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2 요새도시 라 쓰랑 =========================================================================
쌍성의 수호자가 입장하며 한차례 대화를 나눈 후 자리에 앉자 이어서 바람의 대리자가 조용히 들어왔다.
그 뒤를 리더, 폭염의 잉켈스와 탐지의 빈스가 나란히 따랐다.
언제 왔는지 제노스까지 와있자 모든 결사대원이 모인 자리가 됐다.
덜컥.
자리에서 일어서는 잉켈스.
“오늘은 우리 결사대에 없어서는 안 될 불릿 폰 바포 백작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자리다. 다들 알고 있겠지?”
아까의 소란스러움이 거짓이었다는 양 모두가 조양한 자리.
“백작님이 안 계셨다면 우리 결사대가 유지됐을까? 저 멍청하고 탐욕스러운 연합체 놈들이 우리를 가만히 뒀을까?”
결사대는 분명 대륙 최강의 전력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연합체라는 거대한 폭력집단을 감당하기란 무리.
이들 중에서 귀족은 불릿이 유일했고, 또 한 지역의 패자임과 동시에 고위귀족인 것도 불릿이 유일했다.
불릿은 결사대가 알게 모르게 부족한 각종 물자와 정보를 제공해주었고, 자국의 이익이나 개인의 이득에 결사대를 이용하려는 자들에게서 보호했다.
일신의 무력은 중급 정령사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가 결사대에 제공한 공헌은 결코 낮지 않았던 것이다.
약간 과장하자면 그로 인해 결사대가 유지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
“말은 않고 있었으나 나 또한 백작님께 감사하고 있었다. 감사했소, 불릿.”
“흠…, 정 고마우면 다음에 본인의 목숨이나 구해주게. 늙어서 그런지 일일이 피하기도 힘들군.”
“풋. 어흠, 알겠소. 내 그리하리다.”
잘 웃지 않는 잉켈스가 불릿의 농담에 웃는 모습을 보였다.
“오늘이 좋은 날이긴 한가보네, 대장의 웃는 모습도 볼 수 있고.”
“아무렴, 좋은 날이고말고! 그러니 일단 한잔 들자!”
“와!!”
금세 시끌벅적해지며 불릿에게 각종 음식을 떠밀자 불릿은 체면이 손상될까 걱정하면서도 뿌듯한 마음이 들어 조금씩 받아먹어 주었다.
* * *
‘그런 때도 있었지….’
용병들은 결사대원들을 떠올리게끔 만들었으나 반대로 우울하게도 만들었다.
‘본인을 제외하곤 모두…….’
생사를 알 수 없다. 아니, 죽은 것을 알지만 자신이라는 불확실한 결과물로 인해 미약하나마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그 일말의 여지가 자신처럼 살았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주었고 그는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는 데로 정보를 수집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안 되겠지.’
주문한 술을 홀짝이며 주변을 살펴보는 불릿. 현재 그는 과거의 힘도 되찾지 못한 상태라 자신의 안전도 보장받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불릿 폰 바포 백작이라는 것을 입증하려면 영지에 있는 늙은 가신들밖에는 답이 없었다.
누가 이 젊디젊은 청년을 불릿이라고 생각하겠는가?
“꿀꺽, 꿀꺽.”
지금 마시는 쓰디 쓴 맥주 한 모금. 여러 정황이 자신이 죽지 않았음을 시사했고, 의심이란 것을 할 수 있는 것을 보니 정신계 마법에 당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자신의 기억을 토대로 만들어낸 환상이라면 새로운 지식 따위 생겨날 수도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곳은 자신이 처음 와보는 곳. 환각은 본적도 없는 것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용병이라…, 그때 잘 들어둘 걸 그랬나…….”
결사대에도 용병출신은 많았다. 특히 대표적인 인물로 리더였던 잉켈스가 용병출신 마법사로 활약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동료들이 떠드는 얘깃거리는 흥미롭긴 했으나 재미 그 이상은 되지 못했다.
그것을 정보로 받아들여 기억하고 있었다면 지금 상황에서 많은 도움이 됐으리라 여겨졌다.
“후우…….”
젊어진 이후로 유난히 감정의 폭이 넓어진 불릿. 본래 그는 행동하기 전에 두세 번씩 생각하고 결과를 도출한 후에야 움직였다.
군주의 한순간의 선택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기에 생겨난 버릇이었는데, 이 젊어진 육체가 말을 안 듣는 것이다.
분명 몸은 그의 것이었으나 마치 새것처럼 길이 들지 않은 느낌을 주었다.
무의식중에 나오던 버릇도 없어졌고, 감정의 절제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나이 때의 평범한 청년들처럼 행동하려하자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제동을 걸어줘야 했던 것이다.
‘왜 이러는 것인가? 이유를 알면 좋겠는데 말이지.’
자신이 이렇게 된 원인을 규명할 수 없으니 모든 것은 제자리답보. 날이 갈수록 궁금증이 쌓여가는 것이다.
‘할 수 있는 일부터 해야겠지. 정신 차리자.’
했던 다짐을 반복하지만 자꾸 흔들리는 불릿. 그는 육체에 정신이 따라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와하하….”
달그락, 덜그럭.
쩝쩝쩝-.
신경이 분산되자 들리기 시작하는 소음. 불릿은 술잔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주변의 사람들은 그와는 별개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처럼 동료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혼자인 사람이 불릿만이 아닌데도 유독 그만이 고독해보였다.
“그래서 말인데, 거기는 어떻게 됐는가? 아직도 싸우는가?”
“아주 발악을 하더군. 어디서 기어 나왔는지는 모르겠는데, 하급 마물이 설치고 다니는 모양이야.”
“이 주변에는 마물이 나올 껀덕지가 없을 텐데? 그것 참 이상하군.”
‘마물? 방금 하급 마물이라고 했는가?’
그 말에 번쩍 고개를 든 불릿. 분명 그는 하급 마물이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하급이라지만 마물이 인간들의 도시 주변에 서식할 리가 없다. 누군가 수작을 부린 것 같은데….’
마물은 마족과는 다르게 지성이 거의 없다. 본능적으로 행동하지만 그만큼 저돌적이라는 소리.
게다가 꼴에 하급이지만 마물이라고 주변의 몬스터를 끌어들이기도 한다.
불릿은 자세히 알아봐야 할 필요성을 느껴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쩝쩝쩝. 근데 자네는 거기서 뭐하다 왔길래 벌써 돌아왔는가?”
음식을 먹는 용병이 의문을 표하자 건너편의 용병이 한숨을 쉬며 말한다.
“아직 정식으로 의뢰가 내려오지도 않았는데 거기서 죽치고 앉아봤자 징집만 될 뿐이지, 있긴 뭘 있겠는가?”
다른 곳은 라 쓰랑 만큼 용병들에게 대우가 좋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이 론 타로 왕국을 무대로 활동하는 것은 다른 나라보다는 용병과 상인들에 대한 대우가 좋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간에 라 쓰랑의 영주인 세리오 남작덕분에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어때, 돈 좀 될 것 같은가?”
돈. 용병이라면 당연히 돈에 살고 돈에 죽는다. 마물이라고 하지만 하급에 불과했고, 잘만 하면 큰 목돈을 마련할 수 있었기에 왁자지껄하던 여관도 두 용병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내 알아보니 마물이 흘리는 마기에 몬스터들이 꼬이기 시작했더군. 아마 곧 큰 규모의 토벌령이 내려질 것이야.”
토벌령. 그것은 영지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경우 주변의 무력단체에게 의뢰를 하는 것을 뜻하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기에 흡사 전쟁을 치루듯 이루어졌다.
“이야, 토벌령까지? 그게 어디라고 했지?”
“여기서 조금 더 가면 옆에 데빌로안 영지가 있잖은가? 그곳이라네. 이곳과는 다르게 영지가 넓으니 고생 좀 하겠더군.”
라 쓰랑은 요새도시이고 용병들이 모이는 요충지이기에 전쟁의 틈바구니에서도 안전을 보장받았었다.
검사들이 마법에 약하다지만 용병들 중에도 소수지만 마법사와 정령사는 있는 법. 그러니 수가 어마어마한 이곳을 점령하지 못하고 흑마법사들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흑마법사들 때문에 그동안 몸을 사렸는데, 오랜만에 날뛸 수 있겠어.”
“아무렴. 이번 기회에 자네도 나와 같이 한탕 크게 잡자고!”
‘마물…이라. 하급 마물이란 말이지…….’
빠드득.
불릿은 저도 모르게 이를 갈고 있었다. 흑마법사과 전쟁을 겪으며 그들이 부리는 마물에 치를 떨었던 불릿.
본래 그에게 있어 마물이란 몬스터와 별반 차이가 없는 존재였다.
주변의 몬스터를 끌어들이기에 위험하긴 하지만 자기 영지에만 없으면 굳이 찾아가서 죽이지 않아도 될 존재?
말하자면 집안에 바퀴벌레가 침입했느냐, 아니냐의 차이였다.
그런 불릿이 마물을 싫어하게 된 것은 전쟁에서 겪은 마물들의 악독함 때문.
“행선지를 옮겨야겠군.”
라 쓰랑에서 옆에 위치한 영지라면 하나밖에 없었다.
이곳과 이웃한 영지 데빌로안은 라 쓰랑 덕분에 몬스터의 습격에서 한발 물러나 있었는데, 어째서 그곳에 마물이 나타났는지 그것이 의문이었다.
‘놈들의… 짓인가?’
자연적이지 않은 상황. 그렇다면 인위적인 손길이 닿았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왕국의 안쪽에 놓인 영지인데 라 쓰랑을 거치지 않고 마물이 나타났다면 그것은 누군가 수작을 부렸다는 것으로 봐야했다.
‘만일, 흑마법사의 짓이라면 내 손을 쓰지 않을 수 없겠군.’
불릿의 흑마법사에 대한 원한은 매우 깊었다. 결사대의 동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고, 자신 또한 죽음을 맞이했었다.
원인을 모르는 이유로 이렇게 살아있었지만 그 원한이 어딜 가는 것은 아니었던 것.
약간 돌아가겠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니 마물이 출몰했다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다짐하는 불릿이었다.
“이봐, 들었어? 토벌령이 내려진대.”
“바보 같은! 죽으려고 환장했어? 마물이래잖아, 마물!”
“그러니까 가야지! 우리만 가는 것도 아니고, 토벌령이 내려지면 이 많은 인원이 참가한다고! 거기서 몬스터를 잡으면 평소의 몇 배를 주는지 너도 알잖아!”
토벌령은 일반적인 의뢰와는 달랐다. 영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만한 존재를 없애는 것이기에 작은 전쟁으로 봐야 했으니 그 위험도는 한층 높았다.
그 위험한 곳에 단순히 한탕하기 위해서 간다? 용병들도 위험한 의뢰는 돈을 많이 주어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가는 이유는 그 죽을 수도 있는 사람이 자기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서였다.
어리석어 보이는 생각이지만 원래 사람은 수가 많아지면 용감해지는 법이었다.
“게다가 겨우 하급이라고. 강한 것만 따지면 우리들로도 충분히 잡을 수 있다고!”
저 용병의 말은 맞으면서도 틀렸다. 확실히 하급 마물은 몇몇 기형종을 제외하곤 그 자체로는 그렇게 강하지 않다.
하지만 하급 마물이 흘리는 마기에 끌린 몬스터들이 마물의 곁으로 뭉쳐 군세를 이룬다.
몬스터가 무서운 이유는 단일객체로는 인간이 상대하기 버겁다는 것이다.
인간도 모이면 강한데 몬스터는 얼마나 강할 것인가?
물론 몬스터들이 방진을 짠다던가 그렇진 않다. 하지만 단순히 모여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일 것이다.
‘어리석군. 마치 불에 뛰어드는 부나방같이.’
자신의 역량을 파악하지 못한 전사는 금방 죽는다. 그것은 시대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 현상.
저들이 안타깝긴 하나 욕심에 눈이 먼 저들에게 불릿이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남 욕할 처지는 못 되는군….”
불릿은 쓴웃음을 집어 삼키며 맥주를 홀짝였다. 현재 불릿은 하급 정령사. 정령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지만 예전의 성세를 되찾은 것은 아니다.
‘일단 용병시험부터 봐야한다.’
‘볼레트’라는 용병의 이름을 알린다. 그것을 보자면 현재 토벌령이 내려질 상황은 그에게 나쁘지 않았다.
마물을 상대로 두각을 드러낸 용병. 초기에 활동하기엔 이만한 간판도 없을 것이다.
비록 그 마물이 하급이었지만.
달칵.
다 마신 맥주잔을 내려놓은 불릿은 여관의 상태도 확인했으니 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섰다.
“이곳인가.”
수많은 용병이 쉴 새 없이 드나드는 입구. 불릿은 그 옆에 살짝 비켜선 채로 건물을 확인하고 있었다.
다른 곳들과 비교해 그리 차이는 없었으나 그의 생각과는 별개로 의외로 깨끗해 보였다.
안으로 들어서자 은행의 창구처럼 잘 정돈된 게시판과 질서정연하게 자신의 일을 찾는 용병들.
이 또한 불릿이 생각하던 용병들의 거친 이미지와는 달랐다.
“어떻게 오셨나요?”
카운터에는 아저씨가 아닌 젊은 여성이 일을 보고 있었는데, 사무적으로 대하던 태도에서 불릿의 얼굴을 보자 조금 풀어지는 기색을 보였다.
그것도 잠시, 남들이 모르게 빠른 눈짓으로 불릿의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걱정 섞인 충고를 건넨다.
“저기, 여기는 용병길드의 라 쓰랑 지부인데요, 혹시 잘못 찾아오신 것은 아닌가요?”
거친 사내들만 보다가 꽃다운 불릿의 외모를 보자 그가 걱정되어 묻는 것이 엿보였다.
자칫 잘못하면 자존심에 타격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불릿은 겉모습보다 적어도 2배는 더 나이를 먹은 40살의 중년. 젊게 보아주는 것이 은근히 기분 좋을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오늘 밤 12시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