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5 의뢰 =========================================================================
문이 열리자 대여섯 명의 사람이 등장했다. 그들을 보자마자 체내에 마나가 가장 많은 이를 찾아낸 불릿은 그 사람에게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훅!”
짧은 기합과 함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자 놈은 놀란 음성도 내뱉지 못하고 바닥과 키스했다.
꽈당!
“…으으…….”
“소환해제!”
불릿은 그 사람을 위에서 억누른 채 단검을 뒷목에 가져다대고서 외쳤다.
‘이런 멍청한, 깜빡할 게 따로 있는 것이지….’
정령과 정령사는 동등한 계약관계이지만 세상에 불러낸 정령을 되돌려 보낼 권한은 정령사에게 있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부름을 받는 것은 정령의 권한이었다.
어쨌든 간에 불릿은 텔레파시가 통하지 않으면 소환을 해제했다 다시 부르면 된다는 것을 깨닫고서 흙덩이를 다시 불러냈다.
한동안 불러놓고서 돌려보내지 않았더니 망각하고 있던 사실이라 자책하는 불릿.
“흙덩이, 나와!”
급박한 상황이기에 평소의 말투도 집어치운 채 간략히 말함에도 스르르 솟아나며 소환에 응한 흙덩이.
흙덩이는 불릿이 처한 상황을 이해했는지 곧바로 공격할 태세를 갖췄는데, 이때 누군가 흐름을 끊어놓았다.
“그만! 그만하세요, 그만!”
방안에 들이닥친 이들 중 그 누구도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는데, 그들이 아닌 바깥 복도에서부터 앳된 목소리가 들리더니 불릿을 말렸다.
‘남자아이?’
“그래서, 이 아이가 소문의 어린 영주란 것이오?”
“무례하다! 말을 높이지 못하겠소!”
“제발 그만하세요. 저는 괜찮다니까요?”
그들은 전투를 멈추고서 불릿의 방에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심복으로 보이는 이가 호통을 치자 불릿이 인상을 썼다.
그리고 불릿의 심기가 안 좋아지려하자 남자아이가 심복을 말렸다.
“흠, 어린 영주여. 대화를 하고 싶으면 구색부터 맞추고 시작하시오. 죽일 수도 있던 걸 살려주었더니 무례하기 짝이 없군. 대체 누가 무례한 것인지….”
“뭐라?!”
불릿의 말에 기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으나 차마 반격하진 못했다.
상당한 양의 마나를 체내에 갖추고 있는 걸로 보아 기사인 걸로 짐작되지만, 사전에 묻지도 않고 남의 침실에 들이닥친 것은 분명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정당방위로 목이 잘리더라도 할 말이 없던 상황이니 예의를 중시하는 기사로선 치욕적이었던 것.
일방적으로 당하는 기사를 구해준 것은 그의 어린 주군이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괜찮으니 잠시 밖에서 대기해주세요.”
“하지만!”
“그만, 제발 그만해요! 이분이 죽이려고 마음먹었으면 죽었을 거란 걸 아직도 모르겠어요?!”
“으음….”
짧은 침묵. 그러나 자신도 통감하던 찰나이기에 화를 내던 것과는 다르게 순순히 응하며 다른 이들과 함께 복도로 나갔다.
우르르-.
달칵.
문이 닫히며 단 둘만이 남자 남자아이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폐를 끼쳤네요.”
“됐소. 사과 받으려고 했던 말이 아니었으니까. 그 전에, 무슨 영문으로 온 것인지 말해주겠소?”
“아, 네! 저는 파르탄 영지의 영주, 콜드 파르탄이라 합니다.”
“콜드 파르탄?…그렇군. 나는 용병 볼레트요.”
짧고 간략한 소개였으나 남자아이, 콜드 파르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이어받았다.
“예, 알고 있습니다. 데빌로안의 영웅, 아이언가드님 되시죠?”
“……그 소문이 벌써 퍼졌소?”
척보아도 사람의 유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파르탄 영지에까지 자신의 소문이 퍼졌다는 것에 의문을 품은 불릿.
그의 의문을 어린 영주, 콜드가 알려주었다
.
“이곳을 방문한 상인들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후우, 소문이 그렇다 한들 나는 겨우 C급 용병이오. 대체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이오?”
아무리 영웅이라 한들 용병은 용병. 그것 때문에 영주가 몸소 찾아올 리는 없었다.
과연 그의 예상대로인지, 콜드 파르탄은 다른 이유가 있어 찾아왔다는 것을 실토했다.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정령사가 맞으신지요?”
“보시다시피.”
그러면서 그들의 시선은 인간도 아닌 주제에 테이블에 놓인 의자 하나를 차지한 채 다리를 파닥이며 놀고 있는 흙덩이에게로 쏠렸다.
갑자기 자신에게 시선이 모이자 퍼뜩 정신을 차린 흙덩이는 불릿을 보며 고개를 갸웃한다.
- 왜?
“정령이…맞는 겁니까?”
피부색이 노랗다는 것만 제외하면 영락없는 미소녀. 게다가 반응조차 다른 인간여자아이와 별반 차이가 없었으니 의심이 들만도 했다.
“의심만 할 거라면 나가시오.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니.”
“아, 아닙니다. 제가 실언을 했군요.”
수련하던 중에 그것을 멈추게 만들고, 간밤에 들이닥쳐 어수선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기에 좋은 감정이 들 수 없는 상황, 대영주인 불릿의 시선엔 눈앞의 어린 영주는 무례한 애송이일 뿐이기에 좋게 보기 힘들었다.
콜드는 그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것인지 본격적인 주제로 대화를 틀기 시작했다.
“사실 제가 찾아온 이유는 볼레트 경이 정령사이기 때문입니다.”
“……? 장난치지 마시오. 겨우 하급 정령사인데 그게 이유라니.”
현재 불릿의 경지, 그리고 흙덩이 또한 하급이기에 이 정도로 대우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데빌로안에서처럼 활약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정령사가 희귀하다고 하지만 하급 정령사는 의외로 많았기에 대접받을 정도는 아니다.
그 예로, 용병길드에서 겨우 C급으로 책정해주지 않았는가 말이다.
“부디 노여워하지 말아주세요. 정령사가 희귀하다는 것은 부족한 몸이지만 저도 알고 있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정령사가 희귀한 건 맞다. 하지만 멸종의 위기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일정한 수를 유지하며 꾸준히 존재해왔고, 정령사가 중급 이상의 경지에 올라서기 힘들어서 그렇지 하급의 경우는 찾아보려면 쉽게 볼 수 있었다.
불릿은 눈앞의 어린 영주가 계속해서 간절히 말하자 이상함을 느끼고서 흐름에 따라가려고 했다.
“흠, 정령사가 그리 희귀하오? 내 경지가 그리 높지는 않소만.”
아직 용무도 꺼내지 못했지만 콜드는 불릿의 비위를 맞춰주어야 했기에 물음에 먼저 답해줄 필요를 느꼈다.
“희귀합니다. 전쟁 이후로는 수가 더욱더 줄어들었기 때문이지요.”
전쟁이란 말에 불릿은 잠시 멈칫했다.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는 주제, 어차피 칼자루는 불릿이 쥐었기에 이것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그것에 대해 자세히 말해보시오.”
명색이 용병이라는 자가, 그것도 얘기의 중심에 놓인 정령사가 정령사에 대해 읊어보라 하자 이상하게 여겨졌으나 어차피 콜드에겐 다른 방도가 없었다.
“흑마법사와의 전쟁으로 인해 기존의 마법사나 정령사들의 힘이 대폭 약화되었습니다.”
“자세한 기준을 알려주실 수 있소?”
이에 어린 영주, 콜드 파르탄이 쓴웃음을 지으며 얘기를 이어갔다.
“모두 자신의 전력을 공개하지 않으려 애썼기에 다른 지역의 일은 잘 모르겠으나, 저희 영지를 예로 말씀드리자면 영지에 속한 하위 마법사는 마나의 소멸을 발견했고, 고용했던 용병 정령사는 의뢰금을 가지고 도주했습니다.”
자신의 힘이라 할 수 있는 영지의 사태를 낱낱이 밝히는 모습에서 어리숙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순진한 것인지, 어리석은 것인지.’
둘 중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군주로서 보일 행동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기에 불릿의 물음은 계속되었다.
“약화는 무얼 말하는 것이오?”
“소문으로는 정령사들이 상급의 경지일 경우 중급의 힘을, 중급이면 하급의 힘까지를, 하급이면 거의 힘을 못 쓴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마법사의 경우는….”
그러자 콜드가 손바닥을 들어 올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파이어.”
푸시식…
무언가 반짝하더니 작은 연기를 내고 삽시간에 사라져버렸다.
그 후 콜드가 눈을 감으며 대꾸한다.
“정령사와 마찬가지로 저처럼 원래 경지의 마법을 사용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경지가 낮다면 존재하는 마나로도 마법을 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법사였소?”
무력으로 일어선 가문은 그 무력이 사라졌을 때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기사 가문에서 검술에 재능이 없는 자를 배출하고, 마법사가 마법을 못 쓰며 정령사가 정령과 교감하지 못한다거나.
이에 소년이 대답하기를,
“아버지가 원소마법사셨습니다.”
보통 부모가 어떤 재능을 지녔으면 자식도 그에 대한 재능을 조금이라도 갖고 태어난다.
기사나 마법사가 각 가문에서 대대로 힘을 물려받는 이유가 핏줄에서 찾아볼 수 있던 것이다.
그래서 속된말로 ‘교배’라는 단어를 사용할 정도로, 그들의 핏줄을 이어받기 위한 노력은 대대로 내려져왔다.
소드마스터가 등장하면 공주를 내놓을 정도로 극진하게, 대마법사가 등장하면 7, 80의 노인네라도 숱한 처자가 들이밀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귀족이면서 영주이기까지 한 콜드의 말에 신빙성이 더해질 수 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세상은 지금 볼레트 경 정도시라면 서로 모셔갈 정도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알려주어 고맙소.”
사심이 있다면 적당히 속여서 이용해먹을 수도 있었을 텐데,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자칫 약점이 될 수 있는 사안도 말해주었기에 불릿은 인사를 건네주었다.
이 정도 정보면 모든 것을 알 정도는 아니어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대략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내 신체에 대한 문제도 관계가 있나보군.’
알 수 없는 원인, 그것으로 젊어진 신체와 뒤바뀐 친화력도 이에 관련이 있을 것이다.
여러모로 흑마법사 때문에 세상이 발칵 뒤집어졌단 것엔 변함이 없었다.
‘데빌로안에서도 성과 이상으로 지나치게 대우하긴 했었지.’
용병. 용병은 떠돌이다. 정착이란 말은 그들에게 있어 사치였다.
장기간 한곳에 머물며 의뢰를 수행하더라도 언젠간 떠날 존재들.
용병을 관두지 않거나 지부에 소속되지 않는 이상 그들에게 있어 세상은 지붕 없는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 심심해.
의자에 앉은 채 다리를 까닥이는 흙덩이를 불릿이 달래주었다.
“흙덩이여, 잠시만 기다려주시게. 곧 끝날 것 같으이.”
- 친밀, 친밀…
“윽…, 그, 그래. 이리 오시게.”
모처럼 분위기 잡으며 어린 영주에게 선배로서의 위엄을 보여주려 했거늘, 흙덩이가 이를 망쳤다.
허나 그렇다고 안 해줄 수도 없는 상황, 만약 거부하면 흙덩이가 어떤 깽판(?)을 부릴지 아무도 몰랐다.
폴짝.
다리가 닿지 않는 의자에서 뛰어내린 흙덩이가 불릿의 옆에 서자 그는 얕은 한숨을 내뱉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스윽, 스윽-
“저기, 그건 어떤 의미로 하는 것인지…?”
“으음…….”
살짝 눈까지 감으며 기분좋아하는 흙덩이. 그리고 흙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불릿의 모습.
흙덩이가 정령임을 소환되는 장면을 통해 똑똑히 확인했고, 불릿이 본인 스스로도 정령이라 설명했다.
한데 저건 대체 뭐하는 짓이란 말인가?
콜드는 자신이 보아온 정령사들과 비교하며 불릿의 이상한 행동에 의문을 가졌다.
“이, 이건 정령과의 교감을 한층 높이기 위한, 친밀해지기 위한 의식이오.”
“……의식 말입니까? 하지만 제가 본 정령사들은….”
“어허, 어찌 정령을 하나의 객체로 보지 않는 것이오? 이들도 저마다의 생각과 특징이 있소이다.”
정령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은 정령사들이 정령들을 부르는 이름이 하나같이 동일하기에 정령들은 노예이거나 생각이 없는 존재로 여기기 쉬웠다.
하물며 정령의 말을 들으려면 적어도 중급 정령은 되어야 외부로 말을 표출할 수 있는데, 그것도 정령의 의지가 없으면 들을 수 없었다.
게다가 중급 정령부턴 극히 희귀했다. 가뜩이나 적은 정령사 중에서도 매우 극소수만이 중급 이상의 경지에 올랐으니 귀족이라 할지라도 모를 수 있었다.
“그렇습니까?”
“그렇소. 날 믿으시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도 나만이 정령을 부리지 않소?”
“확실히… 과연…, 흐음….”
불릿의 발언이 그럴 듯했는지 콜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고심하는 기색이다.
콜드는 본인이 말하길, 마법사와 정령사를 찾아보기 매우 힘들어진 상황이라 했다.
이런 상황에서 하급 정령사라 알려진 불릿을 찾아올 정도라면 그가 대단한 축에 들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한번 으스대본 것인데, 잘 통한 것 같자 불릿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휴우, 다행이군.’
- 왜 한숨 셔?
‘…들리나, 흙덩이여?’
- ……
의도치 않은 독백이 전해지자 다시 시도해보았으나 이번엔 통하지 않는다.
‘의념이 통했다 안 통했다, 불편함이 많군.’
의념, 다른 말로는 사념이나 텔레파시로도 불리는 이 기술이 제대로 사용되려면 중급의 경지에 불릿과 흙덩이, 둘 중 하나가 올라서야 할 것이다.
============================ 작품 후기 ============================
추천, 선작 감사합니다.
12시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