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5 동행하다 =========================================================================
“오, 중간막대네?”
“쟤는 오자마자 고생하네. 아까 허둥대는 거 보니까 아무것도 모르던데.”
“야야, 그러니까 그나마 다행이지. 중간순번이면 그래도 남들이 깨워주는 거 그대로 따라하면 되니까.”
가장 안 좋은 시간대인 중간막대를 뽑았으나 불릿에게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불릿은 불침번을 서본 적이 없었다. 결사대에 있을 때는 바람의 정령사나 알람마법을 통해 침입자를 경계했기에 물의 정령사였던 그가 나설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용병으로 활동해야하며 남들과 부대끼며 살아야 할 텐데 아무것도 모르면 일정에 지장이 생길 것이다.
‘나쁘지 않군.’
남들은 한창 졸리고 피곤한 시간대라서 그를 불쌍하게 바라봤지만 불릿은 오히려 좋게 생각했다.
부탁하지 않고도 용병들의 불침번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백작 체면에….’
“야야, 저리 비켜. 셀, 다음은 나다.”
텍스는 불릿을 보자 심기가 불편해졌는지 그를 밀치며 앞으로 나섰다.
툭.
‘……일단은 참는다.’
점점 도가 지나친 텍스의 행태에 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불릿이었지만 인내하기로 했다.
혼을 내주더라도 지금은 아니다. 자신은 이들의 틈바구니에 끼어든 사람. 게다가 용병의 생리가 이렇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으니 참아야 할 때였다.
“자, 뽑아라.”
“무조건 첫 번째, 그도 아니면 막빠.”
셀의 말은 들은 체도 안하고 중얼중얼거리며 나뭇가지를 뽑아든 텍스.
그는 애매한 길이를 뽑아들자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이게? 셀, 이거 몇 번째냐?”
자신이 가장 염원하던 것들이 다 빗나가자 기분이 나빴으나 아직 제대로 된 순서를 몰랐기에 나뭇가지를 들고 있는 셀에게 묻는 텍스.
셀은 슬쩍 자신이 들고 있는 나뭇가지와 비교하더니 그에 답변을 주었다.
“3번째.”
“개 씨발! 내가 저 비실이랑 서야한다는 거야?!”
침까지 튀겨가며 셀에게 항의했으나 셀은 그를 밀치며 비키라고 했다.
“젠장, 젠장! 계집처럼 힘도 못 쓸 놈이랑 서다니, 기분 더럽군!”
‘참자, 참아.’
이번에도 모욕을 인내하는 불릿. 그러나 한번만 더 저러한 행위를 반복한다면 그때는 본때를 보여주겠다 다짐했다.
‘버르장머리 없는 것. 또 그러면 군기가 바짝 들도록 해주지.’
그가 언제 이런 모욕을 받아봤겠는가? 아마 두고두고 기억하리라.
“그럼 너 혼자 서던가. 지랄 말고 비켜 새꺄, 기다리잖아.”
하지만 다른 용병들은 그의 행태가 익숙한지 텍스를 밀치며 나뭇가지를 고르고 있었다.
“젠장, 젠장.”
연신 중얼거리며 핏발선 눈으로 불릿을 노려보는 텍스에게 불릿은 무표정으로 대하며 화를 삭였다.
* * *
“쿠울…, 쿠울…….”
아까 순번을 정할 때에는 그렇게 난리법석을 피우더니 불침번을 시작하자 하는 둥 마는 둥, 그러다 기어코 잠이 드는 텍스였다.
“뭐하는 놈인 것인가….”
분명 텍스는 불릿에게 엄중하게 경고를 했었다. 그랬는데 저리 졸고 있으니 황당할 지경.
“됐다, 깨우느니 내버려두는 것이 나을 듯하구나.”
깨워봤자 귀찮은 일만 벌어진다. 그게 텍스에 대한 불릿의 평가였다.
‘흙덩이나 불러야겠군.’
마침 모두가 깊게 잠든 시각. 같은 불침번인 텍스란 놈은 저렇게 졸고 있어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니 이번 기회에 수련이나 하려는 불릿이었다.
“…흙덩이여, 소환에 응할지니.”
조용히 읊조리는 불릿. 그의 소환에 응했는지 작은 공명음이 울리며 흙덩이가 나타났다.
우우웅…
- ……불렀어?
화가 약간 가셨는지 이번엔 자기가 먼저 인사하며 나타난 흙덩이.
불릿은 흙덩이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려 자신이 친밀해지기 위한 의식이라고 거짓말했던 머리쓰다듬기를 해주었다.
스윽스윽.
“잘 계셨는가, 흙덩이여?”
- 응. 내일도 불러줘.
“오늘은 남들 눈에 안 띄면서 대화하는 수련을 하려하네. 가능하겠는가?”
말을 하면서도 혹여 들릴까봐 눈치를 보는 불릿의 모습에서 흙덩이도 그가 큰 소리를 낼 수 없음을 깨달았나보다.
덩달아 자신의 목소리도 죽였는데, 사실 흙덩이의 목소리는 계약자인 불릿에게만 들렸으므로 그럴 필요는 없었다.
- 그러면 말 못해. 괜찮아?
“그래서 수련이라는 거라네. 자네가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으니 모습을 감춰주게나.”
- 응…
스스스…
흙덩이는 불릿의 부탁에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불릿에게는 투명해보이지만 남들이 보기엔 흙덩이의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실체화를 하지 않은 정령은 오직 계약자만이 볼 수 있는데, 그 상태에서는 대화를 하기가 쉽지 않았다.
친화력이 높으면 가능하지만 재능이 모자라거나 계약기간이 짧으면 부단한 노력을 통해서나 시도할 수 있었다.
‘흙덩이여, 들리는가?’
- ……
역시나 첫 번째 시도는 실패. 의념만으로 대화하는 것은 비실체화 상태에서는 힘들었다.
실체화란 정령이 인간세상에 현신하는 것. 저마다의 속성에 걸맞는 기운을 토대로 육체를 구성하는데, 그것은 매개체가 되어주어 정령과 계약자간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그것이 없으니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지사.
부단한 노력만이 성공으로 이끄는 비결이 될 것이다.
‘흙덩이여, 들리면 대답하게.’
- ……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시도했으나 흙덩이는 좀체 대꾸를 하지 않았다.
흐릿한 형체의 흙덩이가 그를 보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지만 아직까진 대화의 소통이 이루어지진 않았다.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되지 않겠는가.’
그가 예전에 계약을 맺었던 물의 정령들은 불릿과 제대로 대화를 하지 않았다. 명령엔 곧잘 따랐지만 개인적인 이야기는 불가능.
비실체화를 해달라는 부탁은 들어주지도 않았던 것이다.
‘다시 생각해도 괘씸한 놈들이로고.’
그렇게 그가 열심히 노력하는 사이, 숲속너머에서 어떤 기책을 느끼게 되었다.
부스럭.
‘음?’
처음엔 바람소리인가 싶었으나 비실체화 된 흙덩이가 기운을 어느 방향으로 흘리자 그곳을 쳐다보는 불릿.
그곳엔 그가 들었던 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증거로 조그맣지만 끊임없이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부스럭부스럭.
부스럭부스럭부스럭-.
딱딱하게 굳는 불릿의 얼굴. 그가 얼굴을 굳히는 이유가 불침번을 서는 현 상황에서의 이유와 맞아떨어졌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부스럭.
얕게 들리는 소음의 너머로 섬뜩한 안광이 비춰보였기 때문이었다.
- …릿…크…오…크……
위기의 상황, 한껏 긴장된 육체가 의념을 쏘아냈는지 이제껏 들리지 않던 흙덩이에게서 미약하나마 어떤 단어가 들려왔다.
비록 온전한 말은 아니었지만 불릿은 그 말만으로도 어떤 존재가 들이닥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크르르….”
붉은 안광을 빛내며 모습을 드러낸 놈들은 과연 흙덩이의 말대로 오크들이었다.
마기에 물들었는지 광기에 젖은 눈동자가 섬뜩했고, 진열조차 갖추지 않고 무작정 들이닥치는 모습은 놈들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나타냈다.
‘이제 고작 하루를 걸어왔거늘, 벌써부터 몬스터가 나타나다니. 이 영지도 썩 안전하진 못하군.’
생각만큼 라 쓰랑의 도로가 안전하지 않자 심기가 불편해진 불릿.
영주라면 모름지기 자신의 영역에서 힘을 낼 줄 알아야 하는 법이었다.
더 이상 놈들이 다가오는 것을 지체할 수 없던 불릿은 그들과 만난 이래로 가장 큰 목소리로 외쳤다.
“기상! 오크가 나타났다! 기상!!”
그 말에 깊은 잠에 빠져들 시간임에도 벌떡 일어나는 용병들.
“뭣, 오, 오크?!”
“무기, 무기 챙겨!”
“일어나 새꺄! 뒤지고 싶어?”
“씨발, 이게 자다가 무슨 날벼락이람!”
입으로는 잡담을 떠들면서도 재빠르게 전투를 준비하는 모습, 이것이야말로 불릿이 전쟁에서 보아오던 용병 그 자체였다.
“음냐, 음냐.”
이 소란스러움 속에서도 입맛을 다시며 졸고 있는 텍스를 제외하면 모두가 자신의 임무를 훌륭히 소화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불릿이 그에게 다가가 발로 걷어찼다.
쿠당탕!
발길질에 바닥을 구르는 텍스. 그는 벌떡 일어서며 욕을 내뱉었다.
“어떤 개새끼야!”
“입이 참으로 더럽군. 너는 이 상황에서 잠이 오나?”
“뭐가 어째!”
“주위를 한번 둘러봐라. 아주 잘도 자더군.”
불릿의 핀잔에 그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다 입을 다물었다.
모두가 전투준비 한창이었는데 자신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졸고 있었다.
게다가 텍스는 불침번이었던 상황, 그들의 눈이 고울 수가 없었다.
금세 합죽이가 된 텍스는 솟아나는 짜증을 참기 힘들었는지 그 화를 불릿에게로 돌렸다.
“이 새끼야! 좀 더 일찍 깨웠어야지!”
“…….”
어이없게도 자신에게 화를 내자 불릿은 그를 지긋이 노려보다가 자신도 힘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흙덩이여,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낼지어다.”
우우웅…
비실체화 되었던 흙덩이가 땅의 기운을 뿜으며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 답답했어.
“미안하네, 흙덩이여. 지금은 전투에 집중해주길 바라네.”
그리고 곁눈질로 텍스를 노려보던 용병들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저, 정령사다!”
“비실이가 정령사였어?”
“오, 맙소사. 큰일 날 뻔했군.”
텍스가 먼저 나섰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다른 용병들도 텍스처럼 그에게 시비를 걸었을지도 몰랐다.
불릿이 겪었던 일은 일종의 관례 같은 것으로, 신입 용병의 기를 죽임과 동시에 경각심을 일깨워 죽지 않게 해주려는 의도도 있었다.
다만 텍스는 그 정도가 지나쳤고, 하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까지 짜증을 냈으니 문제였지만.
그리고 텍스 또한 불릿이 소환한 정령을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미친, 뜬금없이 웬 정령?’
정령사 무서운 것은 세 살배기 애도 아는 사실. 게다가 용병 중에서 정령사를 찾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전체 용병에서 10명이나 될지 의심될 정도로 희귀한 직업군인 정령사.
자신 같은 전사보단 정령사가 훨씬 더 도움이 되고 대접받는다는 사실을 아는 이상 식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씨발, 어떡하지.”
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텍스는 사과할 생각을 않고 있었다.
그가 언제 정령사를 구경이나 해봤겠는가? 아쉬울 것 없는 정령사들이 용병으로 활약할 일은 없었고, 있더라도 신분을 숨기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 대접받고 있는 정령사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와는 신분이 달라 구경조차 못했고 말이다.
그러니 큰일 났다는 것을 인식은 했으나 그게 어느 정도인지는 감을 못 잡는 상태.
“흩어지지 마! 뭉쳐! 뭉치라고!”
아마 이 무리에서는 셀이라는 용병의 지시를 듣기로 했나보다.
그가 소리치자 전투자세를 취했던 용병들이 한곳으로 모여 진을 치고 있었다.
“마기에 물든 놈들이다! 눈깔 봐라, 새빨간 것이 완전 맛이 갔어!”
광폭화 된 몬스터는 위험하다.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마기에 물들었을 때였다.
마기는 마물의 근원, 그 기운에 노출된 몬스터들은 한층 강해지고 그 흉포성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대신 몬스터는 마기를 감당하기엔 나약한 존재여서 이성을 잃기 일쑤였기에 상대하는 방법은 단순해진다.
지금만 봐도 둘러싸서 공격하는 것이 효율적임에도 그냥 무질서하게 서서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곤 하지만 기본능력이 크게 상승한 상태이기에 어중이떠중이들은 전술이건 뭐건 상관없이 쓸릴 판국이었던 것이다.
“흙덩이여, 오크들의 수는 얼마나 되는가?”
어두운 밤이었기에 그들보다 많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으나 자세한 사항까지는 모르는 상황.
불릿은 밤이란 환경에 구애받지 않는 흙덩이에게 놈들의 물량을 알아보았다.
- 여기 10. 저기 20.
“으음. 너무 많군.”
흑마법사는 마족도 소환한 전력이 있었다. 당연히 마기를 이용하는 방법도 알았기에 마수도 곧잘 사용했었는데, 하물며 마기에 물든 몬스터는 수도 없이 겪어본 불릿이었다.
그리고 마기에 물든 몬스터가 얼마나 강해지는지 몸소 겪었기에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지 알 수 있었다.
흘깃 뒤를 돌아보니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용병들. 그들은 흑마법사들과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거나 마기에 물든 몬스터를 상대해본 전적이 없을 것이다.
============================ 작품 후기 ============================
6시 9시 12시에 이어서 올라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