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4 동행하다 =========================================================================
날이 밝자 2층의 침실에서 1층의 식당으로 내려온 불릿.
어제 저녁에는 그래도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지금은 한적한 것이 모두 떠난 모양이었다.
아침부터 장비를 정비하던 불릿은 뒤늦게 내려와서인지 그들을 놓치고 말았다.
“이런, 한발 늦었나.”
불릿은 남아있던 용병들을 따라 마물이 출현했다는 영지로 출발하려 했었다.
당초의 계획은 그러했는데, 예상외로 용병들이 일찍 출발해 홀로 남겨진 것이다.
“빨리 따라잡아야겠군.”
혼자는 위험하다. 무언가 사건이 발생하면 대처하기도 어렵고,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해야 했다.
이 먼 곳에 홀로 떨어진 이후로 불릿은 그것을 몸소 체험했다.
동료가 되지 않더라도 용병무리의 뒤를 따라가면 어느 정도의 안전을 보장받을 것이다.
그리 판단한 불릿은 서둘러 여관을 나서기 시작했다.
터벅, 터벅.
바비 걸음을 옮기던 불릿은 이제 막 성문을 나서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서둘러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자 그들이 불릿을 쳐다보았다.
“뭐요, 갑자기? 가는 사람 붙잡기나 하고.”
이제 막 출발하려던 찰나에 그 흐름을 끊었으니 고운 말이 오갈 리 없었다.
일종의 징크스였는데, 출발하자마자 일이 막히니 재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전쟁을 통해 겪고, 자카르를 통해 세부정보를 얻었으나 이런 미신과도 같은 비공식적인 사항까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미안하오, 같이 동행하고 싶어 내 급히 잡게 되었소.”
“동행? 당신이 뭔데 우리랑 같이 가겠다는 거요?”
그러면서 대꾸하던 용병이 불릿의 위아래를 훑는다.
‘짜증이 나는구나.’
불릿이 보기엔 용병의 실력은 무리에서 중간쯤에 속했는데, 딱히 잘난 것도 아니면서 무시하는 티를 내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럼, 용병들의 무리에 용병이 끼어들지 누가 참가하겠소?”
“요옹벼엉? 비실비실해 보이는 것이 힘이나 제대로 쓰겠어?”
현재 불릿의 차림새는 평범한 가죽갑옷에 창날을 분리한 봉을 들고 있는 상태였다.
거기에 혼자라는 것을 증명하듯 짐이 가득 들어있는 가방.
홀로 다니는 것이 아니더라도 짐꾼역할이나 할법한 차림새였기에 눈앞의 용병이 얕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전쟁 통에도 자주 겪었으나 이들의 생리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군.’
“우리하고 같이 가고 싶으면 근육이나 좀 키우라고. 저기 계집년 받아준 것도 짜증나는데 별 잡놈이 다 귀찮게 구는군.”
‘여성이 있는가?’
놈이 짜증을 부리자 불릿의 시선이 뒤로 넘어갔는데, 그쪽엔 팔짱을 끼고 이쪽을 바라보는 여성용병이 있었다.
“그 계집년이 네놈을 고자로 만들어주면 나는 언니가 되는 건가봐?”
“뭐라고? 이년이 지금 말 다했어?!”
어느새 사태는 여성용병과 불릿에게 시비를 걸던 놈의 말싸움으로 바뀌었는데, 한눈에 보아도 여성용병의 장비가 더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용병에게 있어 장비란 곧 실력. 그만한 장비를 마련하려면 얼마나 많은 모험과 의뢰를 수행했을지 짐작할 만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저 여성용병은 인정받을 만했던 것이다.
“말 다했다, 왜? 그렇게 자신감이 쩌는 놈이 장비는 그에 못 따라가네.”
“흥! 남자한테 가랑이나 벌려서 돈 번 년이 누굴 품평해?”
“네놈 아랫도리보다는 비싸니까 거지같이 굴지나 말라고. 내 가랑일 벌릴 만큼 대단치도 않아 보이지만 말이야….”
그러면서 여성용병의 시선이 아래로 향하며 비웃는 얼굴을 보인다.
이에 남자의 얼굴이 벌게지며 부들부들 떨었고, 주변의 용병들은 실실 쪼개며 서로 키득거렸다.
“낄낄. 멍청이가, 덤비지도 못할 거면서 왜 저런대?”
“야야, 쟤가 가만히 있고 싶어서 그런 게 아냐. 장비를 봐라, 존나 쩔잖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근데 입담이 장난 아닌데? 휘유-.”
“텍스도 약하지 않은데 말만 내뱉고 덤비질 못하네.”
남성용병의 이름이 텍스인가보다. 동행자로 보이는 용병들의 대화를 통해 정보를 얻은 불릿은 살짝 뒤로 빠져 그들의 싸움을 지켜봤다.
자신에게서 화제가 다른 쪽으로 전환된 덕에 시선이 사라졌다.
간간히 쳐다보긴 했으나 이내 신경을 끄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뭐라뭐라 지껄이던 텍스는 끝까지 여자용병을 무시했고, 그렇게 흐지부지 되면서 여행길에 올랐다.
터벅, 터벅.
그들이 무리를 지어 거닐자 불릿은 텍스라는 용병에게서 살짝 떨어져 따라가기 시작했다.
‘수가 열이 되니 몬스터도 덤비질 않는군.’
지금 그들은 새로이 합류한 불릿까지 포함해 총 10명의 인원을 구성하고 있었다.
수가 많아서인지, 아직 영지에 도착하지 않아서인지는 몰라도 딱히 진형을 갖추지 않고 있었다.
이정도 숫자면 웬만한 소규모 용병대의 수준이 되었기에 그들이 자신 있어 하는 것이리라.
‘본인이 민감한 것인지, 저들이 둔감한 것인지. 너무 태평하게 가는 것이 아닌지….’
그래도 어느 정도의 경계심은 갖는 것이 좋지 않나 생각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지금은 길이 잘 닦인 곳이었다.
주변에 몬스터가 있더라도 금방 알아챌 수 있으며 이들은 그래도 베테랑 용병으로 보였다.
그러니 자기목숨 소중한지 잘 아는 용병들이 이렇게 수다를 떨며 나아가는 것이라고 판단됐다.
‘말을 안 거니 다행이로다.’
불릿은 이제 막 용병이 된 새내기. C급이라 하더라도 용병으로서 활약한 일이 없기에 대화가 시작되면 금방 들통날 것이다.
그러니 그로서는 차라리 자기들끼리 대화하는 것이 더 나았을 거다.
‘저 여성도 대화엔 곧잘 끼는군.’
텍스라는 자를 제외하곤 그래도 다들 데면데면하게 지내는 것 같았다.
하긴, 언제 어디서 어떤 형식으로 마주칠지도 모르는 용병인생에 적을 늘려서 좋을 것은 없었다.
때론 감정이 상한 자가 전장에서 적으로 만나 상대방에게 죽임을 당할 때도 있으니 말이다.
여정은 별다른 탈 없이 진행되었다. 그렇게 계속 걷다보니 어느새 해가 기울어 날이 어두워졌다.
더 이상의 이동이 불가능해지자 용병들은 자리에 멈춰 야영을 하게 되었다.
“오늘은 여기서 자도록 하지.”
“빨리하고 자자고. 다리아파 뒤질 것 같으니까.”
“엄살은. 자, 그럼 일단 저녁부터 들고 불침번 순번을 정하자고.”
그렇게 모두가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야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불릿은 무얼 하면 좋을지 몰라 주춤하고 있었는데 텍스라고 불렸던 용병이 다가왔다.
뚜벅뚜벅.
탁.
“이봐, 너도 돕지 그래?”
무얼 할지 몰랐던 불릿은 그의 말에 멀뚱히 서있다가 대꾸를 했다.
“무얼 하면 좋겠소?”
“하, 이 새끼 좀 보게? 네가 알아서 찾아야지. 알.아.서.”
툭툭.
그렇게 말하면서 텍스가 불릿의 가슴을 검지로 툭툭 치자 그의 손길을 피해 뒤로 살짝 물러서는 불릿.
“내 홀로 다녀서 단체생활에 익숙지 않소.”
“그럼 혼자 다니시던가. 왜 끼어들어서 지랄이야?”
“그러는 당신은 무얼 담당하오? 내게 할 일을 일러주고 가면 그만이지, 당신도 딱히 하는 일은 없어 보이는데.”
불릿의 말대로 저쪽의 용병들은 이쪽을 힐끗거리면서도 착실히 야영준비를 마쳐가고 있었다.
이제 불까지 피우면 야영준비가 끝나기에 텍스의 행태는 농땡이를 부리는 것과 불릿에게 시비를 거는 것, 그런 이유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텍스는 움찔하다 무리가 있는 방향을 살짝 훑어보다 크게 소리쳤다.
“뭐 이 새끼야! 막대기처럼 비리비리한 놈이 감히 이 텍스님께 대들어? 뒤지게 맞고 싶어?!”
‘참기 힘들군. 그만 좀 했으면 바랄 게 없겠어.’
불릿이 대답도 않자 혼자 성을 내던 텍스는 눈을 부라리며 말을 뱉었다.
“어이, 그만하고 와서 밥이나 먹어.”
“어, 간다, 가!”
그렇게 혼자 성을 내던 텍스는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더 하고서야 걸음을 옮겼다.
“알아서 몸 사리라고. 그 나뭇가지 같은 다리를 꺾어주기 전에 말이야.”
터벅, 터벅.
텍스가 모닥불로 걸음을 옮기자 불릿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따라서 자리를 옮겼다.
‘꺾이는 것이 누가 되는지는 지켜봐야 알겠지.’
* * *
덜그럭, 덜그럭.
달그락.
“후루룩!”
“씨발, 더럽게 맛없군.”
“그냥 좀 처먹어. 한두 번 먹어보나.”
그릇째로 들며 스프를 목구멍으로 넘기던 용병이 투덜거리자 다른 용병이 핀잔을 주었다.
아마 자신이 만든 음식을 욕지거리를 뱉으며 폄하하자 기분이 상했나보다.
그래서인지 불평하던 용병도 말만 그렇게 하지 꾸역꾸역 먹기는 다 먹었다.
“자, 다들 먹었으면 이제 불침번을 뽑아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
첫 순번과 마지막은 불침번을 서는 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순서.
당연히 열의가 장난이 아니기에 원활한 진행을 위해선 공정한 방법이 필요했다.
“워워, 미친놈들아 진정해. 지들끼리 싸우려고 눈깔 부라리는 것 좀 보게? 나한테 다 좋은 방법이 있으니 그걸 해보자고.”
“그래놓고 저혼자 좋은 걸 하려는 건 아니겠지?”
“수작만 부려봐라. 잘 때 똥꼬를 아작내 버리겠어.”
모두가 눈을 빛내며 대표자처럼 서서 말하는 용병을 노려보자 그 용병은 피식 웃으며 나뭇가지를 가져와 꺾었다.
뚜둑.
뚝-.
나뭇가지는 총 10개로 나뉘었는데, 2개씩 짝을 지어 길이가 달랐다.
“길이가 짧을수록 앞의 순번, 길수록 뒷순번이다. 제비뽑기는 멍청이도 알 정도로 쉬우니 헷갈리는 놈은 없겠지?”
그러자 주변의 사람들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제일 길거나 짧은 것, 이것도 구분하지 못하면 고블린 취급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내가 손에 쥐고 있을 테니까 한명씩 뽑아라. 2명이 한조인 건 알지?”
“씨발, 너는 뭐가 뭔지 알잖아.”
제안을 했으니 부정을 저지르기도 쉬웠다. 그래서 한 용병이 나와 그에게 불만을 토해냈다.
그러자 제비뽑기를 제안한 용병이 피식 비웃는다.
“병신아, 원래 이런 건 제안한 놈이 맨 마지막에 하는 거다. 그러면 내가 알고 있건 말건 상관없이 정해지잖아?”
그래도 못 믿겠는지 놈은 의심스런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상대방은 한숨을 쉬며 팔을 내밀었다.
“의심은 더럽게 많군. 자, 네가 먼저 해라. 뽑아놓고도 지랄하면 궁둥이에 나뭇가지를 꽂아주마.”
의심 많은 용병은 이리저리 손가락을 흔들며 제비뽑기 제안자의 얼굴을 살펴봤는데 달리 변화가 없자 재빨리 하나를 골랐다.
쏙!
그러자 그는 자기가 뽑고도 확인을 않고 손안에 쥐고서 이리저리 쟀는데, 그쯤 되자 상대방의 표정도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적당히 해라? 그러다가 뒷통수 제대로 맞는 수가 있다.”
“쓰읍…, 알았다고.”
천천히 펴지는 손아귀. 그것을 확인한 그는 혼자 씨익 웃더니 그것을 들어 소리쳤다.
“아싸! 고생해라 븅신들아!”
그가 뽑아든 것은 가장 짧은 나뭇가지였는데, 좋아하는 모습이 아주 가관이었다.
“첫판부터 꼬이네. 왜 저놈이 걸려서는….”
“그래도 부정행위는 없나보네. 딴 놈이 제일 좋은 게 걸린 것을 보니까.”
다들 못마땅한 모양이지만 이로 인해 제비뽑기에 부정이란 것이 개입하지 못함을 알 수 있었다.
다음 타자를 찾던 제안자는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불릿에게서 시선이 멈췄다.
“어이, 거기 당신. 이리 와서 좀 뽑아보쇼. 언제까지 겉돌 수는 없잖아?”
그는 불릿이 대화에 끼지를 못하고 홀로 식사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불러왔다.
어느 순번이 되더라도 잠자코 받아들일 생각이었던 불릿은 텍스와는 달리 자신을 챙겨주는 그에게 호감이 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맙소. 나는 볼레트라고 하오.”
“…말투가 뭐 이래. 셀이라고 불러, 내가 형이니까 괜찮지?”
“……그러시오.”
“좋아, 그럼 이중에서 하나 골라서 뽑아.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겠지?”
“알고 있소.”
친근하게 다가오는 셀 덕분에 은근히 달아올랐던 불릿은 감정을 냉각시킬 수 있었다.
스윽.
동작 하나에도 기품이 묻어나게 나뭇가지를 뽑는 불릿. 그는 텍스처럼 가리지도 않고 뽑아든 나뭇가지를 보더니 천천히 눈높이까지 들어올렸다.
============================ 작품 후기 ============================
3시, 6시, 9시, 12시에 이어집니다.
...밤을 새서 피곤하네요.
[서양에선 나이차로 형, 동생이라 나누는 문화가 없으나 읽는 독자는 한국인이 대부분이기에 입맛대로 변형시켰습니다. 식사를 밥이라고 써놓은 것과 비슷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