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1 흙덩이를 부탁해! =========================================================================
부스럭-, 부스럭-.
“에, 이건 여기에 넣고, 이건…. 빨리 먹어야 하니까 위에 올려야지.”
불릿에게 부탁을 받은 점원은 주섬주섬 가방에 음식을 넣고 있었다.
1층 식당의 한쪽 구석에서 짐을 정리하고 있었기에 여관을 이용하는 모든 이가 그 광경을 볼 수 있었는데, 올리비아도 그중 하나였다.
“뭐야, 누가 떠나?”
토벌이 끝난지 벌써 10일 넘었지만 용병의 대다수는 아직까지 의뢰를 수행할 생각이 없었다.
목숨이 오고가는 전투를 끝내고 나면 흔히 발생하는 현상이었는데, 그래서 용병들이 많은 돈을 벌면서도 재산을 소유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향락에 빠져들지 않으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질 만큼의 용기를 갖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놀기만 하는 것은 아니고, 다음 의뢰를 준비하기 위해 몸을 가다듬거나 정보를 수집하는 등의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와중에 점원이 짐을 꾸리는 모습을 포착했으니, 올리비아는 베테랑 용병답게 누가 어떠한 이유로 떠나려는 것인지 알고 싶었나보다.
“에, 볼레트 씨에게 부탁을 받았는뎁쇼.”
“웬 부탁? 나는 그런 말 못 들었는데?”
“예? 하지만 분명 떠나야 한다면서 식량을 부탁하셨는데 말입니다.”
“뭐라고?”
점원의 말에 올리비아는 화가 났는지 씩씩 성을 내며 계단을 올라갔다.
쿵, 쾅, 쿵, 쾅-
벌컥!
“야, 볼레트! 이게 무슨 말이야! 떠난다니!”
“과년한 처자가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은….”
“나한테 말도 없이 떠나려고 했냐고 묻는 거야!!”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소리 지르는 올리비아의 행태에 불릿이 귀를 막았던 손을 떼며 인상을 찌푸렸다.
“말하려고 했소. 다만 아까 전에 결심한 사항이기에 올리비아가 알 수 없었던 것이지.”
불릿은 올리비아에게 알리고서 떠난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어줄 당사자인 올리비아가 흙덩이와 함께 거리를 쏘다니고 있었으니 상당시간이 흐른 후에야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화난 얼굴로 불릿을 쏘아대고 있을 때, 문 뒤편에서 흙덩이가 천천히 걸어왔다.
- 막지 마. 저리가.
자신이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자 흙덩이는 올리비아의 다리를 툭툭 밀었고, 이 혼란스런 와중에도 올리비아는 용케 다리를 들어 입구를 비켜주었다.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흙덩이가 불릿이 누워있던 침대에 앉자 불릿이 흙덩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잇는다.
“올리비아도 흥분하지 말고 이쪽 의자에 앉으시오. 내 천천히 설명해주겠소.”
“헛소리만 해봐라.”
그녀는 ‘흥’이라는 콧소리를 내며 거칠게 의자를 뽑아 털썩 걸터앉은 채 다리를 까닥이며 턱을 괴었고, 불릿은 까칠 도도한 올리비아를 보며 고개를 저으면서도 설명을 시작했다.
“나는 가야할 곳이 있다고 전에도 말했었소. 기억하오?”
“…어. 그게 뭐?”
사전에 알리긴 했어도 떠난다는 말은 아니었기에 불만은 가진 것이리라.
“그에 반해 올리비아는 마물토벌이 종료됨으로써 더 이상 나와 같이 다닐 이유가 사라졌소. 이 또한 맞소?”
“……어.”
그들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마물토벌로 인해 형성된 임시적인 동행이었다.
이유가 없으면서 같이 있는 게 더 이상한 상황. 불릿은 그걸 꼬집는 것이다.
“오늘은 쉬고 내일 떠날 것이오. 이에 질문 있소?”
“내일? 그렇게나 빨리?”
도도했던 자세는 어디가고 초조한 기색을 내뿜으며 불릿을 쳐다보는 올리비아.
그런 그녀에게 불릿은 진짜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잘근잘근…
그녀는 고민하는 듯 입술을 깨물다 이내 입을 떼었다.
“그럼 나도 같이 가.”
“……올리비아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멀리 가오. 루드밀라 왕국이 목적지니까.”
“헉, 그렇게나 멀리?”
남서쪽이라길래 단순히 ‘아아, 그렇구나’라고 생각하던 올리비아. 왕국 몇 개를 껑충 뛰어넘을 정도로 머나먼 곳에 위치해있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갈래. 네 말대로 나는 딱히 할 일도 없고, 너랑 다니면서 조그만 소일거리나 하지 뭐.”
이쯤에서 포기할 줄 알았던 올리비아가 동행을 고집하자 불릿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는다.
“올리비아는 용병이 아니오? 나와 다니면 제대로 된 의뢰를 수행할 수 없소만….”
“괜찮아, 괜찮아. 까짓, 당일치기로 가능한 의뢰들만 간간히 해도 돼. 그냥 같이 다니게만 해줘.”
“흐음…….”
지나칠 정도로 바라는 것이 없었다. 불릿의 입장에선 유능한 검사인 올리비아와 함께 다니는 편이 더 좋기는 했다.
호흡도 잘 맞았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는 사실은 배신당할 걱정을 안 한다는 면에서 큰 점수를 줄 수 있었다.
꾸욱꾸욱…
“음? 왜 그러는가, 흙덩이여?”
잠시 고민에 빠졌던 불릿은 자신의 옷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흙덩이가 불릿의 소매를 당기고 있었는데, 흙덩이는 올리비아를 쳐다보며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옷만 당기고 있었다.
“흙덩이여?”
- ……
또 다시 대꾸를 안 하자 살짝 머리가 아파지려는 찰나, 이를 관망하던 올리비아가 재빨리 말을 던졌다.
“괜찮지? 괜찮은 거지?”
“좋소. 앞으로도 잘 부탁하오, 올리비아.”
“좋았어! 잘 부탁한다고, 파트너!”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기세로 기뻐하는 올리비아. 이에 따라 흙덩이가 불릿의 소매를 잡아당기는 속도와 힘이 한층 빨라졌다.
꾹꾹꾹꾹꾹-
“으윽…, 왜 그러는가, 흙덩이여?”
몸이 비틀거릴 정도로 잡아당기자 참다못한 불릿이 물었으나 이번엔 흙덩이가 애달픈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 ……싫어.
“뭐?”
- 같이 싫어. 우리 둘만.
“으음.”
기쁨에 몸서리치는 올리비아가 이쪽의 상황을 모를 때 불릿은 흙덩이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작게 속삭였다.
‘그러면 안 되네, 이젠 올리비아도 우리의 동료일세.’
- ……
‘착하지, 흙덩이? 본인의 말을 잘 들어야 착한 정령이겠지?’
- ……응…….
결국 불릿에게 설득당한 흙덩이가 그의 손길에 머리를 맡기며 눈을 감자 한숨을 내쉬는 불릿.
“후우.”
“응? 갑자기 웬 한숨?”
불릿의 심기가 어지럽다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챈 올리비아가 물어오자 불릿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그럼 물품을 추가로 구입해야겠구려?”
불릿이 여자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지만 여성은 남자보다 필요한 물건이 더 많다고 알고 있었다.
먹는 것이야 그렇다 쳐도, 다른 것들은 그가 알 수 없으니 난감한 상황.
이에 올리비아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허리에 손을 얹는다.
척.
“흐흥, 그런 걸 생각하고 있었어? 의외로 귀여운 구석도 있는데?”
“……뭐가 말이오?”
“모르는 척 하시겠다-? 그럼 나도 말할 순 없지.”
“끄으응….”
“하하하! 너, 그 얼굴 되게 웃기다! 앞으로 종종 써먹어야겠는데?”
올리비아가 불릿을 놀리고 있었지만 불릿은 그녀가 무엇을 가지고 웃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뭐가 귀엽다는 거지?’
자신은 그저 물품의 추가구입을 말했을 뿐인데 자기 혼자 추측하고, 웃더니 놀리기까지 한다.
이 모습에 흙덩이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지며 중얼거렸다.
- 이상해.
“그럼 이번엔 나도 쇼핑 좀 하고 올게. 필요한 게 있거든.”
대화가 끝나자 언제 화가 났다는 양 올리비아는 환히 웃는 얼굴로 방문을 나서며 추가로 한마디 했다.
“이번엔 흙덩이는 네가 보살피라고. 알았지?”
“뭔가 좀…, 아, 알겠소. 다녀오시오.”
마치 남편에게 애를 맡기고 외출하는 부부의 대화 같았지만 불릿은 평민의 결혼생활 따위 몰랐다.
하지만 어투에서 전해지는 감정이 있었기에 이상함을 감지한 것.
딱히 꼬집어서 ‘이거다!’라고 할 수는 없었기에 찝찝함만 남기고 그녀를 떠나보내야 했다.
달칵.
방문이 닫히며 흙덩이와 불릿, 둘만이 남자 그곳엔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 ……
평소에도 말이 없던 흙덩이였으나 이번엔 지나치게 말이 없었다.
움직이지도 않고, 아니.
움직이긴 했다. 문제는 애달프긴 애달픈데 조금 언짢은 느낌을 주는 시선으로 불릿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이었지만.
그리고 불릿은 어떤 면에선 눈치가 없었지만 이런 심리변화 하나는 감지를 잘했다.
“흙덩이여, 대체 올리비아의 어떤 면이 마음에 안 들길래 그러는 것인가?”
- ……
“그녀는 자네를 며칠씩이나 데리고 인간세상을 소개시켜 주었네. 이제 동료가 될 인물에게 그러한 반응은 좋지 못하네.”
- ……
약간 말을 돌려서 하는 것이었으나 내용을 보자면 불릿이 흙덩이를 혼내는 것이었다.
정령사는 정령의 비위를 잘 맞춰줘야 했으나 어디까지나 계약내용은 평등한 관계.
서로의 이익에 손해가 생겨난다면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다.
- 화났어?
아까와는 달리 조심스런 말투. 남들이 보기엔 무미건조한 흙덩이였으나 불릿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대목에서 그는 의젓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고개를 저으며 그게 아니라는 말을 해주었다.
“화난 것이 아니네. 자네가 어떤 이유로 올리비아를 싫어하는지 본인은 알 수 없으나, 단순히 싫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를 배척하는 것은 잘못된 일인 게야.”
- 싫어하면 안 돼?
“싫어할 수도 있지. 하지만 그것을 대놓고 드러내는 것은 어리석은 짓. 숨길 줄도 알아야하는 법이네.”
- 숨겨? 지옥구덩이처럼?
비유가 조금 이상했지만, 숨긴다는 의미만 떠올리면 지옥구덩이라는 함정은 비슷한 예시가 될지도 몰랐다.
“으음, 적절하진 않으나 사전적의미만을 떠올린다면 그리 틀린 것도 아니군. 그리 생각하게나.”
아직 흙덩이가 말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기에 아는 범주 내에서 설명을 하려니 이렇게 되었다.
- 알았어, 숨길게. 지옥구덩이처럼…
어쩐지 섬뜩한 말이었으나 불릿은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려는 흙덩이가 기특하다는 듯 쓰다듬어줄 뿐이었다.
쓰윽, 쓰윽-
- …우리 어디가?
그러면서 흙덩이가 묻자 잠시 고민하던 불릿, 그는 천천히 입을 떼며 물음에 응답해주었다.
“본인의 고향…이라고 하면 되려나. 과인(寡人)이 다스리던 영지라네. 백성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 고향?
쓰담쓰담.
“음, 그렇다네. 자네가 원래 있던 곳을 고향이라고 할 수 있겠군.”
- 그럼 싫어. 안 갈래.
“으음? 어째서 그러한가? 소중한 장소인데.”
이상하리만치 자신이 있던 곳을 싫어하는 흙덩이. 이에 대해 불릿이 묻자 흙덩이는 재차 대답했다.
- 싫어. 재미없어, 지루해, 심심해.
‘확실히 인간계가 유흥 하나는 뛰어나긴 하지.’
다른 것을 다 제쳐두고, 인간세상은 꽤나 재미난 곳이었다. 짧은 생을 가진 인간들이 발버둥을 치며 온갖 희로애락을 뒤섞는 곳.
거리에만 서있어도 하루 종일 구경하는 맛이 있었다.
흙덩이가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정령들이 인간계를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가 재밌다는 점도 간과해선 아니 되었다.
“흙덩이여, 우리가 가고자하는 곳은 본인에겐 매우 소중한 장소라네. 자네의 마음에도 쏙 들것일 게야.”
- …정말?
“그럼, 그렇고말고? 설마 본인이 자네를 홀로 내버려두겠는가?”
‘혼자가 된다는 것은 무섭고 두려운 일이지.’
혼자라는 것. 백작이라는, 영주라는 직위가 외로운 위치이긴 했으나 그의 곁엔 언제나 사람들이 있었다.
그가 홀로 숲을 헤매일 때 느꼈던 고독과 외로움, 그리고 공포.
이것을 자신의 소중한 이들에게 맛보게 해주긴 싫었다.
“자네는 본인만 믿고 따라오시게. 내 알아서하도록 하지.”
- 응. 난 불릿만 믿어.
포옥.
어디서 배운 것인지 불릿에게 머리를 기대며 말하는 흙덩이.
머리를 쓰다듬을 수 없게 되자 불릿은 흙덩이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 그래도 걔는 싫어.
앙칼지다고 해야 할까? 분명 무표정에 무미건조한 어투였으나 새언니를 미워하는 시누이의 모습이 흙덩이에게서 언뜻 엿보였다.
* * *
“에엣취!”
쿨쩍!
올리비아는 갑자기 터져 나온 제체기에 코를 훌쩍이며 손으로 슥 문질렀다.
“아가씨, 감기라도 들었어? 몸조리를 잘해야지.”
후덕한 인상의 중년여성은 그녀가 감기라도 걸린 것인지 걱정이 되어 말을 건넸고, 올리비아는 배시시 웃으며 손사레를 쳤다.
“어휴, 괜찮아요, 괜찮아! 이래봬도 전 어엿한 용병이라고요?”
그러면서 슬쩍 소매를 걷어 알통을 보여주는 올리비아.
“이 고운 살결에 얇은 팔뚝으로 무슨 용병일을 하겠다고. 퍼뜩 시집이나 가지 말이야.”
“뭐, 언젠가 가던지 말던지….”
“동생처럼 귀여운 여자를 누가 마다하겠어? 그 남자는 복 받은 게야.”
그녀의 새하얗고 가느다란 팔목이 드러나자 지나가던 남자들이 멈칫,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예끼, 이 사람들! 썩 물러나지 못해?!”
중년여성이 호통을 치며 인상을 쓰자 열린 문틈으로 그녀를 엿보던 남성들이 서둘러 발길을 재촉했다.
“쿨쩍. 진짜 감기라도 들었나?”
올리비아는 알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며 물건을 고르고 있었는데,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남성은 절대 사러오지 않을 거시기한(?) 물건이었다.
============================ 작품 후기 ============================
몰래 한 번 더!
...이따 12시에도 올라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