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2 파르탄 영지로 =========================================================================
다음날이 밝자 불릿 일행은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떠날 준비를 했다.
“저기, 볼레트.”
“왜 그러오, 올리비아?”
한창 짐을 꾸리던 불릿에게 백팩을 맨 올리비아가 희고 고운 손가락으로 그의 등을 가리키며 묻는다.
“이제 그 막대는 필요 없지 않아? 무슨 정령사가 창질을 하냐고.”
“아, 이거 말이오?”
그녀의 말에 불릿이 등에서 나무막대를 빼어들고선 허리춤에 단검처럼 매달았던 창날을 뽑아 연결시켰다.
철컥-.
“내가 정령사인 것은 맞는 말이지만, 어디 여행할 때 정령의 힘만으로 모든 일을 하겠소? 때론 스스로의 힘으로 몸을 지킬 필요도 있는 법이지.”
그러면서 한차례 창을 내지른다.
쉬익!
부웅-!
찌르고, 벤다. 창을 다루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이었으나 이것만 제대로 숙달하더라도 어디 가서 밥 빌어먹고 사는 데 지장은 없을 것이다.
“그 외에도, 단검대용으로 쓸 수도 있으니 불필요하진 않소.”
불릿은 한차례 창질을 선보이더니 이내 날과 봉을 분리시켰다.
철커덕, 철컥-
그런 그의 모습에 올리비아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쩝, 그래? 네가 그렇다면야…. 근데 넌 이제 혼자가 아니잖아?”
그러면서 필요이상으로 얼굴을 바싹 들이미는 올리비아.
“너와 나의 콤비네이션이면 네가 몸 쓸 일은 필요 없지 않을까?”
부담스러울 정도로 밀착된 상태였으나 이미 적응된 것인지 불릿은 살며시 그녀를 밀어내며 말을 잇는다.
“나는 흙덩이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소. 나의 정령력만이 아닌, 그의 기운까지 소모시킬 정도로 못난 정령사가 아니란 말이오.”
저번의 마물토벌에서도 그는 흙덩이의 기운을 소모케 만들었다.
정신을 잃었었기에 자세히는 몰랐지만, 그 따스하고 포근한 기운은 깨어난 이후에도 고스란히 전해졌던 것이다.
- 괜찮아, 괜찮아.
이에 흙덩이가 답해주자 불릿은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져 그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지 않으면 어색할 지경.
“알았으니 그만 좀 해라.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중간에 난입한 올리비아만 아니었더라면 한동안 계속 이어졌을 광경이었다.
어쩐지 불만을 보이는 흙덩이였으나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도 없었기에 불릿도 순순히 손을 떼었다.
“그럼, 출발하도록 하지.”
- …응.
“빨리 좀 가자! 얘는 정령을 자기 자식처럼 다루네?”
올리비아의 재촉에 불릿도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 여관을 나섰다.
“다음에 또 오십쇼!”
* * *
“아, 날씨 좋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씨, 올리비아는 쾌청한 하늘을 바라보며 두 팔을 벌렸다.
“스으읍, 하아아……, 공기도 맑고, 여행 떠나기 딱 좋은 날씨네.”
“그런 것 같소.”
올리비아의 독백에 불릿도 맞장구를 쳐주었다. 근래에 들어선 마물의 영향 때문인지 어두침침했던 영지의 날씨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이렇듯 맑은 날씨는 마음도 개운케 해주는 듯했다.
- 탁해.
“그게 무슨 소리인가, 흙덩이여?”
- 탁해. 똑같아.
“흐음…?”
흙덩이의 말은 얼핏 암호를 해독하는 것과 비슷해 종종 난감할 때가 있었다.
단어의 조합이 짧기에 생겨나는 이러한 현상을 불릿은 본인이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탁하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 탁해, 기운. 안 달라.
“…….”
“뭐야, 뭐라고 하는 건데?”
자신만 빼놓고 둘만의 대화가 이어지자 올리비아가 중간에 껴들었으나 불릿은 심각한 고민에 빠지고 있었다.
‘기운이 같다? 데빌로안 영지는 마물의 영향으로 기운이 혼탁할 수도 있었지. 하지만 그곳의 마물과 몬스터는 정리되었을 터인데.’
원인이 제거된 후에도 2주가량이 지났는데도 기운이 머물 수는 없다.
그래봤자 하급 마물, 육체의 폭력에 의존하는 놈인지라 마기는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이다.
‘고민 좀 해봐야겠군.’
흙덩이의 말을 흘려듣기엔 그 사항이 중대하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정령의 말은 믿을 만했다.
좋은 감정이건, 아니건 간에 계약자에게 손해를 입히는 정령은 없었으니 말이다.
“뭐야? 뭐냐구!”
흙덩이는 불릿의 감정이 짙게 배어나오자 그것만으로도 동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불릿과 동행하게 되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 접점도 없던 올리비아로서는 말이 없는 그들이 답답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 * *
첫날 여행은 순조로웠다. 흙덩이의 발언이 신경 쓰이기는 했으나 그것만 제외하면 몬스터의 습격도 없고, 날씨도 맑아 편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둘째 날부터는 얘기가 180도 달라졌다.
촤아악!
“크아악!”
“흙덩이여, 지옥송곳 5연발!”
- 지옥송곳…
슈슈슉!
“크르륵….”
검을 들고 날뛰는 올리비아와 불릿의 명령에 따라 땅에서 1미터가량의 송곳을 솟구치게 만드는 흙덩이.
그들은 지금 몬스터의 습격에 맞서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몬스터를 상대로는 불릿이 마무리를 지었다.
“하앗!”
푸푹-
입을 벌리며 비명을 지르던 몬스터의 입속에 창날을 꽂아주는 불릿.
그렇게 지옥으로 떠나는 선물을 끝으로 더 이상 두 발을 디디고 땅에 서있는 몬스터는 없었다.
“휴우, 이게 다 뭐야?”
“이상하군. 관도를 벗어나지도 않았는데 몬스터가 나타나다니.”
몬스터가 나타날 수는 있다. 그러니 상인들도 용병을 고용해 이동하는 것이니까.
“이쪽은 파르탄 영지로 향하는 길인데 몬스터가 들끓다니, 이게 어찌 된 영문이지?”
불릿이 남서쪽에 위치한 루드밀라 왕국으로 향한다고 하니 올리비아는 단번에 파르탄 영지를 떠올렸다.
데빌로안에서 그쪽으로 향하는 길은 파르탄 영지가 제격이었기 때문이다.
헌데 기껏 방향을 잡아 이동하니 이게 웬걸? 마물토벌을 끝낸 지가 언제라고 벌써부터 대량의 몬스터와 마주치게 되었던 것이다.
“올리비아, 원래 파르탄 영지로 향하는 길이 이토록 험난한 거였소?”
아무리 몬스터가 인류에 위협적인 존재라지만 이렇게 길이 닦인 관도에서까지 몬스터가 대거 출현할 수는 없었다.
그의 말에 올리비아는 땀을 닦으며 부정했다.
“그럴 리가 있겠어? 영지 사람들 다 죽는 소리를 하네.”
불릿과 올리비아는 마물토벌을 통해 한층 더 강해졌다. 그런 그들도 긴장할 만큼 많은 몬스터가 등장한 것이다.
일반 용병이나 주민들이라면 단번에 비명횡사할 수준.
삼일이 지나고 사일이 지나도록 몬스터를 마주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오죽하면 야영을 할 때도 흙덩이의 도움을 빌려 땅굴을 파고 지냈을까?
그렇게 파르탄 영지로 이동을 하다 5일째가 되는 날, 그들은 다른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 크아아…
- 끼긱, 끼기긱!
멀리서 몬스터의 울음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놈들을 상대하는 모습을 제일 먼저 포착한 흙덩이가 불릿에게 알려주었다.
- 오크, 고블린. 사람들 죽여.
여전히 조절을 하지 못하고 살벌하게 말하는 흙덩이. 이 소식을 전해들은 불릿은 옆에서 함께 거닐던 올리비아에게도 알려주었다.
“오크와 고블린무리가 사람들을 습격하고 있나보오.”
“어? 오크하고 고블린이…같이 등장했다고?”
“이상하지 않소? 수도 많고, 연합을 한다는 것이.”
“확실히…, 아차. 일단 도와주는 것부터 하자.”
그 말에 불릿은 고개를 끄덕이며 속도를 높여 습격 받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이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에도 여럿 당했는지 피를 흘리며 쓰러진 자들이 보였는데, 이에 불릿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네 이놈드을! 흙덩이! 죽음의 대지!”
- 죽음의 대지…
슈슈슈슈슉!
“크아아악!”
“끼엑!”
파파팍! 슈슈슈슉!
죽음의 대지는 초창기 불릿이 지옥송곳을 개발했을 때 시전하다 탈진했던 그 기술을 뜻한다.
좁은 지역에 많은 지옥송곳을 촘촘히 뽑아내어 피할 곳을 없애는 끔찍한 기술.
소형몬스터들의 습격이었기에 중급이라 할지라도 고깃덩이가 되어 죽어나갔다.
“후욱, 후욱.”
단번에 많은 정령력이 소모되었지만 몬스터에게 사람이 죽어나가자 분노한 불릿은 아낌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흙덩이여, 놈들을 모조리 죽일 때까지 쌍주먹 쾅!”
- 쌍주먹 쾅…
퍼퍽!
흙덩이의 양 주먹이 쏘아지며 몬스터의 머리와 가슴을 짓이긴다.
올리비아도 이에 질세라 검술실력을 뽐내며 놈들을 하나둘 죽여나갔다.
“크아아악!”
시산혈해. 시체가 쌓이고 쌓여 피가 흐르고 터지고 찢겨나간 시체에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구토를 하는 이도 있었다.
“우웩.”
“으으으, 끔찍하군.”
혼란스러워하는 틈바구니에서도 상인 하나가 불릿의 앞에 나섰는데, 그는 두려워하면서도 불릿이 은인이란 것을 인식했는지 고마움을 표시했다.
“가,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오? 혹시 고용한 용병이 모자랐소?”
간혹 돈을 아끼려 용병이나 병사를 적게 고용했다 되려 손해를 보는 이들이 있었다.
불릿의 생각을 읽었는지 상인은 손사레를 치며 강하게 부정한다.
“아이고, 아닙니다. 저희가 소규모 상단이긴 하나 이쪽 길이 그렇게 위험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길이 이토록 잘 닦인 곳인데 몬스터가 많겠습니까?”
“흐음, 그건 그렇긴 하오.”
길이 잘 닦인 관도는 몬스터도 사람의 영역으로 인지해 만만해지거나 굶주리지 않는 이상 나타나려하지 않았다.
바닥에 쓰러진 자가 6명, 뒤에서 벌벌 떨고 있는 자가 5명이니 총합 12명으로 꾸려진 상행이었던 것이다.
“와, 장난 아니네. 볼레트, 용병들은 다 죽은 것 같은데?”
올리비아가 인상을 쓰며 곁에 다가오자 불릿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확실히 적은 인원은 아닐 진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몬스터들이 습격했다는 점은 이상하다 여길만하오.”
“맞습니다. 10명이 넘어가면 놈들도 여간해선 덤벼들지 않는데, 오늘은 무슨 마가 끼었는지 이렇게 됐습니다.”
12명이면 숫자로 세는 것보다 훨씬 더 많아 보이는 인원이었다.
상인이라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검술은 익히고 있었다. 세상이 워낙 험하다보니 그들 또한 자기 몸을 지킬 방법은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파상적인 오크와 고블린의 공세에 맥을 못 추고 용병 전원이 죽어버렸으니 그들의 상행위는 앞날이 깜깜했다.
“저, 볼레트님. 저는 센슨 상단의 센슨이라 하옵니다.”
갑자기 자신을 소개하는 상인을 없는 턱수염을 쓰다듬던 불릿이 쳐다본다.
“말해보시오, 센슨.”
보통 이런 경우엔 부탁을 많이 하기에 불릿은 익숙하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이미 어떤 부탁을 할지도 예상하고 있었기에 더욱 무덤덤한 상황.
그런 불릿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는지 센슨은 한층 허리를 숙이며 간절히 빌었다.
“저희는 파르탄 영지로 가는 길이온데, 폐가 되지 않는다면 함께 동행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흐음….”
“부디, 부디 부탁드리옵니다. 금액은 섭섭지 않게 드리겠사오니 저희를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센슨과 그의 일행은 불릿과 올리비아의 무력을 눈앞에서 똑똑히 지켜보았다.
올리비아의 민첩하면서도 날카로운, 유려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술.
불릿의 명령에 따라 몬스터떼를 초토화시킨 흙덩이의 위력.
거기에 더불어 불릿 자신도 정령사답지 않게 수준급의 창술을 구사하니 얼마를 주고서라도 그들을 고용해야 했던 것이다.
그들이 떠나고 나면 더 이상 용병들도 없으니 앞날이 깜깜한 상황이었다.
다행히도 불릿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충실한 자, 어려운 자를 보면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내 그대들이 걱정되던 차인데 이렇듯 부탁까지 하는 마당에 거절할 순 없지.”
그러면서 불릿은 뒷짐을 지며 센슨에게 말을 답을 주었다.
“좋소. 의뢰를 받아들이겠소.”
“아이고, 감사합니다! 여봐라, 뭣들 하는가! 당장 이리로 와서 볼레트 씨에게 인사하거라!”
겁에 질렸던 상인들도 단번에 밝아진 얼굴로 불릿과 올리비아에게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흙덩이의 강렬한 활약 덕분인지 상인들은 모두 불릿에게 몰렸고, 올리비아는 덤처럼 인사를 받았다.
이에 올리비아는 뒤에 제쳐져 있던 흙덩이를 껴안으며 불만을 토해냈다.
“나도 열심히 했는데 거 더럽게 구네. 그치, 예쁜아?”
흙덩이에게 얼굴을 부비며 말하자 흙덩이는 입을 벙긋거리며 들리지 않을 테지만 올리비아의 대꾸했다.
- 나는 흙덩이야. 바보야.
“그래그래, 너도 열심히 했어. 볼레트에게만 고마워하고, 남자들은 치사하지?”
- 나는 상관없어. 바보야.
흙덩이의 입모양은 그저 벙긋거리기만 할 뿐 모양까진 흉내 내지 못했기에 올리비아와 흙덩이의 대화는 서로 일방통행이었다.
- 저리가, 손만 잡아.
거리구경을 시켜줬던 덕분에 이전처럼 거부감을 보이진 않았으나 그래도 싫어하는 흙덩이.
- 불릿, 도와줘. 얘 싫어.
“다들 고생 많았소. 앞으로는 내 지시에 따라주길 바라오.”
“이를 말입니까? 예, 예.”
이 말을 들어야 할 당사자는 정작 상인들과 얘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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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작 200기념으로!
감사합니다, 여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