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9 인장의 주인 =========================================================================
쿠당탕-!
주름살이 그득한 중년의 남성이 자신과 흡사하게 생긴 염수수염의 청년을 바닥에 내팽겨치며 버럭 성을 내었다.
“이노옴! 감히 영지민에게 손을 대?!”
“아, 아니 그게 아니고요, 아버지 그게 아니라요!”
“듣기 싫다! 여봐라, 내 칼을 가져오너라!”
“히익!?”
주변의 하인과 시녀들이 쩔쩔매며 어찌할 줄을 모르는 사이, 곁에서 지켜보던 비슷한 연배의 기사가 이를 말렸다.
“자작님, 대영주께서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제야 분노에서 정신을 차린 중년인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다시 고개를 숙였다.
“대단히 송구스럽습니다, 주군!”
자작이라 불린 중년인이 고개를 숙이면서까지 용서를 비는 이는 대단히 젊어보였는데, 그 젊은이의 외모는 빛나면서도 위엄이 서려 군주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뒤에 나열된 기사들과 곁에 선 제노스라는 어린 마법사가 눈에 불을 켠 상태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송구스럽다라…, 무엇이?”
그들이 있는 곳은 영주의 집무실로 추정되는 곳이었는데, 고풍스러운 의자엔 영주가 아닌 불릿이 앉아있었고, 자작이라 불린 이는 바닥에 패대기쳐진 아들과 함께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것이, 아들을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하여….”
“진정 네놈이 한 짓이 아니렷다, 이 말인가?”
아직 어린 군주인 불릿은 영주들에게 함부로 말을 하는 경우가 없었다.
그것은 경우에 벗어나는 일로, 무릇 귀족이란 행동거지에 있어 타의 모범이 되어야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하나의 행동에도 대영주의 모습을 보이던 젊은 청년인 불릿이 본래 나이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이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직스 자작령의 영주에게 반말을 하였다.
그럼에도 영주, 직스 자작은 꼼짝도 못하였는데 그것은 자신의 아들의 죄를 낱낱이 고해받아서 그렇다.
“그래서 영지가 개판이 되어가고 시름을 앓는 백성들은 눈에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16에서 18세의 마을 처자들은 추적도 되지 않는데,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이느냐!”
사아아…
불릿의 감정이 고조됨에 따라 허공에는 점점 물방울이 뭉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하나의 형상을 이루는가 싶더니 이내 완숙한 여인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흐물흐물-
물로 이루어진 그것은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었으나 끊임없이 유동하는 것이 가만히 있음에도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의 중급 정령…에, 엘레노아…!”
- ……
불릿의 감정에 따라 소환된 물의 중급 정령 엘레노아는 아무런 말도, 표정도 없이 그저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직스 자작은 엄청난 압박감을 느꼈는지 아예 바닥에 엎드려 벌벌 떨고 있었다.
그의 옆에 내팽겨져 있던 아들놈은 진즉에 머리를 감싼 채로 벌레처럼 웅크린 상태였다.
“진정 잘못이 없단 소리렷다!!”
의자에 앉아 거만하게 말하던 불릿은 벌떡 일어서더니 크게 호통을 쳤다.
“직스 자작! 내 선대와의 인연을 생각해 믿고 맡겼거늘, 감히 본인의 백성들을 팔아넘겨?!”
사라진 젊은 처녀들, 그녀들의 추적이 불가능한 것은 이미 불릿의 영역을 벗어났기에 그러한 것이고, 가족들이 있음에도 그녀들만 추방된 이유는 직스 자작의 아들이 누군가에게 팔거나 넘겼기에 그런 것이었다.
찾으려야 찾을 수 없게 된 그녀들을 생각하면 불릿은 가슴이 욱신거리는 듯했다.
“제노스!”
“예, 각하.”
이렇듯 불같이 화를 내는 불릿은 보기 드물었기에 언제나 씩씩하게 굴던 제노스도 이 순간만큼은 목소리를 낮춰 자신의 존재감을 낮추었다.
“이러한 경우에 대한 처벌은 어떠한 게 있지?”
제노스는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우렁차게 대답하였다.
“약하게는 직위박탈과 함께 5년간 영주직을 이행할 수 없사옵고, 크게는 작위를 단승으로 바꿀 수 있는 걸로 압니다!”
이 말에 엎드려있던 직스 자작이 고개를 벌떡 든 상태로 무릎으로 기어 불릿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렸다.
“가, 각하! 부디 그것만은! 제발!”
“네 이놈! 당장 그 손을 놓지 못할까!
스릉-.
기사들이 뽑아든 검의 칼날이 자신의 목에 대어졌으나 직스 자작은 필사적으로 매달려있었다.
직스 자작은 불릿이 자신에게 어떤 벌을 내리려는지 잘 알았기에 목이 잘릴 수도 있는 순간에도 그에게 매달렸던 것이다.
“후후, 왜 이러는가, 직스 자작? 자네가 아닌 자네의 아들이 잘못한 일이 아니던가?”
“각하, 부디, 부디 자비를…!”
그러나 불릿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백성들의 원통함은 외면하고 자비를 바란다? 어이가 없구려, 직스 자작. 여봐라, 직스 자작의 작위를 현 시간부로 단승으로 강등하고 그의 아들을 평민으로….”
“각하! 이 목숨으로 죄를 대신하겠나이다!”
스르릉!
직스 자작은 자신과 함께 엎드려있던 중년기사의 허리에서 검을 뽑아내더니 그것을 자신의 목에 갖다대었다.
이에 놀란 중년기사가 말리려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자작님!”
“바포 백작각하, 만세!”
스각-
푸슈슉.
“커헉…….”
몸을 돌린 채로 자신의 아들을 보며 목을 그어버린 직스 자작은 멍한 시선으로 피를 뿜어내는 자신의 아비를 바라보는 아들과 마지막 눈빛교환을 하더니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털썩-.
“자작님….”
중년기사는 바닥에 쓰러진 채로 움찔움찔,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직스 자작을 보면서도 아무 말도 못한 채로 그를 말리려던 손을 회수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 아버지…?”
흔들흔들.
바닥을 적시는 피가 자신의 무릎에 묻었으나 자작의 아들은 싸늘하게 식어가는 그의 육체만 흔들며 다른 반응은 보이질 않고 있었다.
“무례한 것! 죄를 빌지 못할까!”
그의 태도에 제노스가 호통을 쳤으나 자작의 아들은 듣질 못했는지 탁해진 눈으로 자작의 몸을 흔들기만 할 뿐이었다.
살집이 둔턱한 얼굴이었으나 충격을 받았단 것은 여실히 드러나는 자작의 아들.
불릿은 그런 자작의 아들을 보더니 시체를 피해 이동하며 명령하였다.
“직스 자작의 유언에 따라 그의 작위는 유지한다. 그러나 물려받을 후계자가 어린 관계로 그가 성년이 될 때까지 게슐린 그랩 자작이 대신 영지를 관리하도록 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자작의 아들, 이제는 직스 자작이 된 어린 영주는 자기대신 서른 줄의 게슐린 그랩 자작에게 섭정을 맡기게 되었다.
자신의 탐욕과 잘못으로 한순간에 아버지를 잃고 영지까지 몇 년간 다스리지 못하게 되자 망연자실함을 감추지 못하는 직스 자작.
불릿은 집무실을 벗어나기 전 바닥에 엎어져 얼굴도 보이지 않는 전대 직스 자작을 보며 작게 소곤거렸다.
“그동안 고마웠네, 직스 자작.”
주군에겐 충실했으나 자식농사는 망친, 불행한 아비인 직스 자작의 마지막이었다.
* * *
“이곳입니다.”
그가 상념에 빠졌던 사이, 어느새 그들은 수습기사들이 안내한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은 칠이 벗겨지고 있는 저택이었는데, 관리하는 자가 없는지 정원도 엉망인 게 영지만큼이나 황량해보였다.
“뭐야, 꽃이 다 시들었잖아.”
그 와중에 올리비아가 한소리를 하자 수습기사들은 차마 말은 못했으나 인상을 찌푸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깟 꽃이 뭐 중요하다고….”
한 수습기사가 중얼거리자 그것을 들었는지 올리비아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저따위로 생각하니까 꽃다운 여자를 만나보지도 못하는 거겠지.”
“…….”
내심 울컥하는 수습기사들이었으나 아무도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왜냐? 사실이기 때문에.
불릿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그저 얼굴의 구겨짐이 한층 심해진 수습기사들의 안내를 따라 저택으로 들어설 뿐이었다.
힐끔.
수습기사들은 안내를 하면서도 올리비아를 쳐다보았는데, 어쩐지 불릿과 올리비아를 계속해서 번갈아보는 것에서 영 찝찝함을 느낀 불릿이었다.
“왜들 그러는가? 본인과 올리비아에게 뭐라도 묻은 겐가?”
그러자 화들짝 놀란 수습기사들이 눈을 돌리며 저마다 변명을 했다.
“아, 아닙니다.”
“그냥 잘 따라오나 해서….”
“이쪽으로 오시지요, 이쪽으로.
“흐음?”
이러한 와중에 뒤에서 관심을 못 받으며 따라오던 흙덩이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 바보들.
그들의 안내에 따라 불릿은 낡은 문을 열고서 방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끼이익…
“기름칠 좀 하지.”
올리비아의 목소리에 불릿 또한 그것에 동의했다.
귀족에게 있어 저택이란 자신을 내보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였다.
그들이 왜 자기 몸에 치장하고 가꾸는 것에 열심히 인가? 그들에게 있어 그것이야말로 전투복장이었던 것이다.
누구를 상대하기 위한? 그야 당연히 자신들과 같은 귀족이나 부호들처럼 정계에 발을 디딘 자들이 아니겠는가?
저택을 보면 그 인물을 안다고, 이 저택의 주인이라 짐작되는 기사 또한 별 볼일 없는 인물일 가능성도 있었다.
“…사정이 있을 것이오.”
불릿이 아는 크레파토스는 비록 스쳐지나가듯 보았던 기억이 대부분이었으나 언제나 충직한 자세로 직스 자작을 보필하고, 불릿 자신에게 깍듯하게 대하던 가신들 중 하나였다.
그러한 인물이 망가졌으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던 것.
그래서 저택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내내 들었었다.
그들이 들어서자 방안에는 가구도 거의 없었는데, 그마저도 낡고 칠이 벗겨진 것이 바깥과 마찬가지로 손질이 잘 안 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자들을 데려왔습니다, 크레파토스님.”
수습기사들 중 대표자의 말에 머릿결과 수염이 새하얗게 돼버린 노기사, 크레파토스는 칼집을 지팡이삼고선 의자에 꼿꼿이 앉아있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비록 주름살도 늘고, 검버섯도 얼핏 보이는 노장인 크레파토스였으나 목소리만큼은 아직도 힘이 넘쳐남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음성에 수습기사는 쩔쩔매면서도 답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확인만 한다는 게 어쩌다보니….”
탁.
“어허, 못난 것. 내 그렇게 행동을 함에 신중을 기하라 했거늘, 아직도 그 버릇을 못 버렸는가!”
크레파토스의 호통에 수습기사들이 모두 무릎을 꿇으며 잘못을 빌기 시작했다.
“잘못했습니다, 크레파토스님!”
“용서해주십시오, 크레파토스님!”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그들의 잘못을 듣던 크레파토스는 허옇게 샌 수염을 쓰다듬으며 목을 가다듬었다.
“어흠, 거기 자네들에겐 미안하게 되었네. 내 수하들이 성급한 면이 있어 그런 것이니….”
“크레파토스, 자네는 아직도 정정하군.”
“…흠?”
불릿이 자신의 말을 끊어내자 크레파토스는 이상한 눈초리로 그를 보았는데, 마치 예전부터 자신을 아는 말투이자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알기론 자네들은 직스 자작님의 저택에 다녀온 것으로 아는데, 아니던가?”
“자작‘님’이라…, 자네는 아직도 그놈을 주군으로 여기는 것인가?”
“으음…, 그러는 자네는 누군고?”
오랜만에 보아서인지 크레파토스는 좀체 불릿을 알아보지 못했고, 더 이상 시간을 끌기 싫었던 불릿은 예의 그 귀족의 인장을 앞에 내보였다.
척.
“!! 그, 그것은!”
세월로 인해 눈꺼풀이 늘어졌던 크레파토스의 눈이 크게 뜨여지며 놀람을 감추지 않았는데, 그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칼집으로 그것을 가리켰다.
“그것을 어디서 구한 것인가!”
“과인이 부덕하여 영지가 이 꼴이 되었으니 원인제공자가 되돌려야하지 않겠는가?”
수습기사들과는 달리, 크레파토스는 이 영지와 인생을 같이 한 토박이였다.
그래서 인장을 보자마자 누구의 것인지를 알 수 있었고, 눈앞의 청년에게 그것을 물었는데 청년의 태도가 이상했다.
불릿의 태도에 크레파토스는 어렴풋이 누군가의 모습과 겹쳐 보이는 것을 느꼈다.
‘마치 각하를 보는 듯하구나…. 그러고 보니 그분과 매우 닮았군.’
크레파토스는 불릿의 젊을 적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가신들 중 하나, 그러나 그간 지난 세월이 얼마인데 저렇듯 젊은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혹, 내가 모르는 사생아가 있던 것인가?’
이제 40에 접어들었어도 혼인하지 않은 불릿과 닮은 청년이 있다면 그것은 사생아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크레파토스는 이내 고개를 작게 흔들며 스스로 부정했다.
‘그분이 그럴 리가 없다. 언제나 공명정대하던 분이 사생아 따위를 두실 리가 없지.’
그렇게 생각하자 눈앞의 저 청년이 매우 수상쩍어 보이기 시작했다.
크레파토스는 생각을 함과 동시에 불렛에게서 인장을 빼앗기 위해 늙은 노구를 날렸다.
쉬익!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구도팔문입니다.
본래 오늘 저녁 6시와 밤 12시, 2연재가 이루어질 예정이었사오나 추천과 선작이 300을 넘은 기념으로 지금 올리는 것을 포함, 3연재가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금, 토, 일 이렇게 3일간 하루 3연재가 이루어질 것이오니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