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정령사-47화 (47/241)

00047  토벌의 결과  =========================================================================

그날 밤은 불릿과 올리비아라는 두 용병영웅을 위해 만찬이 마련되었다.

만찬이라 해서 대단히 화려하거나 엄청 비싼 음식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영주의 취향이 그대로 드러난 정갈한 음식은 고된 여정으로 인해 심신이 지친 그들의 위장을 달래주어 맛나게 먹을 수 있었다.

달그락, 달각-.

스슥, 슥슥슥.

위에 부담이 적게 가는 치즈퐁듀와 여기에 곁들여서 먹는 달콤한 빵.

달달하며 폭신한 빵에 적셔먹는 퐁듀의 담백하며 짭짤한 맛은 가히 일품이었다.

불릿은 귀족의 예법에 따라 능숙하게 순서를 지키며 식사를 해나갔는데, 그것을 바라본 영주의 눈이 번뜩였다.

“볼레트 경은 귀족의 식사법을 아는가 보군?”

이런 말이 나올 줄 알았던 불릿은 대수롭지 않은 양 음식을 입안에서 사라지게 만든 후에야 대답했다.

“꿀꺽. 예. 제가 귀족이 될 일은 없겠으나 예절만이라도 익힌다면 어딜 가서 예의 없단 소릴 듣진 않을 것 같았기에 미리 익혀두었습니다.”

“흐응. 그러한가.”

그리고 계속되는 식사.

입안에 음식물을 내보이는 것 또한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기에 이렇듯 한쪽이 식사를 하고 있으면 상대방을 기다리거나 아니면 식사 후에 대화를 이어나가야 했다.

이미 사전에 불릿에게 추궁과 비슷한 대화를 실컷 나눈 후였기에 필로스 영주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

슥, 스슥-.

나이프로 빵을 자르고 포크로 찍은 후 퐁듀에 조신하게 찍어먹는 올리비아.

이 자리에서 의외인 것은 올리비아였다. 그녀가 뛰어난 검사이기는 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용병의 기준.

그녀수준의 검사라면 기사들에게선 여럿 찾아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영주의 눈에 띄지 않은 것인데, 그녀는 의외로 귀족의 예법에 익숙한지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서도 순서를 이탈하지 않았다.

‘역시 무슨 사연이 있음이 분명하군.’

영주가 관심을 보인 자는 볼레트 한 사람 뿐이었다. 그럼에도 올리비아는 이 자리에서 함께 식사를 나누고 있었다.

게다가 이곳까지 오며 올리비아에게 보인 카를로스의 보이지 않은 세심한 배려.

불릿은 그녀에 대한 하나의 추측을 내릴 수 있었다.

‘몰락귀족이거나 그 후예인 것 같군. 그렇다면 모른 체 해주는 것 또한 예의겠지.’

누군가 한번쯤 물어볼 법도 하건만 아무도 올리비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의도적으로 올리비아를 이야기의 도마에 올려놓지 않으려는 것이고, 다른 이들이 그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반증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일만으로도 벅찬 불릿으로선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손을 담그기 껄끄러웠으므로 결론을 내린 이후 신경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볼레트, 음식은 입에 맞아?”

“……크흠.”

영주가 기침을 통해 눈치를 주었으나 크게 나무라는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저 자제하라는 의사표현정도?

“조심할게요, 영주님.”

“……알겠소이다.”

이상한 대화. 뭐라 콕 찝어 말할 수 없었지만 영주와 용병의 대화라기엔 조금 어색했다.

불릿은 조그맣게 뜯은 빵을 퐁듀에 적셔먹으며 자신에게 눈길을 보내는 올리비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의 작은 움직임에도 올리비아는 밝게 웃으며 음식을 해치웠다.

달그락!

* * *

“아, 배부르다!”

풀썩-

올리비아는 소파에 몸을 푹 파묻으며 노곤함을 드러냈다.

그녀만큼은 아니지만 불릿 또한 오랜만에 만족할 만한 식사를 했기에 은근히 풀어지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귀족다운 식사를 한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귀족의 식사. 평민이 보기엔 번거롭고 복잡해 먹다가도 체할 것 같은 기분이 들겠지만 그들에게 있어 그건 일상이었다.

무엇보다 식사의 품질이 훌륭했기에 먹다 체하더라도 한번쯤 경험해보고 싶은 것이 귀족의 식사인 것이다.

“과년한 처자가 식사직후에 드러눕는 것이 아니오.”

“그만 좀 해. 소파에 허리 좀 넣었다고 너무 과장하시네.”

기분 좋은 포만감에 배를 두드리던 올리비아는 불릿의 핀잔에 불만을 드러냈다.

아무리 그래도 휴식시간에까지 여성으로서의 몸가짐을 지적받는 것은 불릿에게 호감을 가졌다한들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 ……

흙덩이도 불릿을 따라 올리비아를 쳐다봤는데, 무슨 생각에서인지 올리비아가 앉은 소파에 따라서 앉는다.

포옥.

푹신한 소파가 흙덩이가 앉음에 따라 살짝 안으로 들어갔다.

“뭐야, 정령도 소파에 앉아?”

자신을 따라하는 듯한 흙덩이의 행동에 올리비아가 불릿을 쳐다보며 묻는다.

- 하지 마?

올리비아의 말에 흙덩이가 불릿을 쳐다보며 애처롭게 바라본다.

인간을 따라하는 것이 딱히 잘못된 일도 아니기에 불릿은 고개를 저으며 허락한다.

“상관없다네, 흙덩이여. 자네가 하고 싶은 데로 하시게.”

- …응.

흙덩이는 푹신한 소파가 마음에 든 것인지 조막만한 손으로 조물조물 만져보며 바닥에 닿지도 않는 짧은 다리를 휘휘 흔들었다.

그 광경에 올리비아가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얘는 이상한 애라니까. 무슨 정령이 사람을 따라해?”

“흙덩이는 이상한 게 아니라 특별한 것이오.”

불릿의 말대로 흙덩이는 특별했다. 어디서 온 것인지 다른 정령들과는 달리 인간세상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고, 그러면서도 빠른 습득력을 지녔다.

하급이라는 틀을 벗어나진 못했으나 그 틀 안에서는 최고라고 꼽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과 능동성.

게다가 문득 보이는 인간다움까지.

정령을 삶의 동반자라 여기는 정령사에게 있어 오만하고 무뚝뚝한 여타 정령들보다 훨씬 나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 흙덩이를 올리비아가 뭐라고 하니 자신도 모르게 발끈한 불릿이 대변을 한 것.

“와, 지금 정령 때문에 나한테 화를 낸 거니?”

올리비아의 말에 불릿이 변명 아닌 변명을 한다.

“그런 것이 아니오. 흙덩이는 나와 올리비아의 목숨을 구해준 소중한 존재, 잘못한 것도 없는데 타박하는 것은 불쌍하지 않소?”

- 불쌍? 그게 뭐야?

“에이씨, 알았다, 알았어!”

그의 답변에 궁금증이 돋은 흙덩이가 물어왔고, 올리비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깍지 낀 손으로 머리를 받쳤다.

차마 흙덩이에게 ‘너 불쌍해’라고는 할 수 없어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질문도 잊고 얌전해진 흙덩이.

“앞으로 어떡할 건데?”

“무엇을 말이오?”

올리비아는 방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스쳐지나가듯 불릿에게 물었다.

불릿이 생각하기에 몇몇 떠오르는 답변이 있었지만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

그가 재깍 대답하지 않자 올리비아는 심통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뭐긴 뭐야. 토벌도 끝났고, 앞으로 뭘 할 거냐고.”

“흐음….”

불릿은 그녀에게 어떻게 말해주어야 할지 고민했다. 반응을 보건대, 올리비아는 불릿과 동행하고 싶어하는 듯했다.

“자세한 위치까지는 알려줄 수 없으나 남서쪽으로 향할 것이오.”

“남서쪽? 뭐야, 그 방향으로 가면 다른 왕국을 지나가겠다는 소리잖아.”

“맞소. 원하던 바를 다 끝냈으니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지.”

자신의 영지가 어찌됐는지 모르는 마당에 남의 영지에서 미적거릴 만큼 한가하진 않았다.

몸의 회복만 끝난다면 바로 출발할 예정. 그렇게 된다면 올리비아와도 헤어지게 될 것이다.

“…그래. 그렇겠지.”

왠지 기운이 없어 보이는 올리비아. 그녀는 불릿에게서 시선을 돌려 흙덩이를 쳐다보았다.

“…….”

- ……?

갑자기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혼자서 놀고 있던 흙덩이도 그녀를 마주보았는데, 올리비아는 양손을 들어 흙덩이의 겨드랑이에 넣더니 자신의 무릎에 올려놓았다.

- …? 불릿, 뭐야?

마치 인형처럼 껴안는 올리비아의 몸짓에 흙덩이는 불릿에게 물었고, 불릿은 흙덩이에게 제대로 된 답을 내려줄 수 없었다.

“뭐하는… 짓이오?”

“뭐가?”

너무도 당돌한 말에 불릿은 할 말을 잃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시 물음을 건넸다.

“그러니까…, 어째서 흙덩이를 껴안느냔 말이오.”

“아아, 이거?”

그러면서 다시금 흙덩이의 양쪽 겨드랑이에 손을 넣더니 번쩍 들어 올리는 올리비아.

마치 인형처럼 다뤄지는 상황에도 흙덩이는 이 행동이 인간세상에서 무얼 뜻하는지를 알 수 없어 잠자코 있었다.

그저 갸웃, 거리는 고개만이 인형과는 달리 살아 움직임을 보여줄 뿐.

“왜긴. 귀엽잖아.”

“귀엽다? 무슨 의미오?”

“귀엽다구. 얘가 정령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귀엽다구.”

흙덩이가 예쁘고 귀엽다는 사실은 불릿도 인정하는 바이다. 체면을 중시하는 불릿이 자신도 모르게 손이 올라가 머리를 쓰다듬을 정도이니까.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의기소침해하다가 갑자기 저러는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내가 용병일을 한다고 잊었나 본데, 나도 여자야. 귀여운 게 있으면 당연히 껴안고 쓰다듬고 싶다고.”

“올리비아가 여성이란 사실은 누구나 알지 않소?”

불릿의 말에 올리비아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쉰다.

“넌 다 좋은데 완전 할배 같아. 능력 좋고, 잘생기면 뭐해? 하는 짓이 애늙은이인데.”

“다시 말하지만 나는 어리지 않소. 옛날 같으면 애가 둘은 있을 나이인….”

“아아, 그만, 그만! 그 얘기는 거기까지. 그게 바로 애늙은이 같다는 증거야.”

“…….”

오늘따라 올리비아가 어리광을 피우는 듯해 하루 일과 중에서 지금이 가장 피곤한 불릿이었다.

- 불릿, 이거 뭐야? 움직이면 안 돼?

꼼짝도 않고 그녀의 품에 안겨있던 흙덩이는 그게 불편했던지 트레이드마크나 마찬가지였던 무표정을 약간 찡그러트렸다.

미간만 살짝 주름졌으나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상해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올리비아, 흙덩이가 불편해하는 것 같소. 이만 놓아주시오.”

“왜에? 뭐가 어때서. 인간들이 친밀함을 과시할 때 이러는 거잖아?”

올리비아는 흙덩이가 말을 못할 뿐이지 듣는 것엔 이상이 없음을 깨닫고선 지금처럼 거짓말을 내뱉었다.

아주 거짓인 건 아니었으나 친밀이란 단어가 들어가자 절로 움찔하는 불릿.

- 친밀? 불릿, 이것도 의식?

“……아닐세. 그런 의식 따위 없다네.”

“너 예쁜이한테 뭐라고 하는 거야?”

이번엔 대꾸도 않던 불릿이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에게서 흙덩이를 강탈했다.

덥썩.

“뭐얏! 그동안 사이도 안 좋았는데 친해지면 좀 덧나?!”

마치 아기를 안아들 듯 흙덩이를 자신의 품에 안아든 불릿이 그녀의 말에 대꾸한다.

“친해지기 위해선 상대방이 무얼 싫어하는지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오. 지금 흙덩이는 그게 싫었기에 인상을 찌푸렸단 말이오.”

그녀에게 빼앗듯 안아들었기에 불릿은 얼굴이 자신의 어깨에 걸쳐진 흙덩이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뒤에서 바라본 흙덩이의 얼굴은 기분나빠했다는 것이 거짓말인 양 미미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하지만 이를 알 리가 없는 불릿은 조금은 단호한 어투로 올리비아에게 말을 이었다.

“흙덩이는 나의 계약자이며 동등한 관계요.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며 내 일생이 끝나기 전까지 함께 해야 한단 말이오.”

꼬옥…

그의 말과 동시에 흙덩이가 한층 더 강하게 그를 끌어안는다.

그 모습은 마치 아비에게 어리광부리는 딸의 모습을 연상케 했는데, 올리비아가 이것을 보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 그저 친해지고 싶었던 거라고.”

약간 의기소침해진 올리비아. 불릿은 자신의 말이 심했나 생각하며 그녀를 달래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불릿은 흙덩이를 내려놓는 것을 잊었는지 품에 안은 채로 최대한 나긋한 어조로써 말을 이어갔다.

“올리비아는 데빌로안까지 오며 인연을 맺고, 마물과의 전투에서 함께 생사를 넘은 소중한 전우요. 내 어찌 그대를 소홀히 대하겠소?”

“너 말고, 흙덩이가 날 싫어하잖아. 난 그저 친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여장부라는 소리를 듣는 올리비아답지 않은 모습이었으나 어차피 불릿의 눈엔 가녀린 여인네였기에 상관없었다.

그는 자신이 흥분했었단 것을 깨닫고 쥐어짜내듯 상냥함을 꺼내어 던져주었다.

“흙덩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내가 손수 가르치고 키워낸 정령이요. 내 비록 혼인은 하지 않았으나 자식과도 같단 말이오.”

말을 하다 보니 얼떨결에 나온 자식이란 소리. 그동안 어렴풋이 느꼈던 감정이 올리비아와의 대화를 통해 속에서 끄집어진 것이다.

- …?

알 수 없는 불릿의 감정을 느낀 흙덩이는 모르는 단어와 함께 반응이 미묘해지자 살짝 불릿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는 자기가 말하고도 이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지 끙끙 앓고 있었는데, 올리비아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게 무슨 개똥같은 소리야? 이게 결혼도 안 한 게 까불어?”

기가 찼는지 올리비아는 헛웃음을 터뜨렸고, 허탈해졌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배정받은 객실로 향하였다.

그녀는 휴게실에서 떠나기 전 아직도 불릿에게 매달려있는 흙덩이를 흘겨봤는데, 이내 자신이 정령에게 질투를 한다는 것이 어이없었는지 고개를 흔들고 말을 툭 내뱉었다.

“그래도 너한텐 안 져.”

물론 흙덩이는 고개를 돌린 상태였기에 그녀의 말은 불릿이 받았다.

“…갑자기 뭘 안 진다는 것인가?”

불릿은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던 것처럼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고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자란 알 수 없는 종족이군.”

============================ 작품 후기 ============================

목요일도 저녁 6시와 12시에 업뎃이 이루어집니다.

오늘 하루도 추천과 선작을 해주신 데에 감사인사를 올리며 이만 물러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