
“…허, 허허허.”
불릿 특유의 말투까지 나오자 크레파토스는 비로소 헛웃음을 짓더니 기사의 예를 취하였다.
왼팔과 오른다리를 뒤로 빼고, 동시에 상체를 약간 숙인다.
그러면서 오른팔은 배를 감싸듯 왼쪽을 향하지만 손바닥은 굳게 주먹을 말아쥐고 있었다.
예전에 불릿이 보인 귀족의 예에서 매우 비슷했지만 딱 하나 다른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손바닥이 펴졌느냐, 주먹을 쥐었느냐의 차이였다.
귀족이면 손바닥을, 기사면 주먹을.
정말 오랜만에 기사의 예를 받아보자 불릿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신 또한 귀족의 예를 정중하게 선보였다.
스윽…
“정말, 오랜만이구려, 크레파토스.”
“각하…….”
울컥했는지 크레파토스의 떨리는 음성엔 울음기가 보였으나 이내 마음을 다잡고 힘있게 외쳤다.
“전원! 각하께 대하여, 경례!”
“추, 충!”
“충!”
두 눈이 충혈된 크레파토스가 외치자 이에 따라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수습기사들.
수습기사들은 어떤 상황인지 파악이 잘 안 되는 모양이었지만 자신들이 따르는 크레파토스가 저리 말하자 믿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이 젊디젊은 청년이 그들이 진정으로 충성을 바쳐야하는 대영주 불릿 폰 바포 백작 진(眞)이란 것을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광경에서 홀로 아무런 자세도 취하지 않는 이가 있었으니, 아름다운 외모의 여검사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서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
우물거리는 입술을 비집고 간신히 튀어나온 탄성.
지금 그녀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던 상태였다.
‘이게 대체 무슨….’
미모의 여검사, 올리비아도 불릿이 귀족이란 사실은 알고 있었다.
자신보다도 더욱 기품이 넘치며 무의식중에도 흘러나오는 예법을 보고서도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녀가 어찌 알겠는가?
세상에, 백작이라니? 그것도 그냥저냥한 백작도 아닌 한 지역의 패자(霸者)라는 소리에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대영주라 함은 각 지역의 영주들도 찍소리 못하는, 그들의 위에 선 존재로서 작은 소국(小國)의 왕이라 부를 수 있는 자였다.
공국과도 비견되는 힘을 가진 이가 바로 대영주인 것인데, 설마 자신과 농담 따먹기도 하고 살갑게 지내며 여행을 하던 용병 볼레트의 정체가 그럴 줄이야!
“볼레트가 아니라…, 불릿 폰 바포… 백작…….”
털썩.
그녀는 힘이 빠지는지 자리에 주저앉아 그 말을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올리비아에게 있어 불릿의 정체는 충격을 넘어 세상이 무너질 정도로 엄청났던 것.
“나는 어떡하라고….”
무슨 의미인지 모를 올리비아의 말이었으나 그녀에게 다가오는 불릿에겐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올리비아가 주저앉자 불릿은 오랜만의 해후를 나누던 와중에도 그녀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스윽.
“올리비아, 괜찮은가?”
“……아.”
올리비아는 대체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불릿은 한 지역의 패자인 대영주이며 백작, 그에 비해 자신은….
거기까지 생각하던 올리비아는 갑작스레 떠오르는 부유감에 화들짝 놀랐다.
“엇?!”
“크레파토스, 올리비아가 피곤한 모양이니 쉴 곳을 안내해주시게.”
직접 올리비아를 공주님안기로 안아든 불릿의 말에 크레파토스는 공손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리로 오시지요.”
수습기사들이 있음에도 직접 노구를 이끌며 앞장서는 크레파토스. 그는 불릿의 행동에 한치의 의심도 않는 모양이었다.
어째서 백작씩이나 되는 인물이 한낱 여성을 저리도 소중히 안아드는가 싶기도 하건만, 불릿이라면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 크레파토스의 사견.
‘각하께 이 이상의 의심이란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미 의심은 할 만큼 했다. 그가 불릿 폰 바포 백작이란 것을 알게 된 이상, 그저 믿고 따를 뿐이었다.
불릿이 크레파토스를 뒤따라가는 사이, 불릿에게 안겨있는 올리비아는 말할 타이밍을 놓쳐 당황하고 있다가 그저 두 팔을 가슴에 올려 두 손을 맞잡은 상태로 눈을 꼬옥 감았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자고나서 생각하자.’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서자 올리비아는 그저 이 순간을 즐기며(?) 나중에 생각하자는, 조금은 무책임한 식으로 상황을 넘겼다.
달각.
“드시지요.”
“음, 고맙네.”
후룩-.
불릿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들며 조금씩 식혀마셨다.
“으음….”
‘백탕(白湯)이로군.’
백탕, 그것은 아무것도 첨가되지 않은 끓인 물이란 뜻으로, 현재 크레파토스가 어떤 상황에 처한 것인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싸구려 찻잎조차 사용하지 못할 정도의 가난함, 이게 정녕 기사의 저택인지 의심스런 상황이었다.
“죄송합니다, 각하.”
불릿에게 이런 것밖에 대접하지 못한다는 것이 못내 걸렸는지 사과의 말을 전하는 크레파토스.
이제는 흰머리가 본래 머리색을 뒤덮어버린 이 늙은 노장에게 불릿이 무얼 바라겠는가?
그나마 몸이라도 건장하다는 사실에 다행이라 여기고 있었다.
“본인은 괜찮다네. 그보다 자네는 이제 본인을 의심하지 않는 겐가?”
“마족도 나타나는 시대인데 무어가 이상하겠습니까. 각하께서 젊어지신 것은 경축할 일이옵지 나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마족이 죽음에 따라 흑마법사와의 전쟁도 끝을 맺었고, 그로인해 폐허가 된 각국의 지역을 이어주던 연합체도 유명무실해진 상태.
그래서 이러한 혼란이 생겨난 것이고 직스 자작령 또한 그 여파를 피해갈 수 없었다.
“본인이 자리를 비운 탓에 이 지경이 된 것이지.”
“각하….”
불릿이 자리를 비우게 된 것은 그의 의지 때문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흑마법사에게 고전하는 결사대의 역량부족과 연합체와 주변의 패자들의 정계싸움이 그 이유였다.
“그래, 우리의 해후는 나중에 나누는 것으로 하고, 내 영지가 어찌 돌아가는지는 잘 알고 있네.”
“…예, 각하.”
“그래서 말인데, 자네에겐 안 된 일이지만 더 이상 직스 가문을 내버려둘 수가 없겠군.”
“……예에, 각하!”
두 눈을 질끈 감는 크레파토스. 드디어 올 것이 왔기에 크레파토스는 입을 굳게 다물었으나 어찌나 이를 세게 악물었는지 입가로 피가 흘러나왔다.
그의 강인한 턱힘을 그의 잇몸이 버티질 못하고 있었는데, 나이도 잊을 만큼 괴로웠기 때문이다.
크레파토스의 심정을 이해하는 불릿 또한 침통한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어쩔 수 없네. 그는 선을 넘어버렸어.”
불릿이라고 해서 왜 아니 슬프겠는가? 자신의 영토에서 이러한 일이 발생했다는 점에 사람으로서, 그리고 군주로서 슬픔과 자괴감이 공존하고 있었다.
자신이 보다 더 잘 다스렸으면, 그때 직스 자작의 싹을 잘라버렸으면.
그랬다면 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라고.
하지만 뒤늦은 후회를 해봤자 때는 이미 늦었다.
“직스 자작을 치겠다. 자네는 어찌할 텐가?”
그 말은 불릿의 영토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직스 자작을 죽이겠단 말인데, 자신의 충실한 가신인 크레파토스를 죽이려던 점도 처형에 한몫했다.
이 점에 대해선 아직 말하지 않았으나 크레파토스도 무슨 연유로 불릿을 불렀던 것인지 대충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직스 자작의 수하라는 자가 이런 곳에서 궁핍하게 살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불릿의 말에 크레파토스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굳게 다짐했다.
“신, 크레파토스는, 바포 변경백의 마땅한 주인이신 불릿 폰 바포 백작 진(眞) 각하께 충성의 서약을 다짐합니다.”
본래 크레파토스는 불릿의 수하가 맞다. 그러나 불릿이 직스 자작령을 직스 가문에 관리를 맡겼기 때문에 그의 상관으로 직스 자작이 존재했다.
그래서 자연스레 크레파토스도 직스 자작을 보필하며 지내왔던 것인데, 이번 기회를 통해 다시금 충성 서약을 맺으며 아예 불릿의 직속 수하로 변경했던 것이다.
“그래, 크레파토스여. 힘든 일이지만 잘 선택했네.”
“……예.”
비록 버림받고 목숨의 위협도 받았었으나 자신이 모시던 직스 가문을 자신의 손으로 끊게 된다는 생각에 무거운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크레파토스 또한 바포 변경백을 지키는 기사 중에 하나, 루드밀라 왕국민 특유의 선한 성격을 지녔다고 한들 전장에서까지 그럴 순 없었다.
충성서약까지 받아내자 불릿은 크레파토스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자네도 예상했겠지만 직스 가문의 집사에게서 자네의 암살청부를 받았다네.”
“으으음… 예….”
“본인은 이 청부의뢰를 이용할 생각일세. 자네의 포박에 성공했다고 속여서 자연스럽게 자작과 대면할 생각이지.”
만약 불릿이 크레파토스를 죽였다고 말하면 집사는 증거를 내놓으라고 할 텐데, 대개 이런 경우는 대상임을 알 수 있는 신체부위를 가져가야 했다.
가장 알기 쉬운 것으로는 머리가 있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각하. 옥체를 보전하셔야함이….”
크레파토스는 불릿이 위험한 적지에 침투하려하자 걱정을 토로하였고, 이에 불릿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대답하였다.
“이만큼 확실하고도 좋은 방법은 없네. 직스 자작을 조용히 처리해야만 더 이상의 혼란 없이 영지를 수습할 수 있을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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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과 선작이 오르고 있군요.
이따가 밤 12시 10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