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9 데빌로안 영지 =========================================================================
“수면…, 그도 그렇군. 용병에게 몸만큼 소중한 재산은 없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듯 독백하는 불릿을 보고 한숨을 내쉬는 올리비아.
그러거나 말거나 불릿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었다.
‘본인의 목표가 볼레트라는 가상의 인물의 명예를 키우며 정령력을 회복하는 것에 있지, 돈을 버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불릿은 돈이 많다. 정말 많다. 무지막지하게 많다. 평민은 상상도 할 수 없이 많다.
백작이라는 작위, 더 나아가 한 지역의 패자인 군주가 돈이 없을 리가 없지 않은가?
어차피 자신의 영지에 도착하면 용병생활로 번 돈은 한 끼 식사에나 쓸 법한 푼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 정도 시설이면 본인의 육체가 휴식을 취하기엔 나쁘지 않을 것 같군.’
불릿은 백작치고는 검소하게 생활했다. 물론 그것은 ‘백작’치고는 이지만.
전쟁 통에 제대로 쉬지 못한 것과 홀로 떨어져 이곳까지 오며 지친 심신을 위로하기에 이 고급여관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무엇보다 방음도 잘 될 것 같고.’
오늘 밤 마정석을 이용해 정령력을 키울 것인데, 난잡하고 위험에 노출된 싸구려 여관에 투숙했다간 어떤 사고를 초래할지 몰랐다.
여기까지 생각한 불릿이 기특하다는 시선을 올리비아에게 보내자 또 다시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정말 피곤한가보군.’
연애경험 전무, 사정상 여자를 멀리했던 불릿은 올리비아의 반응에서 피곤하다는 것 외엔 더 이상 알아낼 재주가 없었다.
“올리비아, 피곤해보이오. 얼굴이 달아오른 것이 간의 기능이 나빠진 것 같기도 하고, 얼른 쉬는 게 좋겠소.”
“으으응? ……에휴. 그래, 볼레트 네 말대로 쉬자.”
자신도 모르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불릿의 말에 식어감을 느끼자 올리비아는 한숨을 쉬며 여관으로 들어섰고, 불릿도 뒤따라 들어갔다.
딸랑-.
맑은 종소리가 울리며 그들이 여관에 들어섰음을 알려주었다.
“어서오십시오, 아….”
“아?”
종업원이 말을 하다 말고 멈추자 불릿이 의문을 토해냈다.
거기에 정신 차린 종업원이 둘러대며 대꾸한다.
“아, 아닙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깍듯한 태도. 조금 미흡해보이지만 깔끔한 내부인테리어에 서비스정신 투철한 종업원을 보니 내심 고개를 끄덕이는 불릿이었다.
‘제대로 된 여관인가보군. 귀인들이 머물고 가기에 괜찮은 곳이겠어.’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얼굴마담이나 마찬가지인 종업원을 보면 그 여관이 어떻게 운영되는지를 알 수 있었다.
불릿은 웬일인지 종종걸음으로 따라 들어오는 올리비아 대신에 2인실이 아닌 1인실 2개를 잡고 2층으로 올라섰다.
터벅, 터벅.
“에휴.”
말없이 그를 지켜보던 올리비아가 갑자기 한숨을 내쉬자 불릿은 뒤를 돌아보진 않았으나 올리비아가 어떤 상태인지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피로가 누적될 만도 하지.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야겠군.’
우우웅…
불릿은 자신의 방문을 걸어 잠그고 마정석을 흡수하고 있었다.
본래의 경지만 되찾는다면(속성이 달라졌지만) 지금의 상황을 보다 개선시킬 수 있을 것이다.
아니, 하급과 중급의 경지는 하늘과 땅 차이. 개선이 아니라 진화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중급에만 올라선다면 정령력을 직접적으로 이용할 수도 있겠지.’
하급에선 하지 못했던 일. 중급 정령사로 올라서면 정령을 통해서만 발현할 수 있었던 정령력을 자신의 몸으로 직접적인 사용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현상은 마나를 오러라고도 부르는 익스퍼터나 마법사와는 다른 부분이었다.
사용방식이 다르기에 정령력의 사용은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마정석이 빠르게 소모되는군…….”
다른 직업군이 그러하듯, 정령사도 경지가 높아질수록 벽을 깨기 위해 요구되는 정령력이 늘어난다.
처음 최하급 마정석을 취했을 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10개가 넘어가는 마정석, 거기에 고블린족장에게서 얻은 하급 마정석까지 사용했음에도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경제적이라 부를 수 없는 장면이었지만 돈보단 수련이 우선시되어야 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군.”
아무렴, 가문비전의 술법이 적용됐으니 효율이 나쁘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그를 백작으로 유지시켜주는 힘 중 하나가 정령술이었으니 말이다.
“오늘은 이쯤하고 식사부터….”
뱃속이 근질거리는 것을 보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것 같았다.
귀족은 소리를 내는 것을 입으로만 한정시키는 존재, 체면을 위해서라도 식사시간만큼은 꼬박꼬박 지키는 불릿이었다.
자신의 객실을 나선 불릿은 올리비아의 객실로 발길을 옮겼다.
뚜벅, 뚜벅.
그가 홀로 식사하지 않고 올리비아를 찾아가는 이유는 그녀에게서 호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호의엔 호의로 보답해준다, 당연한 행동이지만 이를 지키지 않는 이들이 많았다.
‘천박한 것들.’
문득 자신의 영지를 호시탐탐 노리는 타 지역의 패자(霸者)들을 떠올렸다.
명예와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뒤로한 채, 자신의 안영과 욕망에만 충실한 짐승과도 같은 자들.
귀족이란 이름이 부끄러운 폭력의 무리였다.
‘가증스럽도다.’
빠드득…
절로 이가 갈릴 정도로 그들에게 원한을 갖고 있는 불릿이었다.
그가 결사대에 참여한 이유가 중급 정령사여서도 있지만 그들의 입김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어찌 한 지역의 군주가, 영지의 안위를 다스려야하는 영주가 전투원으로서 결사대라는 위험천만한 곳에 끼어든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경우였으나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던 사정이 있었다.
“아차.”
화를 삭이며 눈앞을 보니 올리비아의 객실 앞에 도착해 있었다.
‘감정을 절제하지 못한다니, 어이가 없군.’
젊어진 육체가 거듭 삐죽삐죽 튀어나오려하자 그것을 자제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혈기왕성이란 때론 이처럼 또 다른 시련을 주는 법이었다.
“어흠, 올리비아, 계시오… 음?”
이제 막 문을 두드리려던 순간, 불릿은 마나의 유동을 알아채고 급히 손을 멈추었다.
어디서 느껴지는 마나의 흐름인지를 알아내려 신경을 쏟자 그것이 올리비아의 방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인가?’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었기에 불릿은 흙덩이를 소환할 준비를 마치고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스으윽…
살며시 열린 문틈으로 침대에 앉아있는 올리비아가 보였는데, 올리비아는 기사들 특유의 마나 연공법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가부좌?’
그 유례가 어디서 나왔는지 아는 이는 없었으나, 기사들의 연공법은 특이한 자세로 인해 다른 직업들과 구별이 뚜렷했다.
주저앉은 자세로 다리를 꼬아 안짱다리를 만드는 것으로, 그 자세만으로도 유연성을 기를 수 있다 알려진 유명한 고문스런(?) 자세였다.
‘용병이 기사들의 연공법을 알 리가 없지.’
기사가 기사일 수 있는 이유, 그것은 인내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용병들은 성급하거나 화급한 이들이 많고 시간을 들여 수련하기가 힘들었기에 기사들의 연공법을 따라할 수 없었다.
몸으로 움직이는 것이 최고라 여기는 이들이라 육체적으론 울끈불끈 했지만 마나가 형편없는 이유도 여기서 찾아볼 수 있었다.
‘언제까지 기다릴 순 없으니 깨워야겠군.’
그러면서 밖으로 나가 문을 닫고 마치 방금 도착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불릿.
똑똑.
“올리비아, 거기 있소?”
그러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마나의 유동이 멈췄다.
달칵.
“무슨 일이야?”
“내일부턴 고된 하루가 시작될 터인데 우리의 친목을 다지기 위해서 식사를 청하려 했소.”
‘이런 건 남성이 먼저 청해야겠지.’
굳이 사족을 달자면, 데이트도 아닌데 올리비아를 배려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 또한 용병이었기에 시비를 걸지만 않는다면 군소리가 나오진 않을 터였다.
아직까지도 용병물을 제대로 먹지 못한 불릿이기에 떠올릴 수 있는 착각.
용병에게 있어 성별은 구분할 필요가 없는 요소였던 것이다.
그러나 올리비아 또한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는지 밝게 웃으며 대꾸했다.
“벌써 저녁이야? 시간이 후딱 지나가네!”
“과년한 처자가 그리 말하는 것이 아니오.”
“…뭐야. 우리 아빠 같애.”
불릿의 핀잔에 눈을 흘기며 쳐다보던 올리비아는 배시시 웃으며 앞장서 걸었다.
“뭐해? 밥 먹자!”
당돌한 그녀의 모습에 불릿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아무리 그래도 기사는 아니겠어. 저 모습 어디에서 기사를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인지….”
그녀의 배경에 무언가 있다 생각했던 것이 웃겼던 것인지 불릿은 미소를 지으며 계단을 따라 저 아래의 식당으로 향하였다.
달그락.
달그락, 덜그럭. 찌이익-.
“우걱우걱…….”
불릿의 식사법은 화전마을에서 익혔던 그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귀족의 식사예절은 너무도 복잡하고 오래 걸리며, 무엇보다 평민이 이해하기엔 짜증이 날 정도로 느렸기에 천박하지만 배고팠던 그때의 심정을 떠올리며 식사하고 있었다.
“볼레트, 천천히 먹어.”
혹여 체할까 걱정이 되었는지 올리비아가 물잔을 건네며 말하자 불릿이 그것을 받아들고 단숨에 들이켰다.
“꿀꺽, 꿀꺽-.”
한줄기 물줄기가 모가지를 타고 흘러내리며 불릿을 적셨다.
“꿀꺽….”
그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올리비아.
“후우, 어떤가?”
“으, 응? 뭐가?”
“내 식사하는 모습 말이오.”
“으으응??”
자신이 쳐다보고 있던 것을 들켰다 생각했는지 불릿과 시선을 피했다.
“다른 용병들과 비교하면 어떻냐는 말이오.”
“아…, 뭐. 그냥 잘 먹네. 그래도 걔네보단 나은데?”
“그렇소?”
“응. 훨씬. 무지무지.”
왜 저렇게까지 강조하는지는 몰랐으나 그것은 불릿이 자신의 외모에 큰 자각이 없어서 그랬다.
분명 불릿은 잘생겼다. 하지만 귀족들 대부분은 외모 가꾸는 데에 정성을 아끼지 않았고, 정령사들은 자연의 축복을 받아 못생긴 이들이 거의 없었다.
굳이 자연의 축복이 아니더라도 불릿은 애초에 결점이 별로 없던 ‘군주’ 그 자체였지만 말이다.
올리비아의 말은 잘생긴 놈이 뭘 하건 간에 잘생겨 보일 뿐이라는 뜻이란 소리였다.
‘아직도 용병처럼 보이질 않는 건가?’
이곳까지 오며 동료 용병들을 훔쳐보며 배웠지만 아직도 용병들의 행동을 따라 하기에 버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용병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지만, 결사대의 인원들이 용병출신이라 하여 천박한 이는 없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들을 지탱시켜준 불릿에 대한 고마움을 행동을 자제하는 것으로 보여주었던 걸지도 모른다.
이러나저러나 뼛속 깊숙이 배긴 기품은 좀체 사라지질 않는 모양이었다.
“볼레트, 너는 뭐 할 거야?”
아직 데빌로안 영지에는 토벌령이 내려지지 않았다. 며칠 안에 내려질 것이 확실하지만 공문이 내려지는 것과 내려질 것이라는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말하자면 준비가 덜 됐다는 것이다.
그 준비가 될 시간동안 무얼 하며 지낼 거냐는 말에 불릿은 간단히 대꾸했다.
“올리비아와 함께하기로 한 이상 호흡을 맞춰볼 필요가 있겠지. 아직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많으니까 말이오.”
“그렇지? 그렇지?”
대뜸 신난다는 표정으로 들뜬 것을 감추지 않는 올리비아.
뭐가 저리도 좋을까 싶었지만, 개인의 성격까지 간섭할 정도로 불릿의 오지랖이 넓진 않았다.
“역시 우린 더 많이 알아가야 해.”
“맞는 말이오. 그래야 백성을 괴롭히는 마물의 숨통을 끊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겠소?”
시시덕거리는 올리비아, 그와는 반대로 진지함을 고수하는 불릿.
“또야? 내가 널 오래 겪은 건 아니지만 저번에 셀이라는 용병이 말했던 것처럼 너무 괴상하다.”
“뭐가 말이오?”
“말투 말야, 말투. 우리 아빠랑 똑같다니까? 정말 질린다, 으휴.”
또 다시 나오는 아빠라는 말. 이쯤 되면 신경을 안 쓰려 해도 절로 궁금해지는 대목이었다.
“아버님이 어떤 일을 하시오?”
“누가 너희 아버님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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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 12시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