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4 파르탄 영지로 =========================================================================
휘이잉-
‘처참하군.’
영지에 도착한 불릿의 감상평. 파르탄 영지, 그것도 영주가 거주하는 중심부의 도시가 이 정도로 황량할 줄은 그도 예상하지 못했다.
사람으로 붐벼야할 거리는 몇몇 이들을 제외하면 인적을 찾아볼 수 없었고, 그나마 돌아다니는 이들도 용병 내지는 그들과 거래하는 상인들 뿐이었다.
게다가 곳곳에 급히 수리한 흔적의 건물들이 보이는 것이, 얼마 전에 습격을 당했던 모양이다.
‘영주가 거하는 곳임에도 이런 상황이라니, 안타깝군.’
이 정도쯤 되면 영지가 무너지기 직전이라 여겨도 무방하다.
불릿은 본인도 한 지역의 영주이기 때문에 동질감을 느껴 안타까워했으나 현재 그가 무언가를 해줄 여지는 없었다.
용병의 신분으로, 게다가 자신의 영지와는 동떨어진 타 왕국의 영지를 무슨 수로 도와준단 말인가?
“여기는 유독 심하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일행의 뒤편에서 쫓아오던 올리비아는 놀란 음성을 감추지 못했다. 비단 그녀만이 아니라 센슨을 비롯한 행상인들도 놀란 모습.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센슨의 놀란 음성에 곁에 있던 불릿이 묻는다.
“센슨, 파르탄의 상황이 이전에 왔을 시에도 이랬소?”
불릿의 말에 센슨이 강한 부정을 토해냈다.
“절대 아닙니다. 오는 길에도 말씀드렸지만 영지의 상태가 이런 줄 알았다면 저희도 생각을 달리 했을 겁니다.”
센슨의 발언은 짧은 사이에 파르탄 영지의 상태가 악화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이었다.
다들 심각한 와중에 흙덩이는 다소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마 사람이 적어서 자신에게 시선이 쏠리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볼레트님, 이곳까지 호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오, 어차피 들려야 했었소.”
중간지점마다 보급과 휴식을 취해야 여행도 할 수 있는 법이다.
불릿의 호의도 있었지만 만약 파르탄 영지가 남서쪽에 위치하지 않았다면 그로서도 들를 이유가 없었다.
마물토벌과는 반대로 이곳엔 딱히 이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오는 내내 보았던 몬스터의 출몰과 처참한 영지의 상태를 보자니 분명 사정이 있는 듯했다.
‘알아는 봐야겠군.’
어떻게 행동할지를 정보를 토대로 판단한다, 그것이 불릿이 내린 결론.
흑마법사의 음모로 의심되긴 하지만 단순히 영주가 무능해 몬스터가 범람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가 잠시 생각에 빠진 사이에 센슨이 상단의 상인들과 대화를 나눈 후 불릿에게 말을 걸었다.
“저희가 아는 여관이 있으니 그곳에 묵으시겠습니까?”
“씻고 싶으니까 서둘러 가자고.”
뒤에서 들리는 올리비아의 목소리. 그녀는 웬만큼 높은 인물이 아니라면 존대를 하는 경우가 없었는데, 소규모이긴 하나 상단주인 센슨에게도 반말을 했다.
‘버릇없군.’
어떤 사정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불릿의 눈엔 버르장머리 없는 처자로 보였으니, 올리비아가 알면 땅을 치고 후회하며 태도를 고쳤을지 몰랐다.
“그래주면 고맙소.”
* * *
불릿은 그들에게서 소정의 보답을 받고 헤어지게 되었다.
“저희는 영주님과의 거래가 약속 잡혀 있기에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소규모상단주제에 영주와 대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작은 상단과 직접 대면하나?’
보급이 열악한 가운데 위험을 뚫고 다가올 상인은 많지 않았기에 상단이 온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했을 것이다.
‘센슨의 반응, 그리고 영지의 상태. 약 1주에서 2주 사이에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여겨지는군.’
행상인은 다른 거래처를 통해 약속을 잡더라도 행선지의 정보는 반드시 알아낸다.
주먹구구식이 아니고서야 행선지의 특산물이 무엇인지, 내가 가지고 가는 물품으로 이득이 날 것인지를 계산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센슨 상단이 계산을 잘못해 피해를 입은 것과 영지의 상황에 놀란 것을 보면 기간을 2주 안으로 좁힐 수 있었다.
“잘 가시오.”
“그럼, 이만….”
상인들이 사라지자 흙덩이를 인형처럼 가지고 놀던 올리비아가 고개를 돌렸다.
“저치들은 갔어?”
“끙…. 올리비아, 흙덩이는 놀잇감이 아니오. 적당히 하시오.”
갈수록 그녀가 흙덩이를 함부로 대하는 듯하자 심기가 불편해진 불릿이 그녀에게 한소리를 했다.
그가 그런 말을 한 데에는 저편에서 한층 애절한 눈빛으로 자신에게 구원요청을 하는 흙덩이에게서도 이유를 찾아볼 수 있으리라.
“뭐야, 치사하게 혼자만 독차지하게?”
흙덩이의 팔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흔들 거리던 올리비아가 은근한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엔 겨드랑이에 두 손을 끼워 넣더니 비행기(?)를 태워준다.
“자, 난다 날아! 재밌어, 예쁜아?”
- 뭐야?
올리비아가 알 수 없는 이상한 짓을 하자 흙덩이가 불릿을 쳐다보며 애달프게 말했다.
- 불릿, 뭐야? 얘 뭐하는 거야?
불릿이라고 해서 그녀의 행동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저게 어느 지방의 풍습이지?’
갈수록 그녀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알다가도 모를, 그야말로 정체불명의 여성이었던 것이다.
“거 얼굴표정 한번 되게 웃긴다. 풋.”
- 바보야, 이거 놔.
흙덩이가 몸을 흔들자 그것이 귀여웠는지 품에서 놓질 않는 올리비아.
사실 올리비아가 흙덩이의 힘을 이길 순 없다. 흙덩이는 그야말로 괴력, 땅의 기운으로 이루어진 정령답게 힘이 장사였다.
그러나 흙덩이가 자신의 힘을 온전히 사용하면 올리비아가 다친다.
그래서 육체의 구조에 따른 힘만을 사용했기에 그녀가 손쉽게 흙덩이를 가지고 놀 수 있던 것이다.
“며칠간 머물며 몸을 다스릴 것이오.”
그러면서 불릿이 덧댄 말.
“바깥은 흉흉하니 웬만하면 외출을 삼가면 좋겠소.”
불릿의 조언에 올리비아가 음흉하게 웃으며 흙덩이를 내려놓는다.
바닥에 내려서자 발이 닿은 흙덩이가 그녀의 손을 팽개치며 불릿에게 다가갔다.
도도도…
- 해줘.
이제는 꽤나 인간세상에 익숙해졌는지 볼을 부풀리는 표정을 지으며 불릿의 손을 머리에 얹는 흙덩이.
그러자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그의 손.
스윽스윽.
“뭐야, 날 걱정해주는 거야?”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는 없으나 불릿은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흙덩이나 올리비아나 둘 다 모두 나의 소중한 이들이오. 아끼지 않을 리 있겠소?”
흙덩이도 대답에 들어있었으나 올리비아는 살짝 미묘해진 얼굴로 대꾸하였다.
“기절했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풀썩.
올리비아는 침대에 걸터앉으며 팔짱을 끼었다. 마치 ‘나보단 네가 더 위험해’라는 의미의 제스쳐.
“그래서, 만약 내가 위험해지면 어쩔 건데?”
그녀의 말에 불릿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이며 흙덩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스윽스윽, 스윽스윽.
“목숨이 위태롭다면 구하러 갈 정도라 생각하오.”
‘동료라면 응당 그래야 하는 것이지.’
불릿이 생각하는 동료라는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것이기에 나온 발언.
하지만 듣는 이에 따라, 상황에 따라서는 자칫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발언이었다.
“흐응, 그래? 그렇단 말이지….”
- ……하지 마.
“음? 무얼 말하는가, 흙덩이여?”
올리비아와 대화를 나누던 불릿은 흙덩이가 끼어들자 고개를 아래로 내려 바라보았다.
흙덩이는 고개를 들지 않고 그의 손길을 받으면서 말을 잇는다.
- 하지 마. 좋아하잖아.
“……?”
하지 말라는 소리에 흙덩이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떼자 그것을 덥썩 잡는 흙덩이.
흙덩이는 그 손을 자신의 머리에 다시 올려놓더니 살짝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 아냐. 쟤가 좋아하잖아. 그거 하지 마.
뭐가 좋다는 걸까. 불릿이 보기에 올리비아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기에 흙덩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본인은 딱히 아부를 한 적이 없거늘…, 자네 또한 본인에겐 소중한 동료일세.”
스윽스윽.
- ……비겁해.
“…? 어디서 배운 말인지 모르겠군.”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금세 조용해지는 흙덩이지만 불릿은 흙덩이가 안 좋은 말을 주워듣는다고 여겨 주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너희끼리만 속닥거릴 거야?”
어느새 정신을 차린 것인지 바싹 다가온 올리비아가 불릿의 옆자리에 다가와 머리를 들이밀었다.
“자네는 또 무얼 바라는 것이오?”
휴식을 취하려고 온 여관에서 흙덩이와 올리비아가 번갈아가며 피곤하게 만들자 불릿이 한숨을 쉬며 물었다.
그의 물음에 올리비아가 당연한 것 아니냐는 어투로 말하기를,
“나도 좀 쓰다듬어보자.”
“…커허험. 그것은 정령과 교감을 나누고 친밀해지기 위한 의식이니 오해하지 마시오.”
그렇다. 불릿은 이것을 ‘친밀해지기 위한 의식’이라 명명하여 흙덩이에게 가르쳤던 것이다!
이렇게라도 자위하지 않으면 흙덩이의 요구에 따라 머리를 쓰다듬을 때마다 귀족의 체면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괴로웠다.
‘그래도 명색이 백작인데’, ‘귀족 체면에….’, ‘내 나이가 몇인데’ 등등.
인간인 올리비아에게까지 하기엔 불릿이 버티질 못했다.
그러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그녀로선 불만을 가질 수도 있는 사항이었다.
“뭐야, 지금 사람 차별하는 거야?”
“그대는 계약자가 아니지 않소? 이것은 정령과의 교감을 위한 것이지 내 의지가 아니오. 커허험!”
스윽스윽.
이런 말을 내뱉는 와중에도 불릿의 손은 계속해서 움직이며 흙덩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올리비아가 내심 부럽다 생각하며 포기하려던 찰나, 불릿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아래쪽에서 흙덩이가 올리비아에게로 눈빛을 보냈다.
왜 그러나 싶어 올리비아가 쳐다보니 흙덩이는 미묘한 표정변화를 보였는데, 순간 그녀는 울컥했다.
‘요 맹랑한 것이 지금 날 비웃은 거야?’
아주 미세하고 알아차리기 힘들었으나 올리비아는 여자 특유의 감으로 흙덩이가 비웃고 있단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예로, 불릿의 손을 자연스럽게 잡고선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데, 이에 불릿은 거부감 없이 보드라운 흙덩이의 머릿결을 쓰다듬어주었다.
둘이 무언의 싸움을 나누고 있을 때, 불릿은 홀로 딴 생각에 빠져있었다.
‘영지에 돌아가면 고양이나 키워볼까? 손아귀에 따스하고 보드라운 것이 있으면 손을 놀리는 재미가 있군.’
정작 둘이 기싸움을 벌이는 대상인 불릿은 이러한 행각을 애완동물 키우는 것과 비교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후우…, 요새는 한숨만 쉬는 것 같군.”
홀로 남게 되자 불릿은 긴 숨을 토해내었다. 둘을 내보내고 객실에 혼자 남은 이유는 수련을 위해서.
아무리 올리비아와 친해졌어도 가문의 비술을 보여줄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흙덩이처럼 배신의 여지가 없는 인물이 아니라면 알려줄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인간은 아니지만.’
이곳까지 이동하며 그들은 많은 몬스터를 잡았다. 거기서 나온 부산물은 전투를 치룬 불릿과 올리비아의 몫.
그러나 마정석을 제외하면 다른 것들은 달리 필요가 없었기에 가죽이나 뼈, 힘줄 같은 것들을 상인들에게 일정한 대가를 지불받고 넘겨주었다.
물론 해체과정은 상인들이 하게 내버려두었다.
그런 일에까지 자신의 정령을 사용하기엔 꺼림칙했고, 돈 몇 푼에 자식 같은 정령을 팔아넘기는 것 같았으니까.
“크흠.”
짐짓 기침을 토해낸 불릿은 자세를 바로잡더니 한손에 마정석을 쥐고서 정령력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후우우웅…
우우우우우웅……
한동안 수련을 지속하는 사이, 고요한 방안에 다른 흐름이 포착되었다.
움찔.
그것을 느낀 불릿이 흡수를 중단하고 살며시 눈을 뜨자 고조된 기감에 인기척이 잡혔다.
‘누구지?’
자신은 수련을 한다고 올리비아에게 미리 일러두었다. 게다가 흙덩이는 자신이 어떤 수련을 하는 것인지 알고 있으니 올리비아가 갑자기 찾아오는 것을 막아주리라.
이곳에서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은 센슨과 상인들 뿐인데, 그들이 이런 한밤중에 찾아올 리는 없었다.
그러니 남는 것은 좋지 못한 의도를 가진 자들.
‘승냥이들이로군.’
흑마법사와의 전쟁으로 황폐화된 세계, 도적이 들끓는 세상이었다.
게다가 파르탄 영지는 최근 상태가 악화되었기에 영지 내부에도 충분히 도적이나 강도가 있을 법했다.
‘그들과 함께 와서 눈에 뜨인 것인가?’
상인은 돈이 많다. 장사를 하려면 돈이 있어야 했고, 사람을 부리며 상단을 꾸릴 정도면 눈독들일 만했다.
거기에 자신이 포함되었다는 게 이내 불쾌한 불릿.
그는 품에서 단검을 꺼내 손에 쥐었다.
스르릉-
이런 좁은 내부에선 창이나 장검처럼 기다란 장병기보단 단검이 더 좋을 수도 있는 법이다.
뭣보다 불릿의 손에 익은 단검이기에 효율성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불릿은 살금살금 자리에서 일어나 문 뒤로 이동했고, 아직 불안정한 텔레파시를 흙덩이에게 보냈다.
‘쯧, 안 되는군.’
바로 코앞에서도 잘 안되는데 벽을 사이에 두고 될 턱이 없었다.
그가 준비를 하는 사이, 문이 열리고 있었다.
끼기긱…
============================ 작품 후기 ============================
오늘 저녁 6시와 12시에 이어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