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7 직스 자작령 =========================================================================
불릿과 올리비아는 여관을 찾아 방을 빌린 뒤에야 대화를 틀수 있었다.
덜컥.
불릿은 확실히 문이 잠겼는지를 확인하고서 도도하게 앉아있는 올리비아에게로 향했다.
뚜벅뚜벅.
풀썩.
싸구려 여관이라서 그런지 다른 가구를 찾아볼 수가 없었기에 불릿과 올리비아는 침대에 앉아야만 했다.
그들은 고개를 돌린 채 마주보고선 대화를 시작했다.
“올리비아, 나는 크레파토스라는 기사를 암살할 생각이 없소.”
“뭐?”
예상외의 발언. 그렇다면 대체 왜 의뢰를 받아들였단 말인가?
이에 대한 궁금증을 불릿이 곧장 풀어주었다.
“아무렴, 내 고향이 망가지는 꼴을 두고만 볼 거라 생각했소? 그저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기 위해 그런 술수를 벌인 것이오.”
“거절해도 됐었잖아?”
그녀의 말대로 의뢰를 받아들이지 않고도 영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누가 뭐래도 그들은 용병, 게다가 텔레포트에 대한 허락도 받은 상황이니 발길을 막을 수단이 없었다.
적어도 그녀가 생각하기엔.
“집사는 우리의 의향도 묻지 않고서 얘기부터 풀어놓았소. 만약 우리가 거절했다면 순순히 풀어주리라 생각했소?”
“…아니. 강제로 떠맡기거나 입막음으로 죽였겠지.”
“맞소. 그래서 일단은 받아들인 것이오.”
그제야 올리비아는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 처했었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올리비아가 화를 내는 순간, 집사는 누군가를 불러낼 자세를 취했었는데, 만약 그들이 접객실로 들이닥쳤다면 불릿과 올리비아는 무사할 수 있었을까?
흙덩이가 있기에 불릿은 탈출할 수 있더라도 올리비아까지 챙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대단하다고 하지만 흙덩이는 하급 정령, 단시간에 여러 기술을 펼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올리바아가 파트너로서 동행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렇게 무덤덤했었구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불같이 화를 내던 건 언제고 순순히 사과하는 올리비아에게 불릿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내가 사전에 일러줬어야 했던 것인데 저택까지 향하는 와중에 미처 일러주지 못했던 점, 사과드리오.”
“어휴, 그냥 받아들이면 좀 좋아? 너는 전에도 말했지만 다 좋은데 너무 애늙은이 같아서 탈이야.”
“아무튼 간에. 이로써 시간을 벌었으니 얼마간은 놈들도 우릴 건드리지 않을 것 같소.”
그 후 불릿은 잠시 말을 않더니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입을 열었다가도 다시 닫고, 열었다 싶으면 다시 닫아버리자 참지 못한 올리비아가 버럭 소릴 쳤다.
“아, 또 뭐길래 그래! 이번에도 나하고 관계된 얘기라서 말하는 게 꺼려지는 거야?”
불릿은 말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그동안 불릿도 우물쭈물 할 때가 있었으니, 그 경우가 바로 올리비아에게 말하기 곤란한 주제일 때였다.
올리비아 또한 영특한 여인, 살아온 세월이 불릿과 비교할 순 없었으나 몇 번이고 봐오면 그가 왜 그러는지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으, 으음.”
그녀의 다그치는 소리에도 불릿은 주저하는 기색을 보였으나 이내 결심을 굳혔는지 천천히 입을 떼었다.
“올리비아, 여러 번 말하는 것도 당신의 자존심을 긁어내는 행위지만 묻지 않을 수가 없소. 정말 나와 함께할 것이오?”
불릿도 영지가 이정도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파르탄 영지와 비교되는, 아니. 그보다 더 못한 실정의 자작령이라니?
불릿의 비호를 받는 직스 자작령이 이런 폐기처분 직전의 상태가 되었다는 것은 영주들이 어떤 방탕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야, 너 자꾸 그럴래? 그럼 내가 여기까지 와서 ‘앗, 너무 위험하네? 돌아가야겠다’… 이럴 줄 알았어?”
그러면서 다리를 교차시키던 올리비아는 올라간 다리를 까닥이며 불만을 토해냈다.
“볼레트 너한테 정말 실망이다. 우린 동료고, 파트너야. 날 좀 믿어봐라.”
“…….”
- 불릿한테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흙덩이는 기껏 불릿이 올리비아를 생각해 해준 말에 핀잔을 주자 그녀를 주시했는데, 최근에 인간과 흡사해진 흙덩이었지만 여전히 표정의 변화가 적어 얼핏 보아선 알기 힘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올리비아의 불릿에 대한 불평은 끝이질 않았다.
“네가 나를 생각해주는 건 잘 알겠는데, 세상 어디에 용병이 위험할지도 모르겠다고 해서 동료를 냅두고서 몸을 내빼? 그거야말로 쓰레기지.”
“미안하오.”
“아, 쫌! 사과하지 마라. 너는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는 게 아주 입버릇처럼 붙었어. 쳇.”
“…고맙소.”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대신에 고맙다는 인사말을 보내는 불릿.
이에 올리비아도 드디어 씨익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래! 그렇게 말하면 얼마나 좋아? 우리사이에 미안하다는 말은 장난칠 때면 충분하다고. 알았어?”
“알겠소.”
“아니, 그렇다고 일일이 대답할 필요는 없고….”
올리비아가 팔과 손으로 제스쳐를 취하며 이야기하자 불릿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한다.
그들의 대화가 좀체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흙덩이도 침대의 머리맡에 앉았다.
폭신-.
성장했으나 아직은 짧은 다리를 휘저으며 놀고 있자니, 밑에서 누군가 올라오는 기척을 느낀 흙덩이.
- 불릿, 누가 올라와.
흙덩이의 말에 불릿이 멈칫, 동작을 멈추고서 단검을 꺼냈다.
스릉-
“엇, 갑자기 왜 칼을 꺼내들고 난리야?”
대화 도중에 다짜고짜 칼을 끄집어내는 불릿에게 깜짝 놀란 올리비아가 소리치자 그는 손으로 올리비아의 입을 막으며 자신의 입에 검지를 갖다 댔다.
“쉿, 밑에서 누군가 접근하고 있다하오.”
“푸하, 강도인가?”
지금 이 시점에 여관을 이용할 자는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황폐화된 영지에 어느 여행자가 들를 것이며 거래할 물품도 없는데 상인이 오겠는가?
물론 올 수도 있었지만 시기가 공교로웠기에 올리비아는 강도를 먼저 떠올렸다.
어지러운 시국이다 보니 이렇게 황폐한 영지에는 강도들도 곧장 들어오곤 했던 것이다.
- 이쪽으로 오는데?
“흙덩이여, 나서지 말게나.”
- 응? 왜?
“자네가 나서면 사람이 죽는다네.”
아무리 힘을 낮춰도 흙덩이의 기술은 기본적으로 쏘아보내는 것이다.
게다가 실내에서 사용하기엔 부적절한 면도 있었다. 흙이나 광물 등을 이용하는 땅의 정령 특성상 내부를 파괴할 가능성이 농후했던 것이다.
올리비아에게 발판용도로 손바닥을 쏘아 보냈을 때는 거리가 멀어서 위력이 약해진 것이지, 손바닥이라 하여 무시할 수 있던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올리비아라는 뛰어난 실력의 검사가 있지 않은가?
“올리비아, 부탁하겠소.”
“어, 심문하려는 거지? 믿고 맡겨달라고!”
올리비아는 짐짓 알통을 지어보였으나 희고 고운 피부만 보일뿐 우락부락한 근육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불릿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도 준비하기 시작했다.
다다다…
복도에서 뜀박질하는 소리가 가까워지자 흙덩이가 외쳤다.
- 왔다.
쾅!
“움직이지 마라, 용병!”
“무릎 꿇려!”
여관에 들이닥친 무뢰배들을 불릿은 마주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올리비아!”
“알았다고! 히얏!”
불릿의 신호에 올리비아가 고음을 내며 바닥을 박차자 번개처럼 쏘아져 놈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크악!”
“어, 어어!”
“저년부터 잡아!”
혼란스러운 와중, 올리비아가 활약하는 사이 불릿은 넘어진 자들의 상의를 단검으로 잘라내어 두 팔을 허리 뒤로 넘겨서 포박하고 있었다.
쿠당탕!
“아아악!”
“끅! 아파, 아프다고! 살살 묶어!”
제압당한 주제에 묶인 손이 아프다고 하자 불릿은 더욱 꽁꽁 묶으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아프라고 하는 것이네만.”
질끈!!
* * *
“으으으….”
“아야야, 좀만 옆으로 가라.”
“여기서 어디로 가라고?”
“쉿, 눈 마주쳤다.”
팔이 묶인 채로 무릎 꿇린 불한당들이 속닥거리자 올리비아가 버럭 소릴 쳤다.
“이것들이, 입 안 다물어?!”
그러면서 어깨에 걸쳐두었던 검을 슬쩍 움직이자 검신에서 빛이 번쩍였다.
반짝.
“헙.”
“예, 옛.
올리비아는 놈들이 비로소 조용히 하자 검을 칼집에 넣으며 손을 탁탁 털었다.
“짜식들이, 까불고 있어.”
그러면서 불릿의 어깨를 두드리며 뒤로 물러선다.
“바톤 터치, 나머지는 볼레트가 원하는 대로 해.”
“고맙소.”
고개를 끄덕여준 불릿이 앞에 나서서 불한당들을 쓸어보기 시작했다.
스으윽…
“윽.”
“제길….”
놈들은 불릿과 시선을 마주치고 싶지 않은지 저마다 고개를 돌렸는데, 그 중에서도 한 놈은 끝까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불릿이 그를 계속해서 주시하자 눈을 마주치던 놈이 대뜸 버럭 소리친다.
“네 이놈! 당장 이 포박을 풀지 못할까!”
너무도 당당한 모습에 불릿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본인이 왜 그래야하지?”
“네놈이 직스 자작에게 청부를 받았단 정보를 입수했다! 이 개 같은 자식, 감히 크레파토스님을 암살하려들어?!”
“옳소! 이 개만도 못한 녀석!”
“퉤, 이미 버린 목숨, 죽여라!”
그에 동조했는지 나머지 놈들도 버럭버럭 소리를 치는데, 이 광경을 지켜보던 올리비아가 검을 뽑더니 차갑게 말했다.
“이걸로 네놈들 아랫도리만 죽여서 후손을 못 보게 해주리?”
“…….”
“……….”
이 한마디에 놈들은 모조리 침묵하게 되었고, 불릿 또한 할 말을 잃었다.
이때만큼은 불릿이나 불한당들이나 모두 한마음이 되었기 때문.
‘과년한 처자가 못하는 말이 없군.’
그러나 그 말이 효과가 있던 것인지 놈들도 말이 없었기에 불릿은 평소처럼 말을 교정해주지 않았다.
“그 기사는 어디에 있는가?”
“밝힐 수 없다! 이 교활한 악당!”
언제부터 불릿이 악당으로 변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는 흐뭇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직 영지가 회생할 가능성은 남아있는 것인가.’
영지를 잘 다스리라는 자신의 명에 충실한 크레파토스와 그의 수하들.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의리를 지키는 그들의 모습은 바닥까지 닿았던 불릿의 기분을 고양시켜 주었다.
“그래, 자네들은 크레파토스의 수련기사들인가 보군.”
“헙, 그것을 어떻게?!”
“이 간악한 놈! 우릴 기다리고 있었구나!”
“직스 자작은 정녕 크레파토스님을 죽이려는 것인가….”
불릿의 말에 불한당, 아니 수련기사들은 또 다시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비록 이들의 무력이 강하거나 지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으나 충성심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기에 불릿은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 좋아. 마음에 드는 자들이로군.”
“…볼레트? 대체 무슨 생각이야?”
올리비아는 손을 허리춤에 가져간 상태로 수련기사들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불릿의 말대로 심하게 제압하지 않았기에 일어서려고만 한다면 도주할 수도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 올리비아의 신경은 언제라도 칼을 뽑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유지한 상태에서 불릿에게 물었었다.
“올리비아여, 현 정세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이렇듯 충성스런 기사가 존재한다네. 그러니 내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볼레트?”
어쩐지 평소보다 어조가 더 무겁고 기품이 서린 것 같았다.
억지스런 가벼움도 보이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에게서 흐르는 기운은 그녀의 기억 속 추억을 건드리고 있었다.
‘……아빠?’
자연히 아버지를 떠올릴 정도로 불릿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놀라울 정도였는데, 그렇다고 정령력을 이용한 것도 아니었으니 그저 신기할 따름.
불릿은 흐뭇하게 웃던 표정을 지우고선 다시금 엄한 얼굴이 되었다.
“자네들의 이런 행동이 모시는 자에게 해를 끼친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쩌렁쩌렁 울리는 불릿의 호통에 수련기사들은 고개를 움츠렸다.
움찔.
“으, 윽…. 그, 그게 어쨌단 것이냐!”
“간악한 술수에 말려들지 마라!”
그들의 대꾸를 불릿은 다른 말로 잡아먹어 버렸다.
“앞뒤 구분도 하지 아니하고서 사람을 습격하는 것이 기사도란 말인가!!”
불릿의 말에 이번엔 그들도 마땅히 떠오르는 단어가 없었다.
요즘 세상에 누가 기사도를 지킨단 말인가? 개소리나 다름없는 불릿의 말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 그들은 누군가를 떠올리게 되었다.
“이건 그분이랑 비슷한….”
“아니, 설마….”
“그래도 좀…….”
그들이 속닥거리자 불릿은 팔을 받치며 턱을 쓰다듬더니 이내 품을 뒤지기 시작했다.
최후의 결전 이후 홀로 숲속에 떨어진 불릿에게 남은 물건, 잊고 있었던 물품을 그는 주머니에서 천천히 꺼내들어 그들의 앞에 내세웠다.
“저, 저것은!”
“허어억!!”
“정녕 진짜란 말인가!”
불릿이 그들의 앞에 내세운 물건에 수련기사들은 너나할 것 없이 숨이 턱 막힐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는데,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올리비아조차 놀라서 벙 찐 표정을 지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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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 12시에 이어서 올라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