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정령사-36화 (36/241)

00036  동행하다  =========================================================================

‘지금 몸 상태는 최상. 그러나 저들을 지키기 위해선 돌벽과 함정을 대량 설치해야 한다.’

불릿에겐 짐덩어리나 마찬가지인 용병들이 있었다. 비록 오늘 처음 만난 사이지만 자신을 받아주었고, 마음에 안 드는 텍스라는 놈이 있었지만 일단은 동료였다.

그들을 미끼로 삼아 적을 공격하는 것은 자신의 체면을 깎아먹는 행위.

귀족으로서, 군주로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저버리는 짓이었기에 그는 결코 물러설 수 없었다.

‘어리석군, 어리석어.’

게릴라전으로 상대한다면 섬멸시키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자신을 잡지 못하는 오크들이 누구를 노릴지는 굳이 예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

그렇기에 정령력의 소모가 큰 돌벽과 함정을 두루두루 깔아놓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돌벽은 다섯, 함정은…모자라겠군.’

불행 중 다행이랄까, 불릿의 컨디션이 좋았고 오크들은 정면에서만 다가오고 있었다.

게다가 마기에 물들어 전투상황이 아닌 이상 걷는 속도를 유지했다.

전투가 시작되면 원래 낼 수 있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뛰었지만.

- 어떡해? 때려?

그의 곁에서 대기하던 흙덩이가 말을 걸어온다. 이 상황에선 흙덩이의 말대로 선제공격을 할 수 없었다.

용병들이 그의 말대로 따라주면 모르겠으나 자신이 리더도 아니고, 목적지가 같아 동행한 것뿐인 자신을 뭘 믿고 따른단 말인가?

무엇보다 놈들은 한쪽방향에서 오고 있지만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었다.

지옥송곳을 사용하더라도 큰 효과를 볼 수 없다는 뜻.

그렇다면 남는 것은 각개격파인데, 그 시간동안 용병들이 죽어나갈 터이니 결국 수비적으로 나가야했다.

“흙덩이여, 지금부터 본인의 말을 잘 듣게.”

- 응.

“용병들의 앞에 1미터 간격으로 옆으로 나란히 돌벽을 5개 설치하게. 그리고 빈 공간에 지옥구덩이를 파도록.”

- 지옥구덩이 4개?

그 말에 불릿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한다.

“아니, 3개만 부탁하네. 정령력이 부족해.”

- 도망갈 거야?

돌벽과 함정의 조합은 그만큼 정령력의 소모가 극심했다.

그리고 놈들이 코앞까지 다가온 이상, 동시에 일을 진행해야하니 곱절의 정령력이 소모되리라.

암울한 상황임에도 불릿은 당당하게 대꾸했다.

“본인은 전투에 있어 동료를 버리고 도주한 적이 없다네. 그것은 이전에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되겠지.”

결사대, 그들과 함께 했던 시절을 추억하며 지금 불릿은 그 이후 처음으로 동료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용병들의 앞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려 했다.

그에게 있어 동료란 명예 그 자체. 결코 버릴 수 없는 것이란 소리였다.

- 아프면 안 돼.

자신을 걱정해서인지 흙덩이가 불릿에게서 정령력을 끌어오면서도 애달픈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피식.

‘이런, 또 나도 모르게 얼굴이 움직이는군.’

불릿은 젊어진 이후로 좀체 통제가 되지 않는 육체에 불만을 품었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것이 기꺼웠다.

자신을 걱정해주는 정령, 이 얼마나 바라고 원하던 것인가?

물의 정령의 경멸담긴 시선은 명예와 체면을 중시하는 귀족에게 있어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니 흙덩이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몰랐다.

두두두-

놈들이 흥분할 거리가 될 정도로 가까워졌는지 뜀박질을 하느라 대지가 울렸다.

“흙덩이여, 시작하게!”

- …이따 머리 쓰다듬어줘…

살아남아 달라는 부탁. 이에 불릿은 급박한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이에 응답했다.

“우리는 한층 친밀해질지도 모르겠군.”

* * *

오크들은 매우 흥분한 상태였다. 자신들을 간질이며 유혹하는 무언가를 따라 정신없이 이동하고 있었다.

그래서 배가 고픈 것도 참고 있었는데 맛있어 보이는 먹잇감들이 눈에 띄었다.

입에 침이 고이며 흐릿하게 떠오르는 부드러운 육질. 생각만으로도 침이 꼴깍 넘어가기에 모든 오크들은 마기에 물든 상태에서도 인간들을 향해 다가갔다.

“취익, 취이익….”

약간이나마 되찾은 이성이 어떻게 사냥을 하는지를 떠올리게 해주었고, 이에 따라 엉성하게나마 배고픔을 참으며 수풀에 숨어있었다.

무기를 든 인간은 위험하다. 게다가 인간의 수도 많았으니 그간의 경험이 본능적으로 오크들을 숨게 만든 것.

그러나 이제는 한계였다.

‘먹고 싶다! 살점을 뜯어먹고 싶다!’

배고픔이 한계에 이르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잠시 밀려났던 마기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그래서였을까, 자신들이 숨어있던 것도 잊은 채 은신을 깨고 부스럭거리며 수풀에서 기어 나왔다.

인간들은 자기들이 다가오는 것을 눈치 채고 잠에서 깨어났다.

작전은 실패했지만, 별로 상관없었다. 자기들이 더 많고 더 강하다는 생각.

“크르르…….”

오직 먹겠다는 의지가 짙은 살의를 피워올렸다. 그것은 포식자가 사냥감을 노리는 의지.

죽여서 먹는다, 이 얼마나 간단하고 좋단 말인가? 마기에 물든 오크들은 둘러싸서 사냥감이 도망치지 못하게 하는 전법도 구사하지 않고 무작정 걸었다.

지치고 힘들었던 육체가 인간의 살냄새를 맡을수록 불끈불끈 힘이 솟아났다.

“취익! 취익!”

콧바람이 숭숭 흘러나오며 다리가 대지를 박찬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인간들의 하얗고 야들야들한 살점으로 배불리 식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에 다시 가도 늦지 않는다.

어디를 향하는 것인지 자신들도 알 수 없었지만.

“먹자! 먹는 거다!”

“크아!”

“취이익! 내꺼다, 취익!”

두두두두-

대지를 박차자 흙이 파이며 먼지바람을 일으켰다. 잘 닦인 도로였지만 결국은 흙바닥.

어지럽히면 먼지바람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오크들이 일으키는 돌풍에 흙바람이 일어 그들을 가렸다.

두두두-

어둡고 탁한 대기를 가르며 다가오는 오크들. 눈이 안 좋은 인간들은 오크들을 못 볼지 몰라도 오크들은 뛰어난 후각으로 인간들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거의 다 다가온 순간 땅에서 둔탁한 소리와 함께 진동이 일어났다.

“흙덩이여, 시작하게!”

어떤 인간이 외쳤는지 모르겠으나 고운 미성, 그러나 목울림이 느껴지는 남성의 목소리.

그것에 오크들은 한층 강한 식욕을 느끼고 있었다.

‘젊은 남자! 쫄깃하고 탱탱한 인간남자의 살결!’

오크들은 쫄깃하면서도 역한 냄새가 적은, 갓 성인이 된 남성을 좋아했다.

여자는 어리건 크건 간에 화장품과 입욕제로 인해 역겨운 맛이 났다.

후각이 뛰어난 그들로선 향기롭기 보다는 악취나 다를 바 없는 냄새.

아이는 부드럽고 입에서 살살 녹지만 대신 씹는 맛이 부족했다. 게다가 양이 적기까지.

많은 수의 오크를 충족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 먹은 티도 안 났다.

그에 비해 성인남성, 그것도 갓 성년이 된 남성은 역겨운 화장품냄새도 나지 않고 적당한 육즙에 탱탱한 살결, 많은 고기까지.

그야말로 최고의 음식이었던 것이다.

“취이익!”

오크들은 젊은 남자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달음박질을 하며 사정없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부르르-

“으음…. 뭐지, 이 한기는?”

전투를 앞두고 달아오른 몸에서 한기를 느끼자 이상함을 감지한 불릿.

그러나 이 상황에서 그것을 확인하기엔 여의치 않았다.

그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온 오크에게 선물해줄 창날을 막대기에 조립하고 있었다.

끼릭-.

고급스런 나무창대에 유난히 빛나는 창날이 단단히 끼워졌다.

불릿은 그것을 들어 함정의 뒤에 서서 정면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벽을 사이에 두고 싸우시오! 벽과 벽 사이에는 함정이 있으니 발 디디지 말고!”

“모두 사이를 메워! 벽을 앞세우란 말이다!”

“뛰, 뛰어! 빨리!”

삽시간에 올라온 돌벽을 멍하니 쳐다보던 용병들은 불릿의 외침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돌벽에 바짝 다가섰다.

지옥구덩이에 용병들이 빠져들지 몰라 다시금 소리치는 불릿.

“돌벽 옆에는 함정이 있으니 조심하고…, 크윽!”

“크라악!!”

말을 채 끝내기가 무섭게 오크가 들이닥치자 창을 밀어재꼈다.

푹…

“취이익!”

“크으윽….”

어찌나 힘이 센지 불릿의 창날이 제대로 박히지 못한 채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촤아악-!

“저리 꺼지도록!”

푸우욱!

“취아아악!”

오크를 밀어 벽에 밀착시킨 채로 힘을 가해 창날을 밀어재꼈다.

그러자 오크는 미친 듯이 발버둥을 치며 창을 빼내려 창대에 힘을 주었다.

뿌드득!

비싼 돈을 주고 샀던 창대가 부러지려하자 불릿은 서둘러 품을 뒤져 단검을 꺼내 오크의 목을 그어버렸다.

촤악!

“끄르륵….”

피가 봇물처럼 새어나오던 오크는 힘없이 자리에 쓰러졌고, 그 피를 뒤집어쓴 불릿은 쉴 틈도 없이 몰아치는 오크를 상대하게 되었다.

“크앙!”

아직 창대를 제대로 잡지 못했기에 엉성한 자세로 오크를 맞이하려는 순간, 뒤에서 그를 구원해주는 손길이 다가왔다.

챙-!

“신입, 괜찮아?”

“하악, 하악, 괜찮소.”

잠시 숨을 고른 불릿. 자기 대신 무기를 막아준 것이 누군가 확인했더니 텍스와 시비가 붙었던 바로 그 여성용병이었다.

여성용병은 뛰어난 솜씨로 오크를 밀어붙였으나 마기에 물들어 광폭화 된 오크를 끝내기엔 모자랐는지 좀체 승부를 내지 못했다.

이에 불릿이 지옥구덩이를 가동시키고 있던 흙덩이를 불러 마무리했다.

“흙덩이! 주먹 쾅!”

- 주먹 쾅…

매우 짧은 거리, 오크는 흙덩이의 조막만한 주먹이 발사되자 그것에 맞고 옆구리가 터져나가며 즉사했다.

퍼억.

털푸덕.

“후욱. 고맙소이다.”

“말투하곤. 제법인데?”

“말할 시간 없소. 다음 타깃을 잡도록 하지.”

“너나 잘하셔!”

불릿은 함정을 가동하던 것을 멈추고 여성용병과 호흡을 맞추며 오크들을 섬멸해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지옥구덩이는 그 크기에 한계가 있어 일정 수 이상의 적이 빠져들면 더 이상 수용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적을 죽이더라도 그 사체를 처리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는데, 지금과 같은 난전에서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수는 없었으니까.

게다가 아무리 이성을 잃은 오크라 할지라도 몇 번이고 동족이 같은 방식으로 죽어간다면 그 자리를 피하기 마련이다.

“내가 상대할 테니까 네가 마무리해!”

“알겠소! 부탁하오!”

“진짜 말투하고는! 따라와!”

불릿은 여성용병의 뒤를 따라가며 보조를 해주었는데, 그녀와 함께 싸우며 작은 감탄을 터뜨렸다.

챙! 채챙!

“하앗! 히야앗-!”

“취, 취이잇….”

오크의 난폭한 손놀림을 그녀는 뛰어난 검술실력으로 커버하고 있었다.

마기에 노출되어 근력이 한층 더 강해져 있었는데, 그것을 흘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던 것.

‘마나는 방출하지 못하나보군.’

하지만 번번이 막히는 공격의 이유는 마무리를 할 필살기가 없어서일 것이다.

대개 그러한 약점을 검사들은 마나라는 힘을 이용했는데, 그녀는 아직 마나소드를 만들어낼 정도의 경지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단점을 불릿이 채워줄 수 있었다.

“흙덩이, 쌍주먹 쾅!”

“흙덩이여, 오크 뒤에 구덩이!”

“저기에 주먹 쾅! 헛, 돌벽!”

퍼버벅!

드드드득-.

그녀가 정신없이 전장을 누비는 가운데 불릿도 몸을 놀리며 흙덩이에게 명령을 내렸고, 흙덩이는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한 채 착실히 그의 명령을 따랐다.

그러면서도 불릿은 손을 놀리지 않고 창을 휘둘렀는데, 불릿 역시 마무리가 부족한 창솜씨였으나 그것을 여성용병이 채워주었다.

그와 그녀가 전장을 누비자 전투는 점차 정리되기 시작했고, 용병들은 여전히 돌벽을 끼고 싸우면서도 둘의 활약을 훔쳐보고 있었다.

* * *

채채챙!

“하아앗!”

“췩, 취익!”

그녀의 검술에 의해 오크가 허겁지겁 물러선다. 그리고 그녀가 물러나게 만든 오크에게 무언가가 부닥쳐 둔탁한 타격음을 내며 아래의 구멍으로 빠지게 만들었다.

푸슈슈슉! 슈슈슉!

구덩이에 빠진 오크는 사방의 벽에서 튀어나오는 송곳에 온몸이 찢겨 한줌 핏물이 되어버린다.

“휴우.”

그녀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살짝 닦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시오?”

“아냐, 아무것도.”

그녀의 눈앞에 있는 남성은 앳되고 아름다운 외모와는 다르게 시종일관 냉철함을 유지한 채로 전장을 쏘다니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9시, 12시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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