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4 새로운 마을로 =========================================================================
마치 깊은 호수처럼 침잠한 눈은 보기만 해도 보듬어주고 싶을 정도로 애잔했는데, 어찌나 슬픈 기색을 보이는지 결단력 강한 불릿의 손이 흙덩이의 머리로 올라갈 뻔했다.
- 나 이상해…
“무엇이 말인가?”
-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흙덩이는 아마 인간세상뿐이 아니라 다른 정령들과의 접촉도 거의 없었을 것이다.
정령들과 접촉이 있었다면 그들에게서 지식을 습득했을 테니 이 순수한 정령은 홀로 고독히 존재해왔으리라.
그것까지 떠올리니 흙덩이의 모습도 어렴풋이 이해가 갈 법도 했다.
“본인은 자네를 떠나지 않으이.”
- …나도. 불릿 안 떠나.
그러더니 멀리 떨어져서 뒤따라오던 흙덩이가 바짝 다가왔다.
멀뚱멀뚱 서서 불릿을 바라보니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 ……
흙덩이는 뭔가 불만이 있는 기색이었지만 이번엔 그로서도 이유를 모르겠으니 의문만 쌓인 채 길을 거닌다.
뚜벅뚜벅.
“…….”
- ……
불릿도 수다를 즐기는 편이 아니었고 흙덩이도 호기심은 왕성했으나 그렇다고 평범한 산길에서까지 궁금증을 드러내진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조용하게 길을 따라 산을 내려가며 다음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
- ……
터벅, 터벅.
그들은 대화 없이 산을 걷고 있었다. 다만,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흙덩이가 바싹 붙어있다는 점이었다.
걷는데 불편함을 느낀 불릿이 흙덩이를 떼어놓으려고 어깨에 손을 올리자 흙덩이가 그를 올려다본다.
- 아……
무언가 알 수 없는 반응에 불릿은 밀어내려다가 이내 그만두고 얕은 한숨을 쉬고서 그대로 길을 걸어갔다.
“후우….”
- ……?
그것을 느낀 흙덩이가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려다봤으나 반응이 없자 시선을 정면으로 돌리며 길을 걷는다.
‘대체 왜 이러는 것인지 알 수가 없군.’
그는 흙덩이를 처음 소환했을 당시를 떠올리며 그때의 답답함을 다시금 느끼고 있었다.
이유가 있을 텐데 자신은 그걸 모르니 머리를 쓰는 것에 두려움이 없던 불릿은 짜증이 일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흙덩이에게 짜증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중급 정령사로 활약하던 자신이 정령의 감정하나 모른다는 것이 약간의 수치로 다가온 것일 뿐.
그러다 번쩍 떠오른 생각.
‘아! 이게 바로 어미를 따르는 아기오리의 현상인가?’
오리는 가장 처음 본 물체를 어미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만일 그것과 같은 현상이라면 지금의 일도 이해가 간다.
둥지에서 벗어나 불안감을 느낀 아기오리가 믿고 의지할 데가 없으니 어미를 따르는 일은 당연한 일.
비로소 의문이 풀리자 머릿속이 환해지는 것을 느끼며 불릿이 입꼬리를 올렸다.
씨익-
“그렇군, 그런 거였어. 후후후….”
오랜만에 유쾌한 기분을 느끼자 저도 새어나오는 웃음소리.
- 불릿, 어디가?
“흙덩이여, 우리는 조금 더 큰 마을로 이동 중이라네.”
이전의 화전마을은 여러모로 빈약했었다. 뭔가를 구입하기는커녕 오히려 구입해 와야 할 실정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도움 받은 거라곤 식량에 관한 것을 제외하곤 딱히 없었다.
되려 도움을 주면 주었지 못하진 않았던 것이다.
- 더 커?
“마을과 마을을 비교해 한쪽의 규모, 즉 사람의 수가 더 많거나 발전도가 앞서가면 크다고 표현하지.”
여기서 부족할 수 있는 부분을 보강하며 알려준다.
“발전도라는 것은 예를 들어 이렇다. 자네라는 존재가 있다. 그 존재는 처음엔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주먹 쾅도 할 줄 알고, 더 나아가 쌍주먹 쾅도 할 줄 알게 되었지. 이것을 보고 ‘발전’이라 부르는 것이다.”
- 불릿, 나 발전했어?
설명들은 단어를 자신에게 적용해 곧바로 실습하는 흙덩이에게 불릿이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밀착되어 있기에 흙덩이가 보기 힘들다)
“자네는 훌륭히 발전했지. 덕분에 본인도 앞으로가 무척 기대되네.”
칭찬할 수 있을 때는 칭찬해준다. 상급자가 이렇게 몸소 표현하지 않으면 아랫것들은 그 마음을 몰라주고 불만이 쌓이게 된다.
그렇기에 다소 과장스러워보여도 일종의 본보기라는 것으로써 상과 벌을 주는 것이다.
- …응.
그의 칭찬은 곧바로 효과를 드러냈다. 그에게 딱 달라붙어 있던 흙덩이가 곁에서 떨어져 나와 걷기 시작한 것이다.
불릿은 자신의 칭찬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라 생각하고 만족스러워했다.
덕분에 움직임이 한결 가벼워진 불릿은 발걸음을 옮겨 다음 마을로 향했다.
* * *
“흠, 어디에 있나 했더니 이 근처에 있는가보군.”
“취익!”
다음 마을을 향해 이동하던 불릿은 오크무리와 마주치게 되었다.
지난번 화전마을을 습격했던 놈들과 비교했을 때 복장은 매우 흡사했으나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정련된 검이라…, 놈들이 인간 대장장이라도 납치한 것인가?”
오크들도 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 고블린도 사용하는데 그보다 상위체로 여겨지는 오크가 사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가 이상하게 여긴 것은 그 부분이 아니었다.
오크는 어디까지나 몬스터. 제대로 된 문화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
뭉치더라도 부족단위가 한계이며 자기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같은 종족이라 할지라도 적으로 여긴다.
그리고 몬스터가 달리 몬스터겠는가? 그 마기에 물들어 전투를 제외한 일들은 진득하게 배울 의지가 없다.
“갑옷의 상태도 그렇고, 검까지 매끄럽기 그지없군. 그래서 주민들을 납치하려 했던 것인가?”
인간은 손재주가 좋다. 일단 데려가면 뭐라도 시켜먹을 수 있는 것이다.
어른은 중노동에, 어린아이는 전문직업꾼으로 키워서 쓰면 그야말로 알맞지 않은가?
- 불릿, 죽여?
이제는 죽인다는 단어를 스스럼없이 사용하는 흙덩이를 보며 불릿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는 여섯. 이번엔 지옥송곳을 사용해보지. 놈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
- 응. 한다?
“개시!”
“크아악!”
“취이익-!”
오크들은 육중한 몸과 단단한 방어구를 믿는 것인지 따로 전략도 없이 떼로 달려들었다.
- 지옥송곳…많이.
흙덩이가 앞으로 나서자 땅에서 1미터가량의 돌로 된 송곳이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치솟았다.
퍼퍼퍼퍼퍽!
“칵!”
“크취입!!”
단말마를 지르는 오크들. 수십 개의 송곳이 하체를 찢어발기니 서있을 재간이 없었다.
솟구쳤던 송곳들이 허물어지듯 사라지자 바닥으로 추락하는 오크들.
철푸덕.
털썩-
피가 흥건하게 흐르며 악취가 풍기자 불릿은 미간을 잡으며 잠시 비틀거렸다.
“으음….”
- 불릿, 괜찮아?
“괜찮네, 흙덩이여. 잠시, 주위를 경계해주게.”
불릿은 손을 내저으며 괜찮다는 의사를 표하고서 몸을 다잡았다.
이미 시체나 다름없는 오크들을 무시하고서.
“취이익….”
한꺼번에 엄청난 고통과 피가 빠져나가자 오크들은 빠르게 죽어가고 있었는데, 불릿은 비틀거리면서도 놈들에게 다가갔다.
“끄응…, 너, 말을 할 줄 아는가?”
“취이익…….”
불릿은 간신히 목숨줄을 붙들고 있는 오크를 발로 툭툭 차며 말을 걸었는데, 이 와중에도 불릿을 죽일 듯이 바라보며 이승에서의 마지막 말을 뱉었다.
“넌…죽는다…췩…….”
“뭐라고?”
“…….”
그 말을 끝으로 오크는 숨이 끊어졌고, 더 이상의 정보는 알 수 없었다.
“아.”
불릿은 작게 탄식했다. 인간의 말을 할 줄 아는 놈이라면 부족에서의 위치도 낮지 않을 것이다.
그런 놈을 새로운 기술의 희생양으로 끝내버렸으니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이상 미련을 갖는 것은 어리석은 일.
“죽는다라… 자신만만하군.”
- 불릿, 죽어?
흙덩이는 종종 걸음으로 다가왔으나 그 속도는 불릿을 능가했다.
아니, 정령이라는 시점으로 보면 느리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육체의 구성을 인간의 소녀를 베이스로 해서 그런지 한계가 존재하는 것이 보였다.
다가온 흙덩이가 오크와 불릿을 번갈아 바라보자 불릿이 말했다.
“글쎄, 이젠 본인도 잘 모르겠구려….”
그날 이후로 불릿은 여러 번 고민했다. 과연 자신이 살아있는 것인지, 아니면 흑마법사의 수작으로 꼭두각시가 된 것은 아닐까하고.
결론만 말하자면, 모르겠다.
‘몸이 분해되는 기억이 이토록 생생한데, 어떻게 된 영문이련지…….’
그가 생각하기론 그는 이미 죽었었다. 그런데 지금 더 젊어진 육체로 숨도 쉬고 피도 흘린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것이 맞는 걸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죽었던 기억은 무엇일지 이해할 수 없다.
- 불릿?
모호한 대답에 다시금 묻는 흙덩이. 어느샌가 자신만의 세계에 빠졌던 불릿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대답해주었다.
“안 죽는다.”
- 그래?
“죽을 거 같으면 자네가 살려주도록.”
자기 딴에는 농담을 한 것이지만 흙덩이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 응. 그럴게.
“…가도록하지.”
흙덩이가 이전에 고블린의 사체를 처리한 것처럼 정리하고 나자 불릿은 정령력의 소모가 심한 것을 알아챘다.
“지옥송곳은 자주 쓸 것이 못 되는군.”
지옥송곳은 그가 흙덩이와 함께 개발한 기술 중에서 가장 정령력의 소모가 극심했다.
지옥구덩이의 벽에서 치솟는 공격을 지면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변경한 것인데, 공격이 통할 만큼 많은 수를 소환해야 했는데 그것을 단시간에 해내야 했다.
게다가 기존의 지옥구덩이와는 달리 돌로 이루어져서 더욱 많은 정령력을 소모하였다.
이런 물체를 차례로 소환하는 것보다 한꺼번에 다량의 물체를 만들어내는 것은 거의 곱절로 소모가 되는 것이다.
“그래도 파괴력은 좋은 것 같기도….”
1미터나 되는 돌로 된 송곳이 바닥에서 치솟는데 피할 곳이 없다.
그러면 공격을 알아채고 그 높이만큼 제자리에서 뛰거나 범위에서 벗어나는 것 외엔 그것을 막아낼 만한 방법은 많지 않을 것이다.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수십, 때에 따라선 백 개가 넘는 송곳을 소환해야 한다.
지금 이 기술은 본래 하급 정령이 선보일 수 없는 공격방식.
그 부담을 고스란히 계약자인 불릿이 감당해야 했던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거의 절반이나 되는 정령력이 소비된다니, 심각하군.”
한계치까지 사용한 것이 아님에도 정령력의 소모가 심각할 수준으로 소모되는 기술을 평범하게 사용할 순 없다.
불릿의 생각으론 이 기술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위기탈출용도, 또는 필살기로나 쓸 수 있으리라 여겼다.
방금도 정령력을 소비하고 난 직후에 현기증을 느끼지 않았는가?
정령력의 소비도 문제지만 무방비상태가 되는 것 또한 위험했다.
“매번 놈들과 마주치면 일정이 늦어질 터인데….”
이번엔 갑작스레 마주쳤기에 섬멸했으나 매번 그렇게 만나면 시간도 시간이지만 체력의 소비 또한 이루어진다.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니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이 상책.
불릿은 이동을 하면서 주위의 경계를 한층 더 높이고 있었다.
* * *
“취익, 취이익!”
한 오크가 고갯짓을 하며 명령하자 다른 오크들도 콧소리를 내며 코를 벌름거린다.
“취익. 킁, 킁킁.”
“킁킁킁…, 취익?”
그러다 오크무리 중에서 한 오크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췩?”
퍼억!
고개를 갸웃하던 오크는 갑자기 가죽 터지는 소리를 내며 머리가 사라지자 더 이상 고개를 갸웃하며 의문을 표할 수가 없게 되었다.
털썩.
“취이익!”
“크악!”
동료가 죽자 분노한 오크들이 사방을 둘러보며 적의를 드러냈는데, 그 사이에 공격이 한 번 더 들어왔다.
“쌍주먹 쾅.”
- 쌍주먹 쾅…
뭔가 누런 것이 스쳐지나가더니 오크 두 마리를 꿰뚫었다.
퍽!
퍼벅!
“취에엑-.”
놈들이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지자 남은 오크들은 작은 속삭임이 들리던 곳을 향해 뛰쳐 갔다.
“취이익!”
놈들이 달려간 곳엔 자세를 낮춘 채로 숨어있던 불릿과 흙덩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코앞에 놈들이 다가왔으나 불릿은 침착한 행동으로 오크들을 맞이한다.
“함정발동.”
쉬익-!
날카로운 검이 그를 향해 날아들었으나 오크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쑤욱!
삽시간에 구덩이에 빠진 오크는 정신을 차리지 못해 어리둥절해 하다가 벽에서 튀어나오는 송곳에 그대로 전신이 조각났다.
푸슈슈슈슉!
슈슈슈슉!
한 마리가 남자 놈은 동료가 빠졌던 구덩이를 훌쩍 뛰어넘어 검을 양손으로 잡고 내려쳤다.
“크아아악!”
============================ 작품 후기 ============================
9시, 12시에 이어서 올라옵니다.