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정령사-66화 (66/241)

00066  직스 자작령  =========================================================================

불릿과 올리비아는 기사의 뒤를 따라갔다.

터벅, 터벅.

뚜벅뚜벅.

“으어어….”

“머, 먹을 것 좀…….”

거리의 구석구석엔 그동안 보질 못했던 자들이 보였는데, 하나같이 병들고 배고픔에 굶주린 사람들이었다.

행색도 꾀죄죄하고 씻지 못한지도 오래됐는지 멀리 있음에도 악취가 풍겼다.

그리고 이 광경을 보게 된 일행의 얼굴은 자연히 찌푸려지게 되었다.

“볼레트, 여기가 정말 고향이 맞긴 한 거야?”

“안타깝지만, 그런 것 같소.”

“내가 너를 위해서 그동안 말을 아끼긴 했는데, 여기는 좀 심각한 것 같다.”

“…….”

으득…

불릿은 올리비아의 말을 듣고선 아무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불릿은 대영주다. 그것도 란푸스 왕국으로부터 국경을 지켜내는 변경백의 군주.

적국으로부터, 그리고 주변의 승냥이와 다름없는 군주들로부터 영지를 지켜냈거늘 한낱 머저리 같은 귀족 때문에 그걸 망쳐버렸다.

지금 이렇게 고통받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자 불릿은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인양 괴로워했다.

‘과인이 부덕하여 생겨난 일이로다!’

그러나 이런 사태를 만들어낸 직스 자작의 잘못이 제일 컸으니, 철저히 조사한 후 합당한 응징을 가할 생각을 하는 불릿.

‘감히 영지를 망가뜨려?’

감정이 새어나온 탓일까, 불릿의 걸음걸이를 바꿔 성큼성큼 앞서나가면서도 주변의 백성들을 둘러보았다.

고통에 시름하는 백성들, 그러나 지금 이들만 구해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사건의 원흉인 직스 자작을 추궁한 후에 조치를 취해야 탈이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나라는 것을 알릴 방법이 없구나.’

젊어진 육체. 누가 그를 변경백의 대영주 불릿 폰 바포 백작으로 볼 것인가?

이곳에서 정보를 습득한 후 중앙영지로 돌아가야지만 자신임을 증명할 수 있는 가신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불릿은 기사를 따라 나아가자 점차 거리의 모습이 바뀌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는 깨끗하네?”

“정비도 잘되어 있고, 특히 저곳은 관리를 하고 있다고 밖에 볼 수가 없겠소.”

그들의 시야에 띈 것은 어느 저택이었는데, 유난히 다른 곳들보다 깨끗하고 정리가 잘된 것이 우중충한 영지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곳의 대문에 도달하자 기사가 뒤를 돌며 둘에게 알려주었다.

“이곳에 들어가면 집사가 있을 것인데, 자세한 얘기는 그에게 들으시오.”

“당신은 동행하지 않소?”

불릿의 물음에 기사는 힐긋 시선을 내려 아래에 위치한 흙덩이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내 역할은 여기까지오. 내가 있다 한들 정령사인 당신을 어찌할 수도 없으니 있어서 무엇하오?”

그렇게 기사는 마땅한 인사도 하지 않고서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남겨진 일행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불릿이 먼저 저택으로 들어서자 뒤따라 올리비아와 흙덩이도 들어갔다.

저택에 들어서자 정문에서 불릿은 익숙한 얼굴을 대면할 수 있었다.

‘이자는…….’

불릿이 기억하기로 허리를 숙이고 있는 이자는 직스 자작의 집사로, 더러운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작자였다.

귀족이라면 때때로 그런 일이 생기기도 했기에 불릿은 알면서도 내버려두었는데, 그것은 혹시나 일이 생기면 약점으로 틀어쥘 생각도 있었기 때문이다.

“안녕하십니까, 데빌로안의 영웅, 아이언가드님과 발키리님.”

“이것들 봐라? 볼레트, 우릴 알고 있는데?”

‘역시 사전에 조사를 한 모양이군.’

자신들을 알면서도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려 데려오라 명령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불릿이 집사를 바라보자 집사는 숙였던 허리를 곧추세우며 그들을 안내했다.

“따라오시지요.”

뚜벅, 뚜벅.

“…….”

집사의 안내를 받아 이동하면서 불릿은 생각했다. 분명 눈에 확 띌 수밖에 없는 흙덩이를 보고도 아무소리도 없었다.

게다가 자신들이 데빌로안에서 어떤 활약을 했는지 파악했음에도 겨우 기사 한명으로 겁박하려 했으니, 어떤 의도인지를 파악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들은 집사의 안내를 통해 고급스런 방으로 안내되었는데, 접객실로 이용되는 것인지 다과와 함께 찻잔이 놓여 있었다.

“이곳입니다. 일단 차나 한잔씩 드실런지요?”

“뭐하는 짓이지? 누가 오기라도 하나?”

이에 집사는 고개를 저으며 응답했다.

“제가 여러분을 맞이합니다. 자, 자리에 앉으시지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으나 불릿과 올리비아는 소파에 앉았고, 흙덩이는 주춤거리다 불릿과 올리비아의 가운데에 앉았다.

포옥-

“크흠, 흙덩이여, 중요한 얘기를 할 것이니 방해하면 아니 되네.”

- 나보단 올리비아가 방해하지 않을까?

흙덩이의 한층 능숙해진 언어구사력에 불릿은 고개를 끄덕이며 올리비아를 쳐다보았다.

때마침 집사가 따라준 차를 마시던 올리비아가 시선을 알아차렸다.

“뭘 그렇게 쳐다봐?”

“아니오. 그냥, 역시나라고 할까 해서….”

“응??”

올리비아는 불릿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했으나 그 자세 또한 기품이 있었으니, 올리비아는 자신이 찻잔을 드는 폼이 귀족의 예의범절에 속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나보다.

‘숨기려면 제대로 숨길 것이지, 모르는 척하는 것도 힘들군.’

잠시 스쳐지나가는 인연이면 모를까, 불릿과 항시 붙어있는 올리비아에게서 귀족의 향을 느끼지 못할 수가 없었다.

찻잔의 손잡이를 잡을 때 새끼손가락을 드는 행위는 옛날 옛적에 향식료가 부족하던 시절에 생겨난 풍습이었다.

찻잔에 맺히는 물기가 손에 달라붙으면 음식에 뿌려먹는 향식료를 조절하지 못하는데, 그것을 방지하려고 새끼손가락과 엄지손가락은 따로 떼어놓는 것이다.

평민들이 보기에 그 자세가 매우 우아해 보였는데, 한때 유행처럼 번지던 시기가 있었다.

‘무의식중에 배길 정도면 평소 차를 자주 먹었다는 소리겠지.’

지금에 와서는 향신료가 그렇게까지 귀한 것도 아니었기에 그러한 풍습을 지킬 필요는 없어졌다.

하지만 귀족의 품위를 익힐 때 필수적으로 배우니, 아직도 여러 귀족들이 이것을 지키고 있었다.

게다가 불릿 본인이 백작인데 모를 수가 있냔 말이다.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린 불릿은 눈동자를 정좌세로 앉아있는 집사에게로 돌렸다.

“이제 말을 해보시오. 우릴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가 무엇이오?”

그들이 제일 궁금한 점. 커다란 리스크를 안고서도 굳이 무력행사를 하면서까지 자기들을 저택으로 끌고 온 이유였다.

올리비아도 다과를 즐기면서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이, 아직 눈앞의 집사를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불릿과 올리비아를 훑어보던 집사가 이내 천천히 입을 떼기 시작했다.

“여러분에게 은밀한 의뢰를 하고 싶어서 이렇게 무례를 범하게 됐습니다.”

어쩐지 불편한 얼굴의 집사. 그는 자신이 말하면서도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느낌을 주었는데, 자신이 말하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나 한차례 호흡을 끊던 집사는 다시금 말을 이어갔다.

“사람을 한 명…, 처리해주셨으면 합니다.”

“암살?”

또 다시 암살의뢰가 이어지자 골치가 아픈지 아미를 짚는 불릿.

올리비아는 물론 흙덩이도 싫었던지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들의 표정을 본 집사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크레파토스라는 기사인데, 그가 반란의 조짐을 보인다하여 영주님께서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가 무슨 짓을 했길래 직스 자작이 그러한 명령을 내린 것이오?”

어딘가 영지를 가진 영주도 아니고, 작위도 없는 기사가 이런 상황에서 반란을 어떻게 일으켰을까?

불릿이 호기심을 드러내자 집사가 그 의문을 풀어주었다.

“대영주님께서 마족과 함께 전사하셨다는 소문이 파다한 상황에 크레파토스가 영주님의 허락도 받지 않고 주민들을 다독였기 때문입니다.”

“그게 어째서 잘못이란 말이오?”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에 의하면 크레파토스라는 기사는 불릿에게 충성을 다하던 기사였다.

비록 불릿의 직속수하는 아니었으나 그가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열과 성을 다했기에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있던 것.

영주도 방치하고 있는 영지를 크레파토스가 주민들을 다독인 것 또한 불릿에 대한 충성심에서 발로되었으리라 짐작되니, 그가 잘못한 점은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질 않았다.

“자신의 주군인 직스 자작이 하지 않은 일을 대신 해주고 있으니 오히려 상을 주어야함이 마땅하지 않소?”

그러면서 불릿이 집사에게 살짝 떠보기 식으로 물어보자 집사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해주었다.

“저라고 이런 명령이 좋겠습니까? 하지만 나라에 망조가 들어섰고, 마족도 죽었으니 더 이상 귀족들끼리 다툼을 벌이지 않을 이유조차 사라졌으니 난세가 도래했잖습니까.”

흑마법사와 마족이 죽었으니 더 이상 귀족들은 손을 잡고 동맹을 유지할 필요가 사라졌다.

공공의 적이 사라졌으니 이제 그들끼리 피튀기는 경쟁을 벌일 일만 남은 상황.

이런 때에 영주가 아닌 한낱 기사에게 민심이 쏠리면 가뜩이나 약화된 직스 자작의 힘은 사라질지도 몰랐다.

집사의 말에 따르면 어쩔 수 없다는 의미였는데, 직스 자작을 감싸는 말을 하면서도 푸념은 잊지 않았다.

“그렇다곤 해도 지금 영지의 꼴이 말이 아니게 됐습지요. 지금이라도 직접 나서셔서 관리를 해야 할 터인데….”

‘집사까지 썩은 것은 아닌 모양이군.’

직스 자작의 더러운 일들을 도맡아 했으나 그것은 집사의 의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지금도 영지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무래도 그 또한 강압적인 압박에 의해 일을 진행했던 모양.

여러모로 직스 자작은 인물이 덜 되어 먹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장면이었던 것이다.

“뭐야, 정말! 미쳤어, 미쳤어! 다들 미쳤다고! 볼레트, 여기서 떠나자! 이런 곳엔 더 있을 필요도 없어!”

암살의뢰를 명한 영주나 그것을 따르는 집사, 기사도를 잊은 기사나 이런 의뢰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불릿까지.

올리비아는 이런 상황이 마음에 안 들었던지 감정이 폭발했다.

“의뢰를 받아들이겠소.”

“뭐?! 볼레트, 너 정말 미쳤어? 이번엔 그런 게 아니잖아! 착한 사람이라고!”

집사가 눈앞에 있기에 차마 발설할 수는 없었지만 올리비아가 말하는 것은 파르탄 영지에서의 일을 뜻했다.

그곳에서도 나쁜 놈들이라지만 사람을 죽였는데, 여기서도 사람을 죽인다는 소리와 그 사람이 영주도 내버린 영지를 홀로 다독이고 있다는 소리를 듣자 참을 수 없던 것이다.

자신들이 암살자도 아니고, 이런 의뢰를 받아들일 줄은 몰랐기에 올리비아는 볼레트에게 크게 실망한 모습을 보였다.

“너에게 정말 실망이야! 그런 사람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

“올리비아,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보시오.”

“듣기 싫어! 네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았다면 이곳까지 따라오지도 않았을 거야!”

“올리비아! 제발 진정하고, 잠시만, 잠시만 말미를 주시오!”

“내 몸에 손대지마! 이 더러운 쓰레기!!”

불릿이 그녀의 팔목을 잡자 올리비아가 뿌리치려하는 순간, 불릿은 아예 그녀를 품속에 가둬버렸다.

덥썩!

“제발 진정하시오! 내가 언제 그릇된 행동을 보여줬었단 말이오?!”

언제나 침착하고 냉정한 불릿이 목청에 핏줄까지 세우며 소리치자 올리비아도 동작을 멈추었다.

“…헛소리만 해봐. 그랬다간 내가 널 막아서겠어.”

“올리비아, 잠시만.”

불릿은 집사에게 알려주지 않을 생각으로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대고서 작게 속삭였다.

‘계획이 있소. 지금은 내 말에 따라주시오.’

후욱-.

불릿의 숨결이 귓속을 파고들자 올리비아는 이상한 신음을 내며 꿈틀거렸다.

“아아앙….”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광경을 지켜보던 집사는 금방이라도 사람을 부를 자세를 취하고 있었는데, 불릿은 자연스럽게 올리비아를 자리에 앉히며 자신도 소파에 앉았다.

털썩.

“아무것도 아니오. 잠시 동료가 오해를 한 모양으로, 내 알아서 설득할 것이니 의뢰는 받아들인 것으로 아시오.”

“발키리께서 문제가 있으신 듯한데….”

“날 믿으시오. 거절할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기사가 행패를 부렸을 때부터 따라오지 않았을 것이오.”

“으음,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리지요.”

“대금은 의뢰를 마친 후에 정산해주시오.”

불릿과 집사가 대화를 마치고 있는 순간에도 올리비아는 말을 않고 있었는데, 어쩐지 붉어진 볼을 감싸고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미쳤어, 정말. 내가 왜 그런 신음소리를….”

그녀의 중얼거림은 모두에게 닿지 않았으나 단 한 사람(?), 흙덩이에게만은 전해질 수 있었다.

- 바보, 변태.

============================ 작품 후기 ============================

몰아 보시는 분들이 추천을 주시는 모양이군요.

오늘도 감사인사를 전해드리며 내일도 저녁 6시와 밤 12시에 연재를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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