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1 요새도시 라 쓰랑 =========================================================================
스윽.
나무 뒤편으로 다가온 불릿은 흙덩이를 몰래 소환했다.
우우웅…
- 불렀어?
오직 불릿에게만 들리는 목소리. 흙덩이가 불릿에게 묻자 불릿이 명을 내린다.
“흙덩이여, 여관에서 보았던 침대를 만들 수 있겠는가?”
그의 물음에 흙덩이가 잠시 고심하는가 싶더니 손을 휘휘 휘둘러 땅을 솟구치게 만들었다.
드드득…
약간 낮게 솟은 그것은 흙으로 이루어졌지만 확실히 침대의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 누워봐.
흙덩이의 말에 손으로 흙침대를 만져본 불릿. 의외로 푹신거리는 감촉에 놀란 눈으로 흙덩이를 바라보았다.
- 부드러운 흙으로 만들었어.
“천만 깔아서 누우면 좋겠군. 흙덩이여, 수고했네.”
- 친밀, 친밀…
“으음….”
약간의 침음성. 평소처럼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는 흙덩이의 요구에 불릿은 난감함을 보였다.
지금 이곳엔 여럿 용병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눈에 띄고 싶지 않기에 자신만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이다.
“흙덩이여, 영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당분간 소환에 지장이 있을 것이네. 그러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겠나?”
멈칫.
머리도 쓰다듬어주지 않고 자신에게 돌아가라 말하자 흙덩이는 애달픈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말도 않고 자리에서 사라졌다.
사르륵…
마치 흙더미가 땅으로 스며드는 것처럼 사라지자 불릿은 한숨을 쉬었다.
“후우…, 내가 왜 눈치를 보는지 모르겠군.”
아직 4일이나 남은 여정에 벌써부터 피곤함에 물든 불릿이었다.
* * *
라 쓰랑은 요새도시였지만 길이 사방으로 뚫려 있었다.
몬스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벽이 두텁긴 했으나 넓게 뚫린 시야와 사방에서 오고가는 상인들, 그리고 그들을 따라 호위하거나 사냥을 나서는 용병들까지.
오히려 몬스터가 접근하기를 두려워할 정도로 발전하여 해자(垓字)까지 메워버릴 정도로 물자가 풍부한 곳이었다.
지리적 특성을 잘 이용해 날마다 생명의 위협을 받아 시름에 빠졌던 영지민을 구하고, 용병들의 신임을 얻어낸 영주 세리오 남작을 욕할 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볼레트 씨, 용병들의 천국, 요새도시 ‘라 쓰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이곳이 처음인 불릿을 환영해주는 행상인, 자카르.
그는 여기까지 불릿과 동행하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불릿은 자카르와 대화하며 자신에게 부족한 지식을 채울 수 있었다.
“……이곳이 진정 남작령이 맞소?”
끊임없이 오고가는 상인들의 행렬을 보고 불릿은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아무리 몬스터에게서 나오는 부산물이 거래된다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지다니?
불릿 자신도 이렇게나 많은 상인들의 행렬을 본 적은 없었던 것이다.
“하핫! 처음 오는 사람들은 저마다 그런 말씀을 하시지요. 이게 다 영주님의 노력의 산물이 아니겠습니까?”
“영주가 세리오 남작이라 하였소?”
“맞습니다. 세리오 우틀락 남작님이십니다. 본래 우틀락 지방은 우틀락 가문이 대대로 다스리던 지역이었으나 그 세가 쇄해 작위가 남작으로까지 떨어졌지요.”
‘그런 비사가 있었군.’
선대가 일구어놓은 것도 지키지 못하는 가문은 의외로 많았다. 지키는 것 또한 능력 중 하나, 성과가 없다고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분의 용병과 상인을 우대하는 정책이 왕국 전역으로 확대되고 있으니 론 타로 왕국도 발전할 것이라 믿습니다.”
상인은 확실한 정보가 있어도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했다. 그런 이가 이토록 강한 믿음을 보여주었으니 세리오 남작이 얼마나 상인들을 잘 대해주었는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당대 가주인 세리오 우틀락이 적극적인 정책으로 용병과 상인들을 우대해 지금의 성세를 끌어올렸으니 이런 반응이 나와도 이상치 않았다.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연신 감탄사를 내뱉는 불릿. 그는 낮은 작위가 능력을 펼치는데 어떤 형식으로 발목을 잡는지 잘 알고 있었다.
몬스터의 습격, 낮은 작위, 나라의 변두리…
이러한 단점들을 오히려 무역에 용이한 교역수단으로 만들어낸 세리오 남작에겐 박수쳐줘도 무방하다. 불릿은 그리 생각했다.
* * *
“그럼 우리는 여기서 헤어지겠군.”
“그렇습니다만, 다음에 만날 때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겠소.”
요새에 도착하게 되자 자카르와 헤어지게 된 불릿이었다. 그는 자카르가 추천해주었던 여관으로 향했는데, 아직 초입임에도 불구하고 보이는 것이라곤 밝은 표정의 용병과 상인 밖에 없었다.
간간히 주민들도 보였는데, 그들도 거친 용병들을 동경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친절히 대하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자카르가 추천해준 여관에 도착하자 과연 호방한 용병들답게 왁자지껄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캬아, 내가 이 맛에 산다!”
“이놈은 매번 그 소리만 하네. 에라이, 등신아! 딴 것 좀 먹게 작작 처먹어!”
“넌 엿이나 드세요, 이 새끼야!”
“저놈은 지도 매번 같은 소릴 한다는 걸 모르나보네.”
“괜히 만담콤비라고 불리겠냐? 그래서, 이번 의뢰는 뭐야?”
“그게 말이지….”
산만하면서도 나름의 질서가 공존하는 여관. 그러면서도 활력이 있어 보기만 해도 몸에서 힘이 솟게 만들었다.
‘우울한 기색은 보이질 않는군.’
한창 흑마법사들과 전쟁이 진행되고 있을 때는 대륙의 모든 곳이 절망에 휩싸여 있었다.
주 전력은 마법사와 정령사였지만 흑마법사들이 소환한 마물이나 키메라를 상대하는 것은 병사, 기사, 용병들이었던 것이다.
날마다 사람이 죽어나가니 분위기는 당연치 침체되어 있었고, 황폐화 되가는 자신의 고향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들의 사기는 떨어져만 갔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전쟁이 잘 마무리 되었는지 그 어디에도 우울한 기색은 보이질 않았으며 오직 미래에 대한 밝은 기분만을 맛볼 수 있었다.
‘그들이 그립군…….’
비록 전쟁 때문에 모였으나 가족과도 같았던 결사대원들. 불릿은 용병들의 모습을 보며 과거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 * *
결사대는 6인의 영웅을 중심으로 뭉쳐있다. 이전에 언급했던 리더 폭염의 잉켈스와 탐지의 빈스, 쌍성의 수호자, 바람의 대리자, 레인보우 아틱 커맨더들 말이다.
그 밑으로 각기 정령사, 마법사들이 분포되어 있는데 대륙에서 손꼽히는 이들만 모였기에 누가 더 강하고 말고를 따질 것이 없었다.
이들의 특징이라면 귀족출신은 있어도 귀족인 자는 없다는 점.
그리고 거기서 예외가 되는 이가 유일한 귀족이자 고위급 인사인 불릿 폰 바포 백작 진(眞)이었던 것이다.
“아직도 일하고 계셔?”
“진짜 회계사 한명 데려와야 하는 거 아냐?”
“이런 전장에 누가 온다고 그래.”
“그렇다고 생일까지 일하는 건 좀 아니지 않냐?”
홀로 책상에 앉아 문서를 정리하고 있는 불릿을 멀리서 지켜보는 무리.
그들의 뒤에서 혀를 차는 이가 등장했다.
“쯔쯔, 됐으니까 너희는 백작님이나 데려가셔. 나머지는 내가 할 테니까.”
“그래, 부탁한다. 우리 머리로는 저건 감당이 안 돼.”
“수식계산은 빠삭한데, 저건 안 된단 말입니다.”
“마법사가 아주 돌대가리여?”
“…땅의 정령사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뭐얏!”
“이 멍청이들이, 백작님이 보시잖아!”
그들의 말다툼이 어지간히 시끄러웠는지 불릿이 인상을 쓰며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자네들 거기서 뭐하는 겐가?”
피곤한지 눈가를 주무르며 손으로 그들을 가리키는 불릿. 이에 나머지 인원들이 우물쭈물 다가온다.
그리고 그들을 가르며 다가서는 이가 있었으니….
“각하, 나머지는 소인이 맡겠사오니 휴식을 취하시기 바랍니다.”
깍듯한 말투. 누가 보면 군신의 관계인 줄 알 정도였으나 어디까지나 이들의 관계는 평등했다.
원활한 전투를 위해 그 때에만 상하명령에 따를 뿐, 나머지는 딱히 위아래가 없다.
“제노스, 여기서는 그렇게 부르지 않아도 되네. 다른 이들까지 불편해하겠군.”
“아닙니다, 각하! 그 누가 각하께 무례를 저지른단 말씀이십니까!”
제노스라 불린 청년, 그는 불릿의 영지에서 그의 눈에 띄어 권유에 의해 결사대에 오게 된 사람이었다.
“후우, 자네는 조금 자제할 필요가 있겠군. 헌데 왜 몰려온 것인가?”
“그게 말이지…, 읍읍.”
“하하,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갑자기 말을 하려던 이를 막아서며 그 사람을 뒤로 빼낸다.
무슨 일인가 의문을 품으려 할 때, 제노스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각하,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어떨런지요? 저들이 작은 다과상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으음…. 그러고 보니 아침부터 글만 보고 있어서 몸이 찌뿌둥한 게, 뻐근하군.”
뿌드득, 뿌드득-.
팔과 목을 돌리자 늙어가는 중년인 특유의 뼛소리가 들리는 불릿.
소리를 내는 것은 입으로 한정시키는 것이 귀족의 체면이었지만 세월의 흐름까지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좋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군. 자네도 적당히 하고 오게나. 급한 업무는 거의 다 처리했으니 나머진 다른 곳에 넘겨도 상관없네.”
“곧 그리로 가겠습니다, 각하!”
“자자, 아저씨는 빨리 이쪽으로 오시라!”
“이놈이 언제 탈출을…, 어휴.”
포박에서 풀려난 남자가 건들거리며 불릿을 모시자 그를 잡으려던 이도 포기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불릿은 뭉친 근육을 풀며 그들을 따라가기 시작했는데, 그의 발걸음에 따라 신호를 받은 이들이 몰래 빠져나가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타다닥!
펑! 퍼벙!
불의 정령이 작은 불꽃을 피워 올리며 폭죽과 비슷한 효과를 냈고, 물의 정령들은 작은 무지개를 만들어 주변을 장식했다.
“이게 뭐지?”
“생신 축하드립니다!”
뻐벙!
작은 불꽃들 사이로 요란하게 흔들리는 불꽃이 터지자 재빨리 바람의 정령이 공기를 차단한다.
땅의 정령은 주변을 단단하게 만들어 불에 타오르지 않도록 만드는 중이었다.
나머지 인원은 누군가 큰 소리로 외치자 그에 맞춰 손뼉을 친다.
“생일 축하해, 아저씨!”
“축하드립니다.”
“설마 자기 생일날까지 일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고!”
“사람이 참, 자기 생일도 말을 안 해요. 고위귀족이라서 생일을 알아내는 것도 힘들었다구요.”
“……축하.”
짝짝짝짝짝-.
갑작스러운 상황. 그러나 불릿은 당황하지도 않았는지 잔잔한 미소를 띠며 나긋이 입을 열었다.
“본인의 탄생일은 어찌 알았는가?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연회를 연 적이 없거늘.”
불릿은 흑마법사와의 전쟁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생일파티를 열지 않았다.
다른 이들의 선물은 꼬박꼬박 챙겨주면서도 자신은 슬쩍 뒤로 빠졌던 것이다.
“다 방법이 있어요, 방법이. 나쁜 방법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시라!”
“알리시아, 본인의 탄생일을 축하해주는 것은 좋지만 그곳에 올라가면 지금 뒤에서 자네의 속옷을 훔쳐보는 가릴 같은 이가 나올 수 있다네.”
“꺅! 이 변태가!”
퍽!
“쿠엑!”
쿠당탕!
알리시아라는 여성이 치마를 입은 채로 탁자에 올라서서 소리치자 언제 다가갔는지 그녀의 뒤편에 바짝 앉은 채로 몰래 속옷을 들여다보던 남성은 그녀의 발길질에 뒤로 나가떨어졌다.
“이, 이익! 이 멍청이가! 오늘 같은 날까지 꼭 그래야겠어?!”
“얘들아! 알리시아 빤쮸 곰돌이 흰 팬티다! 푸헤헬!”
“미친! 뒤져버렷!”
파앙-!
“그만그만그만! 으허헉!”
마치 고양이와 쥐의 추격전을 연상시키는 장면에 모두가 축하를 하다말고 저마다 소리 내어 웃었다.
“서로 좋아하면서 왜 저러나 몰라.”
“좋아하니까 저러지. 알리시아가 어디 보통 성격이야? 가릴이라서 저 정도지, 다른 놈이 그랬으면 염동력에 갈가리 찢겼을 걸?”
그들의 말대로 둘은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다. 다만 감정표현에 서툴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어정쩡했지만.
“가릴, 알리시아. 불릿 백작님 생신이시다. 멈추도록 하지.”
웅장한 목소리에 웃고 떠들던 이들도 멈추고 소리의 근원지를 확인한다.
“…아틱 커맨더, 왔냐?”
“예상외로 시간이 더 걸렸다. 리더와 그들도 오고 있으니 자리에 착석하도록.”
“예이, 예이.”
“앉자. 백작님도 서계셨네.”
저마다 소란을 잠재우고 자리에 앉자 불릿에게 다가온 대원이 그의 의자를 빼주었다.
“고맙네.”
그에 인사를 건넨 불릿. 다들 자리에 앉자 다른 6영웅도 도착하기 시작했다.
“역시 사령관을 먼저 보내야해. 조용한 것 좀 봐라.”
“…너나 좀 닥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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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저녁 6시, 12시 2연재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