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9 흙덩이를 부탁해! =========================================================================
‘이거 안 줄 수도 없고, 곤란하게 되었군.’
지금 불릿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마정석이었기에 흙덩이가 달라고 하자 곤란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흙덩이가 원하는 물건을 주지 않으면 감정이 상할지도 몰랐다.
흙덩이는 불릿에게 소환된 이후로 그에게 불평 한 마디 제대로 토로해본 적 없이 명을 훌륭히 수행했고, 목숨까지 구해주었다.
‘그래, 까짓것 하나쯤은 주어도 무방하다.’
생각해보면 대단한 것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여기에 모여 있는 마정석의 등급은 모두 동일한 최하급.
딱히 뭐가 더 좋고 말고도 없는 것이다.
다만, 흙덩이가 집어든 마정석의 색이 다른 것들과 비교해 탁하다는 점?
마기가 소모되어 평범한 돌멩이가 된 것은 아닌데, 이상할 정도로 어두운 빛깔을 띠고 있었다.
‘본인이 처음 보는 마정석이니 세상에 내보인 적이 없는 유형인 것 같은데, 조사를 해봐야….’
- 싫어?
마치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마정석을 품안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흙덩이.
다른 마정석들엔 눈길도 안 주면서 저 요상한 마정석만 고집하는 것을 보니 다른 이유가 있는 듯했다.
이상한 색의 마정석이기에 충분한 연구를 통해 성분과 효능을 알아내야 했으나 이런 곳에서 마법사를 쉬이 구할 순 없었다.
애초에 마법사가 있었다면 마물토벌은 보다 편한 여정이 됐을 것이다.
‘어쩔 수 없군. 그래도 정령이니까 죽거나 하진 않겠지.’
어차피 주기로 결정했으니 자신이 쪼잔하지 않다는 점을 알려주어야 했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본인은 그저 자네가 탈이라도 날까봐 걱정되어 그랬다네.”
이는 말뿐만이 아닌 실제 그의 심정이기도 했다. 정령이 마정석을 흡수한다는 경우는 듣도 보도 못한 경우,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 정말?
흙덩이의 물음에 불릿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한다.
“그렇고말고. 혹여 마정석을 흡수하다가도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중단하시게.”
계약을 통해 자신을 걱정해주는 불릿의 감정이 전달되자 흙덩이는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내심 뿌듯했는지 어디선가 배운 ‘엣헴’ 자세를 선보였다.
‘저건 또 어디서 배운 것이지?’
불릿은 저런 자세를 보여준 적이 없었다. 흙덩이의 학습능력이 무섭도록 빠르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으나 종종 어디서 배웠는지 모를 행동을 보여줘 그를 당혹케 만들었다.
- 그럼 이건 내꺼.
“그래그래…, 허어?”
탁한 빛깔의 마정석이 자신의 것이라 인식되자 흙덩이는 불릿이 말릴 새도 없이 그대로 꿀꺽 삼켰다.
꿀꺽.
“어…….”
- ……
마정석을 인간이 음식을 섭취하는 것처럼 입을 통해 먹어버린 흙덩이.
불릿은 어떤 효과가 발생할지 몰라 대비를 했으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자 흙덩이의 몸을 더듬었다.
더듬더듬.
- …? 뭐해, 불릿?
“이상하군, 아무 반응이 없다니.”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훑고 만지며 확인하는 불릿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에 빠져 이를 듣지 못했다.
“기운이 강해지거나 정령력의 증가가 이루어지지도 않았거늘….”
그러면서 혹시나 싶었는지 인간소녀와 똑같게 생긴 흙덩이의 식도와 가슴을 손가락으로 찔러보았다.
쿡쿡.
- ……이상해…….
뭔가 느껴지는 게 있는지 꼼지락거리며 몸을 비트는 흙덩이. 이를 인식하지 못한 불릿은 흙덩이의 배꼽지점까지 눌러보고 나서야 손을 떼었다.
“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는데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알 수가 없군.”
자신의 조사로는 마정석이 어떻게 된 것인지 결론을 낼 수가 없자 불릿은 흙덩이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흙덩이여, 자네가 삼킨 마정석은 어찌 되었는가?”
누런빛의 흙덩이가 어쩐지 약간 검붉어진 것 같았는데, 이게 마정석의 효과인 것 같았기에 흙덩이를 유심히 지켜보는 불릿.
그런 그에게 흙덩이가 잠시 뜸을 들인 후 대답을 해주었다.
- 몰라…
아직 언어에 익숙하지 않은 흙덩이가 적절한 단어를 떠올리지 못했다 여긴 불릿은 좀 더 확실하게 묻기로 했다.
“몸의 어디에 마정석이 있는가?”
이전보다 명확해진 표현. 그러자 흙덩이도 대답할 수 있었다.
- 몰라.
“모른다고? 그게 말이나 되는가?”
흙덩이는 불과 30분 전에 마정석을 삼켰다. 그가 30분 동안 흙덩이의 몸을 만지는(….) 사이에 흡수가 이루어졌다면 불릿이 알아차렸을 것이다.
- 몰라. 화내지마.
“아니, 화를 내는 것은 아닌…, 후우. 아니라네.”
결국 한숨을 토해내며 흙덩이에게서 물러나는 불릿. 흙덩이는 정령이고 육체는 소환자의 정령력을 자신의 기운에 맞게 전환해 구성한다.
그렇기에 모를 수가 없는 일인데, 모른다고 하니 불릿이 저도 모르게 성을 냈던 것이다.
그리고 정령사는 정령과의 교감을 이루는 존재이기에 이를 눈치챈 흙덩이가 저리 말하는 것이다.
‘…모를 수도 있겠지.’
이상한 상황이었지만 결과만 보자면 겨우 최하급 마정석 한 개만 소실되었을 뿐, 별다른 손해는 없었다.
여기서 흙덩이를 더 몰아세우면 이번엔 흙덩이가 짜증을 낼지도 몰랐다.
정령이 삐지면 정령사의 명령에 불응할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언제 위험한 상황에 빠져들지 몰랐다.
아무리 경지가 높아도 정령을 이용하지 못하는 정령사는 쓰레기나 마찬가지니 말이다.
‘그런 경험은 한번으로 족하다.’
숲에 홀로 떨어져 떠돌이오크와 조우해 겪었던 굴욕, 이후 화전마을에서 흙덩이와 계약을 맺기까지의 서러움은 다신 느끼고 싶지 않았다.
“흙덩이여, 본인을 믿어주게. 나 불릿 폰 바포 백작은 자네에게 유감이 절대, 절대로 없음을 밝히는 바이네.”
그러면서 흙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흙덩이가 이 친밀함을 위한 의식(?)을 좋아한다는 것을 불릿은 이미 알고 있었다.
스스로가 다가와 쓰다듬어달라고 하는데 모르면 그게 바보였다.
스윽스윽-
- ……
애달픈 눈동자로 불릿을 쳐다보던 흙덩이는 얌전히 서서 그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한참을 쓰다듬어주던 불릿은 흙덩이의 기분이 풀렸다 생각했는지 느릿하게 손을 떼고서 입을 열었다.
“이제 본인도 마정석의 흡수를 시작하겠네. 이는 우리 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니 잠시만 기다려주시게.”
바닥에 널린 마정석의 양은 많았고, 이것들을 가문비전의 술법으로 흡수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
여기는 영지의 한복판, 그것도 여관의 객실이라 흙덩이가 구경하거나 가지고 놀만한 물품도 없었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한 흙덩이가 심심해 할까봐 양해를 구한 것인데, 흙덩이가 이에 대꾸한다.
- 괜찮아.
어쩐지 긍정적인 말을 내뱉은 흙덩이가 불릿에게 밀착한 상태에서 말을 잇는다.
- 안 심심해.
“흙덩이여, 그렇게 가까이 있으면 조금 불편하네만….”
- ……
“흙덩이여?”
“이보시게.”
“땅의 하급 정령이여, 본인이 불편하네만?”
묵묵부답. 상대방이 대꾸조차 않을 때가 대화를 할 때 가장 난감한 상황인 것이다.
불릿은 갈수록 흙덩이가 인간다운 면모를 보일 때마다 당혹스러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자기 좋다고 그러는 것인데 뭐라 하는 것도 감정을 상하게 만드는 것이기에 내버려두는 수밖에.
“끙, 수련에 방해만 하지 말아다오.”
- …응.
대꾸도 않던 흙덩이가 이번엔 잘도 말했다. 불릿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집어삼키고서야 마정석을 손에 쥐고 정령력을 늘려갔다.
우우웅…
‘이번 토벌의 참가는 잘 결정한 것 같다.’
쌓여가던 정령력을 한번 크게 비우고 나니 오히려 더 잘 쌓이는 것 같았다.
마법사나 정령사는 자신의 힘을 한계치까지 사용하지 않는 것이 기본이었다.
기사들의 수련법과는 달리, 한계 이상으로 사용하게 되면 자칫 붕괴가 이뤄지기 때문.
마법사는 서클이 파괴되거나 금이 가고, 정령사는 계약이 해지되는 불상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기사처럼 몸이 튼튼하지 못하기에 벌어지는 사건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불릿은 조금 달랐다.
‘천박하다 여긴 창질이 조금은 도움이 되었군.’
병사나 기사도 아닌, 정령사가 되어서 부족한 무력을 때우려 몸을 놀렸었다.
마물과의 전투에서는 그의 조잡한 창질로는 상대자체가 안 되었기에 사용하진 않았었지만, 그동안 창질로 단련된 몸은 병사들보다 약간 나을 정도로 튼튼해져 있었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였으나 불릿은 바쁜 삶을 살았었기에 그럴 짬이 안 났다.
우우웅…
‘하나, 둘, 셋…, 여섯….’
점점 바닥에 쌓이는 기운을 빨린 돌멩이들. 마정석을 사용해갈수록 불릿은 한층 강해져가고 있었다.
경지를 막고 있는 벽을 허물진 못하더라도 기술 한두 번이라도 더 사용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성공적인 것이다.
‘시간차를 두고 좀 더 정순하게 뽑아내야겠군.’
그렇게 불릿은 강해지기 위해 수련을 거듭하고 있었다.
* * *
흙덩이의 시점에서 보면 세상은 아직도 신기했다. 불릿을 통해 배워나가는 인간계는 언제나 흥미진진해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부스럭.
흙덩이는 불릿이 쓰고 모아놓은 마정석을 집어 들었다.
- ……
기운이 사라져 평범한 돌멩이가 되어버린 마정석. 그것을 매만지며 가지고 놀던 흙덩이는 그것들을 주섬주섬 모으기 시작했다.
- 내꺼, 불릿꺼.
자신이 배웠던 단어들을 적용해 인간으로 치면 소꿉놀이와 비슷하게 노는 흙덩이.
생김새도 어린 소녀의 모습이니 가히 잘 어울린다고 부를만했다.
수련을 하느라 정신없는 불릿의 곁에서 흙덩이는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 스스로 소꿉장난을 만들어내어 놀았다.
- 이건 바보여자꺼.
두 갈래로 나뉜 돌멩이더미 사이에 딸랑 1개만 놓인 돌멩이가 있었는데, 흙덩이는 그것을 보고 바보여자의 것이라며 따로 나누어 놓았다.
- ……기분 나빠.
휙.
잠시간 따로 놓은 1개의 돌멩이를 바라보더니 방구석으로 던져버렸다.
투둑, 툭.
고요하던 방에서 흙덩이의 혼잣말 외에 다른 소리가 울리자 불릿이 눈꺼풀을 열고서 말을 건다.
“무슨 일인가, 흙덩이여?”
흙덩이의 독백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아서일까, 불릿은 어떤 상황에서 흙덩이가 그러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 별로. 그거 언제까지 해?
말을 돌리는 흙덩이. 뭔가 미심쩍었지만 이내 불릿은 흙덩이의 물음에 답해주었다.
“며칠은 더 해야 할 것 같네. 급히 먹는 빵만큼 체하기 쉬운 것도 없지.”
- …나 또 기다려?
어지간히 심심했는지 칭얼거리지 않던 흙덩이가 불만을 토해낸다.
그런 흙덩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불릿이 하는 말.
“본인이 하는 수련은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라네. 이곳이 심심하다면 올리비아와 거리구경이라도 해보겠는가?”
그동안 정령력의 향상이 있었기에 불릿의 곁이 아닌 인근의 거리정도라면 페널티 없이 따로 이동이 가능했다.
- 거리가 뭐야?
일상적으로 보아오는 것이라도 흙덩이가 모르는 단어는 많다. 거리 또한 그중 하나.
“흠. 거리란 사람이 자주 이동하는 길을 뜻하네. 보통 집과 집 사이, 또는 건물 사이를 뜻하지.”
- ?
“여관 밖에 사람이 많지 않은가?”
- 응. 많아.
“그곳이 거리라네. 나가서 좀 구경해보고 싶은가?”
사람이 많으면 당연히 구경할 것도 많다. 호기심 왕성한 흙덩이에게 있어 거리, 특히 시장 같은 경우는 하루종일 있어도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 불릿이랑은 안 돼?
“흐음, 올리비아와는 싫은가?”
- 불릿이 좋아.
이상하게 흙덩이는 올리비아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아니, 올리비아는 흙덩이를 귀여워했었지만 그것을 흙덩이가 거부했다.
그러니 올리비아와의 사이도 자연히 멀어지게 된 상황.
하지만 불릿의 부탁이라면 올리비아도 거부하진 않을 것이다.
아직까진 흙덩이의 반응은 어린아이의 투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내 빨리 끝낼 터이니 며칠만 올리비아와 다녀보시게.”
- 내가 안 지켜줘도 괜찮아?
안전의 이유도 있기에 흙덩이가 멀어지는 것은 좋은 현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방안에 틀어박혀 수련만 하는 것이라면 딱히 위험요소는 없으리라.
일단 그를 주목하는 이가 몇 없었으니 말이다.
“본인은 괜찮다네. 자자, 말이 나온 김에 올리비아와 대화라도 나눠봐야겠군. 자네도 함께하지.”
- 응.
자리에서 일어난 불릿이 흙덩이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
흙덩이가 정령이란 사실은 사람들 사이에 꽤나 알려져 있었다.
피부도 누렇고, 너무도 아름다운 외모의 미소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인간다운 면모가 많았기에 며칠 마주치다보면 시선이 쏠리진 않을 것이다.
‘올리비아에게 좀 맡아달라 해야겠군.’
…불릿의 행동은 아는 사람에게 딸을 맡기는 아빠의 모습이었지만 이를 알 리 없는 흙덩이는 그저 들뜬 기색을 보일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표지는 잘 보셨나요?
내일도 같은 시각, 잘 부탁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