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3 마탑과 흙덩이 =========================================================================
마탑에서의 볼일을 모두 소화한 불릿은 흙덩이를 데리고 여관으로 복귀하였다.
최근 올리비아는 조금 피곤한 기색이 보였었는데, 불릿이 사줬던 마법물품인 반지가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 힘을 내고선 수련에 돌입한 상태였다.
“핫! 히얏!”
여성특유의 고음을 내며 여관의 한쪽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올리비아를 멀찍이서 쳐다보고 있자니 흙덩이가 불릿의 소매를 잡고선 그를 이끌었다.
“…왜 그러시는가?”
- ……
불릿의 의문 섞인 음성에도 흙덩이는 그를 질질 끌고선 여관으로 들어서더니 객실에 도착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흙덩이는 감정이 상한 듯 볼이 살짝 부푼 상태로 불릿을 노려보았다.
- ……나빠.
무엇이 나쁘다는 것인지 곱씹던 불릿은 이내 마탑에서의 일을 떠올리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흙덩이여, 마법사가 신체에 손을 대니 기분이 나쁘던가?”
- 나빠. 불릿.
“음? 본인이 말인가?”
설마 자신에게 화살을 돌릴 줄은 몰랐었던지 웬만하면 당황하지 않는 불릿이 그러고 말았다.
- 바보. 나쁜 불릿.
“이런….”
흙덩이는 마탑에서의 일로 단단히 삐진 듯했는데, 어떻게 하면 이 화를 풀 수 있을까 불릿은 고민했다.
그러다 떠올린 생각이, 대개 이런 상황에선 흙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기분이 풀렸기에 이번에도 쓰다듬어주었다.
스윽스윽-.
불릿의 손길에 움찔하던 흙덩이는 눈을 감고 그것을 음미하는 듯하다가 흠칫 그 손을 떨쳐내었다.
탁.
- 바보. 바보.
거의 팔살기나 다름없던 쓰다듬기도 통하질 않자 불릿은 어찌하면 좋을지 몰랐다.
그는 연애경험도 전무했고, 아이를 키워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남에게 조언을 주는 거라면 모를까, 막상 자신이 이런 상황에 놓이니 난감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허허, 보통 심술이 난 것이 아닌 게로군.’
그러면서 팔짱까지 끼고 몸을 돌린 상태로 뿌뿌거리는 것이 올리비아가 평소 하던 행동도 따라하는 듯했다.
빠르게 배우는 것은 좋았지만 나쁜 것만은 가려서 배웠으면 하는 게 불릿의 마음.
‘흙덩이가 본인에게 그런 말을 할 줄이야….’
당황하긴 했어도 불릿이 살아온 연륜이 있었기에 그는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손에 물건을 들고 있단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들어보았다.
스윽.
“으음…, 흙덩이여. 이것을 받아주겠는가?”
- …어떤 거?
삐진 상태에서도 불릿의 부탁에 거절이 아닌 물건이 무엇이냐는 물음을 보내는 흙덩이.
이 대화만 보아도 흙덩이의 마음이 떠나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물품에 대한 감정도 마쳤으니 이제 자네가 흡수해도 좋을 듯하이.”
흙덩이는 아직도 몸을 돌린 채로 팔짱을 끼고 있었지만 눈만은 연신 그가 들이밀고 있는 마력삽으로 향해있었다.
힐끗.
힐끗힐끗-.
- ……정말?
“그럼, 그렇고말고. 자네를 위해서 산 선물인데 본인의 욕심 때문에 미안했네.”
- 나 정말 먹는다?
“부디 그래주시게나.”
슬슬 넘어오는 흙덩이에게 불릿은 결정타를 날렸다!
스윽스윽-.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다정하게 대해주자 부풀어 올랐던 흙덩이의 두 볼은 원상태로 돌아왔고, 다시 무표정이 되었으나 이전보단 훨씬 나았다.
- …냠냠.
먹는 소리는 굉장히 귀여웠다. 다만….
콰그작, 콰직, 콰그작!
자기 키만한 마력삽을 씹어먹는 흙덩이의 모습은 뭔가 공포스럽기도 했다.
그렇게 흙덩이가 마법물품의 핵인 마정석까지 먹어치우자, 변화가 생겨났다.
우우웅-
갑자기 흙덩이의 배꼽부근에서 빛이 어리기 시작하더니 이상한 공명음이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정령사 인생을 통틀어 이런 현상을 경험한 적도, 들어본 경우도 없던 불릿은 당황했다.
“헛, 이게 무슨…, 흙덩이여, 괜찮은가?!”
이러한 사태에 불릿은 흙덩이가 걱정되어 안부를 물었으나 흙덩이는 대답이 없었고, 이내 공명음은 더욱 심해지며 뿜어지는 빛의 양도 많아지고 있었다.
“으으음!”
흙덩이의 배꼽에서 시작한 빛은 강한 공명음을 울리고 있었는데, 그와 함께 불릿도 요동치기 시작했다.
흙덩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불릿은 대체 왜 공명하기 시작한단 말인가?
이런 경우를 겪어본 적이 없기에 불릿은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방법을 찾아내고 있었는데, 그가 흙덩이의 몸에 손을 대자 정령력이 급속도로 빨려들었다.
슈우우욱-
“흙덩이여! 땅의 하급 정령이여! 정신차리시게!”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체내에 지니고 있던 정령력이 빨려가자 다급히 소리쳤으나 흙덩이는 반응이 없었다.
불릿의 정령력이 사라져갈수록 공명음은 더욱 심해졌으며, 흙덩이의 배꼽에서 피어나던 빛은 어느새 흙덩이의 몸 전체로 번져있었다.
이윽고 공명음이 한계점에 도달했는지 점점 수그러드는 빛과 동시에 빨려 들어가던 불릿의 정령력도 멈추어갔다.
우우웅…
털썩.
“크윽, 무슨 일인 벌어진 것인가…?”
거의 탈진 직전까지 도달했던 불릿은 이윽고 점점 차오르는 정령력에 또 한 번 놀랐다.
“갑자기 왜?”
마정석을 사용한 것도 아니거늘, 소모됐던, 흙덩이에게 빨려 먹힌 정령력이 점점 차오르기 시작했다.
흙덩이가 눈을 깜빡이며 불릿을 쳐다봤을 때엔 정령력을 회복해 몸을 추스르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자신도 당황했는지 흙덩이가 갈피를 못 잡자 불릿은 흙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안정을 되찾도록 도움을 주었다.
스윽, 스윽.
“정령력이 늘어난 것 같은데…, 충만한 느낌이 드는군.”
그 와중에도 자신의 몸을 점검하던 불릿은 전보다 늘어난 정령력에 놀라워하고 있었다.
정령력이란 것이 이리도 쉽게, 얼렁뚱땅 늘어나는 것이 아니었는데 자신도 모르는 이유로 인해 보다 늘어났으니 놀라는 것이다.
게다가 침대에 앉힌 흙덩이에게서도 이상함을 감지했다.
어쩐지 가벼웠던 흙덩이가 좀 더 묵직해진 것 같고, 머리를 쓰다듬는 위치도 더 높아진 것 같아 고민하던 불릿은 고개를 돌렸다.
분명 모습은 흙덩이였는데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이전의 모습이 10살 전후라면 지금은 그것을 넘어 성장기에 들어섰다고 할까?
그렇다곤 해도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라 불릿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를 관찰했다.
- 왜?
“으, 음. 흙덩이도 성장한 것인…가?”
정령이 성장한다는 것은 등급별로 변화가 생겨 진화한다는 개념이었는데, 어쩐지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매우 미묘한 상황이었기에 불릿은 마땅한 표현을 붙이지 못했으나 흙덩이 또한 자신처럼 뭔가가 변한 것은 맞았다.
이 괴현상에 불릿이 혼란을 겪고 있는 사이, 문이 벌컥 열리며 사람이 들이닥쳤다.
쾅!
“방금 그건 무엇이었습니까!”
방안에 들이닥친 사람은 마탑에서 나온 듯한 차림의 마법사였는데, 아마 마나의 유동을 느끼고서 찾아온 모양이었다.
당사자인 불릿도 알 수가 없는데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답지 않게 멍청히 앉아있을 때, 뒤이어 들어온 올리비아가 버럭 소리쳤다.
“이 정신 나간 사람이 진짜! 볼레트, 이 새끼가 막무가내로 들어오려고 해서 붙잡아두고 있었다.”
“이, 이 새끼라고? 이 여자가 보자보자 하니까!”
“그래서 뭐, 한판 뜨시게?”
철컥.
올리비아가 살기를 피어 올리며 칼집에서 검을 슬쩍 들어 올리자 마법사가 시선을 회피하며 헛기침을 뱉는다.
“크흠! 아니 뭐, 내 잘못도 있기도 하고….”
“무슨 일로 오셨소?”
헛기침을 뱉는 마법사에게 여전히 일어서지도 않고 앉아서 대꾸하는 불릿이었으나 마법사는 이를 알아채지 못하고 종알거리지 시작했다.
“그것이 말이오, 우리 마탑의 영역에서 사전에 허락되지 않은 마나의 유동이 포착되었으니 확인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그러면서 구시렁거리는 말이,
“헌데 이 여자가 문을 틀어막고 있으니 우리가 얼마나 애가 탔는 줄 아시오! 만약 사고라도 났으면 내가 크게 치도곤을 당했을….”
“너, 거짓말하지 마라. 우리가 여기 머무는 건 마탑에서 이미 알고 있잖아?”
“크흠….”
그렇다. 마탑 측에선 이미 불릿과 올리비아가 어디에 머무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니 눈앞의 마법사의 말은 거짓, 그저 호기심을 참지 못해 안달이 났던 것이다.
경황이 없던 불릿도 올리비아 덕분에 일을 그르치지 않았단 것을 깨닫고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뒤에서 마법사에게 눈을 부릅뜨던 올리비아는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올리비아, 고맙소.”
“우리사이에 뭘. 문제는 이놈이지.”
그러면서도 마법사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올리비아.
이 눈치코치 없는 마법사는 자신이 무얼 잘못했는지 모르는 듯 여전히 앉은 채로 무례하게 손님을 받는 불릿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대체 무슨 일입니까? 무슨 원인으로 이런 파장을 바깥에까지 퍼뜨린 것인지 궁금합니다.”
‘연구에 미친 작자들 같으니라고.’
예전부터 마법사들이 진리니 뭐니 하면서 해부나 연구에 혈안이 되었단 것은 알고 있었으나 오늘은 너무 심했다.
어떤 상황이었는지 대략적으로 감을 잡았을 텐데도 이런 막무가내라니?
만약 깨달음을 저 마법사의 훼방으로 놓쳤다면 얼마나 분하고 원통한 일이겠냐, 이 말이다.
‘음? 깨달음?’
그러고 보니 지금 이 상황은 깨달음이라는, 경지의 벽을 부수는 현상과 비슷했다.
다만 그것이 흙덩이가 마력삽을 흡수함에 따라 발생한 것이라서 문제였지.
“그렇게 숨기지 말고 조금만, 조금만 알려주시오. 이 방에는 파장을 퍼뜨릴 도구도, 마법사도 없는데 어찌 한 것이오?”
불릿이 묵묵부답임에도 끈질기게 물어오는 마법사에게 그는 피곤함을 느꼈다.
“나도 잘 모르겠소.”
얼른 이 마법사를 떼어내고 휴식을 취하고 싶었는데 역시나 마법사의 호기심은 사람을 죽일 정도였다.
“그러지 마시고, 왜, 뭔가 변화가 있었을 게 아닙니까? 그것에 대해서 알려주시면 됩니다.”
“후우….”
점점 머리가 달아오르는 것이 화를 낼 것 같았으나 이내 호흡을 가다듬으며 마음을 달랬다.
젊어진 육체로 인해 감정조절이 잘 되지 않는 와중에 피곤한 상태의 그를 쪼아대니 마법사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워낙 작은 깨달음이라 변화는 없소.”
“그 작은 깨달음이라는 것에 이런 큰 마나의 유동이 발생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낸들 어찌 하란 말이오? 그렇게 된 것을.”
그 이후로도 마법사가 계속해서 추궁했으나 불릿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간간히 ‘작은 깨달음이라’는 말을 섞으며 잘 모르겠다고 하자 결국 포기한 것은 마법사 쪽이었다.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변화가 없대도 그러네. 이만 가보시오!”
마법사가 보기에도 증거가 될 만한 요소가 없었기에 불릿이 우기기만 하니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마법사는 방을 나서면서도 미련이 남는지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다 올리비아 노려보며 주먹을 불끈 쥐자 후다닥 사라졌다.
쾅!
“어휴, 저 못난이가 사라질 때도 문을 세게 닫네. 못 배워 처먹은 티를 내가지곤…, 쯧.”
올리비아가 창문을 통해 자꾸만 뒤를 보는 마법사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보며 혼잣말을 했다.
마법사들은 지나친 지식의 탐구에 열중하다보니 예의를 씹어 먹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세상 그 누구보다 방대한 지식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렇듯 못 배운 티를 낸다고 욕을 먹는 것이다.
“정말 고맙소, 올리비아. 내 이 은혜는 잊지 않을 것이오.”
“고마우면 나중에 밥이나 한턱 쏘던가.”
“물론이오. 내 반드시 이뤄주겠소.”
덥썩!
불릿이 거듭 고마움을 표하며 손까지 맞잡자 올리비아가 손을 쏙하고 빼버렸다.
“야야야! 어딜 여자 손을 함부로 잡아!”
“미안하오, 나도 모르게 그만.”
감정의 절제를 미처 이루지 못한 불릿의 행동에 올리비아가 잠시 그를 쳐다보았다.
“일단 오늘은 쉬고, 무슨 일인지 나중에 알려달라고?”
올리비아는 그 말을 남기고선 어떤 사정이 있으리라 짐작되는 불릿과 흙덩이를 남겨두고서 방에서 사라져주었다.
달칵.
“후우…, 흙덩이여, 본인은 잠시 쉬겠네.”
풀썩-.
불릿은 마탑에서처럼 이불로 몸을 감싼 채 숨어있는 흙덩이가 있던 침대에 눕더니 그대로 잠들었다.
새액, 새액-
그가 삽시간에 잠들자 머뭇거리던 흙덩이. 잠든 불릿의 곁에 조용히 눕더니 자신의 몸에서 이불을 벗겨내 불릿에게 덮어주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 잘 자.
============================ 작품 후기 ============================
오늘 밤 12시에 이어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