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9 마법사의 탑 =========================================================================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이동해서인지 그들의 여정은 한결 힘이 넘쳤다.
지금만 봐도 올리비아에게 이끌려 가벼운 발걸음으로 이동하는 흙덩이를 보면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있었다.
흙덩이는 불릿을 제외한 타인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을 싫어했다.
그보다 더 싫어하는 것은 자신의 신체에 접촉하는 것. 그것은 오직 불릿에게만 허락한 행위였다.
하지만 지금은 불릿이 올리비아에게 흙덩이를 맡긴 상황, 흙덩이도 올리비아에 한해선 받아들인 걸지도 몰랐다.
- ……
아니, 어쩌면 그냥 포기한 것인지도 몰랐다. 자신의 말을 듣지도 못하고, 불릿에게 의사를 전달해도 불릿은 그녀를 제재하지 않았다.
불릿이 올리비아를 동료로 여기니 흙덩이도 어쩔 수 없었던 걸지도 몰랐다.
그는 이동하면서 마탑, 정식명칭은 마법사의 탑으로 불리는 곳에 대해서 생각했다.
‘여기서 마탑까지의 거리는 조금 걸린다. 마차도 아닌 도보로 이동하니 그 기간은 더욱 늘어날지도 모르지.’
불릿은 결사대에서 전투를 치를 때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여정은 마차를 통해 이동했었다.
고위귀족이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걸어 다닐 리가 없지 않은가?
지금은 그저 특별한 경우일 뿐이다.
‘폐쇄적인 이들이지만 박대하진 않을 것이다.’
불릿에겐 부탁을 요구할 수 있는 펜던트도 있었고, 이번 사건을 통해 폐쇄적이던 마탑도 대중에 조금은 알려졌다.
사건, 그것은 흑마법사와의 전쟁을 일컫는 것인데, 마탑이 폐쇄적인 이유는 중립을 지켜야했기 때문이다.
강력하고 신비한 힘을 지닌 마법사들이 인간들의 분쟁에 끼어들게 되면 개판이 된다는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6대 마탑…중에서 어디로 갈지를 정해야겠군.’
흔히 6대 마탑이라 하면 잘 알려진 학파는 다음과 같다. 먼저 보호계열에 특화된 학파인 프로텍트학파.
공격만큼 중요한 것이 방어인데, 프로텍트학파는 실드라는 마법을 만들어내어 누구나 아는 곳이 되었다.
마탑은 인간들의 분쟁에 끼어들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을 알려야 했는데, 그 방법 중 하나가 공격성이 없거나 효율이 떨어지는 기술을 퍼뜨리는 것이었다.
예를 들자면 ‘어느 학파의 무슨무슨 마법이 그렇게 좋다더라’ 라는 소문이 퍼지면 그것만큼 좋은 광고효과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내게 있어 그들이 필요하진 않다.’
프로텍트학파가 밀고 나가는 돈벌이 중 하나가 방어마법진을 설치하는 것이었는데, 웬만한 귀족의 저택이나 영지들은 죄다 설치되어 있었다.
문제는 설치 이후엔 유지와 보수를 제외하면 딱히 돈 들어올 구석이 없다는 것이다.
마법도구로 만들면 되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도구’에 마법을 부여하는 행위는 인첸트학파라고, 전문가들이 따로 있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마법사들은 기본적으로 원소마법은 할 줄 알았다. 거기에서 자신들의 특색에 맞게 주력기로 삼는 것들이 있었고 말이다.
프로텍트학파의 경우는 윈드계열인데, 이유는 실드마법과 궁합이 잘 맞고 차단과 보호도 곧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는 제외하고.’
다음으로 떠올린 곳이 얼터너티브학파. 이곳은 학파의 이름보단 연금술사라고 하면 ‘아, 거기?’라며 다들 알았다.
주로 하는 일들도 그러한 것들이었는데, 쓸데없이 납을 금으로 만드는 행위보단 사물이나 환경의 본질을 뒤바꾸거나 모습을 변형시키는 데에 주력했다.
납으로 금을 만들 수는 있다. 다만 그 비용이 만들어낸 금의 가치를 넘어서서 문제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보다는 이미 만들어진 것들에 손을 대기 때문에 다른 학파는 물론 장인들과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간단히 말하자면 2차 가공자이기 때문이다.
‘일루젼학파의 도움도 많이 받았지.’
일루젼학파, 환상계열의 대가들.
그들이 시전하는 환상마법은 실물과 구분할 수가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정교했다.
흑마법사들의 마법은 저주와 정신계열을 즐겨 썼는데, 그들의 마법에도 반응할 정도로 뛰어난 완성도를 자랑했다.
다만, 놈들의 본진에 가까워질수록 마물이나 키메라 같은 지능이 거의 없는 놈들에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마물은 마법저항력이 뛰어나서 그렇고, 키메라는 대부분 이미 죽은 것들이라 봐야했으니 환상 같은 것이 통하지 않았다.
그래도 본진까지 가는 동안은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 그들은 역할 다했다 봐도 무방하다.
‘점성학파가 있어 놈들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점성학파는 별의 움직임과 대기의 기운, 그 외의 요소가 연관이 있다 여기며 그것들로 하여금 예지를 하는 신기한 곳이었다.
어찌 보면 사이비종교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학자’였고 그들 중에서 종교를 믿는 이는 소수일 뿐이었다.
웬만하면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은둔하는 편인 그들이었지만 간혹, 수십 수백 년 만에 그들이 활동할 때에는 매번 대륙의 정세에 큰 혼란이 오곤 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예언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흑마법사들의 불길한 소환의식도 점성학파가 있었기에 결사대가 그들의 심부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공인지 실패인지 모르겠지만.’
흑마법사가 다시 발호하는 징조가 보이는 지금, 결사대의 희생은 실패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들의 죽음이 헛되었다는 뜻이다.
“후우.”
불릿의 감정이 고조되자 올리비아에게 끌려 다니던 흙덩이가 슬쩍 뒤를 돌아봤다.
흙덩이의 시선엔 불릿이 홀로 고뇌하는 장면이 포착되었지만 깊은 고민을 하는 듯해 말을 걸진 않았다.
때때로 불릿이 고민하는 경우가 있는데, 인간사에 무지한 흙덩이가 도와줄 방법이 없단 것을 최근에 들어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싫었기에 불릿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 힘내.
비록 듣지는 못했으나 흙덩이의 응원을 받으며 불릿은 생각을 이어갔다.
‘게이트웨이학파의 도움이 있으면 빨리 갈 수도 있겠군.’
게이트웨이학파는 공간이동으로 학계에서도, 세상에도 저명한 곳이다.
마법사하면 손에서 불을 쏘거나 얼음을 만드는 등의 초자연적인 일들과 블링크나 텔레포트 같은, 발 하나 까딱 않고 이동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겠는가?
뭐, 여기까지가 평민들이 흔히 생각하는 마법사에 대한 이미지고.
실제로는 자신이 속한 학파의 마법만 연구하다 인생을 마치는 경우가 허다했다.
마법사는 기본적으로 머리가 좋은 이들만 있는데, 그들 중에서도 천재, 또 그 위의 천재가 아니고서는 모든 마법을 섭렵하기란 절대 불가능했다.
만약 가능하다면 수박 겉핥기처럼 기초지식만 배우다 관짝에 드러누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인챈트학파에게 가야겠지.’
공간이동은 고도의 기술이며 매우 위험한 마법이다.
좌표 하나, 털끝만치의 오차라도 발생한다면 대상자가 목표지점의 물체와 그대로 합체되거나 땅속으로 이동되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본인들의 주특기지만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마법, 그것이 바로 텔레포트였다.
단거리 이동마법인 블링크조차 불상사가 발생할까봐 생명이 위급한 경우가 아니고선 사용하지 않는데, 장거리마법인 텔레포트는 오죽하겠는가?
같은 마법사들, 그것도 마탑의 인물 중에서도 고명한 이가 아니면 부탁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군사목적으로 사용되지 않게 하려는 것도 있었던가?’
게이트웨이학파에게 있어 좌표는 절대기밀이었다. 만약 외부로 반출이 된다면 반출한 마법사의 3대를 멸족함과 동시에 좌표지점의 마나를 비틀어 텔레포트가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자체적으로 단죄를 가하는 형벌이 있는 학파라서 그런지 그들의 수준은 다른 학파들에 비해 뛰어난 면이 있었다.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인챈트학파.
‘다른 학파들에 비해 그곳은 활기를 띠고 있을 게야.’
인챈트학파는 원래부터가 돈을 많이 버는 학파였다. 다른 학파들이 되도록 대중에게 자신들의 기술을 유출하려 하지 않을 때, 그들만이 대놓고 ‘장사’를 했기 때문이다.
인챈트가 무엇인가? 마법이라는 신비한 힘을 장비에 부여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닌가?
그들이 만들어낸 마법물품, 인챈트 된 장비, 결사대에 보급됐던 헤이스트 스크롤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특히나 이번 전쟁을 통해 가장 많은 이득을 취한 곳이 인챈트학파였으니 그 성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러니 자신에게 필요한 곳이 게이트웨이학파임에도 불구하고 인챈트학파에게 가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인챈트학파만 잘 구슬리면 게이트웨이학파도 통행허가를 내줄 것이다.’
인챈트학파의 힘은 잔혹한 면이 있는 게이트웨이학파에서도 한발 물러줄 정도로 강했다.
그리고 그 힘이 금전에서 나왔다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아는 사실.
역시 세상은 돈이다.(?)
“취익, 취이익!”
듣기 싫은 콧소리가 울리며 고뇌하던 불릿을 깨웠는데, 그가 주변을 살피니 어느새 검을 뽑아든 올리비아가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덩달아 흙덩이도 주먹을 쏘아낼 준비를 하고 있는 상황, 그들은 불릿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볼레트! 동쪽 숲에서 오크 출현!”
- 오크, 다섯.
놈들은 먹이를 찾다가 그들의 냄새를 맡고 인간의 영역을 침범한 것으로 보였다.
숫자도 정찰대로 구성하기 알맞았고, 그 중에서도 약간이나마 강해보이는 놈도 보이는 것이 확실해 보였다.
“올리비아는 잠시 대기. 흙덩이여, 주먹 쾅으로 하나씩 잡고 있게나.”
그러면서 불릿은 등에서 봉을 꺼내고선 허리춤에서 뽑아든 창날을 조립하며 말을 이었다.
철컥, 철컥.
“나머지는 본인이 잡도록 하지.”
“크아앙!”
오크들은 굶주린 것인지 침을 질질 흘리며 달려들었는데, 제일 앞에서 달려드는 놈을 향해 흙덩이가 주먹을 날렸다.
- 주먹 쾅…
퍽!
숙달된 솜씨로 흙덩이가 오크의 머리를 날려버리자 불릿도 몸을 날려 오크 한 마리에게 창을 내질렀다.
푸욱!
“퀘에엑….”
몸속에 날카로운 금속이 박히면 숨이 턱 막힌다. 그것은 몬스터라고 예외는 아니었는데, 느긋하게 비명을 지를 수 있게 불릿이 내버려둘 리는 없었다.
“흡.”
촤악-.
“끄르르르…….”
불릿이 창날을 한 바퀴 돌려 뽑아내자 다닥다닥 끊긴 창자가 딸려서 바깥구경을 했다.
오크가 무릎을 꿇고 멍하니 바깥나들이 중인 자신의 내장을 보는 사이, 흙덩이가 연이어 주먹 쾅을 날렸다.
- 쌍주먹 쾅…
퍽, 퍼퍽.
연이어 두 마리가 죽자 불릿이 홀로 도망가는 한 마리를 상대로 투창을 시도했다.
탓, 타다닥!
“차핫!”
짧은 도움닫기 후 던져진 창이 오크에게로 쏘아졌으나, 안타깝게도 불릿의 창은 살짝 옆으로 비껴나갔다.
쉬이익-!
“취이익! 살려, 취익, 줘!”
어색한 인간의 말로 빌면서 도주하는 오크의 등을 바라보던 불릿은 옆에 다가온 흙덩이에게 명령했다.
“흙덩이여, 주먹 쾅.”
- 응.
투확!
대답과 동시에 쏘아진 흙덩이의 조그마한 손. 그것은 빛살처럼 날아가 시야에서 작아져가던 오크의 등을 뚫어버렸다.
…퍽.
- 취에엑-!
오크는 이승에서의 마지막 말을 뱉으며 비명횡사했고, 이를 끝으로 전투가 종료되었다.
천천히 걸어가던 불릿은 땅에 박힌 창을 뽑아내고선 이물질을 털어냈다.
부웅-
원심력을 이용해 이물질을 털어낸 불릿은 창날과 봉을 분리한 후 등에 매고서야 일행이 있는 곳으로 복귀했다.
“나는 왜 가만히 있으라고 한 거야.”
“창술 또한 사용하는 무기일진데 그동안 흙덩이에게만 의지했던 것 같아 몸을 움직여보려 했소.”
자기만 활약하지 못하자 내심 불만이 생겼던 올리비아가 투덜거려도 불릿은 덤덤하게 말할 뿐이었다.
그러자 올리비아는 표정을 싹 바꾸더니 입을 가리며 웃었다.
“자세가 하도 엉성해서 창을 바닥에 내던지는 줄 알았다. 그것도 투척술이라고 한 거야?”
불릿은 투척이란 것을 연습한 적도 없었고, 창을 던져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기에 올리비아가 보기엔 엉성함이 눈에 보였다.
“생각보다 어렵구려.”
불릿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잇는다.
“나중에 올리비아가 가르쳐주시오.”
“뭐? 나? 내가 왜?”
갑자기 자신에게 화살이 돌아오자 깜짝 놀란 올리비아. 그러나 불릿은 장난이 아닌 듯 진지한 어조로 대화를 이었다.
“그렇소. 올리비아는 그런 쪽으론 실력자라고 볼 수 있지 않소?”
“그야 그렇긴 한데….”
보급되는 무기가 없어, 또는 연습할 시간이 없어서 하나의 무기만 다룰 줄 아는 병사들과는 다르게 용병들은 다양한 무기를 사용할 줄 알았다.
비단 용병뿐만이 아니라 전사라면 마땅히 여러 무기를 다루거나 그것들의 특색을 알아야 했다.
기사들 또한 실전에선 잘 사용하지 않는 박투술이나 도끼, 창, 활 등을 몸에 익도록 연습한다.
그래서 고수라고 여겨지는 익스퍼터들은 자신의 주무기가 아니더라도 대련이나 가르칠 때 막힘이 없는 것이다.
“부탁하오. 올리비아 밖에 믿을 이가 없소.”
불릿에게 있어 근접기술을 가르쳐줄 이가 올리비아 밖에 없었다.
영지에 복귀하면 또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그런 불릿의 말에 다시금 올리비아는 예전처럼 가슴을 탕탕 치며 호기롭게 외쳤다.
“그래! 까짓것, 우리 사이에 못해줄 것도 없지!”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는 듯 잔뜩 부푼 가슴을 내밀며 대범한 척 했으나 오히려 그녀의 행동에 불릿이 시선을 살짝 돌리며 대꾸했다.
“흠, 크흠! 아, 알았소. 고맙구려.”
자신의 존재를 어필하는 커다란 두 개의 융기 때문에 괜히 자신의 얼굴이 붉어지려하자 불릿은 눈을 어디에 둬야할지 몰라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제길, 젊은 것들은 대체 어찌 참는단 말인가?’
자신도 모르게 삐죽 튀어나오려는 아들(불릿은 미혼이다)을 억누르며 호흡을 가다듬는 사이, 피냄새를 지우던 흙덩이가 그들을 보며 무미건조하게 말한다.
- 역시 쟤 싫어.
============================ 작품 후기 ============================
언제나 귀환정령사를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내일도 낮 12시, 저녁6시, 밤12시에 이어서 올라오니 많은 애독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