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8 인장의 주인 =========================================================================
불릿이 품에서 꺼낸 것, 그것은 이곳까지 오면서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귀족의 인장이었다.
흔히 귀족의 인장은 반지의 형태로 만드는데, 그 또한 틀린 것은 아니었다.
반지만큼 소지하기 쉬운 형태도 없었으며 미적감각을 해치지 않는 모양도 없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반지를 잃어버릴 때도 있었으니, 그래서 귀족들은 항상 자신을 증명할 인장을 2가지로 구분하여 소유하고 다녔다.
하나는 모두가 잘 아는 반지형태, 또 하나는 지금 불릿이 들고 있는 것처럼 펜던트의 형태였던 것이다.
“어찌 한낱 용병이 귀족의 인장을…!!”
모두가 놀라서 얼어붙은 사이, 누군가가 더듬거리면서도 간신히 말을 꺼내고 있었다.
모든 귀족은 자신의 인장을 남의 손에 함부로 맡기지 않는다.
세간에 알려지기론 중요한 문서의 경우 귀족의 인장에 새겨진 문양을 녹인 촛농에 찍어 봉인하거나 문서를 반으로 접어 자신이 확인했다는 표시를 하는데, 악용될 소지가 높아 그 누구의 손에도 맡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불릿이 내민 인장엔 바포 변경백을 다스리는 대영주, 불릿 폰 바포 백작의 인장이 찍혀있었으니 거기에 소속된 이들로서는 놀라자빠질 일이었다.
“자, 잠시 그것을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포박당한 채로 무릎을 꿇린 상태에서도 수습기사들은 귀족의 인장을 확인하고자 부탁을 했다.
불릿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해주었다.
“의심 가는 것도 당연한 바, 허락하노라.”
그러면서 불릿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올리비아 대신에 흙덩이에게로 명령을 내렸다.
“흙덩이여, 저들의 포박을 풀어주시게.”
- 운이 좋은 사람들이네.
흙덩이는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려오더니 땅의 정령 특유의 괴력으로 우악스레 끊어버렸다.
투두둑-
투둑!
건장한 체격의 청년들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미소녀의 모습을 한 흙덩이가 해내자 수습기사들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기에 그들 중 대표로 보이는 이가 불릿에게서 펜던트를 받아들었다.
“그럼, 확인을….”
수습기사의 말에 불릿이 고개를 끄덕이자 수습기사는 펜던트에 마나를 불어 넣기 시작했다.
달칵…
마나가 불어넣어지자 펜던트는 잠시 진동을 일으키더니 윗부분의 뚜껑이 열리며 빛이 퍼져 나왔다.
파아아앗-
펜던트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은 바포 가문의 문양을 그려내었다.
저기 멀리 꽂혀있는 훼손된 백작기와 같은 문양이었으나 이것만으론 불릿이 펜던트의 원주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수습기사는 애매한 표정으로 우물쭈물했다.
“인장은 진품이긴 한데, 잠시 저희끼리 대화 좀 나누겠습니다.”
그래도 인장이 진품인 것을 확인한 뒤론 수습기사들은 한층 예의를 갖추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것은 인장을 가진 자는 인정을 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남에게 쉬이 맡기지 않는 만큼, 그 귀족의 인장을 소지한 자는 반대로 말하면 해당 귀족의 신임을 받거나 임무를 맡고 있다는 뜻.
함부로 대했다간 나중에 어떤 치도곤을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물며 이 인장의 주인이 누구인가? 바로 바포 변경백의 주인인 불릿 폰 바포 백작의 인장이 아니냐 이 말이다.
신중을 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에 펜던트를 돌려받은 불릿도 그것을 거절하지 않았다.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군.”
“죄송합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반신반의하는 와중에도 예의를 놓지 않는 모습이, 그들이 얼마나 바포 백작을 존경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수습기사들은 저희들끼리 속닥이며 긴급회의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인장은 진품이었어. 진짜 대영주님이신가?”
“그렇게 보기엔 너무 젊어 보이는데?”
“대영주님의 연세가 올해로 40이신데, 차이가 심하다.”
수습기사다운 미숙함이랄까, 그들은 아직도 자신들의 대화가 불릿의 귀로 들어가고 있음을 모르는 듯했다.
자신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자신들의 옆에서 멀뚱히 대화를 엿듣고 있는 흙덩이에 대해선 완전히 무방비한 자세를 보였다.
이는 그들을 제압할 때 흙덩이가 활약한 바가 없어서이기도 하고, 놀랄 만큼의 괴력을 보였으나 자신들을 풀어준 인물이 아름다운 소녀이기 때문에 경계심이 누그러져서이기도 했다.
‘의심도 많은 자들이로고.’
그래도 얼핏 들리는 대화 중에서 자신에 대한 안 좋은 소리가 없는 것을 보니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이런 엉망진창인 영지에서도 아직까지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는 기사들이 있다는 점에서 불릿은 수습기사들에게 높은 점수를 매겨주었다.
‘좋은 방법이었다곤 말할 수 없지만.’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천박한 짓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그저 의심만 받은 상황이 아닌가?
마땅한 증거도 없이 이렇게 방안을 흙발로 짓밟는 행위는 약탈자나 다름없던 것이다.
수습기사들이 밀담을 나누는 사이, 정신을 차린 올리비아가 불릿에게 다가왔다.
“너, 너도 귀족이었던 거야?”
‘…‘너도’라니, 이렇게 무방비할 수가 있는가. 허허허….’
줄곧 봐왔지만 올리비아는 어딘가 살짝 어설픈 구석이 있었다.
노련한 용병인가 싶다가도 간간히 이렇듯 허술한 면을 보였는데, 남들에게는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것을 보니 자신과 가까운 자들에게만 실수가 드러내나보다.
“이미 예상하지 않았소?”
“그렇기야 하지만….”
불릿의 말에 놀랐던 올리비아는 점차 안정을 되찾아갔다.
확실히 불릿은 이상한 면이 많은 인물이었다. 용병이면서 용병들의 세계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었고, 자신처럼 귀족의 예법을 지키는 것을 보기도 했었다.
아니, 오히려 올리비아보다 더욱 기품 있고 예법에 대해 빠삭해 보였었다.
‘어쩐지 말투가 이상하더라니….’
그러면서 되뇌는 생각은 불릿의 나이에 걸맞지 않은 이상한 어조였다.
…말투는 별로 상관없었지만 말이다.
어쩐지 납득하는 올리비아의 모습에 불릿은 고개를 돌려 수습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도 밀담이 끝나가는지 서로의 얼굴 쳐다보며 머리를 끄덕이더니 이내 대표로 보이는 놈이 다가왔다.
터벅, 터벅.
“중대한 사항이기에 저희들로는 감당할 수 없다 판단하여 인장을 지닌 자의 권한에 따라 크레파토스님에게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수습기사들의 말에 이번엔 잠자코 있던 올리비아가 나섰다.
“뭘 믿고 우릴 안내하는 건데?”
그녀의 말대로 수습기사들은 크레파토스를 암살하려는 의심 때문에 불릿 일행을 습격한 것이다.
그래놓고는 이제 와서 안내해주겠다고 하니 도통 믿기 어려운 올리비아였다.
“볼레트, 이건 함정일 수도 있어. 따라가선 안 돼.”
용병으로서 경험을 닦아온 올리비아가 경고를 보내자 불릿은 그녀의 눈을 직시하며 또박또박 말을 했다.
“올리비아. 이제 내가 누구인지 알려줄 때가 온 것 같소.”
“……뭐?”
경고를 보내는 올리비아에게 불릿이 뜬금없는 소릴 하자 의문을 보내는 그녀.
그러나 불릿은 한층 진중해진 어조로 말을 끝내지 않았다.
“그동안 나를 믿고 따라와 주어 고맙소. 여기까지 온 이상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것 같구려.”
말을 하면서도 눈동자가 위로 향한 것이,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해 보이는 불릿.
그는 이제 늙어버린 노기사, 크레파토스를 떠올리며 자작령을 수호하던 듬직한 인물을 떠올리며 지난날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 * *
대영주에게 있어 영토를 잘 다스린다는 의미는 영지민들과 소통을 이룬다거나 그들의 삶에 해박하다는 뜻이 아니었다.
바로 영지민들, 자신을 대신해 각 지역의 주민들을 다스리는 대리자인 영주들이 부패하지 않도록 휘어잡는 것이야말로 대영주의 역할이었다.
그 넓은 영토를 언제 하나하나 확인하며 일일 명령을 내리겠는가?
마을에서 올라오는 탄원서만 읽다가도 하루해가 저버릴 텐데 말이다.
물론 그들의 삶에 무지한 것은 아니었기에 기본적인 지식은 있었으나 모든 지역을 돌아다니며 확인하기엔 불릿의 몸이 열 개라도 부족했다.
그날도 불릿은 1년에 한번, 각각의 영지를 순회하는 여행길에 올랐었다.
이렇게라도 직접 행차하지 않으면 그들이 어떤 폭정을 일삼을지 알고 있는 불릿이었기에 없는 시간을 쪼개서도 8곳이나 되는 영지를 며칠씩 묵으며 확인했던 것이다.
“오랜만에 찾아왔군.”
마차에서 내린 불릿은 직스 자작령에 내려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간 바쁜 일과로 인해 작년에는 상대적으로 멀리 있는 직스 자작령을 둘러보지 못했었다. 그래서 불릿은 올해 순회절차도 바꾸어 다른 곳을 다 제치고 이곳에 먼저 도착한 것이다.
“으음.”
저 멀리 대륙 끝에서는 흑마법사가 준동하여 난리를 피우고 있다지만, 아직까진 루드밀라 왕국은 평화로운 편이었다.
부모가 세상을 타계하고, 그로인해 대영주로 올라선 불릿이 행정절차를 자신에 맞게 바꾸기 바빴기에 바포 변경백은 약간 혼란스러운 면도 없잖아 있었다.
그래도 다른 영지들처럼 이익을 위해 백성들을 쥐어짜는 악행은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와본 직스 자작령의 상태가 이상해보이자 눈을 가늘게 뜬 불릿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영지의 꼴이 왜 이 모양이지?”
그의 말대로 직스 자작령은 어딘가 어수선해 보였는데, 오고가는 사람들의 표정에 근심이 어려있었으며 한숨을 내쉬는 이들도 종종 보이고 있었다.
불릿이 분노한 기색을 보이자 그를 보좌하던 어린 마법사가 급히 다가왔다.
소년처럼 보이는 마법사는 마치 군인처럼 딱딱히 허리를 숙이며 절도 있게 말하기 시작했다.
“예, 각하! 이에 대한 정보는 미리 문서화하여 보고서를 작성해놨습니다!”
“…제노스, 자네는 나이대에 맞는 말투도 괜찮은데 말이지.”
“아닙니다, 각하! 그 누가 감히 각하께 불경을 저지르겠습니까!”
“……관두도록하지. 이리 줘보게.”
“예, 각하!!”
불릿을 호위하는 기사들과 다르게 제노스만이 마법사였는데, 이 희귀한 직업군은 마탑출신을 제외하고선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래서 귀족들 중에 마법사나 정령사인 이가 있다면 구애신청이 끊이질 않았던 것이다.
‘은혜를 갚는 것도 좋지만 청춘을 저리 소비해서야…, 쯧쯧.’
제노스는 불릿의 눈에 우연히 띄어 그의 자비로 재능을 개화할 수 있었는데, 운이 좋았는지 제노스는 마법에 특출한 면이 있어 불릿이 많은 돈을 지불하면서도 그에게 교육을 시켜주었다.
그리고 불릿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은혜를 하사한 것인지 머리가 뛰어난 제노스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골백번 죽어서라도 은혜를 갚겠다며 벌써부터 날뛰고 있었다.
물론, 지금처럼 필요한 일을 시키지 않았음에도 준비하는 일은 장한 일이었으나 때론 어린 소년의 기이한 열기에 부담이 되기도 했던 것은 사실.
여러모로 제노스는 불릿의 고민거리 중 하나였다.
팔락-.
문서를 받아든 불릿은 찬찬히 훑어보는 와중에 갈수록 눈빛이 스산해졌다.
“어째서 직스 자작의 재산이 불어나는 반면, 영주민들의 가계에 부채가 생기는 것인가?”
영주는 고유의 권한으로 영지의 행정절차에 손을 댈 수 있었다.
이는 대영주 불릿 폰 바포 백작의 제안으로 시행한 것인데, 자신이 다스리는 영지라지만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운영하는 것은 영주 개인의 개성을 무너뜨린다 판단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영주 각자의 개성이 있는데 자신에게 어울리지도 않는 방식으로 운영하다간 되려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하여 실시한 방식인데, 지금 이 꼴을 보아하니 직스 자작은 그것을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용도로 사용한 모양이었다.
“그것에 대하여 알려드리겠습니다, 각하!”
제노스는 자신도 따로 들고 있는 보고서를 보며 우렁차게 발표하기 시작했다.
“직스 자작은 지난 3월 4일, 발퐁스라는 농민을 상대로 고리임대를 시작하여 점차 농민들에게 범위를 넓혀가더니, 근래엔 상점주인들에게까지 손을 뻗치고 있습니다!”
한차례 목을 가다듬던 제노스, 그는 강조하는 말로 보고서에 적힌 글자를 또박또박 읽어나갔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것은, 대금을 갚지 못한 주민들 중에서 16에서 18세의 처녀들을 뽑아 영지에서 추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추방을 한다라….”
불릿이 제정한 법률 중에 영지에 큰 해악을 끼치는 중범죄자들을 다른 영지로 추방시키는 법이 있었다.
다만, 다른 군주의 영지가 아닌 불릿이 다스리는 영지 중에서 한 곳을 골라 보내지는데, 그곳에서 노동을 통한 빚의 삭감이나 죄에 따른 노동을 하는 것이다.
이는 영지의 발전을 저해하는 인물이더라도 후일 빚을 갚거나 죄를 뉘우친 다음 일상으로 돌아가더라도 이웃에게 손가락질을 받지 않도록 배려한 불릿의 친절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들은 불릿은 스산하게 빛나는 눈으로 낮게, 그러나 주변의 인물 모두가 들을 정도의 목소리로 읊조렸다.
“당장 영주의 저택으로 안내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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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반가웠던 독자 여러분, 안녕히 주무세요.
내일 이 시각, 저녁 6시와 밤 12시에 만나길 고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